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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에 해당되는 글 32건

  1. 2018.09.10 박경랑 선생 특별 인터뷰-월간 무용과 오페라
  2. 2017.09.15 운파 박경랑의 춤에 대한 몇가지생각
  3. 2015.05.20 운파 박경랑의 돌아가신 스승님들
  4. 2015.01.12 雲破박경랑 소개영상(tapestry of sacredmusic)
  5. 2014.10.13 故 김수악 선생의 살풀이춤 (1986년 국립극장 대극장)
  6. 2014.09.28 박경랑의 스승 故김수악선생의 진주교방 굿거리춤(Gutgeori Dance of Jinju Gyobang)
  7. 2014.09.22 박경랑 심사이력
  8. 2014.07.14 운파 박경랑 소개
  9. 2014.05.14 “우리 춤은 맛을 알면 벗어 날 수 없는 마약과 같아요” - 박경랑(2007 SIDANCE인터뷰내용)
  10. 2014.05.04 박경랑의 스승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 강옥남
  11. 2014.03.03 박경랑의 스승 김진홍선생
  12. 2014.02.06 운파 박경랑 사진
  13. 2014.02.01 박경랑의 스승 금산 故조용배옹
  14. 2014.01.15 운파 박경랑 영문소개
  15. 2013.10.16 2010년 박경랑 인터뷰
  16. 2013.08.24 박경랑의 외증조부 고성오광대 중시조 故김창후옹입니다
  17. 2013.08.12 [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18. 2013.01.21 박경랑의 스승 영남 제일의 만능엔터테이너 ‘김수악’
  19. 2012.12.22 박경랑의스승 김진홍선생의 한량무
  20. 2012.12.14 최근국악관련 심사이력
  21. 2012.11.17 박경랑의 스승 김수악선생님의 교방굿거리춤 (korean traditional dance)
  22. 2012.10.22 박경랑선생의 외증조부 故 김창후옹의 프로필입니다.
  23. 2012.10.02 진주검무,진주교방굿거리춤의 예능보유자 故 김수악 (金壽岳) 선생님
  24. 2012.08.14 조각가 김학제교수와 인터뷰. 재즈에 살풀이를 춰봐
  25. 2012.08.14 운파 박경랑의 스승 2002 김진홍선생의 동래 한량춤


박경랑 선생 특별 인터뷰-월간 무용과 오페라

 우리 전통무용을 자신의 생명처럼 지켜 온 한국무용가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 관장 특별인터뷰 

 

 

 

현재 우리나라 수많은 전통무용 중 단 3개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있다. 살풀이, 태평무, 승무다. 그런데 무용계 일부에서는 그 폐해때문에 - 이들이 주장하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첫째는 이렇게 지정된 무용들이 이수증등을 마치 자격증처럼 따게 만들며 우리 전통무용을 상업화시키고, 무용 판이 한 쪽으로만 쏠린다. 두 번째는, 그러면서 지정받지는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우리 대부분의 전통무용들이 영원히 사라져 간다는 등이다 - 이 지정도 없애버리자는 주장도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지만, 평자는 우리 전통무용계 전체의 현실을 볼 때, 기존 3종목의 지정을 없앨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무용의 무형문화재 지정 몫을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즉 왜 현재 우리 문화재청은 국악, 공예, 의식, 제례, 등에는 백여 개 이상의 종목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것들보다 훨씬 미학적 예술적 의미가 높은 전통무용은 달랑 3개만 지정하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부분에 대해 평자가 약 2년 전인 지난 20167월호 무용과오페라전통무용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제도는 확산되면서 강화되어야 한다라는 타이틀의 문화시론에 게재한 글의 일부를 다시 한 번 인용한다. “현재 문화재청은 우리 전통무용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수백 개의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가장 그 예술적 표현력이 높은 전통무용 분야를 아예 고사시키는 일을 해왔다.

  사실 우리 전통무용의 미학적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각종 민속놀이의 그것과는 비교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높다. 그리고 현재 우리 전통춤 중에 문화재 미 지정 종목은 수백 개가 넘는다. 이들 춤들의 전승자들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춤을 지킨다. 그렇지만 이런 열악한 조건이면 곧 소멸될 수도 있다. 이들을 국가와 사회에서 도와야 한다. 전통무용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일부 단세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그만 두어야 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확산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도 평자는 문화재청이 정신을 바로 차리고 우리 전통무용 삼사십 개 정도를 새로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실제로 그런 경우가 되었을 때 우리 전통무용계에서는 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무대 표현 예술로서의 춤들을 잘 안무하여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솔직히 준비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아무런 희망 없이, 그리고 아무런 국가 등의 재정보조가 없는 가난 속에, 개인이 우리 전통무용을 보존해 지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되어 국가의 보조를 하나도 받지 못하는 전통예술인들에게 왜 우리 소중한 전통무용을 지키지 않느냐며 아무도 함부로 돌을 던질 수가 없다. 그런데 근래 평자는 정말 놀라운 경우를 확인했다. 산재해 있는 우리 전통무용의 아름답고 유려한 춤사위와 동작들을 자신의 독창적 안무로 개인적으로 정리해 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 고유의 춤들을 스스로 창조해 준비해 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지난한 작업을 한 이유가 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사라져 가는 우리 아름답고 유려한 전통 춤사위들이 안타까워서 자신 고유의 춤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지켜온 것이다. 그것도 10여개 이상의 다양한 춤들을 말이다.

  무용과오페라는 이번 9월호 표지인물로 자신 고유의 전통춤들을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박경랑류 영남교방소반춤, 박경랑류 영남소고춤 등등이다 - 지난 20여년 이상동안 자신의 생명처럼 만들고 지켜온 전통무용인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박경랑 관장을 모셨다. 인터뷰 질문을 만들 때부터 이번 인터뷰는 그 진지해야 할 수밖에 없는 내용상 또 그 시간이 정말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 실제로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시작된 이 인터뷰는 약 5시간이 걸려 밤 11시가 조금 지난 다음에 끝났고, 인터뷰가 있었던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 쪽에서 6호선을 탄 다음 약수역에서 3호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 평자가 바로 첫 질문을 던진다.

 

 

 

- (사실은 이 첫 질문은 이 인터뷰가 있는 건물로 들어오면서 큰 간판을 보고 즉석에서 하게 된 것이다) 영남교방청춤 전수관이 영남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인상의 박관장이 가만히 대화를 시작한다) 작년까지는 부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로 옮겼고, 저도 서울에 더 오래 있게 됩니다. 일단 춤 하면 영남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소리는 전라도고 춤은 경상도라고 했습니다. (이때 평자가 그런데 서울의 공연장의 상황을 보면 호남 춤이나 서울 경기도 춤에 비해서는 영남 춤의 공연 빈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경상도 춤은 전승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제도가 생기면서 지정 종목 외에는 무용인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남 춤 중에는 현재 중앙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춤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 전통 무용계의 분위기는 옛날처럼 예인들의 춤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고, 자격증을 따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 근래 부산과 서울 등에서 무도회등의 타이틀을 가지고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 부산에서는 지난 6월에 공연했고, 서울에서는 이번 818일에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합니다(이 인터뷰는 무더위가 극성이던 8월 초순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전에 광주와 진주 그리고 강릉 등에서도 공연했습니다. (이때 평자가 공연의 목적을 말해달라고 했다) 이 공연의 취지는 대중들이 우리 전통춤과 우리 전통문화에 쉽게 다가올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춤의 맥을 잇고 그 빛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번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현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흔히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는 우리의 권번 문화를 단순한 기생집정도의 분위기로 폄하합니다. 물론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전통무용은 그 소중한 뿌리의 일부가 권번 문화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 전통춤의 교육이, 지금의 무용예술 고등학교 수준 이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졌습니다.(박경랑은 그동안 수많은 원로 교방 무용 지도자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 왔다고 한다)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시와 서화가 있었고, 춤으로 감동을 표현했습니다. 지금의 학자인 선비들이 그 춤을 감상했을 것이며 교양 있는 지성적인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원래 교방춤은 결코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문화를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인들이 만든 화류계 문화가 아닙니다. 고고하고 지성적인 표현의 춤입니다. 저가 약 20여 년 전부터 저의 춤에 교방이라는 말을 붙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외롭게 혼자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 6~7년 전부터 우리 무용계도 교방이라는 말을 다시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 객석의 반응은 어땠는지요.

 

저는 우리 전통무용이 대중들과 멀어지는 이유가 옛것만 고집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현시대에 맞게 새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승무를 하더라도 왜 그 춤이 추어져야 하는지 하는 연출이나 스토리가 장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공연을 할 때 언제나 무대를 생각하고 동시에 관객들을 생각합니다.(이때 평자는 지난 616일 부산국립국악원에서 본 박경랑의 무도회 공연 때 부산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 소리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다)”

 

 

 

- 국악 등 다른 장르와의 협업도 많았습니다.

 

저는 저의 공연을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악기를 쓰더라도 46각을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서 개인 악기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는 노력 등을 합니다. 대금, 아쟁, 거문고, 등등 개별 악기는 모두 자신의 특별한 소리를 가집니다. 이를 통해 더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작품 표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 우리 전통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잠시 생각에 깊게 빠진 다음) 저 개인적으로 보면 저는 저가 추는 우리 전통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느낍니다. 저는 언제나 춤을 추면서 왜 우리 전통춤에는 이런 동작이 있는지, 그리고 왜 지금 내가 이 춤을 추고 있는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전통무용은 그 힘든 수련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의 격을 정해줍니다. 인내심, 기다림, 참을성, 등을 한 없이 고양시켜 줍니다.”

 

 

 

- 왜 소중한지요?

 

우리 전통무용은 우리 선조의 몸짓이고 우리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발레도 했습니다(나중에 다시 나오지만 박경랑은 놀랍게도 대학을 클래식발레의 명문인 세종대학교 발레 전공으로 입학해, 1년 후 한국무용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저희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원에서 선생님들께서 발레와 한국무용 그리고 현대무용 등을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춤이 다 중요하지만 우리 춤을 추면서 우리의 얼과 정신을 지킨다는 희열은 특히 큽니다.”

 

 

 

- 우리 전통무용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요.

