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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춤'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17.03.13 운파 박경랑류 영남춤 연수회 경남 진해 사진
  2. 2015.04.30 전수관 위치
  3. 2014.09.26 '백재화'의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 고운 빛과 소리의 향기
  4. 2014.01.17 박경랑선생 국립국악원 2014 수업안내
  5. 2014.01.10 보존회 고양지부장 김정미-박경랑류 영남교방춤
  6. 2013.12.06 2011 종횡무진 박경랑류 영남 교방춤(백재화 박선영 조미나 성예진)
  7. 2013.10.20 영남교방춤 대가 뉴저지온다(미주 중앙일보)
  8. 2013.08.20 2011박경랑의춤 제주 同行사진모음 (법능스님 찬불가 나무아미타불)
  9. 2013.08.12 [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10. 2013.01.09 KBS국악한마당출연영상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11. 2012.12.24 영남교방춤
  12. 2012.12.20 雲破 박경랑 영남교방청춤 전수관 수업안내
  13. 2012.10.24 비워서 채우는 길
  14. 2012.10.22 박경랑류 영남교방춤 (KBS TV 국악한마당 방영분)
  15. 2012.10.11 40년 춤사위 춤을 의식 안 하니 진짜 춤이 나오더라!
  16. 2012.08.21 영남교방청춤의 복식
  17. 2012.08.01 교방의 변천사
  18. 2012.07.18 영남 교방춤 등 전통 춤을 현대시각으로( 2010년 수성아트피아 어버이날‘조율 TUNE’공연)
  19. 2012.07.10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20. 2012.06.17 2000년 11월 20일 박경랑류 영남 교방춤
  21. 2012.05.09 2012 박경랑의 춤 ‘인연’…현대의 관점에서 본 전통의 재해석 그리고 새로운 탄생
  22. 2012.04.24 미국에서 활약하는 영남교방청춤의 이현주
  23. 2012.04.05 2012 박경랑의 춤 (서울)온고지신
  24. 2012.04.03 전통춤과 현대춤의 교감(조율)
  25. 2012.03.22 교방춤사진

진해 청소년전당 영남 교방춤 2017년 3회차 연수
2017.3월12일 단체사진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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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6호선 효창공원역 4번출구에서 50M - 효창파크 푸르지오아파트 상가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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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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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진쇠춤-매주 목요일 09:30 -11:00(맺음과정)
 
모집기간 :
2014. 1. 6(월) ~ 1. 29(수)
교육기간 :
2014. 2. 3(월) ~ 12. 7(일) (1년 / 주1회 40회 수업) /
방학기간 : 7. 21(월) ~ 8. 17(일)
교육시간 :
주 1회 90분 진행
교육내용 :
실기 및 이론수업 (고급과정)
수강자격 :
만 18세 이상 일반인으로 2013년 돋움과정을
수료한 자, 이에 상응한 실력자
수 강 료 :
40만원
교육과목 :
영남진쇠춤
모집인원 :
각반 15-30명 / 강습실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신청방법 :
방문접수 및 인터넷접수
방문접수처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사무국
 
 
 
 
 영남교방춤 : 매주 목요일 11:10 -12:40(디딤과정)
 
모집기간 :
2014. 1. 6(월) ~ 1. 29(수)
교육기간 :
2014. 2. 3(월) ~ 12. 7(일) (1년 / 주1회 40회 수업) /
방학기간 : 7. 21(월) ~ 8. 17(일)
교육시간 :
주 1회 90분 진행
교육내용 :
실기 및 이론수업 (초급과정)
수강자격 :
만 18세 이상 일반인으로 처음 입문하는 자
수 강 료 :
40만원
교육과목 :
영남교방춤
모집인원 :
각반 15-30명 / 강습실 사정에 따라 변동될 수 있습니다.
신청방법 :
방문접수 및 인터넷접수
방문접수처 :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사무국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 http://www.ktpaf.or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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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국립 국악원 우면당

백재화 박선영 조미나 성예진 영남교방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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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춤 대가 뉴저지 온다

 [뉴욕 중앙일보]



한국무용가 박경랑씨 공연

26일 버겐아카데미 대강당
발행: 10/01/13 미주판 9면   기사입력: 10/01/13 06:21
영남교방청춤의 대가인 한국무용가 박경랑(사진)씨가 뉴저지를 찾아 공연을 펼친다.

한국 무용가로는 드물게 팬들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박씨는 오는 26일 오후 7시 해캔섹의 버겐아카데미 대강당(200 해켄색애브뉴)에서 열리는 KCC(한인동포회관) 주최 '제8회 한국전통무용의 밤' 행사에 초청돼 한인 관객들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이번 행사는 한글과 한국의 역사 등을 전통무용과 신무용 뮤지컬.현대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됐다. 박씨는 그가 이끄는 영남춤보존회와 함께 '영남교방청춤'과 '살풀이' 공연 등을 선보인다.

이번 공연을 총괄하는 이현주 KCC 문화디렉터는 "한인 관객에게 한국 전통무용의 진수를 보여주기 위해 박씨가 초청에 흔쾌히 응했다"고 밝혔다.

이외에 이현주.나윤주.김영은씨 등 3인의 무용가와 KCC무용단은 한국 근현대사를 무용으로 재해석하는 한국 신무용 '장구춤'을 펼친다. 또 뉴욕 세종학당 뮤지컬단과 KCC뮤지컬단 등이 협연하는 '두근두근한글' '코리안판타지' 등 뮤지컬 공연도 볼거리다.

201-541-1200(교환 102).

서한서 기자

hseo@koreadaily.com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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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박경랑의 춤 동행(同行)
2011 05 17 제주특별자치도 문화회관
영상 :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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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영남춤 맥 잇는 춤사위… 전통과 퓨전의 어울림

  • 국제신문 2006-06-28 20:39
"춤을 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호박꽃 같은 춤을 추고 싶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춤을 추다가/ 춤으로 녹아 흐른 호박꽃 꿀을 따다가/

호박꽃 속에 갇히어 죽을지라도/ 슬픈 영혼을 품은 푸른 별로 남으리/

춤은 내 인생이다, 눈물이다/ 아니 그것은 내 사랑이다, 열정이다."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살풀이춤, 지전춤, 교방춤(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을 추고 있는 박경랑 씨.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 무대. 이하월백(梨下月白)보다 더 파르스름한 소복으로 살풀이춤을 추며 '호국영령'을 위무하고 있는 박경랑. 젊은 광대들이 저어대는 해금 가락은 애간장을 끊는 듯 구슬픈데, 휘어져 감기우고 돌아서 다시 뻗는 춤꾼의 소매 끝을 스치며 너풀너풀 허공을 가르는 수건자락은 길 잃은 영령을 인도하는 구름이 되고, 다리가 되고, 반야용선이 되었다.

시나위 가락이 빨라지면서 춤은 지전춤으로 바뀌고, 지전은 어느새 영령들의 노잣돈이 되었다. 흡사 전통춤에 맞춘 듯한 박경랑의 단아한 몸매에서 솟구쳐 나오는 춤사위는 폭풍이요, 뇌운이었다. 무심한 영령인들 어찌 감응치 않으랴.

박경랑(45) 씨는 영남춤의 맥을 정통으로 잇고 있는 전통 춤꾼이다. 네 살 때부터 춤을 익혔다니 무력(舞歷)으로야 완숙기에 접어든 중견이지만, 마음이 열려있는 신세대 춤꾼이다.

이날 무대는 '박경랑과 광대들의 놀음'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 그가 젊은 혈기로 시도하는 섞음(퓨전)무대. 전통 국악기에 신시사이저, 피아노까지 동원되었다. 그리고 고성오광대 전수생들로 이루어진 'the광대'의 사물놀이와 오광대춤 일부가 나왔다. 특히 박경랑의 춤곡 연주를 맡은 '젓광대 공감'은 20대의 신세대 국악도들로, 그들의 발랄함은 구차한 형식을 타파하는 발칙함으로 통한다.

이날 공연은 강당을 가득 채운 관중과 광대들이 함께 어우러진 일종의 마당놀이였다. 관중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고 무대 앞에서는 물론 무대 위에까지 올라가 연희자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장면. 이날 공연을 기획한 (사)부산문화 박흥주 대표는 "문화대중이 박경랑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단언했다.

이들 광대의 재치와 익살은 뒤풀이까지 이어졌다. 박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는 그들의 여흥을 깨지 않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결례를 무릅쓰고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박 씨와 마주할 수 있었다. 장소는 대연동 뒤풀이 집에서 옮겨 앉은 주례동 기사식당. 박 씨의 무용학원 이웃으로,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다.

<ㅏ-2>"교방춤에 대한 내력이 궁금하네요."

"예전 기생들이 추었던 춤이죠. 우리 전통춤의 원전이라고 할까요. 이를 기초로 해서 모든 춤이 생성되고 파생된다고 보면 됩니다."

"교방춤을 잘 춰야 다른 춤도 잘 출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기생들에 대한 교육을 맡은 곳이 교방청이었고, 영남교방청은 기생으로 명성이 높은 진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방문화가 가장 오래된 곳은 부산(동래)이랍니다. 그 때는 기생들이 춤선생에 대한 오디션을 봤다네요. 춤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 춤을 배운 거죠."

"살풀이춤은 어떤가요. 그 춤을 보노라면 공연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던데요."

"일종의 무속춤이지요. 지금은 교방춤으로 편입됐습니다만. 살풀이춤은 가장 섹시한 춤입니다. 소복을 통해 비칠 듯 말 듯 한 여인의 속살은 처절한 한(恨)의 몸짓인데, 그게 섹시미를 더하는 거지요."

"그래서 더욱 슬픈가 봐요. 아까 지전춤은 여느 지전과 다른 것 같던데요?"

"채 양쪽에 지전이 달려 있는 거요? 보통은 한 쪽에만 있는데, 그만큼 힘이 듭니다. 기교도 더 필요하고요."

"그래선지 매우 장엄하고 다이내믹하더군요. 그 춤사위에 해원(解寃) 못할 원혼(寃魂)은 없겠지요?"

"그럴 것으로 믿습니다. 제 춤에 영령들께서 평안을 찾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교방춤에서는 선비가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선비가 멀리 떠나면서 정인(情人)의 증표로 속치마에다 서화를 남기는 모습이죠. 옛 조상들의 운치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남원에서 한양으로 떠나던 이몽룡이 춘향이에게, 서화담이 동짓달 기나긴 밤 잠 못 드는 황진이에게도 그리 했을까. 이 날 공연에서는 도예가 서종훈(경기도 여주 민예총지부장) 선생이 박경랑의 치마폭에 난초를 치는 일을 대신 했다.

<ㅏ-3>"춤을 추실 땐 무아지경에 빠지겠지요?"

"관객을 의식하면 춤이 되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춤을 춘다는 사실 그 자체마저 잊어야 합니다. 제가 춤의 진가를 알게 된 건 한 5년쯤 됐나 싶어요. 오직 춤을 출 뿐, 일체의 상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일각에서는 전통의 파괴라거나 격이 낮다는 비판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만.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며, 그 정통성을 지키고 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중을 상대로 한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은 고수하되, 연희형식은 과감히 변화를 해보자 하는 차원에서 이번 섞음공연이 기획됐습니다. 다행히 관객들의 호응이 좋아 성공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물론 시류에 영합하는 지나친 상업주의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시대흐름에 맞춰가는 것이 문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로 생음악으로 안무를 하시는데요. 더러는 요란한 음악에 춤이 묻히는 경향도 있지 않는지요.

"그렇다고 음악 없이 할 수는 없지요. 물론 음악에 춤이 빨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춤이 음악을 이끌어야지요. 지난 93년 처음으로 했던 개인 발표회를 이생강 선생의 대금 독주로 했어요. 그 때 모두가 놀랐지요. 젊은 혈기랄까, 오기랄까 뭐 그런 거였죠."

"공연하랴, 후학 지도하랴 많이 힘드시리라 봅니다. 연습은 어떻게 하시나요."

"1997년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때까진 하루 2시간도 채 잠을 자지 않았어요. 먹고 살아야 하기에 낮에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제대로 춤을 배우기 위해 여러 스승님을 찾아다녔죠. 게다가 서울에도 전수소를 차려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발을 무척이나 혹사시켰죠."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외간남자에게 외씨버선을 벗어 발을 보여줬다. 발가락 마디마디는 말할 것도 없고 발가락 사이에까지 못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발등과 발목은 버선목에 주리를 당해 푸르스름한 멍과 함께 굳은살로 변해 있었다. 처절함 바로 그것, 최고 고수가 되는 과정의 고난이 얼마만큼 치열한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박 씨는 차를 몰고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린단다. 운전대를 잡고도 음악을 들으며 어깻짓을 하는 등 잠시도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밤중에 차를 몰고 가다가 여명을 느끼면서, 해돋이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감동과 감정을 춤에 끌어들이려 애쓴단다.

몸을 던져 완성해 가는 수도자와 같은 노력이 오늘날 '박경랑에 대한 주목'을 낳게 한 원동력인가 싶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그의 앞에서 감히 졸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편집위원 songsun@kookje.co.kr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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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춤

사진/춤사진 2012. 12. 24. 16:08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을 좀더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연구하며 보존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전승할 수있는 기틀을 만들고자 이 블로거를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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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雲破 박경랑 영남교방청춤 전수관 수업안내
                      ☞  운파 박경랑선생 소개


박경랑 영남춤 전수관에서는 영남지역에서 이전부터 전승되어 오던 한국의 대표적인 각종춤들 뿐만 아니라 雲破 박경랑선생에 의하여 현대적으로 재구성 재해석 되어진 박경랑류 여러가지춤들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월/화/수는 전임 조교 박선영 선생이 주야간
시간별로 기초 및 초급과정의 여러춤을 지도하고 있으며, 운파 박경랑 선생님의 직강은 목/금/토/일 주야간에 있습니다.

수업내용은 초급과정후 다듬기와 개인및 그룹스터디등으로 구분 지도하고 있으며, 모든 수업은 필히 먼저 상담이 이루져야만 각 특성별로 맞춤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자세한 문의는 전임조교
박선영 선생께 문의하시면 안내 받으실 수도 있고 꼭 필요 하시면 박경랑 선생님과도 직접 상담이 가능합니다.

문의안내 : 전임조교 박선영 선생  ☎ 010-7102-0205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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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관수업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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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서 채우는 길

최 은 숙

 

1. 삶의 춤결

그는 수업시간마다 외친다. 발목 접고 깊이 눌러라. 무겁게 해라. 바닥에서 발을 떼지 마라. 눌러라. 계속 눌러라. 우리춤이 중력을 뿌리치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서양춤과 다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한없이 누르다간 바닥에 달라 붙다가 땅 밑으로 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근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의 춤 선은 참 예쁘고 고운데 실제로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호흡과 기교 심지어 얼굴 표정까지도 깊고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춤을 추면 저런 묵직한 팔 다리와 진중한 분위기가 나올까 연구하게 만든다.

그는 ‘멈춰, 서’게 한다. 화려한 움직임은 ‘멈춤’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세상에서 정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침묵이 없는 말은 소음이 되고 어둠이 없으면 밝음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듯이 쉼이 없다면 드러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위대한 멈춤이다. ‘딱 멈추’지를 못해 몸이 혼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중심을 잡아가는 것은 몸보다 정신 쪽이었다.

가식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 진정 자신의 무게로만 움직일 때 진국이 되는 춤사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을 녹이는 그의 화려한 발 디딤새는 단순한 겉멋이 아닌 진국을 향한 열정의 결과였다. 자신을 향한 진지한 시선으로 내면을 다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는 살인적인 연습시간이 있었기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동안 일 년에 두 번 씩 열리는 연수에 거의 참여했는데 하루는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숙소에서 그와 같은 방을 쓰면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갑자기 잠꼬대로 춤 장단을 치시는 것이 아닌가. 새벽 연수부터 시작해서 저녁 시간까지 꼬박 채우고 피곤한 몸으로 겨우 몇 시간 잠드는데 꿈에서도 장단을 치고 우리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던 거였다. 허리 펴고 명치 접고 겨드랑이 들어! 시선 옆으로! 쿵 기덕 쿵 따아악. 춤으로 가득 찬 치열한 삶이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손에 잡힐 듯이 작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몸은 단단하고 밀도있게 다져진 정갈한 멋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밤낮없이 하는 춤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2006년 여름 교방춤 연수 장소가 해운대였는데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던 홀이었다. 수평선에 배가 떠있는 그림 같은 장소를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잡으신 것 같았다. 그때 연수의 주제는 바다와 함께 춤을 추라는 것이었다. 파도가 밀려오면 움직이는 물결 따라 추라고 했다. 물결이 내 품으로 밀려들듯이 한 호흡으로 밀어 올리고 내려 앉아라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때 각인된 물결 이미지는 교방춤 속의 하나의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이미지를 주문한다. 춤 속에 각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한다. 내가 자연인양 먼 수평선의 아득함과 흐르는 구름을 마음에 담아내라고 했다.

