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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 Vol 63. 2009. 9/10. 49-51쪽 배 학수(경성대 교수/ 철학) --> 블로그보기

“뭣보다 교방이라는 담장, 그 담장이 가두기엔, 너무 큰 예인이었다"(KBS 황진이). 드라마에서는 예인藝人이라고 미화된 황진이 같은 기생들은 조선 시대 궁중이나 관청의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공연했다.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교방敎坊인데, 교방은 을사조약으로 폐지되었고, 그 후 교방의 기생들은 새로 생겨난 민간 조직인 기생 조합, 권번券番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권번은 서울, 평양, 부산, 대구, 진주 등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동기童妓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화대花代를 관리했다.

강 옥남(姜玉南)은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다. 그에게는 남기고 기록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언론에 한번도 대담 기사가 실린 적이 없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여러 번 부탁하여 마침내 그녀를 2009년 6월 15일 부산 서구의 새진주 식당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해 달라
.
1938년 일본 나고야 태생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대구 출신인 어머니는 자식 셋(오빠, 언니, 나)을 데리고 해방되자 귀국했다. 돈 3만원을 가지고 왔는데 환전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삼천포로 갔다가 부산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부민 국민 학교를 다녔고, 가정 형편상 졸업후 학업을 중단하다. 그 당시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았다. 오빠는 동아대학을 졸업했다. 어머니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어떻게 무용을 배우게 되었나?

16살쯤 한 순섭(여자. 서울에서 무용 학원을 하고 있다)을 권 명화 학원에서 만났다. 한 순섭의 아버지가 잘 살아서 학원을 차렸는데 거기에 이 매방을 초청하여 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권 명화 학원에서 딱 한달을 배웠는데, 이건 무용이 아닌 것 같아 한 순섭의 권유를 따라 이 매방 학원으로 옮겼다. 이 매방, 권 명화 두 사람 모두 그 당시 부산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권 명화도 이 매방에게서 배웠다.

이 매방은 어떻게 지냈는가?

이 매방은 학원이 잘 안되어 양춤(스포츠 댄스)추는 사람에게 낮에 학원을 빌려 주었다. 이 당시에는 이렇게 안하면 운영이 안 되었다.

이 매방은 김 진홍, 조 광, 전 무영(스페인춤, 지금 양정에 있다) 등과 함께 하야리야 부대에서 가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대영 극장에서 공연을 함께 한 기억이 있다. 이 매방, 김 진홍, 성민(이 매방의 제자이며 정 진욱의 스승이다), 그리고 내가 참가했다.

이 매방은 대신동에 어떤 부자가 학원을 차려 주어서 거기로 옮겼다. 나도 따라 갔다. 이 매방은 서울에서 전 무영을 데리고 왔다, 그는 딱춤(스페인춤)을 추는 사람이다. 어린이 시간에는 그분이 가르치고, 학부형 시간(법원장 부인, 변호사 부인 등)에는 내가 가르쳤다. 성 민이가 그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 나오면 내가 가르쳐 주었다.

강습료는 많이 받았는가?


아니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려고 거기에 있었던 거지 돈 벌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춤을 배웠는가?

입춤, 소고춤, 승무, 살풀이 다 배웠다. 그런데 이 매방은 춤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매방은 욕쟁이였다.

이 매방은 왜 춤을 잘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이 매방은 춤을 잘 추어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생짜(기생)들이 좋아한다. 고관 부인들도 돈 보따리를 들고 이 매방을 찾아왔다. 밤만 되면 화장을 똑딱하고 놀러 나갔다. 이 매방은 낮에 온천장, 별장, 호텔에서 기생들과 장구를 치고 놀았다. 김 진홍과 일본말을 하면서 같이 놀았다. 김 진홍은 예뻤다. 화장을 하면 여자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예뻤다.

이 매방 학원에서 언제까지 조교를 했나?

최 장술(노래)이 이 매방 학원을 그만두고 동래 온천장 권번에 춤을 가르쳐 주러 오라고 했다. 권번에 가니 기생이 120명 정도 앉아 있었다. 기생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먼저 권 명화가 춤을 추고 나갔다. 기생 한 사람이 장구를 치고 나는 춤을 추었다. 권 명화가 춤을 춘 줄도 몰랐는데, 기생이 나를 선택했다. 춤 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 나이 스물 한 두살 정도였다. 4.19이전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선거 유세에 기생들 데리고 가서 춤을 추어 주기도 하였다.

이 매방 외 다른 스승은 없는가?