 

있는 것은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현대감각에 맞게 고급스러운 예술로 새롭게 표현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무용 공연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가 새롭게 안무한 문둥북춤도 원래 고성오광대놀이의 일부 이었는데, 저가 현대적으로 새롭게 안무해 무대화시켰습니다.”

 

 

 

- 우리 전통무용의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지금 저가 생각하기로는 사라져 가는 전통무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춤, 소리 등을 정말 잘 하시는 분들이나, 잘 아시는 분들이 그냥 묻혀있습니다. 이분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이분들을) 찾아 가서 구전으로라도 들어 우리 전통춤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합니다. 이제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직전입니다. 사실 저의 춤을 마지막까지 다듬어주신 분은 부산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님이셨던 - 그리고 이매방선생의 제1호 제자였다고 한다 - 강옥남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막내 - 그 당시 기생들은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 가 소고춤을 잘 추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추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보아라.’는 등의 방식이었습니다. 완전히 구전 방식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선명했고, 바로 이런 자료들이 저의 박경랑류 교방소고춤등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 우리 전통춤들이 문화재로 더 많은 지정을 받았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더 많은 춤들이 문화재 지정을 받아서 우리 전통춤이 잘 지켜져야 합니다. 사실 근래 무용을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전공을 지향하는 학생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예술이 됩니다. 물론 역으로 요즘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반 성인 위주인) 문화원 무용 등은 도리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용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전공을 하는 프로 무용인입니다. 따라서 우리 무용계는 정말 다시 터놓고 새로 정신을 차려 나가야 합니다. 없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재 양성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능만 있는 학생이 보이면 어떤 조건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키웁니다.”

 

 

 

- 제자들은 어떻게 교육하시는지요.

 

제자들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제관계가) 얼마나 진실한가가 소중합니다. 저가 열심히 키웠는데도 (다른 춤으로) ‘이수하러 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기본기를 확실히 지도합니다. 동작 지도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동작을 하는지 하는 것의 지도가 중요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전통무용 지도가 대부분 그냥 따라만 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 동작을 하는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용수들의 감정 유발을 위한 설명을 합니다. ‘승무를 할 때 대북 쪽으로 합장해 엎드리는데, 이때 대북은 임이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먼저 간 동생도 되고, 부처님도 됩니다. 그런 기본 설정이 있어야 감동을 표현하는 움직임이 이루어집니다. 그냥 막 엎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여기서는 일어나고 저기서는 엎드리고 다시 여기서는 몇 장단으로 움직여라 하는 지도만 받는 무용은 감동이 없습니다. 저의 옛날 스승이 저에게 여기는 구름 위다라며 춤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왜 선생님이 그런 지도를 했는지 잘 알겠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요.

 

때로는 보람도 느끼고 또 때로는 속상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자리를 지키며 커나가는 것이 보람이라기보다는 저에게는 재산처럼 느껴집니다. 제자가 잘 되면 부자가 된 느낌이며, 제자 잘 되는 것이 빌딩보다 더 좋은 재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선생님들과 대화하다가 그런 동작은 이렇게 하면 참 좋은데라는 선생님만의 숨겨진동작을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하나 하나가 지금의 저가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무용 같은 예술 교육은 사숙을 하며 지도하는 방식이 참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등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왔는데, 자신 춤의 뿌리는 무엇인지요?

 

저의 춤의 뿌리는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자문 받은 다양하고 풍요로운 춤사위들이었으며, 저가 그 춤사위들을 가지고 하나의 통합적인 저의 춤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분들의 춤사위에는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선생님들의 춤의 최고의 장점만 추출하고 취합해 저 고유의 춤으로 만드는 노력을 했습니다.”

 

 

 

- 어떤 계기로 자신의 독자적인 춤을 만들게 되었는지요?

 

어떤 지인이 저에게 이제 따라하며 흉내 내는 춤은 그만 추고, 그동안 배워온 여러 선생님의 춤사위들로 자신 고유의 춤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받고 난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저 춤을 창조해 왔습니다.”

 

 

 

- 그 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박경랑류 교방소반춤, 박경랑류 교방소고무, 박경랑류 교방살풀이춤, 박경랑류 교방승무, 박경랑류 교방검무, 박경랑류 교방수건춤, 박경랑류 징춤, 박경랑류 진쇠춤, 박경랑류 북춤, 등등입니다. 저는 선생님들로 배워 온 이 춤들을 저 스스로 연상하고 기억한 후 저의 고유 춤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저의 이 춤들이) 문화재가 되지 않더라도, 저가 여러 선생님 등으로부터 배워 온 이 소중한 춤사위들을 저의 작품으로 만들어 꼭 후세에 남겨야 하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가 그동안 만들어 온 이 10개의 춤에 대한 창조 과정을 책으로 엮어 낼 예정입니다.(이때 평자는 그 창조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작품 창조 과정을 다시 한 번 상세히 말해주겠습니까.

 

일단은 여러 선생님들의 춤을 학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렁탕집도 집마다 맛이 다르듯이 각 선생님들의 춤사위와 느낌도 달랐습니다. 선생님들 춤을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만 추출합니다. 그래서 그 아주 좋은 동작들만 저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안무해 저의 춤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때 구전되어 오는 말들을 채집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판소리 하는 선생님이나 악기 하는 선생님들의 자신들이 오래 전에 본 무용에 대한 기억 등도 소중했습니다. ‘진주 기생이 그때 이런 춤을 이렇게 추었다는 등의 말 하나 하나가 다 저의 창작의 소중한 원천이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저가 배웠던 발레의 공간 사용 방식 등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전통춤도 발레처럼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의 사람들이 우리 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현재 우리 전통춤 지도 현장의 대부분의 현실은 그냥 따라 해라’, ‘보고 그대로 해라’, 정도의 수준에 그칩니다. 왜 그 동작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자신 춤의 특징은 무엇인지요?

 

저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분들이 저의 춤을 보고 움직임의 선 등이 아름답고 표현력 있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전통은 무겁고 깊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저 스스로가 연습하고 연마하며 이해했습니다. 이는 말만 듣고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가 한창 연습할 때는 약 8년 동안 하루 2~3시간만 자고 춤을 췄습니다. 그러자 몸이 이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발 디딤을 정말 섬세하고 조신하게 합니다. 전통춤은 상체도 섬세해야 하지만 사실은 발 등의 하체 움직임은 상체보다 더 정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동차도 바퀴가 잘 굴러야 잘 간다는 말을 해줍니다. 발가락이 벌여져 있는 상태면 당연히 섬세한 디딤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몸의 기운이 흐트러지고 중심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발 디딤 하나를 정확히 하기 위해 하루 종일 반복해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조금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 앞으로 자신의 춤을 어떻게 확산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예정인지요?

 

저는 이미 1995년부터 - 그렇다면 23년 전이라는 말이 되고 30대 중후반에 벌써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된다 - 저의 영남교방청춤의 연수회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어린 사람이’, ‘문화재 지정 종목도 아닌데등등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사라져가는 보석 같은 우리 전통춤의 춤사위들을 그대로 날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함께 공유하고 함께 배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연수는 이어지고 이제 9월에도 또 저희 전수관에서 (저의 춤에 대한) 연수가 계속됩니다. 저는 저의 연수 2시간 모두를 끝까지 연습시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고 뜁니다.”

 

 

 

- 영남춤의 특징은 무엇인지요?

 

아무래도 저가 추는 영남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서민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춤이며, 쾌활한듯하면서도 깊은 한을 가지는 춤입니다.”

 

 

 

- 영남춤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저는 아무래도 근대 영남춤의 역사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원래 영남 쪽 권번에서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춤들이 있었습니다. 부산(동래) - 우리나라의 권번제도가 동래에 제일 오래 남았다고 한다 - , 진주, 대구, 등등에서는 수많은 우리 전통춤들이 풍성하게 추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전국의 춤과 소리와 기악의 명인들이 영남으로 모였습니다. 이매방선생님도 부산에서 활동하고 명창 안숙선선생님도 동래온천 쪽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래의 권번 등도 사라지면서, 이제 전국의 예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올바른 전수교육기관이 없는 영남춤은 - 그리고 앞에서 거론되었지만 영남춤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아무것도 지정받지 못했다 - 소멸의 위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이때 평자는 ! 그래서 박경랑관장이, 문화재 지정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온갖 몰이해와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영남춤 보존과 창작에 나섰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진다)”

 

 

- 영남춤을 누구보다 면밀히 연구하고 집중해왔습니다.

“(다시 박경랑이 그 특유의 수줍고 순수한 미소를 지은 다음, 겸손에 가득 찬 대답을 이어간다) 사라져가는 춤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후세에 전달하고 싶었는데, 아직 이것 밖에 못했습니다.

 

 

- 영남춤이 상대적으로 서울 등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중앙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춤도 사라지게 됩니다.”

 

 

- 영남춤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요.

“(다시 박경랑이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이 전수교육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영남춤을 사랑하고 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 (이때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넘어있다. 이제 빨리 이 소중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끝내야 한다) 태어난 곳은 어디이고 춤의 동기는 무엇인지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주로 마산에서 살았습니다. 춤을 추게 된 동기는 고성오광대놀이를 하신 외할아버지의 - 박경랑의 외조부 고 김창후 옹은 고성오광대의 중시조였다 -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 가족들은 좋아하셨는지요.

반대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끝까지 저의 뒷바라지를 해주셨지만, 아버님의 반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이 길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막상 날마다 무용하지 말라고 하시다가도, 저가 상을 받아오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버님이셨습니다.”

 

 

- 어릴 때 학교는 어디에서 다니셨는지요.

“4살 때부터 마산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고성에서 통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는 마산 월영초등학교, 완월초등학교 등을 다녔고, 마산여중과 마산여고를 졸업했습니다.”

 

 

- 어릴 때 어떤 추억이 있는지요.

집에서 저를 잃어버리면 극장 앞에 가면 찾았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극장 간판, 약장수, 등등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기질이 많았겠지요. 영화를 보면 펑펑 울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예부 학생이기도 했습니다.”