교방춤의 춤사위는 조금 많은 기교가 필요하다. 처음에 복잡한 동작을 배우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켜야 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치가 아파야 했다. 동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으면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그는 동작을 이해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자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있자면 내 몸의 구조와 관절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자연스럽게 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가면 억지스럽지 않은 편안한 춤길이 나온다 한다. 그렇게 무르익어 편안해진 경지가 되면서 그의 춤사위는 독특하게 멋지다.

춤의 비밀을 조금씩 발견해 가는 이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주었다. 그의 춤에 대한 자세는 나의 숨어 있던 열정을 깨우게 했고 이렇게 치열하게 몰입하고 다구쳐 보라고 자극했다.

 그는 엇박자를 즐긴다. 인생이란 대부분 엇나간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엇박이 들어가지 않은 안무가 별로 없다. 세상은 정박이 아니므로 엇박의 묘미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 된다. 나와 님 사이에 사랑의 방향이 다르고 시작점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그 엇나감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생이 괴롭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 엇나감만큼 우리는 방황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또 성숙한다. 너와 내가 말이 섞이는 데는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장단을 돌아 나온 끝이다. 내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경지는 수 년이 걸리는 긴 가락을 다 알고 난 뒤다. 하지만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맞추지 못한 한 조각은 다른 데서 우리도 모르게 힘을 발휘하면서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그의 엇박은 너무 절묘하여 자꾸 보고 싶다. 엇박이 들어가는 순간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하다. 경계에 끄달렸던 마음들이 부질없어짐을 확인한다.

그런데 그는 자주 서럽다. 무엇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서러운 것일까. 한 시인은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의 설움이 전해져 온다. 언젠가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과 제자가 목이 메어 대화를 하지 못할 서러움이 삶의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을 너머 선 것을 바랐기 때문에 끝나지 않을 서러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적이다. 그건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불가능한 것을 항상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 어디쯤에서 서성이다 잠깐씩 그와 눈빛이 마주칠 때 나를 발견한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다 가슴에 안고 춤을 춘다. 그래서 그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수건은 날릴 때면 가슴이 복받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사랑했던 아버지와 남동생을 묻고 사랑하는 스승과 님과 떠난 제자까지 가슴에 안았으니 응어리가 너무 깊다. 아무리 풀고 풀어도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홀로 법당을 다닌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누군가 야속할 때는 절을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절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는 늪과 같다고 했으니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는 주말이면 법당에서 그 누구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천도하고 빌어준다. 더불어 참회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임을 몰랐던 죄.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죄. 돌봐주지 못한 죄. 감싸고 덮어주지 못한 죄. 죄스러운 마음은 북장단을 타고 영남승무 회색빛 장삼을 흔든다. 먹장삼에 빨간 가사를 입고 추는 그의 승무를 처음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다. 장삼을 던질 때 온 마음을 다하는 진정성이 무대를 꽉 채웠고 뿌린 장삼 끝으로 그려지는 유연한 포물선은 내 마음에도 이어졌다.

오열과 희열이 섞인 그의 북장단은 사람 마음을 찢어 놓는다. 북소리는 작아졌다 커졌다 하면서 인간사 희노애락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다시 숭고하게 울린다.

그는 다 준다. 자기가 가진 것을 언제나 아낌없이 내어 주기 때문에 가난하다. 다 주어라. 전수관 벽면에 그렇게 적어놓았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우니 마음에 욕심을 쌓지 말라고. 자신을 끝없이 비워내어 항상 새롭고자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춤사위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는 괴로워한다. 오늘의 창조적인 박경랑은 당신의 스승이 날마다 춤사위를 바꿔 다양한 동작으로 춤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도 그를 따라 하다 보면 그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공공연히 우리는 그를 철인이라 부른다. 무쇠팔 무쇠다리로 전국을 누비는 철의 여인이라고. 수많은 공연과 수업을 뚫고 자기 춤을 선보이는 신비주의자. 언제 울고 언제 사랑했을까. 거미처럼 긴 두 팔로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아무래도 길 위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다. 자분자분하던 말씨가 흥이 나면 인심좋은 경상도 여인이 된다. 주례학원 찬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더운 열기를 식히면서 제자와 같이 어울리는 소탈함이 있다. 밤 수업 뒤 팥빙수를 나누어 먹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를 즐겼던 편안한 사람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내 입에 새우를 까서 넣어줄 때 그 다정함에 당황하였던 기억이 난다. 제자들 연습하라고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말은 처음엔 시가 되고 편지가 되었다가 나중엔 춤이 된다. 일상의 말과 행동이 다음에 나올 춤의 집이 된다.

 

2. 다른 빛깔로

그와 처음 마주친 순간은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그는 자태가 매혹적이었고 말소리며 표정이 가냘프고 정다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떤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드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적지 만나보지 못했던 오묘한 감성이 주는 그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곧바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을 가르쳐 준 이정표가 되었다.

한동안 국어교사의 처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흔들렸고 저쪽 춤의 세계가 부러웠다. 학교를 마치면 모든 시간을 춤에 집중했고 너무 행복했다. 원래 우리 춤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는지 그의 기운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에 십 수 년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탈을 벗기 위해 탈을 쓴다’는 말에 나를 크게 돌아 본 적이 있다. 춤을 배우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안 되고 또 얼마나 굳어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던 때였다. 몸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주어진 신분과 역할에 갇혀 딱딱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지금까지 틀에 얽매인 줄도 몰랐고 자신을 바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나에게 균열이 생겼다. 벌어진 작은 틈새로 아름다운 물이 스며들면서 나는 다른 빛깔로 물들 수 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3. 숙련

 몸으로 하는 공부는 고달프다. 물론 공부 자체가 고달픈 일이고 세상의 모든 공부는 마지막에는 몸으로 승부를 본다. 몸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강점은 정직함이다. 신체에 새겨진 흔적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도 그대로 표출되어 버리는 투명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 잡아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일주일에 한 번 그의 기를 받으러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오고 갔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태풍이 몰아쳐도 어김없이 그를 찾았다. 새로운 내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운은 오고가는 고달픔을 덮을 뿐 아니라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새로운 춤을 익힐 때마다 나는 부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거칠게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내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운 작은 조각으로 섬세하게 나누어져 갔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얻어 가면 성공이다는 그의 말을 믿고 먼 길을 오가도 성급하지 않으려 애썼다. 죽을 때까지 나를 구원하는 거라 생각하고 욕심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춤을 배운 지 4년 정도 지나서부터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 느껴보라고 그는 의도적으로 무대에 서게 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배운 것의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생음악 앞에 어쩌다 서게 되면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살아 있는 음악 속에 춤가락을 살려 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춤이 무너졌다. 그가 판소리, 산조 등 음악을 많이 들으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수업 시간에 장구 장단으로 춤 앞에 서게 하는 깊은 뜻을 알았다.

순서를 빨리 익혀서 성급하게 한 판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춤은 거칠어지고 몸만 피곤했다.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춤을 추면 그 잘난 마음이 춤 속에 보인다는 걸 알았다. 추는 사람의 기질과 마음, 심지어 그의 세계관까지 다 드러나는 걸 알고 정말 마음으로 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내려 놓는 공부를 해야 했다.

기교를 익히는데 3년, 버리는데 30년.

어설픈 우리는 춤은 없고 몸짓만 있다. 우리가 기교를 익힐 때 그는 모든 기교를 버리고 간결해지고 승화되어 갔다. 하루 종일 제자와 춤추면서 자신의 춤을 갈무리해서 정화시켰다. 삶의 굴곡따라 고비고비 춤이 나왔다. 춤이 변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았다. 스승의 변화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공부가 있겠는가. 몸에서 익고 삭아서 나오는 춤. 인생을 묵혀서 깊게 배어 나오는 것이어서 진정 그는 안 보이인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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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ttleSil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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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춤사위 춤을 의식 안 하니 진짜 춤이 나오더라!

고성 오광대 초대 무형문화재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
말 배우기 전부터 춤 보고 자라 대학 때는 발레 전공


춤꾼 박경랑(50)씨의 춤사위를 처음 본 것은 2년 전 서울시 중구 필동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한 공연에서였다. 박씨는 영남지방 기생의 춤, 영남교방청(敎坊廳)춤을 췄다. 느린 장구 장단에 맞춰 상체가 미묘하게 흔들리다가도 장구의 장단이 점차 빨라지면 박씨의 발놀림도 장단을 뒤따랐다. 춤을 추는 박씨의 손끝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명이 묻어나왔다. 쉴 새 없이 달리던 장구 장단이 갑자기 멎자 박씨가 무대 한편으로 다가갔다.

무대의 왼편엔 도포를 입은 한 시인이 자신 앞에 놓인 화선지에 시를 쓰며 풍류를 읊고 있었다. 박씨는 허리에 둘러맸던 치맛자락을 넓게 펼쳐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시인 앞 화선지 위에 놓았다. 시인은 먹을 듬뿍 묻힌 붓을 들어 박씨의 파란색 비단 치맛자락 위에 시 한 줄을 적었다. 오래전 교방에서의 풍류도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긴 공연이었다. 공연을 본 한 관객은 “굉장히 여성적인 춤이었다”고 말했고, 한국을 관광 중이던 한 미국인은 “섹시한 무대였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박경랑 영남춤문화예술연구소’ 연습실에서 중견 춤꾼 박경랑씨를 만났다. 박씨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 무용 강의를 하고 서울에 올라온 직후였다. 체중이 50㎏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그는 국악인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날도 더운데 여기(연습실)에선 사진만 찍고 밖에 나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교방청춤이 우리 춤의 기본

박씨는 국내 무용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경남 고성 출신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 오광대의 초대 예능 보유자인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다. 박씨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춤 이수자이자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전수자이기도 하다.

“제가 언제부터 춤을 췄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어릴 적에 외가에 놀러갈 때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하시는 손짓, 발짓을 자연스럽게 따라하면서 움직임을 익힌 것이니까요. 자라면서 그냥 (춤을) 추고 싶,었,어요.”

박씨는 어릴 적 외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할아버지는 지금은 음식점이 된 부산의 동래권번(券番·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에 자주 드나드시면서 풍류를 익히셨다”며 “할아버지의 예인으로서의 끼가 저한테 남겨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외증조할아버지를 따라 박씨도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즐겼다. 동네에 약장수가 와서 창도 하고 춤도 추고 묘기도 부릴 때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시고 우리 5남매 가운데 춤을 추는 사람도 저 하나뿐이에요.”

박씨가 추는 영남교방청춤은 김창후 선생과 그의 제자 고 조용배 선생을 통해 전수됐다. 교,방청춤은 교방청(고려·조선 시대 기생들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를 관장하던 기관)이 폐지된 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을 중심으로 췄다. 활달한 상체 동작과 섬세한 발놀림이 특징이다. 박씨는 이어서 “기생들의 춤인 교방청춤은 우리 춤의 기본”이라며 “기생 문화가 조선 이후에 음주 문화와 결합하며 퇴폐적인 이미지로 변했는데 원래 교방청은 예인 육성 관청으로 우리의 춤 문화는 교방에서 많이 가다듬어졌다”고 말했다.


진정한 춤은 뭘까

지금은 영남지방의 춤으로 유명한 박씨지만 대학에선 발레를 공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를 시작해 세종대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하지만 무릎과 팔 관절이 발레를 하기엔 적합한 체격이 아니었다. “제 아버지도 제가 평생 발레를 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힘든 무용은 그만하고 결혼해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길 바라셨죠.”

박씨의 생각은 달랐다. 29세에 첫아이를 낳고 한국 전통춤에 몰입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며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었던 강옥남 선생에게서 교방청춤을 배웠다. 주변에서 “독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박씨는 “그땐 ‘지금이 아니면 영영 춤을 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어릴 적부터 춰오던 춤을 완성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 지금까지 달려온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춤을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슬럼프는 간혹 찾아왔습니다. 특히 ‘내가 지금 왜 춤을 추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지난해 말 박경랑씨의 춤 인생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50세를 넘긴 해부터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았고 ‘지금 내가 추는 게 진정한 춤일까’ 의문도 들었다. 6개월 정도 이어진 정신적 슬럼프였다. 그런 박씨에게 지난 3월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의 소아마비 환자, 정신지체인 등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극단 타이핸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어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의 근대무용가 최승희 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재일 동포 2세인 김말리 극단 타이핸 대표가 조선의 기생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와 재야의 독립운동가 함웅도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프로 만든 창작극 ‘함웅도 잠복기’란 작품이었다.


“이제야 춤을 알겠다”



“작품 속에 팔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 무용수들이 자신의 느낌만으로 살풀이를 추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사지 멀쩡한 제가 추는 춤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곤 충격을 받았죠. 그때까지 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그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죠.”

박씨는 이 극단과의 공연을 준비하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씨는 “서로 표현하는 형태미는 달라도 ‘공감’을 통해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이 작품에 무용의 요소를 좀 더 가미해 오는 9월 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박경랑씨는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박씨는 “시간 날 때마다 새로 나온 국악과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작품을 생각한다”며 “할 줄 아는 게 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춤은 가장 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춤을 추기 시작한 지는 40년이 넘었고 한국무용만 추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이제야 춤추는 느낌을 조금 알겠어요.”

40여년간 춤을 춰온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매일 8시간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자신의 춤을 춰온 ‘연습벌레’로 알려진 그였다. 박씨는 “그전까진 여전히 내 몸동작과 음악을 의식하는 춤을 추고 있었다”며 “2년 전부터야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젠 음악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춤이 나오고 음악이 멈추면 자연스럽게 몸이 멈춰 “춤출 맛 난다”는 박씨는 “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2011년 주간조선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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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복식

조 미 나

국문초록

 

전통무용은 춤을 추어 온 신분과 장소에 따라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으로 분류한다. 민속무용은 민중의생활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궁중무용에서 볼 수 없는 고정된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짓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현란한 의상이나 무대장치 없이 세련된 동작만으로 평민계급의 소박한 생활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승무, 살풀이, 농악무, 소고춤, 장고춤 등이 대표적이다.

교방춤 복식은 살풀이나 승무 같은 종교적인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무용처럼 정해진 복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채는 무대화시키면서 의상과의 일치를 위해 때에따라 의상에따라 바뀌기도 하며 의상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바뀌어지기도 하나 대체로 춤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교방춤와의 구별을 하기위해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 그리고 고름과 디자인을 특성화시켜다고 본다.

속치마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 것을 입기도 하는데 그것은 옛날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시, 서, 화, 악, 가, 무 등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치마폭이나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 시 를 써주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들고 흥이나면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또한 정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이것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과정에서 부채나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기도 한다.

부채는 황, 룡, 기, 백, 학, 무라는 한자로 백학이 황룡의 기운처럼 춤춘다. 또는 황룡의 기운처럼 힘차고 백학처럼 부드럽게 춤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교방춤의 이미지나 동작의특성을 살펴보면 다소 답답해 보일수 있는 전통무의 느낌에 비해 시원 시원 하고 여성스러운동작과 남성스러운동작의 조화가 잘 짜여져 있다.

복식의 색과 디자인은 이와 잘 연관되어 있는데 대체로 흑색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입고 디자인의 특색이라 한다면 저고리가 짧은 편이며 고름은 가슴을 띠 띠우듯 학고 남은 부분을 세로 고름으로 맨다. 치마는 팻치를 입지 않는 홋 치마이며 속바지는 통 속바지를 입는다.

남성스러운 흑색치마, 여성스러운 노란 저고리 그리고 하체동작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홋치마를 입으며 빠르게 도는 동작의 효과를 위해 속치마를 겉치마화 시키고 통속바지로 예의를 갖춘다.

또한 색의 내제된 의미를 보면 검정 치마는 물의 성질처럼 무용수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감을 의미한다. 노란 저고리는 관객의 내면에 에 숨어있는 감흥을 흔들어 끄집어 내는 활동성을 의미한다.

교방무의상의 초기 복식은 기본적으로 검정치마에 노란배색을 선택하였고 중기의 복식어깨부분의 색이 다양해지고 속치마의색이나 문양으로 인해 겉치마 못지않은 의상의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후기의 복식은 저고리가 화려해지고 치마와 속치마에도 변화를 주었다.

영남교방무의복식은 무용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치장이 아닌 관객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써의 역할을 지향한다.

예쁘게 보이려는 디자인보다는 동작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정직함으로 관객의 흥미유발을 위해 즉흥적으로 사용되어지는 의상과 소품의 사용또한 그러할것이다. 그래서 추는 자가 추어 지게 만드는 새로운 공간의 창조가 될수 있다.