김 온경 아버지가 학원을 할 때 강 태홍(가야금)이 그 뒤에 살았다. 한 순섭을 따라 강태홍에게 놀러갔다. 강태홍은 ‘살풀이는 앉은 사위에서 울고, 승무는 염불 장단에서 완전히 중이라는 것을 객석에 보여주라’라고 하였다. 거기서 나는 많이 배웠다.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고, 표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권번이란 어떤 곳인가?

기생 조합이다. 동래 호텔. 대성장, 동래 별장으로 기생이 간다. 춤추고 노래한다. 화대를 전표로 받는다. 두 방 들어가면 두장 받는다. 여기 동래 호텔인데 어느 기생 불러 주세요. 이렇게 손님이 주문한다.

권번은 4.19, 5.16과 함께 끝이 난다. 공무원이 술을 마시면 목 날아간다. 동래 권번을 운영한 사람은 이북 출신 여자이다.

기생은 무슨 일을 하나?

출근을 해서 조합장이 이름을 뒤집어 놓으면 오늘 일이 있으니 집에 가서 화장을 한다. 끝까지 이름이 그대로 있으면 공치는 날이다. 화대는 음식 값에 포함되어 있다.

기생은 방에서 상 하나 치우고 춤을 춘다. 동래 호텔은 방문이 두꺼워서 방음이 잘 된다. 단체 손님이 서울에서 많이 온다.

기생은 입춤, 살풀이, 민살풀이(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춤), 소고품을 춘다.

기생의 한이란 무엇인가?

기생 어머니가 기생을 영감에게 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아침에 남자는 가고 나서 기생은 다음날 잔치를 한다. 동기가 남자와 자고 난 후 조합에서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동료 기생과 하는 격이다. 이것이 기생의 한이다. 동기는 남자와 자고 나서(머리를 올리고 나서) 다음에 기생 일을 시작한다. 동기 3사람을 머리 올려 주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기생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동래 권번에서 무엇을 가르쳤나?

기생에게 조합에서 승무, 살풀이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기간은 기생의 소질에 따라 다르다. 춤 가르치는 사람, 악기 가르치는 사람, 소리 가르치는 선생이 따로 있었다.

공연을 한 적이 있는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작품 공연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지도를 많이 했다. 기생들을 데리고 온천 극장에서 한번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동래 권번에서 얼마 동안 가르쳤나?

2,3년 있다가 공 대일(공 옥진의 아버지)의 초청으로 광주 호남 국악원에 갔다. 거기에도 주로 기생이 배웠다. 동기는 별로 없었다. 함평, 영광에서도 가르쳤다.

스승인 이 매방의 춤과 당신은 춤은 어떻게 다른가?

생음악을 잡으면 이 매방도 춤이 달라진다. 녹음된 걸로 하면 거기서 꼼짝 못한다. 순서대로 나가야 하거든. 이 매방도 생음악을 추면 떵떵 고개 짓을 한다. 그러나 녹음에 하면 그냥 못출까 싶어서 놀라서 기계적으로 춘다. 나는 항상 춤을 생음악으로 춘다.

강옥남 류의 특징은 무엇인가?

멋과 한의 춤이다. 우선 춤은 멋이 있어야 한다. 춤을 멋있게 추려면 춤 가락이 좋아야 한다. 보통 무용가들이 춤을 추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춘다. 그런데 하나아 두우울 세에넷 네에엣 이렇게 추어야 한다. 우리 음악은 하나가 삼분박이어서 12분박이면 한 장단이다. 하나둘셋, 둘둘셋, 셋둘셋, 넷둘셋. 삼사 십이가 되어야 온박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다 줄여버리고 하나 둘 셋 넷, 그냥 이렇게 춘다. 춤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같은 네 박자라도 그 안에서 열 둘을 먹든 열 여덟을 먹던 박자만 안고 가면 된다. 이렇게 추어야 멋있고, 지겹지 않다.

한의 춤은 자기가 슬픔이 많아야 한다. 살풀이에서 수건을 떨어뜨리고 주으러 갈 때 헤어진 연인처럼 생각한다. 감정을 잡고 얼굴의 표정에서 전달해야 한다. 동작 하나 하나에서 어떤 감정인지 생각해서 추도록 한다. 살풀이를 추면 관객을 울려야 한다. 못 울리면 못추는 것이다. 나는 상상하면서 춤을 추도록 한다. 나는 춤을 가르칠 때 상황을 떠 올리도록 한다. 죽고 못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를 상상하고. 그것을 느끼고 추라고 강조한다.

강 옥남은 올해 71세이다. 그녀는 등록된 문화재도 아니고, 대학에 자리도 없고 무용 협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언론도 관객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보물처럼 소중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명의 문화재들에게도 경험과 기억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우리의 문화 유산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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