 

 

- 대학교는 어디로 진학했는지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평자는 여기서 정말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서울로 와서 세종대학교 발레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1년을 마치고 한국무용 전공으로 바꿉니다.(물론 이때 평자는 왜 박경랑의 전통춤에 클래식발레 특유의 우아한 기품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지 하는 것을 이해한다)”

 

 

- 무용단에도 근무를 했습니다.

. 1984년도에 창단된 경남도립무용단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용단이 창원시로 이관되면서 창원시립무용단 단원으로 88올림픽 때까지 활동했습니다.”

 

 

- 존경하는 스승을 말해주세요.

김수악 선생님으로부터 진주교방굿거리 검무 오고무 소고춤 등등을 배웠습니다. 김애정선생님으로 부터는 김애정류 살풀이춤과 교방소반춤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자이면서 천하한량이라는 소리를 듣던 조용배 선생님으로 부터는 소고춤, 북춤, 문둥북춤 등의 동작들을 공부했습니다. 강옥남 선생님은 저의 춤의 기법을 다듬어 주신 분이며, 황무봉, 김진홍 선생님 등으로 부터는 수려한 춤사위의 표현 방식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고향 고성 등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님들 - 흔히들 꼭지선생님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로부터는 살풀이춤과 소고춤 등등을 배웠습니다.”

 

 

- 수상실적은 어떻게 되는지요.

대표적인 상을 말씀드리면, 1995년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서울전통공연예술 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 18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 지난 반세기 이상 한 평생 무용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요?

“(다시 깊은 생각에 잠시 담긴 다음) 2때 아버님의 사업이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연에 나가야 하는데, 학원에서 작품을 받을 돈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 스스로 작품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기존의 흰 의상에 닭털을 씻어 붙여 의상을 만들고 경연에 나가 경상남도 학예발표회에 나가 또 1등을 했습니다. 힘든 때였지만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 나는 나의 작품을 스스로 안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나 자신의 춤을 스스로 만들어 출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나의 춤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창작해 추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무용에서 안무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음악을 잘 이해해야 안무가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저는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서울 부산을 오가며 살풀이춤 음악 하나를 계속 수백 번 반복해 듣기도 합니다.”

 

 

- 가장 기쁜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저 스스로의 춤을 - 즉 박경랑류의 춤을 -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저가 전통춤 전공 선택을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춤 한 개는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나머지 9개의 춤을 잘 발전 보급시키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 다시 태어나도 춤을 추는지요?

추고 싶습니다. 현세에 못 다한 것을 다음 세상에서 계속 더 해나가고 싶습니다. 춤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물론 저도 춤에 모든 것을 집중했습니다. 친구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은 보았지만 춤은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춤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지켜봐주고 있습니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요?

저의 10개 춤을 세상에 전수 보급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의 춤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춤 출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의 이 10개 무용의 탄생 혹은 안무 창조 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히 글로 적어 책으로 발간해 후세에 남기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전국의 무용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진정한 춤을 추기 위해서는 진정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들의 춤에 정진해 나간다면 우리 전통춤의 앞날은 밝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힘들어도 더 인내를 가지고, 더 멀리 보고 나는 새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송종건/월간 무용과 오페라발행인/sjkdc@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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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TV팟에서 보기              자세히 알기 --> 故 김수악 명인



2012/05/26 - 진주검무,진주교방굿거리춤의 예능보유자 故 김수악 (金壽岳) 선생님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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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 14회 세계 한국국악 경연대회                 미국
2014 제9회 황산벌전국국악경연대회 충남
2014 제9회 전국풍남춤페스티벌 전북
2013 제23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10회 전국국악대전(서울) 서울
2012 제22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38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전북
2012 제1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경남
2012 제12회 세계한국국악경연대회 기타
2012 제30회 전국국악대전(전북) 전북
2010 제17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2010 제11회 국창권삼득선생추모전국국악대제전 전북
2009 제16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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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破 朴璟娘

 

1961년 경남 고성 출생. 중요 무형 문화재 제 7호 고성 오광대 초대 문화재이셨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견 춤꾼으로 보기 드물게 농익은 춤의 기량을 간직하고 있다.


 

4세에 춤에 입문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황무봉 故김애정 故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들에게 우리춤을 사사받았고 지금은 서울, 부산을 오가며 개인 공연 및 기획 공연 국악 무용 경연대회 심사 및 우리춤을 연구, 전수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상이력

 

93년 제 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전체 종합대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3년 제4회 대구국악제 전체 종합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4년 진주 개천 예술제 제12회 개천 한국 무용제 특장부문 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5년 제21회 전주 대사습 놀이 무용부문 장원(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6년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 최우수상(국무총리상)수상 등을 거처 97년 제 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활동사항

 

현재 경상남도 무형 문화제 제 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 이며 한국 영남춤 문화 예술 연구소 대표. 박경랑 전통예술단 단장. 영남춤 보존회 대표. 국립국악원 문화학교 강사, 부산 경남정보대학 및 동서 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예술과 한국무용 지도 교수로 부산에술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 예술대학원 전통춤 외래지도교수로 역임한바 있으며 각종 세미나를 통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경랑의 영남 교방청춤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받은 춤으로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널리 알려진 춤이다. 민속학자 정상박 교수는 박경랑의 춤을 흔히 난초와 대나무에 비교하며 또한 '영남 춤의 규격속의 비규격 정형속의 비정형, 유형속의 강건 절제 속의 자유에서 박경랑의 춤의 멋을 느낀다'라고 표현했다

박경랑은 여러 명인 선생님들의 장단에 익숙해진 영남춤을 추어 왔으며 이제는 음악을 자유자재로 춤 사위에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전통춤의 깊이를 느끼게 하며 영남춤의 지킴이로서 이미 우리시대의 춤꾼 정동극장 명인전,팔무전,고궁명무전 등의 기획공연을 통하여 명무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다.


 


 

박경랑_공연이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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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춤은 맛을 알면 벗어 날 수 없는 마약과 같아요” - 박경랑

“이번에 제대로 된 한 판을 벌여 보자” - 김운태


12일 오후 8시 호암아트홀에서 ‘판굿’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 전 관객들의 질문을 들고 분장실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 입으신 박경랑 선생님과 앞서 공연을 하고 나오신 듯 숨을 고르고 계신 김운태 선생님을 만났다.


Q. 팀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궁금하고요, 이런 공연들은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경랑) 솔로로 활동 하고 가끔 이렇게 모여서 공연을 해야 될 때는 모여서 연습을 합니다. 같이 연습을 하는 기회는 많이 없죠.

저희들 공연은 마당에서 또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공연이 많이 이루어집니다. 정형화된 무대도 중요하지만 우리 것이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보여주고 관객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를 많이 택합니다.


(김운태) 이런 공연은 서로 재미있어서 오는 거예요. 우리 것이 외국에 소개 돼야 된다는 입장에서의 사명감 그거 아니면 모일 수가 없어요. 각자 솔리스트로 공연 하는 것이 더 많고. 저 같은 경우는 혼자 다니는데 이렇게 쟁이들이 모인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공연은 많이 있어요. 국립국악원, 국립무용단도 따로 있고, 남사당도 있고 각 시립 굉장히 많은데 통상적으로 정기공연을 하다 보니 신명감이 덜할 수도 있고. 저희 공연을 하는 목적은 프로들이 모여서 제대로 된 판을 한 번 벌여보자 라는 거예요. 이번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우리 공연을 선보이고 내년에는 공식적으로 수출해보자 하는거예요. 이 공연을 준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Q. 2004년에 하셨던 <춤추는 바람꽃 여성농악단> 보다 무대화 됐다는데 그 의미가 무엇이고 또 그 때의 공연과 지금의 공연이 다른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박경랑) 2004년 공연은 흩어졌던 분들이 모여서 형식을 짰던 무대구요, 이번에는 무대화시켜 만든 작업이기 때문에 지난번의 마당놀이의 형식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에 비해 조금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공연이죠.


(김운태) 예전 공연을 복원하는 차원에서 신경을 많이 썼어요.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옛날 사람들을 모아서 다시 한 번 재연하는 쪽이예요. 이번에는 가락도 정리를 하고 춤사위도 정리를 했어요. 흔히 말하는 연풍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왼발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하는데 전라도는 왠지 오른쪽 발을 사용하면서 흥청거려요. 그런 것도 시도를 했는데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어요. 해가 흐르면 흐를수록 그 부분을 더욱 신경 써서 본격적으로 익히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Q. 한국무용을 잘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고 청소년들이 한국무용을 왜 전수해야 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박경랑) 한국무용에도 신무용이 있고 전통무용이 있는데 신무용은 젊은 세대들이 많이 좋아하지만 전통무용은 좀 소외시 되었기 때문에 많이 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죠. 그런데 요즘은 우리 것을 다시 살리려고 하는 흐름 덕에 전통무용도 많이들 좋아하죠. 우리춤은 깊이가 있어요. 서양 사람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어떤 오묘한 춤의 기법이 있기 때문에 저희가 외국에 가서 외국춤을 배우면 쉽게 따라 하지만 서양분들은 저희 춤을 쉽게 받아들이질 못해요. 우리춤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신체의 모든 부분들을 활용해야만 제대로 된 하나의 춤사위가 나와요. 또 서양춤은 오락성이나 보여지는 춤인데 반해 우리 춤은 보여지기도 하고 인생의 철학이라든지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마음과 정신이 담기지 않으면 한 동작 한 동작이 우러나오질 않아요. 그게 서양춤과의 차이죠.

우리 것이기 때문에 더 소중함을 알고 해야 된다는 걸 알지만 젊은 사람들이 현대리듬 감각에 빠른 것만 좋아하니까 느린 것에 익숙해져 있질 않아요. 하지만 한 번 빠지게 되면 벗어나질 못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국민성이 그대로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려고만 하지 말고 과감하게 부딪쳐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게 될 거예요. 그 맛을 알게 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게 마약이나 마찬가지예요 우리 춤은.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에.


(김운태) 한국무용이나 서양무용이나 ‘잘한다’는 개념은 똑같아요. 다만 형식미가 조금 다를 뿐이죠. 그리고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요. 서양은 즉흥적이지만 한국은 내면적인 표현이 많아요. 한마디로 제가 공연에 흔쾌히 나가지 않으면 흥을 낼 수 없어요. 동작이 많지가 않으니까요. 한국무용을 잘춘다 라고 하는 것은 우선은 나를 찾아 봐야 해요. 내가 무대에 서는 사람이 맞는가. 또 내 소망과 삶이 무대에 서기를 원하고 있는가를.