1.1.

1.2.

목 차

Ⅰ. 서론

3. 영남교방청춤 복식의 내적의미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Ⅲ. 영남교방청춤이 지향하는 복식의미

 

 

Ⅱ. 영남교방청춤의 복식

 

1. 전통춤의 일반적인 복식

참고문헌

2. 영남 교방청춤 복식패턴의

외형적 변천연구

Abstract

1.3.

1.4. Ⅰ. 서론

1.4.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복식은 격식이라는 말이 있다. 이말이 지향하는 뜻은 간결하고도 깊다. 옷이 곧 무엇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냄을 말하는 것이다. 복식의 상징성은 시대성과 함께 변모되어가고 있다. 춤에 있어서 복식이 갖는 의미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반적인 복식의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대동소이하지 않을 것이며,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옷과는 상이한 점을 보일 것이다.

춤은 인간육체의 시 공간적인 동작조성을 통해 가시적인 의미체를 형성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순수발생적인 원시무용, 오락무용과 같은 형태에서는 예외가 되겠지만 종합예술로써의 무용에서는 동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장치, 조명, 의상과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특히 무용의상은 시각예술의 형태로 종합예술로써의 무용에 새로운 무대를 제시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무용의상은 무용이 본래 의도하는 주제를 관객에게 쉽게 전달하게 해서 관객의 이해와 흥미를 주며 조명과 장치의 일관성 있는 통일을 통해 무용의 시각적 효과에 도움을 주며 공연자의 신체적 결합 및 배역의 성격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에 관하여 복식의 의미와 그 의미가 내포하는 사상 등 복식에 관련하여 면밀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1.4.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문헌연구에 집중하였으며, 사실적인 묘사와 탐구에 있어서는 운파 박경랑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시도하여 세부적으로 참고하였다.

연구의 제한점은 영남교방청춤의 현 전승자인 운파 박경랑선생의 개인적인 복식의도에 맞추어 복식의 의미를 구현해 내려 했으므로 일반적인 춤 복식의미와 상충하는 부분과 같은 주관적인 해석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5. Ⅱ.영남 교방청춤의 복식

 

1.5.1. 1. 전통춤의 일반적인 복식

 

한국의 전통무용은 춤을 추어 온 신분과 장소에 따라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으로 분류한다.

 

1) 궁중무용복(宮中舞踊服)

 

궁중무용은 일명 정재(呈才)라고 하는데 이는 재조(才操)를 드린다는 뜻으로 나 라의 경사, 궁중의 향연, 외국 국빈을 위한 연회 등의 궁중잔치 때에 하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를 말한다. 이는 신라시대 발생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30여종의 무용이 만들어졌고 조선 말기에는 약 50여종에 달했다.

궁중무용은 특히 조선 후기 순조조에 이르러 정리되고 그 종목도 대폭 증대되어 전성기를 이룬다. 궁중에 내외연이 성행될 때에는 외연을 무동(舞童)이, 내연은 여령(女伶)이 각각 거행하게 되며, 대기 무동은 악공 중에서 대치하고 여령은 각도에서 선출하였다.

 

(1) 무동복(舞童服)

상례적으로 궁중에서의 향연에는 여악(女樂)이 주가 되어 왔으나 고려 때부터 있어 왔던 여악에 대한 시비는 세종조에 이르러 새로운 정재무동을 낳게 했다. 그러나 이는 곧 폐지가 되었다가 경오년(문종즉위년, 1450)에 다시 복구 되었다. 조선말기 궁중무용의 전성기까지 이어진 전통무용 중 무동이 등장하는 춤은 29 종이다. 이는 복식의 형태가 동일한 26종의 복식과 첨수무의 복식, 처용무의 복식 그리고 학무의 복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일반무동의 복식

일반적인 무동복식은 정재의 수도 많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무동의 수도 상당히 많으므로 이들의 복식이 대표적인 궁중남무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중단의(中單衣)에 상(裳)과 각 색의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그 위로 야자대(也字帶)를 두르고 흑화자(黑靴子)를 신었다.

 

(2) 첨수무(尖袖舞)의 복식

순조 28년에는 공작깃이 달린 피변(皮弁)을 쓰고 녹문첨수의를 입고 홍자문반비의(紅紫紋半臂衣)를 입었으며 남전대를 두르고 청말에 자색 행전을 두르고 흑화자를 신었다.

첨수의는 일반무동들이 단령 속에 입은 중단의와 같은 형태로 직령에 좁은 소매이며, 반비의는 이 시대의 여령들이 착용했던 양옆과 뒷솔기가 터진 4자락의 쾌자와는 달리, 뒷솔기가 터지지 않은 3자락의 옷이며, 앞자락의 길이가 뒷자락 보다 훨씬 짧은 것이 특징이다.

(3) 처용무(處容舞)의 복식

삼국유사의 처용량조에 의해 처용무가 신라 헌강왕 때 지금의 울산지방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신라 때는 검은색 도포에 사모를 쓰고 추었으며 뒤에 오방처용무가 되었다.

악학궤범에 나타난 처용무에 대한 복식을 각 위복별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모(紗帽)

처용가면을 쓴 다음 사모를 쓰는데 사모에는 수공화(首拱花) 2지를 꽂았다.

이 수공화는 모란꽃을 가리키며 사모 뒤에는 후수가 늘어져 있다.

 

② 의(衣)

의는 오방의 색에 따라 청, 황, 홍, 백, 흑색의 비단으로 만든다. 형태는 앞자락이 짧고 뒷자락이 길며 앞가슴 부분에 모나고 긴 흉배를 달고 앞뒤와 소매에 만화를 그리며, 옆솔기의 밑부분은 거의 허리선까지 터져있다.

 

③ 천의(天衣)

천의는 녹색비단을 쓰고, 만화를 그리며, 안은 홍색 명주를 쓴다.

 

④길경(吉慶)

길경은 안팎 모두 홍색 초를 쓰며, 양 끝에 녹색비단을 잇대어 깁는다.

 

⑤ 상(裳)

상은 황색 초를 쓰며, 상 가운데는 세로 녹색비단으로 첨(簷)을 만들고, 첨 아래는 가로 홍금선과 황색 초를 잇대어 깁고, 첨 위에서 홍색 초 끝 2개를 드리우고 끈 끝에 녹색 비단을 잇대어 깁는다.

 

⑥ 말군(襪裙)

처용무의 말군은 무릎에 채화사각(彩花四角)의 꽃문양이 붙어 있는데 이 문양은 방슬(方膝)을 말한다. 이 방슬에는 수가 놓여져 있으며 오방에 따라 말군과 방슬의 색상이 달라진다.

 

⑦ 한삼(汗衫)

한삼은 도련한 백색비단으로 한다.

 

⑧ 대(帶)

홍색 가죽띠를 쓰고, 고리로는 여주가지를 새긴 나무로 쓰고 쇠를 붙인다.

 

⑨ 화(靴)

백색가죽으로 만들고 끈이 있다.

 

(4) 학무의 복식

학무는 학이 연통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가 나오는 춤이다. 학무의 발생 연대는 고려대이고 조선조 성종 때 크게 발전하여 전선말까지 궁중에서 성장하여 전해져 왔다. 사람이 학의 형체를 뒤집어 쓴 형태이다.

 

2) 여령복(女伶服)

 

순조 29년부터 고종말까지 내연에서 거행된 총 34종 중 처용무와 학무를 제외 하면 여령이 추는 무용은 32종이다. 이들 여령무복은 6종류의 복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일반 여령무의 복식

 

아박무, 향발무, 헌선도, 무고, 가인전목단, 선유락, 연화대무, 첨수무, 몽금척 등 25종의 일반 여령무는 정재의 수도 많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무기(舞妓)의 수도 상당히 많으므로 이들의 복식이 곧 이 시대의 궁중여무의 대표적인 복식을 말해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평복차림에 화관을 쓰고 홍초상(紅梢裳)과 황초삼(黃梢衫)을 입은 위로 수대(繡帶)를 매었으며 오색한삼을 끼우고 초록화를 신었다. 이 차림은 일반 여령들과도 같으며 무(舞)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의물이나 악기를 들었다.

 

(2) 춘앵전(春鶯囀)의 복식

 

이 춤은 순조의 세자 익종이 순종숙황후의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1인이 추는 독무이다.

이의 복식으로는 평복차림에 화관을 쓰고 홍초상과 황초삼을 입은 위로 홍수대(紅繡帶)를 매었으며 비구(臂構)를 차고 오색한삼을 끼었으며 어깨에 하피(霞帔)를 두르고 비두리(飛頭履)를 신었다.

 

(3) 검기무(劍器舞)의 복식

 

검기무는 검무 또는 황창랑무라고도 하는 무무(武舞)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검기무는 민간에서 가면무로 연희되기 시작하다가 궁중에 들어가면서 가면이 없어지고 여령에 의해 이조말까지 전승되어 옷 듯하다.

이들의 복식으로는 전립(氈笠)을 쓰고 금향협수 위로 괘자(掛子)를 입고 남전대를 띠었으며 양손에 무검을 들었다.

 

(4) 선유락 집사(船遊樂 執事)의 복식

 

선유락이란 채선(彩船)을 끌고 배 떠나는 정경을 그린 춤으로서 2명의 동기(童妓)는 닻과 돛을 잡으면 나머지 여령들은 2명의 집사의 행선령(行船令)에 따라 배를 끌게 된다.

이들 집사들은 주립(朱笠)을 쓰고 협수(挾袖)를 입은 위로 철릭을 입고 진홍광대(眞紅廣帶)를 띠었으며 수화자(水靴子)를 신고 등에는 통개(筒箇), 양손에는 환도와 등편(籐鞭)을 들고 있다. 이것은 무관의 복식과도 같다.

 

(5) 무산향(舞山香)의 복식(服飾)

 

무산향은 익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대모반(玳瑁盤)을 놓고 1인이 추는 독무로서 춘앵전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의 복식으로는 춘앵전에서와 같은 화관을 쓰고 홍착수의를 입은 위로 초록괘자를 입고 금사자를 두르고 남전대를 띠었으며 오색한삼을 끼우고 홍수혜를 신었다.

 

(6) 동기(童妓)의 복식(服飾)

 

여러 의궤의 정재도를 보면 동기는 3개의 무용에 참여하고 있다. 즉 연화대무 에 2명, 선유락에 2명 그리고 학무에서 연꽃 속에 2명의 동기가 보인다.

이들의 복식을 보면 홍초말군(紅綃襪裙)과 홍라상을 입은 위에 단의(丹衣)를 입고 금화라대(金花羅帶)를 띠었으며 한삼을 끼우고 수초혜를 신었다. 이러한 복식은 3개의 무용에 참여한 동기가 모두 같았는데 다만 서로 다른 것은 관이다.

연화대무의 동기는 고종 24년 진찬까지는 합립(蛤笠)을 썼으나 그 이후는 연화관을 썼다.

 

1.5.2. 2. 민속무용복(民俗舞踊服)

 

무속무용, 사찰무용, 가면무용과 농악 기타 살풀이, 강강수월래 등이 있다. 이중에서 실용성과 표현성을 고루 갖추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 배경인 무속, 불교, 군의 요소가 습합된 놀이복식으로서의 농악복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 농악의 유래와 유형

농악의 기원은 고대의 제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농악은 그 내용이나 구조, 형식 그리고 연희하는 목적과 기능에 따라 성립과정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축원형태의 농악에서 시작하여 농경적인 노작농악(勞作農樂), 걸립농악(乞粒農樂), 연예적인 형태의 농악 등 네 단계로 변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농악의 복식유형

 

농악대는 기본적으로 사물(꽹과리 ․ 징 ․ 장구 ․ 북)과 기(旗)대 ․ 소고 ․ 잡색 ․나팔 등으로 편성되는데 그 조직은 대체적으로 농기(農旗) 1인, 영기 2인, 쇠 2인, 징 1인, 장구 2인, 북 2인, 소고 8인과 무동 ․ 중 ․ 각시 ․ 양반 ․ 대포수(총잽이) 등의 잡색으로 구성된다.

① 상쇠

상쇠는 농악단을 지휘하는 사람이기에 옷이나 장식품이 가장 화려하다.

이 상쇠의 복식은 지방마다 약간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호남우도(湖南右道)의 경우 전립에 부포(꽃상모)를 달고 반소매 창옷(홍동지기)를 입으며 등에는 원형의 쇠붙이인 거울을 양 옆에 달고 안에는 적황녹색의 천을 늘어뜨리며 청색띠를 허리에 맨다.

 

② 쇠꾼

상쇠와 비슷하며 장식이 없고, 모자는 전립을 쓰거나 고깔을 쓴다.

 

③ 징수

 

쇠꾼과 비슷하며 패랭이나 고깔을 쓴다. 색띠는 한쪽만 매거나 삼색띠를 감고매는 것이 있다.

 

④ 장구수 ․ 북수

쇠꾼의 복식과 같이 전립을 쓰거나 고깔을 쓴다.

 

⑤ 소고잽이

쇠꾼과 복식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종이로 만든 꼬리가 달린 채상모를 쓰는 경우와 고깔을 쓰는 경우가 있다.

 

⑥ 농기수

흰 옷에 패랭이를 쓰거나 꽃수건 그리고 고깔을 쓰는 경우도 있고 삼색띠를 허리에 두르거나 맨다. 걸립농악에서는 먹장삼과 홍장삼을 입는 경우도 있다.

 

⑦ 영기수

농기와 같으나, 지역에 따라 쾌자나 더그레를 입거나, 상모 없이 전립을 쓰고 꽃두건을 쓰는 경우도 있다.

 

⑧ 잡색

기본적인 잡색은 무동, 대포수, 각시, 중, 양반 등이다.

● 무동: 고깔을 쓰고 남쾌자를 입으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 대포수: 옷의 색깔이나 옷차림이 일정하지 않으나 장식품은 공통적이다.

● 양반: 경기․ 충청에서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며, 호남에서는 정자관을 쓴다.

● 각시(색시); 지역마다 색상이 일정치 않으나 저고리에는 치마를 걸치고 일부 지방에서는 바가지로 만든 탈을 쓰기도 한다.

 

● 중: 장삼에 송낙을 쓰고 허리에는 바랑을 진다. 장삼이 없으면 색두루마기를 입기도 한다. 송낙은「조리」라고도 하는데 짚으로 주저리같이 엮어 만들며 꼭대기에 꽃을 길게 달기도 한다. 일부지방에선 탈을 쓰기도 한다.

 

● 참봉: 도포를 입고 탈을 쓰며 큰 갓을 쓰며 홍적삼은 붉은 장삼에 붉은 탈을 쓰고 붉은 고깔과 버선을 신는다.

이 밖에도 얼굴에다 방울을 달아 소리를 내는 방울쇠, 쇠옷에 부포 상모를 쓴 농구, 붉은 창옷에 초립을 쓴 화동(花童), 쾌자를 입고 전립을 쓴 집사(執事), 나팔수, 새납 등이 있다.

 

3) 기타 복색

 

전립(戰笠), 상모, 고깔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상모는 부포상모와 채상모가 있는데 부포상모는 뻣뻣하게 서 있는 뻣상모와 부드러운 부들상모가 있다. 채상모는 부포와 같이 전립꼭대기에 석조시를 붙 이고 구슬을 단다.

마을 농악에서 볼 수 있는 고깔은 삼각형 형태로서 꽃을 다는데 당배꽃, 모란, 함박꽃, 백일홍 등을 달며 잎이 달린 것도 있다.

지역별로 양상이 다른 농악복식은 복식유형의 특징은 다르나, 기본으로 잡색과 무동을 제외한 전원이 고깔이나 전립을 쓰고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3색 띠를 맨다.

또한 편성에 있어 잡색들은 복색이 화려하며 꽹과리수를 제외한 모두는 채상모나 고깔을 쓴다. 색띠 매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다르며 고깔이나 띠, 전립, 더그레, 쾌자 등의 요소들은 불교적 군, 무속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백, 청, 홍, 흑, 황색의 오방색(五方色)이 사용되고 지방에 따라 색채의 선호가 상이함을 볼 수 있다.

 

4) 승무

 

승무는 한국민속무용의 백미라고 할만큼 춤의 기교와 예술성이 뛰어나며 민속춤 특유의 ‘정 중 동’ ‘동 중 정’의 정취가 가장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어, 앞서 연구 민속무용을 대표하는 춤이다. 승무의 무복은 장삼, 가사, 고깔로 이루어져 있는데 옷감은 갑사로 만들고 속옷은 무명으로 만들며, 버선은 옥양목으로 만들어 신는다. 원레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의상으로 바지,저고리를 입었지만, 현재 남자는 바지,저고리,여자는 치마저고리에 긴소매가 달린 장삼을 입고 머리에 고깔을 쓰고 어깨에 사선으로 홍가사를 입는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양손에 북채를 든다. 승무에 있어 무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승무의 무복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승복은 아니고, 장삼의 명칭은 조선시대전부터 사용되었다.