한국무용을 잘 추려면 첫 번째 한국적 체형을 놀여야 해요. 또 한 가지 말씀 드리면 절대적으로 음악을 느껴야 해요. 춤에는 장단이 보이고 장단 속에는 춤이 보여야 된다는 거죠. 서양에서는 장단을 비트라고 하는 것 같은데 쌈바를 보면 광장히 강하게 단순하면서도 잠시 동안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강한 비트를 갖고 있지만 우리는 형식에 드러나는 게 적기 때문에 힘들고 내면적으로 힘을 줘야 해요. 그걸 어른들이 속박자라고 해요. 내 속에 박을 품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무용을 잘 추려면 여러 가지 것들을 경험하고 체험해야 돼요.

- 아직 공연을 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시고 마지막 기념촬영에 멋진 포즈로 마무리 해주신 박경랑 선생님. 한복을 차려입은 고운 자태에서 빛이 나셨다!!

- 공연 중간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대답해주신 김운태 선생님. 마지막 질문을 하나 남겨두고 공연 중간에 인터뷰 한다고 혼난 나를 위해 공연 끝나고 대답 해주시겠다고 하셔서 눈물 났다.


글/영상 시끌이 기자부 이현진

인터뷰 동영상보기 : http://www.sidance.org/bbs.php?table=2007notice&uid=321&query=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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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 Vol 63. 2009. 9/10. 49-51쪽 배 학수(경성대 교수/ 철학) --> 블로그보기

“뭣보다 교방이라는 담장, 그 담장이 가두기엔, 너무 큰 예인이었다"(KBS 황진이). 드라마에서는 예인藝人이라고 미화된 황진이 같은 기생들은 조선 시대 궁중이나 관청의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공연했다.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교방敎坊인데, 교방은 을사조약으로 폐지되었고, 그 후 교방의 기생들은 새로 생겨난 민간 조직인 기생 조합, 권번券番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권번은 서울, 평양, 부산, 대구, 진주 등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동기童妓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화대花代를 관리했다.

강 옥남(姜玉南)은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다. 그에게는 남기고 기록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언론에 한번도 대담 기사가 실린 적이 없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여러 번 부탁하여 마침내 그녀를 2009년 6월 15일 부산 서구의 새진주 식당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해 달라
.
1938년 일본 나고야 태생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대구 출신인 어머니는 자식 셋(오빠, 언니, 나)을 데리고 해방되자 귀국했다. 돈 3만원을 가지고 왔는데 환전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삼천포로 갔다가 부산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부민 국민 학교를 다녔고, 가정 형편상 졸업후 학업을 중단하다. 그 당시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았다. 오빠는 동아대학을 졸업했다. 어머니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어떻게 무용을 배우게 되었나?

16살쯤 한 순섭(여자. 서울에서 무용 학원을 하고 있다)을 권 명화 학원에서 만났다. 한 순섭의 아버지가 잘 살아서 학원을 차렸는데 거기에 이 매방을 초청하여 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권 명화 학원에서 딱 한달을 배웠는데, 이건 무용이 아닌 것 같아 한 순섭의 권유를 따라 이 매방 학원으로 옮겼다. 이 매방, 권 명화 두 사람 모두 그 당시 부산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권 명화도 이 매방에게서 배웠다.

이 매방은 어떻게 지냈는가?

이 매방은 학원이 잘 안되어 양춤(스포츠 댄스)추는 사람에게 낮에 학원을 빌려 주었다. 이 당시에는 이렇게 안하면 운영이 안 되었다.

이 매방은 김 진홍, 조 광, 전 무영(스페인춤, 지금 양정에 있다) 등과 함께 하야리야 부대에서 가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대영 극장에서 공연을 함께 한 기억이 있다. 이 매방, 김 진홍, 성민(이 매방의 제자이며 정 진욱의 스승이다), 그리고 내가 참가했다.

이 매방은 대신동에 어떤 부자가 학원을 차려 주어서 거기로 옮겼다. 나도 따라 갔다. 이 매방은 서울에서 전 무영을 데리고 왔다, 그는 딱춤(스페인춤)을 추는 사람이다. 어린이 시간에는 그분이 가르치고, 학부형 시간(법원장 부인, 변호사 부인 등)에는 내가 가르쳤다. 성 민이가 그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 나오면 내가 가르쳐 주었다.

강습료는 많이 받았는가?


아니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려고 거기에 있었던 거지 돈 벌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춤을 배웠는가?

입춤, 소고춤, 승무, 살풀이 다 배웠다. 그런데 이 매방은 춤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매방은 욕쟁이였다.

이 매방은 왜 춤을 잘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이 매방은 춤을 잘 추어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생짜(기생)들이 좋아한다. 고관 부인들도 돈 보따리를 들고 이 매방을 찾아왔다. 밤만 되면 화장을 똑딱하고 놀러 나갔다. 이 매방은 낮에 온천장, 별장, 호텔에서 기생들과 장구를 치고 놀았다. 김 진홍과 일본말을 하면서 같이 놀았다. 김 진홍은 예뻤다. 화장을 하면 여자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예뻤다.

이 매방 학원에서 언제까지 조교를 했나?

최 장술(노래)이 이 매방 학원을 그만두고 동래 온천장 권번에 춤을 가르쳐 주러 오라고 했다. 권번에 가니 기생이 120명 정도 앉아 있었다. 기생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먼저 권 명화가 춤을 추고 나갔다. 기생 한 사람이 장구를 치고 나는 춤을 추었다. 권 명화가 춤을 춘 줄도 몰랐는데, 기생이 나를 선택했다. 춤 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 나이 스물 한 두살 정도였다. 4.19이전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선거 유세에 기생들 데리고 가서 춤을 추어 주기도 하였다.

이 매방 외 다른 스승은 없는가?

김 온경 아버지가 학원을 할 때 강 태홍(가야금)이 그 뒤에 살았다. 한 순섭을 따라 강태홍에게 놀러갔다. 강태홍은 ‘살풀이는 앉은 사위에서 울고, 승무는 염불 장단에서 완전히 중이라는 것을 객석에 보여주라’라고 하였다. 거기서 나는 많이 배웠다.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고, 표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권번이란 어떤 곳인가?

기생 조합이다. 동래 호텔. 대성장, 동래 별장으로 기생이 간다. 춤추고 노래한다. 화대를 전표로 받는다. 두 방 들어가면 두장 받는다. 여기 동래 호텔인데 어느 기생 불러 주세요. 이렇게 손님이 주문한다.

권번은 4.19, 5.16과 함께 끝이 난다. 공무원이 술을 마시면 목 날아간다. 동래 권번을 운영한 사람은 이북 출신 여자이다.

기생은 무슨 일을 하나?

출근을 해서 조합장이 이름을 뒤집어 놓으면 오늘 일이 있으니 집에 가서 화장을 한다. 끝까지 이름이 그대로 있으면 공치는 날이다. 화대는 음식 값에 포함되어 있다.

기생은 방에서 상 하나 치우고 춤을 춘다. 동래 호텔은 방문이 두꺼워서 방음이 잘 된다. 단체 손님이 서울에서 많이 온다.

기생은 입춤, 살풀이, 민살풀이(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춤), 소고품을 춘다.

기생의 한이란 무엇인가?

기생 어머니가 기생을 영감에게 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아침에 남자는 가고 나서 기생은 다음날 잔치를 한다. 동기가 남자와 자고 난 후 조합에서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동료 기생과 하는 격이다. 이것이 기생의 한이다. 동기는 남자와 자고 나서(머리를 올리고 나서) 다음에 기생 일을 시작한다. 동기 3사람을 머리 올려 주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기생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동래 권번에서 무엇을 가르쳤나?

기생에게 조합에서 승무, 살풀이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기간은 기생의 소질에 따라 다르다. 춤 가르치는 사람, 악기 가르치는 사람, 소리 가르치는 선생이 따로 있었다.

공연을 한 적이 있는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작품 공연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지도를 많이 했다. 기생들을 데리고 온천 극장에서 한번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동래 권번에서 얼마 동안 가르쳤나?

2,3년 있다가 공 대일(공 옥진의 아버지)의 초청으로 광주 호남 국악원에 갔다. 거기에도 주로 기생이 배웠다. 동기는 별로 없었다. 함평, 영광에서도 가르쳤다.

스승인 이 매방의 춤과 당신은 춤은 어떻게 다른가?

생음악을 잡으면 이 매방도 춤이 달라진다. 녹음된 걸로 하면 거기서 꼼짝 못한다. 순서대로 나가야 하거든. 이 매방도 생음악을 추면 떵떵 고개 짓을 한다. 그러나 녹음에 하면 그냥 못출까 싶어서 놀라서 기계적으로 춘다. 나는 항상 춤을 생음악으로 춘다.

강옥남 류의 특징은 무엇인가?

멋과 한의 춤이다. 우선 춤은 멋이 있어야 한다. 춤을 멋있게 추려면 춤 가락이 좋아야 한다. 보통 무용가들이 춤을 추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춘다. 그런데 하나아 두우울 세에넷 네에엣 이렇게 추어야 한다. 우리 음악은 하나가 삼분박이어서 12분박이면 한 장단이다. 하나둘셋, 둘둘셋, 셋둘셋, 넷둘셋. 삼사 십이가 되어야 온박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다 줄여버리고 하나 둘 셋 넷, 그냥 이렇게 춘다. 춤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같은 네 박자라도 그 안에서 열 둘을 먹든 열 여덟을 먹던 박자만 안고 가면 된다. 이렇게 추어야 멋있고, 지겹지 않다.

한의 춤은 자기가 슬픔이 많아야 한다. 살풀이에서 수건을 떨어뜨리고 주으러 갈 때 헤어진 연인처럼 생각한다. 감정을 잡고 얼굴의 표정에서 전달해야 한다. 동작 하나 하나에서 어떤 감정인지 생각해서 추도록 한다. 살풀이를 추면 관객을 울려야 한다. 못 울리면 못추는 것이다. 나는 상상하면서 춤을 추도록 한다. 나는 춤을 가르칠 때 상황을 떠 올리도록 한다. 죽고 못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를 상상하고. 그것을 느끼고 추라고 강조한다.

강 옥남은 올해 71세이다. 그녀는 등록된 문화재도 아니고, 대학에 자리도 없고 무용 협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언론도 관객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보물처럼 소중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명의 문화재들에게도 경험과 기억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우리의 문화 유산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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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한량춤)

김진홍의 춤사위에는 삶의 굴곡과 달관이 흠뻑 배어 있다.

욕심 없이 깨끗한 자세로 마음을 비운다. 몸짓 하나도 조심스럽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넘치는 것을 경계하고 모자라지 않도록 늘 춤집을 채워 넣는다.

김진홍(金眞弘ㆍ58, 1935년 4월 5일생) 씨는 혼자 춤 연습을 하면서도 자신이 춤 인생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을 소홀히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인 홍복순(洪福順ㆍ48, 조교), 박영미(朴英美ㆍ40, 학원 원장), 장선희(張善姬ㆍ36, 새한전통예술보존학원 원장),
박경랑(朴環朗ㆍ33, 리라무용학원 원장), 신치련(42, 학원 원장), 이송희(李松姬ㆍ36, 부산 시립무용단수석), 오숙례(吳淑禮ㆍ29, 시립무용단 단원), 장내훈(33, 시립무용단 수석), 홍기택(洪基澤ㆍ32, 시립무용단 수석) 씨 등도 스승 앞에서의 춤 공부가 여간 정중하고 조심스럽지 않다고 한다.

“춤은 마음으로 춰야지요. 고뇌를 통해 내연시켜 온 정신 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 관중이 느끼도록 해 주는 겁니다. 재주로 춤을 추면 기교에 지나지 않으며 진한 감동을 교감하지 못합니다.”

늘 하심(下心)하는 자세로 선후배 가리지 않고 먼저 인사하는 그. 말소리 발소리조차 조신하게 챙기는 그런 김씨가 일단 무대에 섰다 하면 관중은 몽땅 그가 의도하는 예술 세계로 빨려들고 만다. 그의 한량춤(閑良舞)에서 삶의 굴곡과 생동감을 확인하고 승무에서는 광대무변한 정적과 알 수 없는 소생심(蘇生心)을 느낀다. 명주살풀이와 민살풀이로 교차되는 살풀이 춤짓에서는 소름끼치는 정율과 해탈의 넉넉함이 안도감으로 다가오고······.

“한량춤을 추면서는 박목월의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승무를 안고 돌 때면 조지훈의 ‘승무’를 사뿐이 즈려밟고 학을 탑니다. 살풀이를 휩싸 감을 땐 노천명의 ‘사슴’ 눈을 찾아 모가지를 어루만지고······. 이러다 보면 으레껏 정해진 공연 시간을 초과하기가 일쑤지요.”

김씨는 이매방(李梅芳)제 승무의 이수자 1호이면서 한량춤의 1인자로 손꼽히고 있다. 입춤이나 덧뵈기춤(허튼춤)을 추면서도 손가락의 곡선은 물론, 안 보이는 버선 속 발가락 움직임까지 치열한 자세와 정신으로 임한다. 마치 달관 경지가 이래야 됨을 육체 언어로 토해 내는 듯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일곱 살 때 부산으로 건너오면서 ‘조선놈이 조선말도 못한다.’고 뭇매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김종명)가 고향인 진주를 떠나 어머니(강매결)와 함께 일본에 건너간 건 1930년 3월. 고물상을 해 큰돈을 벌었지만 ‘큰 사업’에 잘못 손대 둘러엎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홍(진홍 씨 본명)이가 독자라고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 밥주발을 들고 쫓아다니며 밥을 먹여 주었다.

“외삼촌이 진주 기생과 첩살림을 하는데 그리도 고울 수가 없었고 소리와 춤에 반했어요. 그 후에는 외숙모한테 옷고름 뜯기고 멱살잡혀 당하는 외삼촌의 망신과 머리채 휘둘리며 퉁퉁 붓도록 얻어맞은 외숙모도 목격했습니다. 어릴 적 나고 자라는 환경과 보고 들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잘 알잖습니까.”

한영숙(살풀이) 씨와 이매방(승무) 씨의 잦은 부산 공연은 감수성 예민한 소년 김진홍을 예술 세계로 흡인시켰다. 그 때 나이 열 셋이었다. 가설 극장 에서 만난 이춘우 씨에게 청해 기본무, 입춤, 산조를 배웠고 이매방 씨가 부산에 있는 5~6년 동안 그 유명한 승무와 살풀이 산조까지 전수받는다.

그가 추는 한량춤은 서른이 넘어 당시 부산 민속보존협회장이던 문장원(文章垣ㆍ77, 인간문화재 제18호 동래야유 기능 보유자) 씨한테 사사받은 것이다. 한량춤은 원래 기방(妓房) 무용 계열로 남부 경남에서 추어 오던 무용극 형태의 춤으로 남사당패에서도 연희됐으나 1910년 전후 남사당패가 흩어지면서 넓은 잔디밭이나 마당을 이용해 흥겹게 추어 왔던 것이다.

도포에 정자관을 쓴 한량, 궁중 별관 복식의 별감, 몽두리에 색한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 궁중 여기(女妓) 차림의 기생, 가사 장삼에 작은 방갓을 쓴 승려 등이 어우러져 계급 사회를 강하게 풍자하며 한바탕 웃어 제끼는 놀이극이다. 줄거리는 한량과 별감이 기생을 데리고 흥겹게 노는 자리에 파계승이 끼여들며 시작된다. 아리따운 기생에 반한 승려가 춤으로 유혹하니 기생은 한량과 별감을 등돌리고 파계승 품에 안긴다는 매우 해학적인 내용이다.

원래 한량은 직업 없이 경제적으로는 부유해 돈 잘 쓰고 만판 놀이만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 놈, 한량이야’ 하는 나무람 속에는 가진자에 대한 은근한 야유와 함께 ‘건달’이라는 빈정거림도 담겨져 있다. 김씨는 말한다. 한량춤을 제대로 추려면 ‘한량질’을 해 봐야 하고, 승무에 몰입하기 위해선 파계승의 고뇌에 함몰돼 봐야 한다고. 매몰찬 시어미한테 정강이뼈 묻어나게 얻어맞고 부앗김에 잿물 삼켜 물에 빠져 죽은 며느리의 한을 알아야 살풀이를 제대로 삭혀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김씨는 마산 김애정(1992년 작고) 씨한테 그런 한이 묻어난 살풀이를 넘겨 받았다. 한 분의 스승을 새롭게 모실 때마다 ‘나도 제자들을 똑바로 길러 내야지······.’ 하는 각오와 다짐이 들어섰다고 한다.

• 김진홍 한량춤 계보

김진홍 본문 이미지 1



출 처 : 이규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내용 더 자세히보기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7344&cid=3005&categoryId=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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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서예 대가로 전국 무대 누벼

당대 춤꾼 고성하면 ‘조한량’ 불려

조용배 그는 1929 9월 거류면 용산리 157번지에 태어났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조용배’의 신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일찌감치 예인기질을 발산시켰다.

세인들은 한량에도 급수가 있다면 故 조용배 선생은 단연 9단이요, 가장 으뜸일 것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춤이면 춤, 악이면 악, 그림이면 그림, 글씨면 글씨, 문장이면 문장 이 모두를 두루 섭렵했던 한량 조용배.

그는 타고난 끼를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다 기어코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승화시키면서 91년 예순셋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가리켜 고성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풍류객들은 이렇게 이름 지어 놓았다.

‘조한량’ 이라고….

여늬 사람들 같으면 그가 세상을 향해 풀어놓았던 그 출중한 예인기질을
한 가지만 익혀도 감탄을 자아냈을 법 한데 ‘文書畵樂舞’를 모두 겸비했던, 금산 조용배.

그래서 그를 가리켜 한량 9단이라는데 아무런 주저 없이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허리춤에 호리병과 표주박을 메달고 달랑 단소하나 챙기면 전국방방 곡곡을
내집처럼 누빌 수 있었던 이 시대의 마지막 풍류객 조용배.

그의 예술의 세계는 고성보다 부산 동래와 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더 극찬했다.

부산 동래에서 생활하는 한 동안은 동래가 술렁거렸다고 한다.

예술인이 모이는 곳이면 금산은 항상 그 모임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의 춤이며, , 서화를 감상하기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산의 예술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높아졌으며, 무르익어 간 것이다.

특히 예향의 도시라고 자부하는 전남 광주는
타지인의 재능을 그리 쉽게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금산의 춤과 서예, 서화 앞에서는 이들조차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 금남로 다방에서 서예전을 가진 뒤 전남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고성산 금산 조용배선생의 글씨는 전남지방에서 보는 문체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과 힘이 있다. 특히 그의 서화중에서도 매화는 일품이다’고.

당시 ‘경상도 보리문디’에 대해서는 썩 좋잖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던데 비해
광주의 예인들은 금산에게만은 절대적인 호의를 베풀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예순셋의 생을 살다 가면서도 결코 단 하루도 평범한 날을 보내지 않았던 조용배.

그는 1929 9월 거류면 용산리 157번지에 태어났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조용배’의 신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일찌감치 예인기질을 발산시켰다.

청소년기를 접어들면서 부산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해 해관암으로 입산, 잠적해 버린다.

이 입산이 그를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이끌어 내는데 큰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입산수도를 정진하면서 글씨와 그림, 문장을 익히면서 풍류의 기본이 되는 학문에 전념한다.

이후 외아들의 입산을 안타까워하며 하산을 종용하던 부모님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락정(二樂亭)’이라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읽고 깨우친다.

그러나 그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풍류의 기질이 꿈틀대며 그를 다시 절 생활로 이끈다.
그 길로 강원도 낙산사, 통도사, 해인사를 거쳐 통영 안정사를 오가며
6
년간의 승려생활이 시작된다.