 

5) 살풀이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쫓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 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추는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꿈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춤이라는 말을 쓴데서부터 이름이 비롯되었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꽃고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나타내기 위해 수건을 들고 살풀이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살풀이 춤은 춤꾼의 치마와 저고리가 모두 흰색이다. 흰색은 곧 무색無色이며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간직한 색이다. 무색, 있는 그대로의 색 곧 자연 그 자체이다.

 

1.5.3. 2. 영남 교방청춤 복식패턴의 외형적 변천연구

 

1) 영남교방청춤의 고유복식패턴의 특징

 

교방춤복식은 살풀이나 승무 같은 종교적인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무용처럼 정해진 복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채는 무대화시키면서 의상과의 일치를 위해 때에 따라 의상에 따라 바뀌기도 하며 의상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바뀌어 지기도 하나 대체로 춤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교방춤와의 구별을 하기위해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그리고 고름과 디자인을 특성화 시켰다고 본다.

 

속치마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 것을 입기도 하는데 그것은 옛날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시,서, 화, 악, 가, 무 등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치마폭이나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시 를

써주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들고 흥이 나면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또한 정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이것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과정에서 부채나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기도 한다.

 

부채는 황, 룡, 기, 백, 학, 무라는 한자로 백학이 황룡의 기운처럼 춤춘다. 또는 황룡의 기운처럼 힘차고 백학처럼 부드럽게 춤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박경랑선생의 인터뷰내용<2011년 11월 29일 PM.12시. 박경랑류 영남 교방청 춤전수관>)

(1) 저고리의 특징

먼저 색의 배색에서 저고리와 어깨부분의 배색을 대비되는 색을 사용한다. 전체적인 노란색에 자주색을 덴다던지 초록계통의 녹두색이나 공연자의 이미지에 맞게 여러 색을 선택하기도 한다. 저고리의 배레선은 통이 좁은편이며 소매와 동정 둘레 부분의 색도 대비되는 색을 사용한다.가장 차별화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저고리의 고름은 일반적으로 매어지는 형식과는 다르게 가슴B.P선을 높이로 전체 돌레로 띠 띠우듯 두르고 나머지 남아있는 부분으로 중앙보다 조금 오른쪽에 가로 고름이 아닌 세로 고름을 맨다.

 

(2) 치마

치마또한 디자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치마의 주름은 치마 윗 부분부터 시작이 되지만 교방복식의 치마는 속 치마의 가슴 말기처럼 겨드랑이 높이부터 시작하여 젖가슴 아래 부분까지 흰색민무늬 천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부터 치마의 주름이 잡혀있다 치마의 색은 기본적으로 검정을 사용한다. 하지만 속치마의 색깔이 비추어 지는 무늬의 감을 선택하기도 한다.

 

(3) 속치마

속치마는 일반적인 속치마와 기능적인 면에서 아주 차이가 있다. 그야말로 겉옷을 살려주기 위한 속 옷 이라기 보다는 겉옷 못지 않는 의상의 역할을 한다. 광택이 나는 소재에 큰 꽃 자수가 그려지기도 하고 아주 선명한 색또는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속치마의 개념이 아닌 또 하나의 치마의 역할을 한다.

 

(4) 속바지

속바지 또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다른 속바지에 비해서 통이 아주 넓고 아랫단의 모양은 사각이다. 그리고 보통 속에 속바지를 하나 더 입어서 비춰지지 않게 하는 것 도 있지만 더 풍성해 보이게 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1.5.4.

1.5.5. 3. 영남 교방청춤이 의미하는 복식의 내적의미

 

한국전통무용, 외국무용, 그리고 대중가요와 함께 공연되어지는 댄스도 그 동작을 잘 부각시켜주고 이미지전달을 극대화 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이 바로 의상이다.

대표적인 전통무용을 예를 들면 살풀이는 기원의 뜻이 있는 다소 정신적인 춤사위를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 전통 민복을 바탕으로 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것이 대체로 정형화 되어있다. 한복의 형태는 특별한 것이 없으나 흰색이 주는 경건함으로 춤의 깊이와 기원의 마음을 잘 나타내어준다.

승무는 남자는 바지저고리 여자일 경우는 치마저고리를 안에 받치고 위는 긴 장삼을 입는다. 승무동작은 염불장단부터 아주 느리게 시작하는데 오래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동작을 진행하다가 한꺼번에 큰 동작을 한다. 이때 한삼을 크게 뿌리는데 장삼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그림 그려지듯 뿌려진다.(춤은, 인간의 신체 움직임을 이용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 그리는 하나의 그림과도 같다.)

이 처럼 의상은 그 춤의 이미지나 동작을 잘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박 경랑 류 교방 춤의 이미지나 동작의 특성을 살펴보자.

먼저 춤의 이미지를 보면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전통무의 느낌에 비해 시원 시원 하고 선이 확연히 드러나 보여서 가끔씩 상체동작에서는 남성스러운 굵직한 선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곡선과 직선을 번갈아 조화롭게 짜여 져 있어 적당히 시원스럽고 적당한 무계감이 느껴지게 한다. 전체적인 동작 선(자신이 위치한 공간속에서 동작의 이동을 통해 그 공간을 채웠다 비웠다 하는 연희자의 움직임으로 해서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수 많은 공간 여백 활동 까지 포함하며, 이러한 움직임이 만드는 선을 ‘동작선’이라 정의한다)은 크고 확실한 편이지만 중간 중간 잔재주를 부리듯 아주 여성적인 동작이 간간이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는 춤이다.

박 경랑 류 교방무의상은 일단 검정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는 경우가 많다.

저고리색은 여성적인 황색계통이며 치마색은 남성적인 흑색이다. 저고리는 배래선이 좁은 편이며 치마는 완전히 흑색을 입기도 하지만 속치마가 약간씩 비추어지는 무늬가 그려진 치마를 입기도 한다. 그리고 속바지는 보통 두 개 정도를 입는데 가장 겉에 입는 속바지는 통이 넓은 통속바지를 입는다.

그러면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는 춤의 이미지와 황색의 여성스러움과 흑색의 남성적인 이미지의 색이 서로 잘 연관되어 있다.

좁은 배래선의 저고리는 시원스러운 상체동작과 사선과 직선의 팔 사위를 할 때 팔선이 더 길어 보이는 효과를 준다. 그리고 교방 춤 후반부엔 큰 원을 돌면서 다시 작은 원을 함께 도는 동작이 있는데 이때 동작이 다소 크고 빠르기 때문에 속바지가 보여 지는 부분이 다른 춤에 비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속바지를 입고 속에 다른 속바지를 하나 더 입어 비치지 않게 하므로 관객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검정치마에 노랑저고리의 한복배색은 그리 흔한 배색의 조합은 아니다. 보통은 교방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다소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을 많이 입는다. 황색저고리에는 금박이나 수를 놓아 다소 화려하게 하기도 하지만 흑색치마가 무계 감을 줌으로써 잔재주를 부리는 동작이나 어깨춤이 있는 동작처럼 기교를 부리는 동작에서도 애교가 있어 보이기는 하나 절대 가벼워 보이지는 않고 넘치지 않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민속무용은 일반 서민이나 대중과 왕후, 귀족 등이 있는 계층화된 사회에 있어서 그 민족의 시층 사회에 있어서 그 민족의 기층사회에서 전승된 무용을 말한다. 기층사회의 전승자는 서민이나 대중이며, 이사회의 문화는 유형적, 일상적, 반복적으로 전승이 강한 문화이다. 즉, 민속무용이란 직업적으로 무용가나 특정의 작가나 안무가에 의해 만들어진 춤이 아니라 그 민족의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무용으로써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춤이 아닌 상당히 오렌 기간동안 전승된 무용을 말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가 즐기는 춤이다.

민속무용은 민중의생활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궁중무용에서 볼 수 없는 고정된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짓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현란한 의상이나 무대장치 없이 세련된 동작만으로 평민계급의 소박한 생활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박경랑류 영남 교방무는 민속무용의 성격을 많이 표현하려 한다. 보통 전통무용처럼 춤만 행하여지는 형식을 벗어나 극적인 구성을 만들고 등장인물에 각각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춤추는 공연자와 예를 들어 반주를 하는 악사들도 같은 이야기의 인물들로 묶어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를 유발하게 한다. 등장인물이 반주를 하는 악사 단 1인 일 때도 있고 여러 등장인물이 있을 때는 수 십 명이 있을 때도 있다.

반주자와 춤추는 공연자만 있을 때는 때로는 춤만 추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주자에게도 약간의 대사 없는 연기를 행하게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때 악사는 오랜만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온 선비이고 춤추는 공연자는 오랫동안 기다린 님을 반기는 여인이 되어 춤을 춰 나간다. 이럴 때는 보통 입어지는 흑색 치마에 황색 저고리는 입지 않고 그 어느 색보다 화려한 색을 선택하여 보고 싶은 님을 맞이하는 여인의 설레는 마음과 사랑의 열정을 표현한다.

이런 경우에는 선명한 보라색과 미색저고리를 입기도 하고 옛날 시집가기 전에 쳐녀들이 가장 많이 입었던 홍색치마에 연두저고리같이 아주 선명한 색 그 외에도 다양하게 화려한 장신구나 머리 모양의 변형을 하기도 하여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다양성을 준다.

그리고 교방 무 에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흰색저고리와 치마를 입을 때도 있다. 처음 등장할 때 는 살풀이의상처럼 아주 깨끗하고 전갈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방무보다 더 차분한 춤이 행하여 질것 같은 느낌을 먼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흰 치마와 저고리는 춤이 행하여 지는 동안 변화 무쌍하게 변화를 한다.

이때에도 극적인 요소가 사용되어 지는데 무대의 상황은 잔치가 벌어 지고 있는 연희장면이며 한쪽에서는 걸쭉한 술판이 벌어지고 또 한쪽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화선지에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방무가 행하여 지는데 부채또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부채를 들고 춘다.

초반부는 똑같이 진행하다가 자연스럽게 붓을 들고 있는 선비에게로 가서 살포시 앉아 팔을 내밀어 저고리 배래에 글 한줄 써 줄 것을 요청한다. 선비는 아주 흥쾌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흰 저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이 다 써지면 글이 쓰여진 부분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관객에 대한 하나의 이벤트를 선사한다. 그렇게 되면 흰 저고리는 글씨가 쓰여 진 다른 옷으로 변화를 한다. 같은 방법으로 치마에 또는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흰 부채에 글씨를 쓰기도 한다.

이 같은 방법은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의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의상을 활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즉흥적인 변화를 줌으로써 관객과의 소통거리를 더 좁히는 하나의 매계체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즉흥이란 어느 자극에 대하여 복잡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신체활동은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며 순간적인 창작으로써 표현형식이 불완전해도 새롭게 만들어 내는데 가치가 있다.)

 

그리고 소품이 사용되는 경우에서도 단지 춤을 추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도 하지만 관객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여 춤판으로 끌어 들이는 흥을 돋구어 내는 즉흥적인 요소 또한 가질수 있게 한다.(여러 이미지와 소품들도 즉흥무를 경험하는데 적합하게 사용 될 수 있다)대표적인 예로는 탈춤이나 농악, 북춤이 있다. 살풀이나 승무 같은 경우도 마당에서 자주 행하여 지던 때에는 즉흥무가 많이 행하여 졌지만 무대공연으로 많이 공연되어 지면서부터 즉흥적인 부분이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영남교방무의 소품은 부채이다. 굿 거리 장단에는 부채가 사용되어지지 않고 자진모리장단으로 변할 때 부터 부채가 사용되어 지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부터는 춤의 동작도 빨라지고 동작선이 더더욱 커진다. 이렇게 흥이 점점 더 고조 되어 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지면 관객가까이로 다가와서 부채를 내밀고 잠깐의 무언의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어깨춤이나 잔재주를 부리면서 흥을 돋운다. 이때 부채는 소품으로써의 역할 보다 더 큰 영역을 넘나들어 관객과 춤추는 공연자를 합일 시키며 무대와 객석으로 분리되었던 공간을 같은 흥을 가진 하나의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그 공간은 더 이상 무대가 아닌 원래 우리의 문화인 마당의 문화로 공간이 재 창조 되어 진다.(마당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일을 제 각각 분리 시키는 분업적 관점을 파기하며 나아가서는 하나의 총체로 결속 시킨다)

영남교방무의복식에서 특징적인 디자인이 있다면 고름이다. 보통 가슴앞에서 매어지는 고름과는

영남교방무의 다르게 가슴을 띠 띠우듯 두르고 남겨진 띠로 고름을 매는데 새로 방향으로 맨다. 그리고 저고리의 풀어서 벗으려면 안쪽에 한번 더 매어져 있는 작은 고름을 풀어야 벗을수 있다.

가로로 매어지는 고름에 비해 세로로 매어지는 고름은 야무지게 매어진다.

이것은 정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복식에서는 치마를 더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 팻치를 입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영남 교방무 복식에서는 패치를 입지 않고 속치마와 속바지만 입는다. 하지만 다른 속치마처럼 흰색이나 단색이 아니고 꽃수가 들어 가거나 화려한 무늬가 들어 가기도 하는데 치마의 풍성함 때문에 가려지는 발디딤이나 하체동작들을 드러내기 위함도 있다. 살짝 살짝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하체 동작들이 아니기 때문에 춤을 추는 사람은 자신있게 내 보여 줄수 있을만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교방무의 가장후반부에는 빠르게 돌아 가는 동작을 하는데 이때 속치마의 역할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는 두가지 색의 치마가 마치 두가지 색을 가진 하나의 치마가 돌아가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해서 마치 두가지 의상을 본것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고 가장 상승되는 분위기를 더 상승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교방청춤의 의상은 대개 검정치마나 노란 저고리이다. 일반적으로 검정은 오행 중 수이다. “흑색은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에 속한다. 오행 중 수(水)로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스며들기를 좋아하는 물과 같이 음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검정 치마는 이러한 물의 성질처럼 무용수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감을 의미한다. 노란색은 감정을 자극하는 화려한 색이다. “일반적으로 황색은 환하고 자극성 있는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스럽고 개방된 감정과 상응하며, 적극적인 감정으로부터 변화되어 가는 자유로운 관계를 찾는 색이다.“ 노란 저고리는 관객의 내면에 에 숨어있는 감흥을 흔들어 끄집어 내는 활동성을 의미한다.

 

교방무에서 선명한 보라색이 자주 사용된다. 보라색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보라색은 고급스러움, 비정상적인 등의 이중적 의미가 강하며,...“ 기생은 매우 고급스러우면서도 일반적인 가정생활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므로, 교방무의 보라색은 고상함과 비정상성이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교방무에게 가끔씩 흰색 저고리와 치마가 사용된다. 흰색은 일반적으로 순결이다. “흰색은 순결, 청렴 등을 상징하며 우리 민족의 심성과 기질에 부합되어 한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교방무의 백색은 여자의 순결과 정조를 의미한다.

 

 

 

(2)영남교방청춤의 복식의 변천

 

①초기 : 교방무의상의 초기 복식은 기본적으로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의 배색을 사용한다.

 

● 저고리 : 기본형태는 일반적인 복식과 비슷하나 다른 특징이 있다면 길이가 조금 짧은 편이어서 가슴아래까지 다 덮이지 않고 거의 반만 덮여지는 높이이다. 그리고 저고리 배래선이 넓지 않고 좁다. 저고리 동정을 중심으로 어깨 부분에 자주색으로 천이 덧 대어져 있어 색이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고름도 일반적으로 매는 형식이 아닌 가슴부분을 가로로 띠 띠우듯하고 남겨진 띠로 가로 고름을 매지 않고 세로 고름을 맨다.

● 치마 : 저고리의 길이가 짧은 편이기 때문에 가슴부위는 하얀색 굵은 띠처럼 단단하게 되어있고 그 아래부터 치마의 주름이 만들어져 나간다.

속치마는 흰색속치마를 입는데 다른 속 치마와는 다르게 광택이 나는 소재를 사용한다. 속바지는 기본 속바지 위에 통이 넓고 아래부분이 사각모양인 통속바지를 입는다.

 

② 중기 : 중기의 복식은 색의 다양성으로 변화를 주었다.