해관암부터 시작된 그의 승려생활 10년 동안
서예와 사군자, 승무, 장구, , 아쟁, 대금 등을 틈틈이 연마한다.

이런 금산이 잠시 마음을 다잡고 고향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있었으니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과 아내에 대한 민망함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1.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월치에 3만평의 농장을 구입,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제법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고성읍 남산경로당에서는
지금은 작고하신 김창후, 홍성락, 천세봉옹 등이 모여 고성오광대 명맥을 잇고자
고증과 발굴에 힘쓰는 한편 후진양성에 혼을 기울이고 있던 때다.

이를 놓칠 리 없는 금산은 한달음에 달려와 이들로부터 고성오광대 전수에 몰두한다.

그렇잖아도 잘 타는 마른 장작에 기름까지 껴얹은 양 그의 춤은 마치 신들린듯한 모습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고성오광대가 우리나라 민속예술계의 한 산맥으로 우뚝 솟게 한 데는
금산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생전에 그는 “춤사위는 혼이 들어 있어야 하고
춤을 추는 사람이 무아지경에 들어야 보는 사람도 같이 춤에 빠져들게 되는 거야.

“요즘 젊은 놈들은 재주는 있는데 인간이 안되고, 춤은 잘 추는데 멋이 없어.
한마디로 풍류가 뭔지 모르는 게지.”라며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며
어깨짓 하나에도, 몸짓 하나에도 혼을 불어넣기를 강조했던 금산.

그 자신이 문둥북춤을 추어 보이면 천형을 안고 사는
문둥이의 골수에 맺힌 원한과 처절한 한이
보는 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고성이 낳은 예술인 조용배의 춤사위를 닮으려 고성오광대 전수생들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원기사보기 : http://goseong.newsk.com/bbs/bbs.asp?exe=view&group_name=403&section=14&category=1&idx_num=1807&page=9&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

한국의 멋진 한량閑良 조용배趙鏞培와 고성오광대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lsteel&logNo=2201143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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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Park Gyongnang was born in 1961 in Goseong, Kyongsangnamdo Province. She is Korea's leading dancer actively engaging in teaching and performance in Seoul and Busan. Her maternal great-grand father had been the first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for the Goseong Ogwangdae performance. Like her great-grand father, she follows in the tradition of Youngnam dance.

At the age of four she became a disciple of renowned dance masters like late Kim Chang-hoo, late Cho Yong-bae, late Hwang Moo-bong, late Kim Soo-ak, Kim Jin-hong, Park Seong-hee, Kang Ok-nam, learning various traditional Korean dances and ballet. She was the principal dancer with Kyongsangnamdo Province dance company, Changwon City dance company. Her traditional Korean dance has been widely acclaimed as masterful. She is devoted to the study, transmission and preservation of traditional Youngnam dance, performing as well as participating as a judge for various dance competitions.

Career

● Completed Jinjoo Gyobang Gukkeori Dance (Kyongsangnamdo Province Intangible Cultural Asset no. 21)

● Instructor of the Goseong Ogwangdae Performance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no. 7)

● Head of Park Gyongnang Traditional Arts Group

● Representative of the Association for the Preservation of Youngnam Dance

● Teaching Korean Dance at the Culture School of the National Gugak Center

● Teaching Korean Dance at the Gimhae Arts and Ports Center

● Visiting Professor at the Sookmyung Women's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Traditional Arts

● Representative of the Korea Culture Institute for Youngnam Dance

Prizes

△ Grand Prix of the 18th National Contest for Traditional Arts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4th National Contest for Traditional Arts in Daegu,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44th Gaecheon Arts Festival,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21th National Competition for Traditional Korean Arts (Jeonjoo Daesaseup Competition),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First Prize of the 4th Seoul Traditional Arts Competition

△ Grand Priz of the 5th Seoul Traditional Arts Competition, awarded by the President

운파 박경랑 영문소개 : http://korakworld.tistory.com/entry/test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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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7
박경랑의 교방춤 인터뷰와 동영상

촬영 : 천승요
원본 소장처 : 예술방송국 (http://www.arts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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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金昌後)

1887(고종 24)∼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固城五廣大〉의 예능보유자.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고성읍 동외동에서 살았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군찬에게서 〈고성오광대〉를 배웠고,
정화경·이윤화·이태준·김성범에게서 배워 원양반역을 잘하였다.
1964년 12월에 〈고성오광대〉 원양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후계자로 배갑문(裵甲文)·이윤수(李允洙)·최규칠(崔奎七)·조용배(趙容培)·최인순(崔仁淳)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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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영남춤 맥 잇는 춤사위… 전통과 퓨전의 어울림

  • 국제신문 2006-06-28 20:39
"춤을 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호박꽃 같은 춤을 추고 싶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춤을 추다가/ 춤으로 녹아 흐른 호박꽃 꿀을 따다가/

호박꽃 속에 갇히어 죽을지라도/ 슬픈 영혼을 품은 푸른 별로 남으리/

춤은 내 인생이다, 눈물이다/ 아니 그것은 내 사랑이다, 열정이다."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살풀이춤, 지전춤, 교방춤(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을 추고 있는 박경랑 씨.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 무대. 이하월백(梨下月白)보다 더 파르스름한 소복으로 살풀이춤을 추며 '호국영령'을 위무하고 있는 박경랑. 젊은 광대들이 저어대는 해금 가락은 애간장을 끊는 듯 구슬픈데, 휘어져 감기우고 돌아서 다시 뻗는 춤꾼의 소매 끝을 스치며 너풀너풀 허공을 가르는 수건자락은 길 잃은 영령을 인도하는 구름이 되고, 다리가 되고, 반야용선이 되었다.

시나위 가락이 빨라지면서 춤은 지전춤으로 바뀌고, 지전은 어느새 영령들의 노잣돈이 되었다. 흡사 전통춤에 맞춘 듯한 박경랑의 단아한 몸매에서 솟구쳐 나오는 춤사위는 폭풍이요, 뇌운이었다. 무심한 영령인들 어찌 감응치 않으랴.

박경랑(45) 씨는 영남춤의 맥을 정통으로 잇고 있는 전통 춤꾼이다. 네 살 때부터 춤을 익혔다니 무력(舞歷)으로야 완숙기에 접어든 중견이지만, 마음이 열려있는 신세대 춤꾼이다.

이날 무대는 '박경랑과 광대들의 놀음'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 그가 젊은 혈기로 시도하는 섞음(퓨전)무대. 전통 국악기에 신시사이저, 피아노까지 동원되었다. 그리고 고성오광대 전수생들로 이루어진 'the광대'의 사물놀이와 오광대춤 일부가 나왔다. 특히 박경랑의 춤곡 연주를 맡은 '젓광대 공감'은 20대의 신세대 국악도들로, 그들의 발랄함은 구차한 형식을 타파하는 발칙함으로 통한다.

이날 공연은 강당을 가득 채운 관중과 광대들이 함께 어우러진 일종의 마당놀이였다. 관중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고 무대 앞에서는 물론 무대 위에까지 올라가 연희자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장면. 이날 공연을 기획한 (사)부산문화 박흥주 대표는 "문화대중이 박경랑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단언했다.

이들 광대의 재치와 익살은 뒤풀이까지 이어졌다. 박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는 그들의 여흥을 깨지 않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결례를 무릅쓰고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박 씨와 마주할 수 있었다. 장소는 대연동 뒤풀이 집에서 옮겨 앉은 주례동 기사식당. 박 씨의 무용학원 이웃으로,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다.

<ㅏ-2>"교방춤에 대한 내력이 궁금하네요."

"예전 기생들이 추었던 춤이죠. 우리 전통춤의 원전이라고 할까요. 이를 기초로 해서 모든 춤이 생성되고 파생된다고 보면 됩니다."

"교방춤을 잘 춰야 다른 춤도 잘 출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기생들에 대한 교육을 맡은 곳이 교방청이었고, 영남교방청은 기생으로 명성이 높은 진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방문화가 가장 오래된 곳은 부산(동래)이랍니다. 그 때는 기생들이 춤선생에 대한 오디션을 봤다네요. 춤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 춤을 배운 거죠."

"살풀이춤은 어떤가요. 그 춤을 보노라면 공연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던데요."

"일종의 무속춤이지요. 지금은 교방춤으로 편입됐습니다만. 살풀이춤은 가장 섹시한 춤입니다. 소복을 통해 비칠 듯 말 듯 한 여인의 속살은 처절한 한(恨)의 몸짓인데, 그게 섹시미를 더하는 거지요."

"그래서 더욱 슬픈가 봐요. 아까 지전춤은 여느 지전과 다른 것 같던데요?"

"채 양쪽에 지전이 달려 있는 거요? 보통은 한 쪽에만 있는데, 그만큼 힘이 듭니다. 기교도 더 필요하고요."

"그래선지 매우 장엄하고 다이내믹하더군요. 그 춤사위에 해원(解寃) 못할 원혼(寃魂)은 없겠지요?"

"그럴 것으로 믿습니다. 제 춤에 영령들께서 평안을 찾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교방춤에서는 선비가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선비가 멀리 떠나면서 정인(情人)의 증표로 속치마에다 서화를 남기는 모습이죠. 옛 조상들의 운치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남원에서 한양으로 떠나던 이몽룡이 춘향이에게, 서화담이 동짓달 기나긴 밤 잠 못 드는 황진이에게도 그리 했을까. 이 날 공연에서는 도예가 서종훈(경기도 여주 민예총지부장) 선생이 박경랑의 치마폭에 난초를 치는 일을 대신 했다.

<ㅏ-3>"춤을 추실 땐 무아지경에 빠지겠지요?"

"관객을 의식하면 춤이 되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춤을 춘다는 사실 그 자체마저 잊어야 합니다. 제가 춤의 진가를 알게 된 건 한 5년쯤 됐나 싶어요. 오직 춤을 출 뿐, 일체의 상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일각에서는 전통의 파괴라거나 격이 낮다는 비판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만.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며, 그 정통성을 지키고 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중을 상대로 한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은 고수하되, 연희형식은 과감히 변화를 해보자 하는 차원에서 이번 섞음공연이 기획됐습니다. 다행히 관객들의 호응이 좋아 성공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물론 시류에 영합하는 지나친 상업주의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시대흐름에 맞춰가는 것이 문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로 생음악으로 안무를 하시는데요. 더러는 요란한 음악에 춤이 묻히는 경향도 있지 않는지요.

"그렇다고 음악 없이 할 수는 없지요. 물론 음악에 춤이 빨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춤이 음악을 이끌어야지요. 지난 93년 처음으로 했던 개인 발표회를 이생강 선생의 대금 독주로 했어요. 그 때 모두가 놀랐지요. 젊은 혈기랄까, 오기랄까 뭐 그런 거였죠."

"공연하랴, 후학 지도하랴 많이 힘드시리라 봅니다. 연습은 어떻게 하시나요."

"1997년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때까진 하루 2시간도 채 잠을 자지 않았어요. 먹고 살아야 하기에 낮에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제대로 춤을 배우기 위해 여러 스승님을 찾아다녔죠. 게다가 서울에도 전수소를 차려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발을 무척이나 혹사시켰죠."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외간남자에게 외씨버선을 벗어 발을 보여줬다. 발가락 마디마디는 말할 것도 없고 발가락 사이에까지 못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발등과 발목은 버선목에 주리를 당해 푸르스름한 멍과 함께 굳은살로 변해 있었다. 처절함 바로 그것, 최고 고수가 되는 과정의 고난이 얼마만큼 치열한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박 씨는 차를 몰고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린단다. 운전대를 잡고도 음악을 들으며 어깻짓을 하는 등 잠시도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밤중에 차를 몰고 가다가 여명을 느끼면서, 해돋이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감동과 감정을 춤에 끌어들이려 애쓴단다.

몸을 던져 완성해 가는 수도자와 같은 노력이 오늘날 '박경랑에 대한 주목'을 낳게 한 원동력인가 싶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그의 앞에서 감히 졸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편집위원 songsun@kookje.co.kr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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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최고무(最高舞)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쇠잔한 육체에서 자꾸만 춤이 터져나오니, 병상에 누운 몸은 어쩌란 말인가. 병원과 집을 몇 달 걸러 오가며 몸을 추스르지만 무대와는 점점 멀어지는데, 입에선 소리가 터지고 두 팔과 가슴은 소리에 맞춰 벌써 가락을 타고 있지 않은가.

# 70년을 해도 족함이 없는 전통춤

 
춘당(春堂) 김수악(81)을 몇 번의 전화 약속 끝에 만났다. 진주 엠마우스 요양병원에서 만난 그는 서울에서 내려간 제자들의 문안을 받고 있었다. 춤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로 부족했던지 원미자씨(김수악 전통춤 보존회장)에게 손수건을 달라 했다. 꽃무늬 손수건은 제자 김경란씨의 손에 들려졌고 침상의 스승은 구부러진 등을 추슬렀다. 긴장하는 제자. 스승은 컵라면용 나무 젓가락을 쫙 갈라 양손에 쥐고 침대에 놓인 식탁을 두드리며 슬그머니 장단을 잇는다. 즉흥 레슨이다. “띠리리 릿띠~ 허이 두드드 둥둥” 앞 소리는 젓대고 뒷소리는 가야금 선율. 스승은 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구음으로 엄격한 장단을 더했다. 어쩌랴. 제자, 쑥스러워하면서 병실에 한바탕 굿거리춤을 풀어놓는다. 이제 스승의 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스승의 한 마디 구음, 한 자락 춤사위가 나올 때마다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만 더하다.

“선생님께 배우기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다듬어 정형화하시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이 터져나오는 대로 즉흥춤을 추시니까 저희는 매번 달라지는 춤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물론 다양한 춤사위를 배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김수악 앞에만 갔다오면 춤이 달라진다’는 말이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니다.

아들 김인권씨(54·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장)의 귀띔. “10년 전 오른쪽 골반을 다치셨는데, 지난해 10월에는 춤추며 앉는 순간 왼쪽 골반을 다쳐 5개월 동안 입원하셨죠. 이번에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셨습니다. 치아도 상태가 좋지 않아 틀니를 하셔야 해요.” 무역업을 하던 아들은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사업을 접고 ‘춘당 김수악 전통춤보존회’ 실무위원장을 겸하는 등 남은 인생을 전통춤에 걸었다. 다시 아들의 증언. “어머님께선 예술가의 자존심을 제일로 치십니다. 얼마 전에는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중계방송차가 몇 시간 동안 집 앞에서 대기 중인 데도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대문을 열지 않으셨어요. 결국 중계방송차는 돌아갔고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모두 쏟아야 하는데, 갑자기 춤을 출 순 없다는 주장이셨죠. 무대에서 10분 동안 춤추기 위해 5시간 동안 단장하고 무대에 서시는 분이니까요.”

기자가 병상의 기수악을 촬영하려 하자 춘당(春堂) 김수악은 ‘사진 찍지마’ ‘안돼’ 하면서도 연방 머리를 매만진다. ‘5시간 단장’의 습관이 무섭다.

# 강산 제일의 춤, 강산 제일의 구음-가무악 일체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수악은 함양군 안의읍에서 김종옥과 유몽길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린 순녀를 본 후 명이 짧다며 ‘목숨 수, 뫼뿌리 악’으로 개명해주었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순녀의 아버지는 만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다. 대를 이어야 할 큰 아들. 한량인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떼어받고 본가를 나왔다. 집에선 늘 유성기판을 틀어놓고 거문고와 피리도 수준급이었다. 집에 찾아오는 풍류객들의 분위기가 어린 순녀의 몸에도 익숙했다. 어느날 손님이 안겨준 양금은 여섯살 순녀가 김수악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순녀는 처음 만져보는 양금을 3개월도 안돼 익혔다. 남들은 7개월 걸려야 타는 악기였다.

일곱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순녀는 ‘여란(麗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모두 ‘애란’이라 불렀다. 진주의 애란은 영남 제일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가야금병창, 장구, 구음, 검무, 굿거리춤 등 다재다능했다. 애란이 끼지 않으면 예능이 될 수 없었다.

“젊을 때 내 얼굴 보기 힘들었어요. 중요한 자리에는 인력거가 날 데리러 왔어요. 내 창과 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당시 ‘검무’는 4명이 추었는데 스승 최완자, 박국엽, 홍채자, 이현이 추다 그후 ‘사 검무’는 김수악을 비롯해 최예분, 이윤례, 김채옥이 함께 했다.

노랫말도 구성지게 만들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어이하리 어이할꺼나 부모님께 불량하여~”로 시작하는 ‘논개의 얼’을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8년 연상인 김영조(진주 청과조합장 역임)와 결혼 후에는 춤을 접었는데 조용한 세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냥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6·25 전쟁 후 아비를 잃고 60년대 초반 남편을 잃은 후 시골 판에 묻혀 살던 그에게 나라에서 인간문화재가 될 것을 권유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권번에서 배웠던 ‘검무’를 복원·계승하라고 했다. 과거를 알리기 싫었지만 전통춤 계승이라는 정부측 대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67년 당시 월 3만원씩 줄 테니 ‘검무’로 문화재지정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때는 문화재고 뭐고 귀찮기만 해서 싫다고 했죠.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지만, 나는 손에 칼을 비롯, 뭘 들고 추는 게 재미없어서 그리 반갑지 않더라고요.”

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26세와 33세에 남매를 낳았지만 춤이 더 귀했다. 아들도 개천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춤내림을 했는데, 어미가 아닌 이모에게 춤을 배울 만큼 어미는 바빴다. 다재다능한 게 죄였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춤은 경상도, 소리는 전라도라 했지만, 본향의 최고 소리꾼들도 김수악의 구음을 제일로 쳤다.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김수악이 유성준의 동편제 판소리로 인간문화재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개천예술제에서 매년 논개를 기리기 위해 공연되는 ‘논개 살풀이춤’도 김수악의 작품이다. 왜장을 상징하는 빨간 수건과 민중을 의미하는 노란 수건을 양손에 들고 추는 논개 살풀이춤은 기존 살푸리춤과 다른 춤사위를 자랑한다. 논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에 춤의 원형대로 계승되는 한성준의 살풀이춤과 달리 김수악의 창작 춤사위가 중심을 이룬다.

“예술은 마음, 정신, 인내, 공력, 한(恨), 멋, 혼이 어우러져야 해요. 춤도 내가 추는 게 아니고 몸이 추도록 해야 합니다. 맺고 푸는 호흡의 예술이 춤이니까요.” 명무는 춤이야기에 빠져 아픈 줄도 모른다. 침대에 앉은 채 두 팔을 올려 연꽃 사위를 직접 시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다. “제 의상의 대부분이 연분홍색이에요. 분홍색을 좋아하면 마음 약한 사람이라는데….” 그러나 약하고 곱기만 한 건 아니다. 춤과 소리에 엄격하지 않았다면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손수건을 들릴까. 스승은 누누이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스승의 마음이 깊고도 알뜰하다.

▲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중 둘째로 출생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
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
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
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
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
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
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
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
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유인화 선임기자|진주에서 rhew@kyunghyang.com〉

-‘제자들과 함께’ 병실에서-

# 풍경1

병실에서 아들 김인권씨의 보살핌을 받는 김수악 명인.

병실에서의 화제는 얼마 전 김수악이 승소한 소송건이었다. 김수악 측과 김수악의 제자 정모씨가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맞선 재판이었다. 정모씨가 김수악에게 알리지 않고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조직 후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발행한 사실이 드러난 것. 김수악 측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김수악 제자들로 구성된 김수악 전통춤 보존회는 정씨의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무효화하고 정씨가 이수자 자격증을 주지 못하도록 소송을 냈다. 정상적으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김수악이 인정하는 제자에게 김수악의 도장이 찍힌 이수자 자격증을 주어야 한다. 김수악에게 굿거리춤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김수악의 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받는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 그런데 정씨는 김수악의 허락없이 김수악 도장을 위조해 7명의 이수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 풍경2
김수악 병상 옆에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스승 김수악과 정답게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강금실 전 장관은 부산지법 판사 시절부터 20년 넘게 김수악의 제자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김수악에게 굿거리춤과 살풀이춤을 배웠다. 김수악은 “춤을 계속 했으면 성격이 차분하고 성실해 대단한 춤꾼이 됐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오죽하면 스승이 ‘검사 하지 말고 나하고 춤추자’고 권했을까. 강전장관은 요즘도 안부 전화를 자주 한다고 한다. 2005년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 명무전 ‘전무후무’ 공연 때는 법무장관이던 강전장관이 스승이 춤추는 토월극장에 오느냐 못 오느냐가 화제였다.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법무부 측에선 ‘바쁘신 분이니 알아서 하시도록 두라’는 전언을 공연 주최 측에 했다고. 그러나 그는 스승의 분장실을 찾았고 스승은 화답이라도 하듯 노약한 몸을 잊은 듯 살푸리춤에 소고춤을 엮은 ‘교방굿거리춤’으로 무대를 들었다 놓았다.