 

● 저고리 : 초기의저고리는 전체적인 노란색에 어깨부분에는 자주색,그리고 가슴띠 부분의 자주색이 전부였다. 중기에 와서는 동정돌레로 녹두색을 덫 대기도 하고 다양하게 대비대는 색을 사용한다. 그리고 어깨부분에는 꽃자수를 놓아서 더 여성스러운 느낌을 강조하기도 한다.

● 치마 : 치마의 색이나 다지인의 변화는 없지만 초기의 치마는 저고리의 길이에 맞춰 가슴부위 흰색천의 길이도 정해져있어 팔을 올리지 않으면 보여지지 않았다. 중기에 와서는 흰색천의길이가 조금더 길어져 저고리 아래로 조금 보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상체를 더 길고 가늘게 보여지는 효과가 있다.

●속치마,: 중기때부는 속치마의 변화가 가장 큰 변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치마에서 아주 큼직한 꽃수가 전체 둘레로 놓아지기도 하고 먹으로 그린 그림이나 글씨가 쓰여지기도 하면서 단순한 속옷의 역활에서 겉치마 못지 않은 의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③ 후기 : 후기의 복식은 저고리가 화려해지고 치마와 속치마에도 변화를 준다.

 

●저고리: 후기에 와서는 저고리가 매우 화려해진다. 기본적인 노란색도 다양한 채도를 이용하여 밝은 개나리색을 쓰기도 하고 장중한 황금색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금박이나 은박을 찍어 빛을 주기도 하고 어깨쪽에 놓는 수는 물론이고 배래에 큰 꽃수를 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소매도 점점 넓어지고 한색이 아닌 여러색을 단계적으로 덫덴다. 이처럼 후기의 저고리는 오히려 다른 복식의 저고리보다 더 화려해졌다.

●치마 : 후기에 와서는 치마가 단순한 검정치마일때도 있지만 속 치마가 비치는 무늬의 검정 치마를 입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떤 속치마를 입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 변화의 효과도 있고 더 여성스러워 보이는 효과도 가지게 되었다.

●속치마 : 후기에 와서의 속치마는 흰색에서 여러 색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노란저고리와 배색이 어울리는 녹두색 속치마를 받쳐 입기도 하고 입는 사람의 이미지에 따라 어울리는 다양한색을 선택한다. 속치마의색이 드러나는 겉치마를 입음으로써 속치마를 입었다기 보다는 치마를 두 개 입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3) 영남교방청춤의 복식과 소품

 

1.6. Ⅲ. 영남 교방청춤이 지향하는 복식의미

 

영남 교방청춤의 복식은 색의 의미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먼저 흘러 들어 가고 다시 함께 흘러 나오는 분리가 아닌 교감과 합일이다.

그저 관객에게 예쁘게만 보이려는 자신의 치장을 넘어서는 교방의 복식은 관객을 위한 복식 그 이상의 의미도 될수 있다.

숙련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 예쁜 한복의 디자인을 과감히 포기 하기도 하고, 관객을 위한 볼 꺼리를 제공하기 위해 단 한번밖에 입을수 없는 일회성 의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영남 교방 춤의 복식은 관객과의 소통과 교감을 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 역할을 지향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목적으로 춤을 추는 자가 춤을 추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춤추는 자의 목적은 그 이상이 없을 듯 하다.

 

 

 

 

 

 

 

 

 

 

 

 

 

참 고 문 헌

 

1) 출처;다음까페 한복 스튜디오 <한복의변천사,한국의전통무용복식>

 

2) 임성수 2004 승무의 동작선을 이용한 한국 민속 무용 극장계획

 

3) 이화진 20005 살풀이 춤에 내제된 음향오행 사상에 관한 연구

 

임성수 2004 승무의 동작선을 이용한 한국 민속 무용 극장계획

 

채희완,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길사, p.34

 

조성환 1990 민속무용 정의와 기능을 중심으로

 

남윤경 2001 피나바우쉬 작품에 나타난 즉흥성 연구

 

남윤경 2001 피나바우쉬 작품에 나타난 즉흥성 연구

 

김채현 1989 춤과 삶의 문화 서울: 민음사

 

황경숙,윤미정 2011 한국무용에 내제된 색채의 의미

 

황경숙,윤미정 2011 한국무용에 내제된 색채의 의미

 

한귀자 2011 보라색의 고급스러운 연상에 관한 연구

 

 

 

The Costume of Park Gyeongrang Yeongnam-Gyobang Dance

 

Cho mi nah

 

Depending on the social status and venue of choreography, traditional Korean dances are categorized into court dance and folk dance. The folk dance originated from ordinary folks' life experiences and is hence native-born in origin. As such, in terms of its method of expression, the folk dance features free body movements that are usually absent in more formalistic court dance. Also, the folk dance conveys the ingenuous life emotions of the common folks through refined moves without the aid of flowery costumes or stage apparatus.

The folk dance includes Seung-mu, Salpuri-chum, Nongakmu, Sogo-chum, and Jango-chum.

 

The costume of Gyobang dance lacks any fixed design unlike religious ritual based dances such as Sungmu or Salpuli. The fan is staged and changes from time to time to match the overall costume. The costume itself also changes from season to season, but typically features a black skirt and a yellow top, as well as knots and other design patterns as distinguishing features from other Gyobang dances.

 

On occasions, the females dancer wears an undergarment with calligraphy or drawings thereon. This practice is effective in creating a dramatic ambience and reenacts the ancient custom that while entertaining with confucian scholars by means of poems, paintings, songs, dances, etc, the scholars sometimes drew a painting on the surface of the dancer's skirt or fan, and the dancer danced with such decorated skirt or fan afterwards as a symbol of affection.

 

The fan represents the six Chinese characters of 黃, 龍, 飛, 白, 鶴, 舞, and denotes a flying yellow dragon and a dancing white crane or the crane dancing like the force of the dragon. If one examines the image and bodily movements of Kyobang dance, one can see that, unlike the traditional dance, it feature breezy movements and seamless intertwining of both masculine and feminine moves.

 

Color and design-wise, the dancer usually puts on a black skirt with a yellow top. In terms of certain signature features of design, the top is relatively short, and the knot is tied as if tying around the chest with the remaining finished off as a vertical knot. The skirt is single layered without any patch, and the undergarment is one-piece.

 

The dancer hence puts on a masculine black skit and the feminine yellow top. The single layered skirt makes lower body moves more readily visible, and the undergarment is externalized to enable swifty circular moves. The one-piece undergarment shows courtesy.

 

Also, if ones probes into hidden meanings behind each color, the black skirt represents water-like consensus through which the mind of the dancer flows out unto and captures the mind of the audience. And the yellow top symbolizes energy with which the dancer can arouse and instill a sense of inspiration among the audience.

 

In its early phase, the Kyobang dance costume featured the black skirt with yellow coloring. In the intermediate phase, the color around shoulder areas diversified gradually, and the undergarment increasingly played a role of outer skirt due to its color and design patterns. In its advanced phase, the top became more colorful which in turn had an impact on the skirt and undergarment alike.

   

The Kyobang dance costume is not a mere extraneous accessory, but serves as a medium for mutual interaction with the audience. Its functional integrity certainly enables the dancer to cre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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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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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의 변천사

연구논문 2012. 8. 1. 13:57


교방의 변천사

김 예 진

국문초록

교방(敎坊)의 전신(前身)을 찾는데 있어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용수의 역할을 짐작해보면, 삼국시대이전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는 직업적인 무용수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교방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이었던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이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통의 단절을 꿰하던 일제강점기의 매서움도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에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에 속한 교방,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같은 음악기관에 예속된 교방사 등의 역사적 흔적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전통문화예술의 교육과 전승, 전파에 오랜 세월 그 소임을 다해 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교방, 권번

1)

목 차

Ⅰ. 서론

Ⅳ. 근대, 현대 교방(敎坊)의 변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2. 연구 방법

2. 현대 교방의 흔적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Ⅴ. 결론

1. 삼국시대

 

2. 발해시대

참고문헌

 

Abstract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가.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모든 한국춤의 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천해 온 교방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춤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춤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생춤이라며 천시하는 인식의 과오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일부 안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기생의 기예(技藝)를 예술의 주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전면에 보여지는 남성들의 유희적 놀음으로만 기생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평가와 가치는 훗날 파생되는 역사의 줄기와 뻗어나간 가지의 역할로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궤 안에서 응당한 사적(史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지난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나간 시간들의 과오의 인식이 덮혀지고 그 틀이 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은 그저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 켜켜히 묵혀낸 곰삭은 절대시간을 넉넉히 품은 탄력성을 지닌 문화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탄력성이 존재하는 ‘교방’은 그 시작점에서 오늘날까지 품고 온 전통의 낱알들이 이뤄낸 풍부한 역사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은 온전한 사적(史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있었고, 이러한 ‘교방’을 향해 왜곡의 거플을 벗겨내고 그릇된 인식을 거둬내 간과된 사고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 우리 예술계에서 시작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전통춤의 모태와 전신이며, 현재 전통춤계의 골(骨)과 근(筋)을 형성하는 역할은 수 천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교방(敎坊)이 이루어내었다.

교방이 존재할 당시의 예술을 장려하고 관장(管掌)한 나라의 관심도와 영향력을 추산해보면, 오늘날 현 정부가 풀어내는 예술정책에 비해 앞설 뿐 아니라, 그 비중 면에 있어서도 크다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전하는 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새것을 익힌다는 뜻처럼 교방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 선조들의 뜻과 밝은 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전통예술을 향한 과거로부터의 진귀함을 터득해낼 것이다.

본 연구는 교방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과정과 시대별 변천과정을 통해 현 시점에서 취해야할 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고찰이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사적고찰이 갖는 방법으로 사료(史料)분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3)

교방의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교방의 변천과정을 다룬 선행연구 및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1) 1. 삼국시대

고구려시대 무용총(舞踊塚) 벽화 속에서 장삼자락처럼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은 고구려시대에도 무녀, 즉 직업적인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 긴 소매의 옷차림은 중국 중원 한족의 춤 복장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춤 예술이 서로 교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의 회랑에 나타난 군주행렬도(君主行列圖)에서의 검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분 묘실 남벽에서의 군무의 한 장면에서 고구려시대 무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설치된 음성서(音聲署)에는 무척(舞尺), 가척(歌尺), 금척(琴尺) 등의 전문적인 예인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무척(舞尺)은 춤 잡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기녀의 존재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악·가·무가 어울어진 종합예술이 분야별로 세분화, 전문화되어 국가에서 관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관제가 정비되어진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던 삼국시대에는 벌써,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서의 효용성과 유용성으로 나라의 통치자들은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전문화된 예술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출현이 갖는 사적 의미만으로도 이미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예술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2. 발해시대

발해시대는 교방(敎坊)이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시기에 국가의 악과 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사(太常寺)가 있었으며, 이때 무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교방의 역할을 담당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재현, 2007).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역사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 한 후,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서게 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고구려의 시대를 따르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고자 노력한 흔적이 존재한 나라라고 평가되어진다. 그러한 자주성과 주체성이 예술을 향한 노력과 관심으로 이어져 신라와 같은 왕립음악기관을 설립하고 장려하는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전통적인 무교의식과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더불어 음악에서도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관기들에 의해 연등회에서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가 추어 졌다고 전해진다(박지은, 2006).

관기(官妓)들의 역할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중궁정재가 활발히 유입되어가면서 커져갔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로는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오양선, 연화대무, 곡파로 무보가 고려사(高麗史)와 악지(樂志)에 전하며 향발무와 학무가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기녀들은 천민 출신의 무당과 관청의 기녀와 관비로 당시 여악 담당기관인 교방(敎坊)에서 기예를 익혔으며 교방은 교방기(敎坊妓)와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는데 교방기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官妓) 중 색과 예가 가장 뛰어난 자로 가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교방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가무를 익혔다.

또한 지방기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열릴 시에는 교방기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문 기녀양성기관인 교방이 설치됨에 따라 기녀들은 한층 격식 있는 가·무·악(歌·舞·樂)을 정립하였다.

고려시대 안정된 정치로 인하여 궁중연희가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기녀들은 왕의 풍류를 돕거나 외교 사신들의 접대연에서 연희를 하였다. 연희의 형태는 점차 사치스러워져 사대부의 개인 연희시에도 기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기(地方妓)나 사기(私妓)에 의해서 사대부의 집안의 행사나 서민잔치 마당에 가무악을 공연함으로서 사대부 개인의 문화적 특성과 서민의 취향에 따른 다른 형태의 가·무·악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고려시대의 교방은 대중화되는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들을 위한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대비나 중궁전 또는 내명부 등의 여자들을 위한 잔치인 내연(內宴)으로 잔치가 구분되는데 이러한 잔치의 공연활동을 담당하던 왕립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진연청(進宴廳), 진찬소(進饌所), 풍정도감(豊呈都監) 같은 임시 관청에서 궁중잔치를 위한 행정적인 임무를 담당 했다(고재현, 2007).

공연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임금의 거동과 같은 의식 절차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공연과 잔치에서 반주음악과 함께 기녀들의 춤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정재 춤을 추기위해 기녀들은 창사(唱詞)와 춤사위 또는 구호를 장악원의 악사들로부터 지도 받았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교방의 체제나 제도를 거의 이어 받았으며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악무제도가 조선 초기부터 발달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녀들의 궁중연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의 기녀들이 올라와 공연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궁중에서 연행되는 정재공연을 지방의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중계자 역할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던 춤을 정재라고 칭하고 정재 무동과 정재 기녀로 무희를 구분 하여, 외연에서는 무동만을 내연에서는 기녀만을 구분하여 출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생차비(妓生差備)라는 일종의 교사로부터 궁중정재 뿐 아니라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지도 받으면서 교육이 보다 구체화 되었으며 학과 과목명이 제시되었고, 춤사위별로 전공자가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관기(官妓)를 경기(競妓)와 지방기(地方妓) 또는 외방기(外方妓)로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경기에는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의녀와 공조와 상의원의 침선비까지 포함된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들어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렸음으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똑똑한 관비를 선발하여 제생원에 소속시켜 글과 의술을 지도하였고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자들만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 궁중의 연희에도 참석 시켰다.

외방에서 여기가 올라오게 하면 폐단을 끼침이 많음으로 검소히 하기 위해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 하도록 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는 장악원(掌樂院)에서 여기들이 가·무·악(歌·舞·樂)을 연마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녀와 침선비가 평소에는 의술과 바느질을 연마하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가무에 참여했다.

순조 때에는 정재가 정리되어 정재의 종류가 5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에 달하였고 순조28년(1828)에는 외연(外宴)과 내연(內宴) 모두에서 무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한 순조29년(1829)에는 순조 즉위 30년을 맞는 진연에서 가인전목단을 비롯하여 보상무,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등 김창하에 의해서 다양한 정재 안무를 창작하였고 효명세자에 의해 창사를 지어 정재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절정을 맞은 정재의 활동은 궁중의 대소 연희와 나라의 행사에서 여기들에 의해 연희 되어졌다. 효명세자 때 융성한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이던 궁중정재는 훗날, 연희의 장소 및 연희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민중들에게도 선보이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현대에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이어지게 된다.

교방에서 여령(女伶), 여기(女妓)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던 여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의 유형에는 소속에 의한 분류로 관기(官妓: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 (家妓: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자유로운 여기)로 구분된다.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지방관에 적 (籍)을 둔 여기)로 나뉘게 된다.

또,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 기), 색기(色妓: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가 있으며,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 牌: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 이패(二牌:일패에서 타락 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 다.)로 나뉜다(김지은, 2007).

고려시대의 ‘교방’기구의 설치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교방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역에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성기숙, 2005).

라.

마. Ⅳ. 근대와 현대의 교방(敎坊)의 변천

1)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904년 신분제 철폐로 관기들은 신분이 자유로워졌지만 실질적인 관기의 해체는 1908년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관기들이 경시청 관할로 옮기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손유주, 2006).

1907년 12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과 1908년 5월 28일 횡성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서양식 극장무대 위에서 기생들이 공연한 춤 종목인 승무와 한량무를 볼 수 있으며, 이춤은 무극(舞劇) 형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말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는 상관없이 자주 거행되는 진연으로 서울로 뽑혀온 기생들이 증가하게 되며, 진연을 마친 기생들이 서울에 계속 머물러 기생 수는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그들을 관리할 ‘기생 단속령’이 1908년 9월 25일에 내려지게 된다. 기생 단속령 내용으로는 “기생이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를 하고 인가증을 받아야하며 그만둘 시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한다”. 등의 기생의 활동을 단속, 통제하고 경시청의 명령권 안에 넣고자 만든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직된 기녀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한성기생조합’이라는 기생 조합이 생겼으며, 그들은 국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에 절과 고아원 등의 연주회에 공연을 하는 등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이설희, 2009).

또한, 유부기조합(有夫妓組合)인 한성기생조합에 대항하여 다동기생조합을 정악원 학감(正樂院 學監) 하규일이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으로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생조합의 춤 교육은 장악원의 전임자, 민속춤 전문인, 은퇴한 노기, 선배기생 들이 관계하였다(김윤주, 2002).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기생의 활동은 경찰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일본 기생의 활동방식이 조선의 기생에게 스며들면서 기생들의 예술 활동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외래문화의 수입으로 권번 이전의 교방의 흔적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변신을 이룩해 낸 시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발판은 바로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1905년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자 1908년 여악에 소속됐던 관기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방황하던 기생들은 일본 경시청을 통해 하달된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는 조직에 묶여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은 1909년 경시청에 의한 ‘창기 조합조건 명령건’이라는 기생 단속령의 시행과정에서 생겨났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에서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전화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하규일의 수제자로 당시 명기(名妓)로 알려졌던 평양출신 이난향이 서울 입성과 기생 입적 경로 미 활동 내력을 회고한 글에서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였다.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때였다.”라고 1970년 12월 25일 중앙일보에 기재된 내용이 전해진다(성기숙, 2005).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던 권번은 서울의 경우, 한성권번・대정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 등이 있었고 대금・금천・동래・창원・광주・수원・평양・진남포・개성・안성・연기 등에 권번 또는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은 대부분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바로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전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이 존재했다. 평양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권번이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지역이다. 진주는 한말 정현석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생들에 의한 다양한 유형의 춤이 전승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진주교방 역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후에 생겨난 것이 진주권번이다(성기숙, 2005).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예술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 등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던 분들이 대부분 동래권번 출신이거나, 마지막에 동래권번에 모여든 예인들이었다고 한다.

2)

3) 2. 현대 교방(敎坊)의 흔적

교방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 발해의 태상사를 만나게 된다. 국가의 통치이념과 운영에 있어 예술의 가치와 유용성의 통찰이 삼국시대에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왕립으로 음악전문기관인 음성서(音聲署)와 태상사(太常寺)가 설립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처음 교방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은 음악과 춤의 전승기관으로 건재했었다. 역사의 급격한 변화와 나라의 기운이 모든 것을 뒤바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명칭이 옮겨 가지전까지 교방은 오랜 시간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전폭적으로 책임지던 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번으로 모든 기능과 존립이유가 변환의 시기를 겪은 후, 권번은 영롱한 전통문화예술의 단절의 기로에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필요의 역사가 되어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잃기 쉬었던 우리전통예능의 교육의 산실 역할을 권번은 잃어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주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교방의 관기들이 대부분 권번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통은 끊겨졌을 것이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연희를 목적으로 예능인을 양성하던 교방의 흔적은 단연 국립국악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에서 교방은 현대의 현재적 모습인 국립국악원으로 1951년 설립되어졌다. 국립국악원은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진흥과 발전에 있어 다양한 노력과 시도로 국가의 대표적 ‘흥’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다.

교방의 역사를 짊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능의 교육으로, 연희기관으로 그 소명을 다했던 권번은 장악원이 해체 된 후, 이왕직 아악부, 구왕궁 아악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에 있어서 가교적인 숨은 역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사라져버린 교방의 기능을 다했던 권번이 있었기에 훗날 자리하게 된 국립국악원이 예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온전한 형태미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정악과 민속악을 전승하여 보존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설립된 이 기관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송방송, 2006).

바.

사.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사에 춤의 비중에서 전통춤 영역에 존재하는 교방, 권번, 기생들의 역할이 빚어낸 공로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교방의 역사와 변천사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각 시대별 교방의 존재와 역사, 기능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교방의 시작점은 한반도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고 나라의 기운이 뿌리를 내리던 삼국시대로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먼저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왕명으로 존재했으며 발해에는 태상사(太常寺)가 신라처럼 왕립음악기관으로 기록되어져있었다.

둘째, 정확한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궁중정재의 활동상을 다 소화해낸 교방은 교육과 연희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해낸 곳이다. 궁내의 모든 대소연희에 활약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교육이 결국엔 예술성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말, 열강들의 어지러운 문호개방과 정치적 혼탁 속에 예술의 목적과 가치가 국가차원에서는 희석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예술성의 애환은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순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넷째,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참고문헌

 

고재현. 2007.「근대 제도개편에 따른 교방 및 기방무용의 변화양상과 특징고찰」, 용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지은. 2007.「조선전기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여기의 변화양상 고찰」,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박지은. 2006. “官妓制度를 중심으로 한 기생(춤)의 기원 및 변천에 관한 고찰”. 『한국무용사학』제5호, 한국무용사학회.

성기숙. 2005.『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민속원.

성무경 역주. 2002.『敎坊歌謠』, 보고사.

송방송. 2006.『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안성희. 2005.「권번 여기 교육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설희. 2009.「‘조선미인보감’에 나타난 기생조합과 권번에 관한고찰」, 한국예술종합 학교예술전문사과정.

임수정. 2008. “한국 여기검무(女妓劍舞)의 예술적 형식”,『공연문화연구』제17집,

한국공연문화학회.

임신화. 2007.「권번과 개인학습의 교육과정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한하영. 2009.「권번여기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The Evolutions of Gyobang

 

Ye-jin Kim (completed Ph.D. course work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In searching the predecessor of Gyobang, the Muyongchong murals of Goguryeo from the Three Kingdoms era suggest that dancers were involved with the various affairs of the state even before the Three Kingdoms era. The historic origin of the name Gyobang can be traced to Daeahkseo, which w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Goryea era, and the musicians of Kwanhyeonbang. The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music and dance while involving with the court dance. The name of Gyonbang changed from Gyogang to Gyobangsa, Gyobangi and some other name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era. Meanwhile, however, there was no material change in the overall substance and function of Gyobang over the centuries.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or geisha system in 1907, scattered gisaeng constituents got together and formed 'Kweonbeon'. Kweonbeon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preserving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especial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s suc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needs to be assessed in a new light.

 

As the state-wide unions of gisaeng, Kweonbeon played a big part in withstanding the Japanese attempts at decimating traditional cultural norms and practic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in laying out the found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as we know and relish today.

 

Gyobang was a public entity in charge of music, dance, and songs, among other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ose who belonged to Gyobang were named Yeogi, Yegi, Yeoahk, and Yeoryong. In terms of affiliation, Gyobang can be classified into Kwangi, Sagi, and Gagi; in terms of region, Kyeonggi, and Jibanggi; in terms of function, Yegi and Sekgi; and, finally in terms of hierarchical level or class, Il-pae, E-pae, and Sam-pae.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system, Kweonbeon first started off as Joyang-gurakbu in 1909 and again as Chosun Jeongahkjeonsupso in 1911. Afterwards, Kweonbeon was operated as Dadong-johap in 1913 as a spin-off division of the Chosun Jeongahkjeonsupso. Kweonbeon continued to grow as Kwangyo-johap, and, in 1914, the era of Kweonbeon took off through Chosun Kweonbeon, Hanseong Kweonbeon and other entities. Numberous Kweonbeon existed in Seoul and other provinces, and, until recently, Dongrae Kweonbeon had produced sizable traditional artists.

 

In conclusion, Gyobang served as a public purveyor of traditional cultural practices and values for centuries, and then laid out the foundational roots for the function and roles of Kweonbeon following the end of the state gisaeng system.

 

As can be seen from pertinent historical traces, Gyobang is an institution par excellence for training, disseminating, and passing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for ages lon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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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교방춤 등 전통 춤을 현대시각으로
수성아트피아 어버이날‘조율 TUNE’공연

 

 
 

 
수성아트피아가 어버이날 기획 공연으로‘조율 TUNE’을 8일 오후 7시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연다. 이번 공연은 ‘매혹’‘구도’‘신명’을 주제로 한국 전통 춤의 대표적인 명인들과 현대무용가들이 춤사위를 나누게 된다.

이번에 공연될 작품은 영남 교방춤, 승무, 밀양백중놀이 등 시간을 넘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살아있는 전통 춤의 주제와 미감을 현대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다.

박경랑이 보여주는 영남 교방춤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인집단인 기생들의 춤으로서 기품 있으면서도 고혹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반면 김은희는 이 미감을 현대 사회의 도발적인 이미지로 새롭게 해석한 창작춤을 선보인다. 두 번째 무대는 채상묵과 현대 무용가 이용우가 ‘구도’라는 화두를 파격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 무대인 ‘신명’은 밀양백중놀이의 하용부와 현대무용가 차진엽의 만남이다. 하용부의 북춤, 범부춤은 토속적인 흥취를 한껏 느끼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와 고전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공연의 음악은 정영만이 이끄는 ‘남해안 별신굿 보존회’ ‘김주홍과 노름마치’ 음악극 집단 ‘바람곶’이 맡았으며, 소리꾼 장사익이 출연하여 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VIP석 5만원, R석 4만원, S석 3만원(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053)666-3300, 티켓링크.

조두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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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임 지 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전통춤의 구조적, 형태적 미적고찰은 나아가 전통춤 전반의 철학적 구조 연구에 초석과 반석 및 발전의 한 영역이 되리라 사료된다.

영남교방청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의 내재와 함께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문화예술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으로 추어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현재적 시점에서 가까운 조선후기에 집중하여 교방춤의 발생요인을 살펴보면서 영남교방청춤이 가지는 춤사위의 특질과 형태적 측면에서 보여진 미적 특질을 고찰해 보았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의식적 환기를 일으키며 연구되어 지고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변혁에 상응하는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미비하고 춤의 기록 또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본 연구자는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작게나마 부분적인 분석과 춤의 미적분석 연구를 통하여 근원적 미의식을 발견하고자 한다. 또, 이를 살펴봄으로써 전통춤의 미의식 영역을 명확히 파악하여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이 영남지방의 지역성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하듯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어 움직임적인 특징도 춤 속에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외에도 음악과의 혼연일체, 다양하고 풍부한 동작소의 존재감,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 작품의 무대 과학화,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 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신체의 사용법에서 기존의 전통춤이 표현해내고 고수해내는 신체운용법을 확연히 뛰어넘는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교방문화의 시작점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으면서도 면면히 잘 고수해 온 영남교방청춤만의 전승의 세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핵심어 : 영남교방청춤, 교방청,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2. 연구방법 및 제한점

2. 영남교방청춤의 외면적 특징

Ⅱ. 교방청춤의 개념

3.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적 특징

1. 조선조 후기 교방춤 발생요인

Ⅳ. 결론

2. 교방청춤의 배경

참고문헌

3. 교방청춤의 변화양상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춤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그 내면에는 시대가 풀어내는 역사와 지배원리에 따른 사상적 영향, 그리고 수적으로 우월한 민중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춤의 구조 속에서 보여 지는 특성은 민족의 정서와 시대적 배경이 바탕을 이룬다.

우리민족의 특성으로 자주 등장하는 ‘한(恨)’은 한으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한을 풀어내는 과정을 통하여 소극적인 정서와 적극적인 정서가 공존하는 상충적이고도 호환되는 이중구조로 성립되어있다. 소극적인 정서는 맺히고, 삭히고, 움켜 안는 등의 정지된 상태로 본다면 적극적인 정서는 포용하고 풀어내고 떨쳐내는 긍정적인 자세로 움직임이 많으며 적극적인 힘을 표출시켜 예술적으로 충분한 승화를 이루어 숭고의 미로 완결되어진다. 이는 춤이 단순한 행동들의 영속적 나열을 상위하며 동작과 행위에서 표출되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표출하고자 의도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내면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방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을 내재하고 무엇보다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운파 박경랑에 의해 승화되고 있다.

교방춤은 한국 민속무용 가운데서도 기방춤의 대표작으로 우리춤의 멋과 태,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춤으로서 춤 안에는 우리 민족의 한의 속성뿐 아니라 흥이나 신명과 같이 상반된 의미가 같은 선상에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의미의 한과 신명이 어떻게 같은 춤 안에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본 연구는 한국민속춤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표명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방법으로서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는 한국민속춤의 지향하는 바를 표명함에 있어서, 현재 전통춤계의 밀도있는 춤으로 호평받는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과 점진적 해석으로 한국민속춤의 본질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근래 들어 널리 알려지며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어 지고 있기는 하나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나아가 우리 민족문화의 특성을 재점검, 정비할 시대적 필요성에 기인하여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총체적 미적분석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전통춤의 지표로 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본 고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찰하여 보고 그 춤이 상징하는 미적특질이 내포하는 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에 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체험하여 학습하는 연구자로서 본 연구를 통하여 제대로 된 춤의 표현원리의 지각과 각각의 춤사위와 춤의 흐름이 지향하는 바를 파악하여 우리춤의 생명력, 역동성, 순박함 등의 형용할 수 없는 철학적 본질을 찾고자 하며, 이로 인해 영남교방청춤의 원형을 찾고, 원활한 전통춤 보급에도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1.2.2.

1.2.3. 2. 연구방법 및 한계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첫째,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학습하고, 춤의 상황을 기록 및 녹취하여 전체상을 파악한 뒤, 춤의 부분적 특징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영남교방청춤 전 과정의 이해도를 위해 ‘2009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白衣百舞)’ 공연영상을 보조자료로 삼았다. 또, 운파 박경랑선생과의 수차례 면접과 무대공연 및 수업참관, 평상시 관찰을 통하여 춤의 특징 및 세부사항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둘째, 주제와 관련 있는 참고서적 및 논문, 선행연구자료 등을 참고하였으며 관련문헌이 없는 경우에는 그 분야 전문가들과의 면담을 통해 수행하였다.

셋째, 영남교방청춤의 숙련된 춤꾼 및 학술적 연구자 3인 이상과의 지속적인 연구토론으로 삼중검증법을 택하여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의 치우침에 따른 연구의 오류 범주를 좁혀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점은 추후 지속적이고 저변화된 연구로 보완 해 나갈것으로 예견된다. 또한 이번 연구를 계기로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다양한 후속연구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1.3. Ⅱ. 교방청춤의 개념

 

1.3.1. 1. 조선조 후기 교방청춤 발생요인

교방기(敎坊妓)는 대부분 미(美)와 재예(才藝)를 겸비한 관청의 기생과 관비 또는 무당 등으로 된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예악의 담당기관이며 교습소였던 교방을 통하여 가무(歌舞)를 전문적으로 교습 받았다.

원래는 무녀는 신 그 자체였으나 신격과 정치권력의 분화과정에서 퇴화함으로써 신에 봉사한 무녀가 지방의 토호와 결부되어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녀가 되고 무악의 예능적인 면에서 익힌 예기로 권력층에 예악의 가척(歌尺), 무척(舞尺)으로 봉사하는 기녀가 되는 것이다.

기녀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 국한한 교방기(敎坊妓)가 표면적이지만 지방 관청에 속하는 기녀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지방의 큰 고을이나 감영, 주군에도 상당수의 관기가 배치되었다.

고종 때는 기녀들이 어느 시기에 못지않게 자주 진연정재를 베풀었고 출연한 기녀나 무동들은 행사가 끝나면 귀향하여 궁중에서 새로 익힌 가무를 동료들에게 전수시켰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궁중의 가무(歌舞)가 지방에서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창우 출신들의 무동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이 교방청에 들어가 선생이 되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된다. 이와 같이 창우 출신과 기녀들은 선비취향의 춤과 평민취향의 춤을 조화롭게 융합시켜서 근세 전통춤을 형성한 것이다.

조선후기 19세기부터는 넓은 광장이나 마당에서 추었던 것이 상업화 내지는 도시화됨에 따라 한층 공연예술로 급속히 변화하여 춤판이 옥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부잣집 대청마루를 무대화로 하는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춤으로서 자연히 뛰는 동작이 없어지고 정적 지향의 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소리광대의 판소리판에서도 추는 경우가 많아짐으로서 그 춤들이 판소리와도 상호관계가 있는 공연예술로서의 고전적 춤이 된 것이다.

교방청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였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산조, 삼현육각과 같은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교방청춤은 서민들의 심성과 양반들의 심성을 조화시켜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춤이라 할 수 있다.

1.3.2.

1.3.3. 2. 영남교방청춤의 배경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 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 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활달함과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춤의 성향을 지닌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방은 한마디로 전문예능인의 교육기관이자, 내·외의 연희에서 악(樂)·가(歌)·무(舞)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렇듯 교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예능기관이며 그곳에서 시대상을 반영한 악(樂)·가(歌)·무(舞)이 발전되었으며, 그 명맥을 오래도록 유지하였다고 하겠다. 나중에 권번과 기생조합으로 그 명칭과 기능이 다소 분리 발전되었지만, 예능을 관장하고, 예능을 교육하고, 예능을 향유하였던 기관이라는 점에는 상이점이 없다.