# 풍경 3
서울 제자들이 전한 내용. 역시 2005년 여름이었다. 노스승은 운신할 수 없을 만큼 기진한 상태인 데도 매년 진주에서 열리는 김수악 전통춤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한 워크숍 기간 중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진주 남강 앞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자 강미선씨(한국체육대 무용과 교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피날레에서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른 춘당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꽹과리를 잡자마자 거장의 예혼을 객석에 뿌렸다. 등은 구부러지고 기력이 없는 데도 무대 오른편에 앉은 사물놀이팀 악사를 어르며 맞대화를 펼쳐나갔다. 춘당은 전했다. “좋은 선생에게 올바로 배운 제자들”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피날레를 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 2007년 6월 21일 기사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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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무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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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년도 대회명 지역
                       2012          제10회 전국국악대전(서울) 서울
                       2012          제22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38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전북
                       2012          제1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경남
                       2010          제17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2010          제11회 국창권삼득선생추모전국국악대제전 전북
                       2009          제16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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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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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 프로필

           사진  
         출생년도  1887년 (고종 24)∼1965년 (경남 고성)
       전공 / 분야  한국무용, 고성오광대
       무형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1964년)

       활동 경력  후계자로 배갑문(裵甲文)‧이윤수(李允洙)‧최규칠(崔奎七)‧조용배(趙容培)‧    최인순(崔仁淳) 등이 있다
         특기 사항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군찬에게서 〈고성오광대〉를 배웠고, 정화경‧
 
이윤화‧이태준‧김성범에게서 배워 원양반역을 잘하였다.

         홈페이지  http://gyobang.tistory.com/entry/박경랑의-외증조부-故김창후옹
           기타  한국무용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다.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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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에 도리깨도 춤을 춘다"

 

우리의 전통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무악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이다.

그리고 이 가무악의 어우러짐은 오늘날의 공연예술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가무악 일체의 최고의 예인을 꼽으려하면 단연 첫 손가락이진주의 김수악 선생일 것이다.

 

김수악 선생은 열 살에 진주 권번에 입적하여 판소리는 유성준, 정정렬, 이선유, 김준섭 등의

쟁쟁한 명인들게게 다섯마당을 떼었고 기악은 김종기, 강태홍, 이순근, 박상근 등으로부터

가야금 아쟁을 배웠고, 춤은 김옥민을 통하여 발걸음을 뗀 후, 한성준에게 승무를, 김해의

김녹주에게 소고무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구한말 관기출신인 최완자에게 굿거리춤, 입춤,검무를 배웠으니

아마 고금의 국악사를 통해 김수악 선생처럼 완벽한 스승을 모신 이도 없을 것이다.

선생은 진주 검무로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그리고 교방굿거리춤으로 경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춤이 두 종이나 지정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나 혹자들은 선생의 춤이 진주검무

보다 먼저 교방굿거리춤으로 중요문화재가 되었다면 보다 나았을 거라며 아쉬워

한다. 같은 무형문화재라도 군무인 진주검무나 승전무 보다는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 독무가 선호되는 것이다. 또 독무로 교방굿거리춤이 지정되었을지라도

실속이 적은 지방문화재라는 점 때문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다한들 어디 구음만 할 것인가. 구음이란 악기를 가르칠 때 악보

격으로 그 소리를 입으로 내는 것인데 구음 자체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곡이 된다.

이 구음이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춤판인데, 꾼들은 모두 김수악 선생을

제일로 친다. 원래는 전두영이라는 전라도 사람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이제는

천상 선생의 소리가 되었다.

 

피리나 대금 없이 자신의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갖은

곡조를 얹으면, 그저 제일이라 했었고 그 소리에 놀던 춤꾼들은 그 소리가 오죽이

좋았던지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에 도리깨도 춤을 춘다" 고 했었다.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시고 2009년 돌아가셨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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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다른 영역의 예술장르와 만나는 것이 창작작업에 큰 도움이 된다.조각가 김학제(오른쪽)와 한국춤꾼 박경랑의 만남도 장르를 넘나들며 한국적 미의식을 다시 생각하고 창작작업으로 연결시키는 자리가 됐다.
재즈에 맞춰 살풀이를 춰봐 

지난 99년 '사형제 폐지를 위한 삶 권력 죽음전'에서 한국춤꾼 박경랑(41·박경랑 영남춤전수소 대표)은 망자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를 추고 조각가 김학제(45·동아대 교수)는 생명의 저울을 그린 조각작품을 내놓았다. 그렇게 처음 만났던 두 사람이 경성대 부근 라이브재즈클럽 '몽크'에서 다시 만났다. 부산재즈클럽의 회원인 김교수가 이날 '몽크'의 라이브공연 기획을 맡았다며 자신의 '아지트'로 초대한 것이다. 

조각가와 한국춤꾼의 만남에 재즈가 다리를 놓아 그럭저럭 재미있는 그림이 됐다. 재즈의 선율이 몸속으로 휘감겨 들어온다는 느낌이 들자 기자가 농담 섞어 말을 던졌다. '재즈음악에 맞춰 살풀이를 출 수 있을까요?' 

―박경랑 / 이런 음악은 우리 자진모리 장단과 비슷하네요(다소 빠른 템포의 재즈 선율을 듣고는 앉은 자리에서 바로 춤이 나왔다. 농담처럼 말을 던졌는데 너무 진지했다. 기회가 되면 재즈음악에 맞춰 우리춤을 춰보고 싶다는데까지 진도가 나갔다). 

- 김학제 / 재즈는 굉장히 포괄적인 음악이죠. 각 지역의 민족음악을 포괄하는 재즈의 특성에 비춰보면 한국의 선율도 예외는 아니겠죠(재즈 애호가답게 한 수 거들었다). 

―박 / 한국창작춤을 서양춤에 맞추는 것보다 서양음악에 전통춤사위를 맞춰가는 것이 더 올바른 창작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창작춤은 방향이 없고 춤의 기틀도 잃어간다는 이야기가 많잖아요(사실 박경랑은 억척스럽게도 영남춤을 고집한다는 데서 중심이 있다. 혹자는 박경랑의 춤을 대나무가 연상되는 수려한 몸매에서 아름다운 난초의 유연한 곡선을 그려낸다해서 대와 난초에 비유하기도 한다). 

- 김 / 현대미술도 전통과 단절돼 있어요. 초상화나 풍속화 등 회화쪽에서는 여러 형태로 한국의 전통이 남아있지만 입체미술 즉 조각에서 한국적인 조형의식을 찾기란 쉽지 않아요. 기껏해야 불상 장승 토우 같은 부분이지만 한계가 있어요. 일제시대 이후 현대미술을 갑자기 수용하다보니 우리 것이 계승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구의 형식이 들어와 혼란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죠. 그래도 전통춤은 나은 편 아닌가요. 

―박 / 전통춤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재야에 묻혀 있는 분들을 찾아뵙고 고증을 해내야 하는데 쉽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 많은 토속춤들이 사라지고 있어요(그러면서 갑자기 기생문화 이야기를 꺼냈다). 왜색문화 때문에 잘못 인식돼 왔지만 그들은 정말 풍류를 알던 사람이에요. 소리면 소리, 글씨면 글씨, 춤이면 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죠. 저는 춤 하나밖에 모르지만…(교방문화가 우리춤의 원형을 보존한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녀의 이야기가 이해된다. 실제 그녀는 공연때마다 화류놀이하는 장면을 무대화시켜 술과 시,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풍류마당을 재연하고 있다). 

―박 / 우리춤의 정신을 잃은 대신 지나치게 사변적으로 무용이 흐르고 있다는 것도 문제죠. 

- 김 / 현대미술도 점차 개념화돼가고 있어요. 사고를 위한 사고를 요하는 것처럼…. 깊이와 대중성 두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진 않지만 그래도 농담 섞어 제 작품의 화두는 '쉽고 깊게'라고 말하곤 해요. 한국인의 조형의식은 곡선의 미학이자 부드러움의 미학이죠. 한국인의 정서를 미술조형적으로 재해석하고 정립할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해요. 

―박 / 제가 김 선생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도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선생님의 작품세계 때문이었어요. 

- 김 / 99년 개인전 때 움직이는 작품을 내놓은 적이 있어요. 알몸을 한 원추꼴의 인간상이 공중에서 마치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을 준 작품인데 정적인데서 동적인 부분을 끌어들인 것이죠. 만약 박 선생과 같이 작업할 기회가 오면 박 선생의 춤사위 움직임에 따라 내 작품도 움직이는, 시간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박 / 제 신체 움직임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선생님이 만든 작품을 제가 그대로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어요. 춤사위를 그린 조각작품 전시회에선 전통음악을 깔고 선생님 작품에 춤을 출 때는 재즈음악을 배경으로 깔고요.그런 과정에서 새로운 창작본들도 나올 수 있겠지요 (재즈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기자가 끼어들 틈도 없이 전통을 거쳐 새로운 창작작업으로 진전되고 있는 중에 이날의 라이브 공연도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상헌 기자 ttong@pusanilbo.com 



경북일보 2001.8.13.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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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명 : 우리민속한마당 송진수의 "춤세계"

작품명 : 동래 한량춤

공연일 : 2002.5.11

출연 : 김진홍

행사장소 : 국립민속박물관 공연장

원본소장처 : 예술방송국.com(http://artsmuseum.or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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