 

1.3.4. 3. 영남교방청춤의 변화양상

교방은 쉽게 말해서 정부관하소속이었기에 개성, 평양교방부터 남쪽으로 모두 소속관청이 있었다. 다만 시대적 영향으로 가장 오래 잔재해 있던 교방이 진주, 고성, 통영, 마산, 부산, 대구를 포함한 영남권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중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던 것이 부산 동래권번이었다. 그러기에 교방청에서 교육받은 관기들이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여러 곳으로 권번(기생조합, 예기조합)소속의 기방으로 전속되면서 이동이 많았을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 영향으로 영남권의 교방에서 추어오던 춤사위의 흐름이 엇비슷하거나 동일한 춤사위가 많으며 박경랑의 스승 또한 이곳저곳을 다니던 이름 높던 한량이었기에 총체적인 교방의 입춤 ‘영남교방청춤’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활발히 보급, 전수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그 인지도를 끊임없이 드넓히고 있다.

또, 영남교방청춤은 가계도의 명맥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정통성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초대문화재였던 故 김창후 선생이 박경랑의 외증조부이며,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에게로 이어지는 맥을 지금은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파 박경랑은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을 찾기 위해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 이었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동고동락하면서 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시키는 영남교방청춤에 대한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를 잇고 있다.

 

1.4. Ⅲ.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93년 제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대상, 1994년 제12회 개천 한국무용제 특장부문 대상,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을 비롯한 다수의 수상을 거쳐 제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무로서의 위치를 굳혔던 운파 박경랑은 타고난 춤꾼이며 현재 영남교방춤을 보급하고 있는 명무이다. 경남고성 출신으로 고성오광대 초대 문화재였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잇고 있는 춤꾼으로 4세에 춤에 입문해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 황무봉, 故 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에게서 전통춤과 발레 등을 사사한 운파 박경랑은 경남도립무용단, 창원시립무용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로 우리 춤의 연구·전수·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1.4.1.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영남교방청춤의 춤 특성을 보면 곡선이나 원형의 무대진행법을 사용하였으며 사방의 어느 방향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원형적인 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뒷모습을 보여주는 동작은 보통의 전통춤에서 나타나는 초연한 모습이나 담담함 또는 한을 승화시키는 미보다는 ‘뒷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관객을 의식하고 일면 교태스럽기까지하며, 또한 사대부의 귀족적인 취향과 멋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춤은 닫혀진 좁은 공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객의 시선을 의식한 듯 각 동작의 움직임이 짜임새 있게 명확해야 하며 많은 기교와 기술이 필요한 춤이다.

영남교방청춤은 다른 전통춤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단박에 휘어잡는 매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춤이다. 그 매력을 살펴보면 대체로 간략하게 다음의 몇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첫째, 음악과의 혼연일체이다. 보통 우리는 악(樂)·가(歌)·무(舞)라 칭한다. 악이 노래가, 춤이 서열화 된 것도 아니요, 어느 한 대복 처지거나 앞서거나 하지 않고 정삼각형의 도형을 이루는 것처럼, 악(樂)·가(歌)·무(舞)는 그렇게 다함께 어우러짐을 표출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이다. 한국전통춤의 특징을 말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분이 반복성이다. 이 뜻의 이면에는 다양한 춤태의 부재가 숨어 있다. 다른 춤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동작소, 춤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다양한 표현체의 개체수가 넉넉한 동작소의 저장고를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다른 전통춤보다도 음악의 한 장단 안에 존재하는 춤태가 현격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이다. 이 부분은 전통문화예술의 미래의 존재성과 생명력을 가늠하는 중요요소이다. 느림의 미학과 경쾌함의 적절한 충족, 이 둘의 완급조절이 현시점에서 전통문화예술이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볼 수 있겠다. 영남교방청춤은 느림으로 일관되지 않으며, 또한 빠름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영남의 지역적 맥과 교방청춤의 맥을 살리면서도 현대 대중들의 전통문화예술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을 해소시키는 변모를 적절히 배합하는 춤태를 감각적으로 지니고 있다.

넷째, 작품의 무대 과학화이다. 현대 예술은 서구의 무대예술인 프로시니엄의 무대를 기본형으로 하여 많은 무대장비의 첨단 과학화를 수용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춤이 되고자 노력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안방문화의 사방위 방향성을 고려하는 춤태에서 프로시니엄 무대로의 전환을 고려하는 춤태로의 다각적 변화를 이룬 춤이다. 프로시니엄 무대의 특성과 관객의 시선을 전적으로 고려하여 몸 방향과 팔 사용법에 사선의 선사용을 감각적으로 이루어냈으며, 시선의 사용 역시 맞물려가며 춤꾼의 신체활용도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영남의 활달함에 남성성과 섬세함의 여성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다섯째, 네 번째 항목의 세부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겠는데, 몸 사용법의 차별화이다.

 

1.4.2.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외형미

영남교방청춤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하며, 곡선과 직선의 조화, 여성미와 남성미를 표출하며 몸통 전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춤의 강·약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즉, 다른 교방춤과는 달리 활달하면서도 휘감아 들어가는 허리의 곡선, 어깨의 곡선미가 여성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춤이다. 또, 호흡은 소리의 호흡과 동일하게 하여야 한다.

판소리의 호흡법과 민요풍의 토속적인 호흡법이 병행되어 단전에서부터 공굴려 깊이 있게 끌어 올리면서 대삼소삼(大三小三)에서 다시 호흡의 세분법이 음악의 세분법과 일치하여야 움직이는 듯, 정지되는 듯 하는 이 춤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다.

시선은 어느 춤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춤은 반드시 시선을 던지면서 가며, 턱선과 어깨선이 거의 일치되면서 자연적으로 턱선이 낮게 드리워지고 다소곳한 느낌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렇게 할 때 몸의 동작선도 곡선미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영남교방청춤의 여러 특징 중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크게 상·하체의 움직임으로 구분하면서 의상이 주는 외형미를 주력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상체

① 상체의 손사위 : 활궁체 사위, ,, 훼치기 사위, 터벌림사위(일자로 뻗기형, 사선형), 휘몰이사위, 학체사위, 버들가지사위, 회뿌림사위 등이 상체 손사위의 위주이며

손동작들은 두 팔을 펼치며 크게 추어야하며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손목놀음 또한 이 춤의 주된 특징들이다.

② 어깨 사용법 : 신체역학 측면에서의 어깨는 팔과 몸통을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과 함께 팔의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부위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사선의 팔사용의 기본형을 어깨에서부터 다르게 사용한다. 어깨를 누르면서 가하는 롤링의 변화는 팔의 각도와 높이를 조절하게 된다. 이 점이 좀 더 시원한 상체의 표현, 활달함과 섬세함이 교차 표현되는 점이며, 안정감 있는 상체의 고저 변화를 이끌어 낸다.,

③ 시선과 턱과 어깨의 조합 : 영남교방청춤에서 시선과 턱과 어깨의 세 신체 부위는 동작 가운데 합일점을 보여주는 부분이 등장한다. 시선을 지향하는 춤태 가운데 시선과 턱과 어깨의 합일점을 보여주는 동작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소곳함과 세련미의 공존일 것이다. 춤의 향기를 담당하는 듯 한 이 세 신체부위의 합일은 고혹적인 매력을 내적발산하는 영남교방청춤의 일등공신과도 같은 부분이라고 본다.

④ 허리사용법의 다양화 : 다양한 춤사위의 급감과 함께 신체 부위의 사용법, 빈도의 급감이 허리사용법이다. 신체 중심의 정점인 허리사용법은 다른 춤에서는 이제는 보기 드문 신체 활용법이 되어버렸지만 영남교방청춤에서는 세밀하게 잘 나타나 있다. 활궁체사위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선의 방향성에 또 다른 매력을 첨가하는 신체 사용법이 허리사용법이라고 하겠다. 허리 양 옆의 굴곡 있는 선의 사용법이 쉬운 신체사용법은 아닌 것처럼 다양한 허리사용법의 백미는 고혹적 매력의 발산을 넘는 광풍매력의 발산이라고 칭할 만큼 관객에게 색다른 깊이가 있다.

몸을 사용하는 법에 있어서 교방청춤은 굉장한 유연함을 필요로 한다. 하체는 객석정면을 향하고 허리를 비틀어 상체는 감았던 손을 천천히 펴면서 태극을 그려내며 천천히 회전하는 동작을 비롯하여 모든 동작소에는 유연함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또, 유연함에 이어 자진모리의 빠른 장단에서는 흥과 신명이 어우러지는 동적인 동작을 연출하여 민첩한 기교 역시 요구되는 춤이다.

⑤ 손목사용 : 맺고 풀고 어르는 동작을 넘어 강·약의 완급조절이 손목과 손끝에서 나타나는데, 손목의 사용법에 각도가 부여됨으로 그 묘미가 살아난다. 역시 여느 춤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풀고 조이고의 자연스러움의 교차가 손목에서 나타난다.

2) 하체

① 하체움직임 : 교방이라는 의미와 함께 안방춤이였기 때문에 아주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춤의 묘미를 살리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앗아갈 수 있고 흥과 멋을 전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아주 미세한 버선발의 움직임과 섬세한 디딤과 작은 움직임을 주는 발디딤은 작은 동선을 이용하면서 크게 보이는 굴신법과 호흡법을 일치 시키는 순간 미묘한 동선의 차이가 나타나는 춤이다.

② 발목 사용범위 강화 : 일반적인 춤보다는 발목사용에 있어서 각도의 범위가 큰 편이다. 이러한 사용법은 급격한 신체의 높낮이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다. 물 흐르듯이 안정감 있게 변모하는 신체중심과 신체의 고저 변화는 각이 큰 발목의 사용법에서 찾을 수 있는 점이다.

③ 발바닥의 세분법 : 발은 다리의 자유로운 이동과 지지에 첫 단계와 같다. 이러한 첫 단계의 발에서 발바닥의 세분법은 춤의 중심을 좀 더 잘게(여러개) 쪼개어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이로 인해 춤의 안정성이 더 강화되고, 호흡 또한 세밀하게 표현 할 수 있게 되는 원천의 힘이다. 영남교방청춤에서 발바닥의 세분화된 표현법은 어찌 보면 다양한 동작소와 맞물려있기에, 다양성의 동작소, 춤사위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원천이라고 본다.

④ 발의 움직임 : 발사위에 있어서는 발을 들어 살짝 돌려 뒤로 딛는 동작을 비롯하여 디딜방아 사위, 좌·우 달걸음사위, 홍두깨걸음사위, 덧배김사위, 외발들기사위, 용트림사위(용이 물에서 몸을 휘감아 돌며 승천하는 느낌의 공회전하는 동작)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첫 박에 솟아올라 잔걸음으로 걸으면서 숨을 내려 앉혀 다시 첫 박에 맺는 것으로 관객의 춤의 즐거움, 호흡의 맛과 멋을 동시에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⑤ 신체 각 부위 : 영남교방청춤은 춤 안에서도 즉흥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흐르는 대로 춤은 추어야한다. 몸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춤을 추는 사람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끄럽지 못함을 느낀다면 영남교방청춤 안에서 그것은 정확한 동작의 완성도가 결여된 것이다. 몸의 중심인 골반이 빠지면 춤의 자세는 흐트러진 상태이기에 골반을 시작하여 등은 곧아야하며 가슴(흉부)은 안으로 감기우고 어깨선은 흘러야 하며, 상·하체가 동작의 형태미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고는 특별한 동작 외에는 분리되면 되어서는 안된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모든 신체의 기운이 같이 흘러야 정확하게 맥의 풀고 맺음을 확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교태미가 흘러나와야 하며 춤을 보면서 마음을 앗아 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특성을 살펴보면 먼저 무대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항상 관객을 존중하는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무대진행법에 있어서 무대 중앙에서 시작하여 긴장감 있게 천천히 제자리에서 추다가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하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왼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한다. 다시 무대 중앙에서 무대 중앙 정면으로 전진하다 다시 제자리로 이동하는 등 대부분의 관객을 향한 사선이나 직선, 원형을 사용하여 관객이 춤을 감상하기에 가장 편안한 선을 사용하고 있어 관객을 존중한 춤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순한 선을 사용하는 무대 사용법은 영남교방청춤을 더 깨끗하고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꼿꼿함과 숭고함이 함께 깃들어 있어 깊이 있고, 감성적이다.

 

3) 의상

이 춤의 춤사위에서 가장 두드러진 동작은 부채를 드는 장면이다. 무대 중앙에서 부채를 들어 춤을 추는 것은 이 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와 함께 이 춤의 외형적인 미는 의상과 부채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진 1, 2>와 같이 춤의 의상을 살펴보면 운파 박경랑은 검정 겉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주의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공연의 의미와 계절별로 색을 달리 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속바지 두벌, 허리 묶는 속치마 두 벌, 겉치마, 저고리, 천노리개를 덧댄다. 다른 민속무용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검정치마에 노란 저고리와 천노리개를 매치하는 것은 시각적 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며 색사로 수를 놓은 천노리개를 더함으로 복식의 미를 더 화려하게 장식한다. 또, 춤에 사용되는 부채는 교방에서 전해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특징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글체는 놀음판에서 선비가 춤을 보고 써주었을것을 전제하에 운파 박경랑이 고정이미지화 시켰다. ‘황룡백학무(黃龍氣白鶴舞)’ 라는 의미로 ‘황용의 날아갈 듯 한 기운을 받아 백학이 춤춘다.’ 또는 ‘백학이 용과 같이 힘찬 기운으로 춤추며 움직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춤은 기운으로 추는 것이고, 힘으로 추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백학처럼 부드럽게 긴 선을 나타내며 곡선과 유연함을 가르친 뜻이다. 또한 이면에는 사랑의 정표를 상징하기도 하며 부채를 살짝 펴고 얼굴을 가리면서 이어지는 동작의 의미는 여러 가지의 상징점이 내포되어 있다. 순백의 기면(器面) 위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려 만들어냈던 청화백자와 같이 부채를 펴 들어 얼굴을 가리며 이어지는 동작들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하고 도도한 품위가 흐르는 청화백자와 같다.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쳐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중도를 지켜 균형을 잃지 않는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우리의 토속 맛이 절로 베어 나오며 교방의 멋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상에서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춤은 흐르는 듯 한 유연한 선이 춤동작의 민첩함을 더하고, 자태를 뽐내듯 강렬한 빛을 발하는 청화백자와 같이 그 당당함이 기방예술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숙련된 고도의 춤 동작과 기술, 그리고 화려하고 귀족취향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

 

<사진 1,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1.4.3. 3.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내면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드러나지 않고 삭혀도 내면에 흐르고, 젖어드는 멋과 흥이 호기심을 알 듯, 말 듯 유발해야한다.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내면의 감정표출이 분명해야하며 각자의 생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속내음이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내면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박경랑의 춤을 “살아있는 영혼이었고 그 춤이 만들어 내는 절정과 내적 에너지는 관객의 혼을 끌어 올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교방청춤을 비롯하여 춤을 추는 사람은 예(禮), 법(法), 도(道)를 갖춘 의식 있는 춤이 되어야하며,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운파 박경랑은 언급했다. 춤은 수련의 내공을 쌓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禮), 법(法), 도(道)에 따른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했다. 또, 천박한 이미지를 주어서는 안되기에 조선의 기생들은 가(歌), 무(舞), 악(樂), 시(詩), 서(書), 화(畵)를 잘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선비들과의 교류가 가능하였듯이 모든 예능적인 면에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어야 했다.

 

1) 정서적 측면

이제까지 언급한 내용들을 전제로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을 살펴본다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언어의 본질처럼 기방적인 것이며, 기교가 넘친다. 둘째,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셋째, 우리춤의 기본 정신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다. 넷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 다섯째,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미적 특질 가운데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세계에 함축된 정서적 측면을 언급해보는 것은 한국 민속무용의 특징을 밝혀보는 과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민족정서를 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데이비츠(Davitz)는 “정서의 정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의 본질 때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정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정서의 정의를 ‘행동하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외적표현과 내적 감각과 관련된 복합된 인식상태’로 규정짓고자 한다. 이에 따라서 민족정서를 춤으로 그 민족이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정서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성에 나타나는 한과 신명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정서라 할 수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무수한 외세의 침입 속에서 한이 맺힌 민족이며, 양반제도, 노비제도 등을 통해 사회의 하층계급 또한 한을 간직한 채 살아 왔으며, 남존여비의 불평등한 가치관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이 있었다.

계층적인 핍박과 문화적인 억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사회의 멍이 되고 맺힘이 된다. 즉 응어리진 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파 박경랑은 춤으로서의 심리적인 해방감, 생리적인 발산에 사회적 자유 등과 같은 풀림의 현상이 극대화되는 현장에서 다 같이 해결 될 수 있음을 뜻하여 영남교방청춤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즉, 춤을 통해 한이 풀리고 흥이 있고, 정이 되살아나고 신명이 솟는다. 영남교방청춤의 기능은 종교성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추어지고 있다. 우리춤의 미적 특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요소인 소위 예(禮), 법(法), 도(道)의 모습을 현시한다. 또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곧장 정(靜)·동(動)의 관계에 조용된다. 고요하면서 그 고요가 단순한 죽음의 고요가 아니라 무수한 생명력을 내포하는 역동적 고요, 곧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 움직임 속에 무한한 고요를 내포한 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 갖은 뜻을 다해 추는 춤”이라 그는 언급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베어 나오게끔 자연적인 멋으로 추어져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밖에도 “직접 춤을 추는 춤사위의 태도는 다소곳하면서, 정갈하고, 단아하면서도 도도하게 버들가지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바람에 거센 파도가 일어도 부서지지(흐트러지지 않는)않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으로 추어야한다.”는 그의 말 속에서 춤의 미적 특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적 자연주의를 즉흥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고요’과 ‘움직임’의 역설적 관계는 정서적 측면에서 보여 지는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임을 알 수 있다.

 

2) 지역적 측면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영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지니는 춤사위의 특질과 미의식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사료된다.

우선적으로 경상도라는 지역은 야류를 비롯한 경남농악, 학춤, 한량무 등이 발달되었던 지역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많은 예능인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예술 또한 널리 보급,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다.

영남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면 정교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부드럽고 굴곡이 많고 남성적인 수식과 기교가 많다. 또 장구장단의 경우 장단의 붙임새에 변화가 많으며 사설과 장단이 서로 엇물리는 엇붙임을 많이 쓴다.

해안지방에 위치한 영남지역은 지방색이 강하여 농악에서의 가락도 상당히 빨리 몰아내며, 진모리(덧뵈기) 가락이 많고 빨라서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준다. 그와 함께 향토적이며 소박함을 내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영남지역은 보통 음악이나 춤에 있어서 생동감과 뛰어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춤동작은 나긋나긋하기보다 민첩하며 세련된 편으로 개인놀음이 발달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소리의 특징과 같이 춤에 있어서도 잔기교가 많고 변화가 다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로움을 자아내며 엑센트가 강하게 표출되어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굴곡이 많아 전체적 흐름이 단순함과 평면적인 선율보다는 입체적 선율로 보여 지는 것이 특징이다.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한마디로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다.

이러한 음악의 지역적 특성들이 춤에서도 그 지역색으로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지역성이 내포된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감칠맛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또, 고도로 다듬어진 전형적인 기방예술의 산물로서 춤사위의 기교가 뛰어나며 한과 멋과 흥을 다른 어떤 춤보다 몸의 사용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춤의 기법에서도 호흡을 맺고 푸는 춤사위의 빈도수가 많이 드러나는 점, 그 외에 발끝, 손끝, 시선, 몸통사용 등 섬세하게 마무리 되어지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교방춤에 비해 춤사위가 많고 까다로운 편으로서 부채의 테크닉과 발놀음이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그의 춤의 멋은 정교한 발디딤과 다양한 몸 사용법에 있으며 깊은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출발시키고 절제하는 호흡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서 느낄 수 있는 우아미와 절제미를 나타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내면적 상징성은 호흡과 발디딤을 통해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흡과 발디딤은 이 춤의 정적인 특성에 역동성을 더해주는 요인으로서 발디딤은 발뒤꿈치, 발끝, 발허리의 세부분이 각각 섬세하게 움직여져 선명한 정확도를 보여준다.

또, 용트림사위를 보면 용의 용트림처럼 세찬 힘으로 곡선을 그리기도 하는 남성성과 학체사위와 같이 새의 날개짓처럼 가볍게 허공을 가르기도 하는 여성성의 교태로움이 더하여 남성성의 힘 있고 우직한 면과 여성성의 기교스러움이 모두 갖춰진 복합적 요소를 잘 조화시킨 춤태가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특징이 잘 어우러져, 음과 양이 잘 조화된 춤이며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게 한쪽으로 쏠린 춤사위가 아니며 상체는 남성적인 활달함이 강조되고 하체는 여성적인 섬세함이 강조되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춤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도도하고 가볍지 않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둔탁하지 않는 춤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러한 영남지역의 특성은 곧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특성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형태적 측면

교방청춤, 안방의 춤은 무대의 격식이 없는 춤이었으나 보는 이가 자리한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무대화 되어가는 우리전통공연은 극장형식에 맞추어 삼면(앞, 양측면)에 따른 춤의 감상척도가 거의 비슷해야만 그 춤동작을 균등하게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기에 일찍이 박경랑교방춤은 동작의 무대방향에 따른 동작의 형태미는 이미 미래를 예측하고 정해진 것 같다.

겉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정지 상태이면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움직임이 하나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 즉 집중된 동작이 불러일으키는, 순간적인 일탈과 파란으로써 일상적인 시공간을 미적시공간으로 자리바꿈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겉으로는 빙산의 일각만 보이면서 속으로 알 수 없는 덩어리를 숨쉬고 있는 것과 같은 침묵적 내면의 역동성이다.

1.5. Ⅳ. 결론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서로 바르게 교감하는 가운데 행복해질 수 있는 춤이며, 무참히 짓밟혀도 살아나는 끈끈한 생명력을 가지고, 삶에 대한 은근한 역동성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어울리는 기기묘묘한 춤으로, 약함과 강함이 조합된 중성적인 춤이다. 풍속화속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박한 서민적 정서와 조선조 후기의 교방춤을 현대에 이르러 무대화시킨 운파 박경랑의 춤 무대에서 보여 지는 교감을 토대로 영남교방청춤의 내면 및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상·하체로 구분하여 큰틀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영남교방청춤에는 내적 에너지의 집약과 이완의 작용을 충분히 담아내어 독특한 미의식을 춤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배합하여 맺고 풀고 어르는 한국춤의 묘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즉흥성의 원리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즉,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모든 한국춤은 고유한 민족정서와 연계성을 가지므로 한국인의 심성에 내포된 한과 신명이라는 정서를 즉흥적 원리를 통해 표출하고 이것은 곧, 감정이 춤으로 보여지는 행동양식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영남교방청춤의 흐름은 심성의 자연적 표출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춤의 특징은 형식상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율동이지만 내용면으로는 풍부한 감정이 스며있으며 낙관적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살펴 본 영남교방청춤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자태가 드러나는 사방춤이며 몸통의 쓰임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이다. 유난히 잦은걸음으로 장단을 타는 사위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몸동작이 매우 기교적이며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발끝, 손끝, 손목, 허리사용 및 시선처리 등이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감칠맛을 자아내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춤의 네 가지 미적요소인 한과 흥 그리고 멋과 태를 고루 갖춘 춤으로 한국적 자태를 엿볼 수 있는 춤사위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므로 민속무용의 특질을 살펴봄에 있어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은 충분한 연구대상이 된다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에 고찰은 뿌리 깊은 한국인의 미의식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민속춤의 한 특성을 밝혀보고 우리 민속무용의 사관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시기 이후 이른바 무대 양식화를 통해 변화, 발전되어 온 전통춤들은 오늘날 전체 춤공연문화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 시점에 그의 영남교방청춤을 통해 또 다른 춤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춤에 대한 뚜렷한 가치기준을 세우는 일은 한국무용의 전통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춤전통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영남교방청춤 뿐 아니라 전통은 지켜가기 위하여 지켜져야 할 부분과 또, 지켜내기 위해 더해지는 점이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이것을 계기로 현대의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기초자료로서의 의미를 갖기를 바란다.

참 고 문 헌

 

서적

김매자(1996), 한국무용사, 삼신각.

채희완(1985)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길사 p.23.

 

논문

김동민(1966), 아시아문제연구소논문집 제5집, 李朝枝女史, p.75.

김용숙(1990), 韓國女俗史, 民音社, p.264.

백재화(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69.

안미아(2001), 조선조 후기 교방(敎坊)춤 특징에 관한 연구, p.5.

정병호(1889), 무용론, 서울六百年史, 서울특별시, p.1297.

 

정기간행물

2011, 계간 예술문화비평 제2호 가을,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248-253.

우리춤 연구소, 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p.6.

 

기타

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 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2012, 1, 30, 운파 박경랑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ABSTRACT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Yim, Ji Ae(Dongduk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structural significance and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Park Gyeongnang Youngnam Gyobang Dance. Structural, aesthetic analysis of traditional dance will contribute positively to researches on philosophical structural studies of traditional dance in general.

Youngnam Gyobang Dance reflects the life and arts of the people of Late Joseon Dynasty. It represents Korean ethos and reflects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Youngnam Gyobang Dance evolved to be artistic and recreational dance, rather than religious dance. In the process, professional Gyobang dancers developed elegant and elaborate dance movements. This study focus on late Joseon period in search of the origin of Gyobang Dance, examining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So far, theoretical works on Woonpa Park Gyeongneng's Youngnam Gyobang Dance and records of the dance are far from comprehensive. The author attempted to analyze Youngnam Gyobang Dance performed by Woonpa Park Gyeongnang on micro-level, in search of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The conclusion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the following: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turned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into artistic prope,rties. Cultural characteristics of Youngnam region, which is often thought of as masculine are reflected to the movements of the dance.

In addition, perfect harmony with music, various movements, modern sensation of visuals, scientific approaches to proscenium performance characterizes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Especially,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goes beyond the traditional limitations of body movement. This was possible because it inherits the tradition stemming from the beginnings of Gyobang culture.

 

Key : Youngnam Gyobang Dance, Gyobangcheong, aesthetic characteristic, Woonpa Park Gyeongn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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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20일 부산문화회관 중강당 춤의 고을 고성사람들 공연중 교방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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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박경랑의 춤 ‘인연’…현대의 관점에서 본 전통의 재해석 그리고 새로운 탄생

뉴스와이어|입력2012.05.09 13:08

 
(서울=뉴스와이어) 한국무용가 박경랑은 인연(因緣)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가지고 2012 박경랑의 춤이란 제목으로 40여년 춤 인생 중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이삼십년씩 교류를 가져온 여러 국악인들과 스승 故김수악 선생의 체취가 배인 예향 경남 진주에서 2012년 5월 16일 오후 7시 경상남도 문화예술회관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작년 11월 국립부산국악원 지난4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내국인 관객 뿐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 팬들을 양산해낸 공연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의 특징은 수십 년 내공의 명인들이 전통의 참맛을 느끼도록 하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잘 융합시켜 고루하고 지겹다는 지금까지의 국악 공연에 관한 편견을 완전히 무너뜨린 크로스오브 국악무대를 표현한다는데 있다.


대금산조 중요무형문화재 이생강 선생은 기타리스트인 김광석 씨와 호흡을 맞추고 뉴욕링컨센터에서 미국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즉흥 연주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백인영 선생은 거문고와 아쟁으로 이미 젊은 층에 널리 알려진 드러머인 오흥선 씨와 환상적인 협연을 한다.

여기에 경남 고성출신 젊은 타악연주자 고석진의 열정적인 모듬북 연주도 같이하며 특히 박경랑은 자신의 대표춤인 영남교방청춤과 여성무용가로서는 유일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고성오광대 제1과장인 문둥북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무대에 올린다.

그리고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과 동래학춤 구음예능보유자인 유금선 선생의 남녀구음과 춤이 어우러지는 장면은 요즈음 보기 드문 무대가 될 것이다.

현장서예는 신구 윤효석 선생이, 민요에는 신정혜와 김문희, 피리 천성대, 25현가야금은 김민영이 출연하며, 18명의 박경랑 전통무용단의 군무 또한 볼거리가 될 것이다.

사회에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최종민 교수가 맡았다.

티켓가격은 R석 7만원 S석 5만원 A석 3만원

공연문의 02-730-0301

공연기획 코락(www.korak.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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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춤의 교시 남성적인 파워와 여성 섬세함의 극치

 

영남 교방청춤이 오는 11월14일부터FGS에서10주(20시간)과정이 시작된다. 강사는 이현주 씨(사진 경희대학원 한국무용 박사과정 수료)가 나서며 수료식에는 그동안 수강생들이 터득한 교방청춤 발표회도 가질 계획이다.


이 강사는 “영남 교방청춤은 미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동포들에게 민족혼을 가미한 화려한 율동을 선보이게 됐다”며 “ 고려시대부터 전해온 유서깊은 교방청춤은 조선시대 왕실교방청이 폐지된 후 새로운 변모를 거치면서 초대 김창후 인간문화재가 흩어졌던 춤가락을 한데 묶어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정형화 시키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영남교방청춤은 진주, 동래, 마산 통영 등의 권번에서 전해져 오던 춤가락으로 음, 양의 조화가 튼튼하고 남성적인 활달한 상체의 동작과 밀도가 높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지닌 하체 중심의 발놀음이 특징이며 교방 춤의 기교가 빼어나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 정도 매력이 넘친다.

 

 

이현주 강사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박경랑 씨로부터 사사 받아 이어받은 춤으로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널리 알려진 춤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난초와 대나무’에 빗대어 ‘규격 속의 비규격, 정형 속의 비정형, 유형 속의 강건, 절제 속의 자유’에서 춤의 멋을 느낀다고 이 강사는 교방청춤을 자랑했다.

발 뒷꿈치를 높이들어 긴시간을 보내는 관계로 몸의 균형이 아름답고 발걸음의 스텝도 상쾌해 진다. 교방청춤이 우리 춤의 기본이며 손짓, 발짓을 자연스럽게 따라하고 움직임을 익히는 순서에 들어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삶의 의욕도 새롭게 느낄 수 있다.

FGS 커뮤니티센터는 한국에서 교방청춤의 실력자인 이현주씨를 특별강사로 초청 독무를 오는 14일부터 오후1시부터 3시까지 10주 20시간과정의 영남교방청춤 강습시간을 마련했다며 많은 동포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전화 201-541-1200 교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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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ittleSil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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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 溫故知新(온고지신)

장소 : 국립국악원 우면당
일시 : 2012년 2월 17일 (금) 오후 7시 30분
문의 : 011-9924-9561, 011-9523-4604


김애정류 교방수건춤, 조용배류 교방 소고춤과 더불어 김창후, 조용배의 맥을 이으며 박경랑에 의해 세상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세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는 공연입니다.

이번무대는 동래학춤의 구음 유금선 선생님, 남해안 별신굿의 정영만 선생님, 고성오광대의 이윤석 선생님, 밀양북춤의 하용부선생님, 동부민요의 박수관선생님과 함께 영남에 면면히 흐르는 예술혼이 올곧게 투영되는 두 번 다시 있기 어려울만큼 진귀한 무한매력의 무대가 관객에게 다가갑니다.

공연해설을 맡은 최종민 교수님의 수려하면서도 담백한 진행으로 관객의 공연이해도 및 무대와 관객과의 호흡마저 예사무대 사뭇 다를 것입니다.

타고난 춤꾼이자 또한 전통의 맥이 길러낸 춤꾼 박경랑이 옛 '교방청'의 춤가락을 흥과 멋의 감각으로 현재적 시점에서 재현해내는 걸출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이번 공연은 새로운 연출시도와 진행으로 또 다시 박경랑을 통한, 박경랑에 의한 전통의 거방진 한판을 기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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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춤과 현대춤의 교감

[한겨레] 세가지 주제로 춤사위 주고받아

내로라하는 명인·무용가들 ‘조율’

우리 전통 춤과 현대무용이 공통된 주제로 만나 조율하고 교감하는 독특한 춤판이 펼쳐진다.

9~10일 서울 엘지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조율> 공연은 한국 전통 춤의 내로라하는 명인들과 현대무용가들이 어울려 ‘매혹’, ‘구도’, ‘신명’이라는 세 주제로 예술적 영감을 나누고 춤사위를 교감하는 자리다. 우리 전통음악이 현대의 춤과 어떤 접점에서 만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첫 무대에서는 박경랑(49·경남 무형문화재 제21호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춤 이수자)씨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인집단이었던 기녀들의 춤인 ‘영남교방춤’으로 옛 한국 여성이 지닌 ‘매혹’을 선보인다. 교방 기녀들의 멋과 태를 끈끈하면서도 은은한 춤사위로 펼쳐보이면, 한국 춤의 현대적인 변형에 매달려온 김은희(47·김은희무용단 대표)씨가 오늘날 여성의 ‘매혹’을 담아낸다. 여기에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보존회 대표 예능보유자 정영만(54)씨가 삼현육각에 징과 아쟁을 덧붙인 음악으로 춤사위를 돕는다.

‘구도’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의 이수자 채상묵(66)씨가 번뇌와 깨달음을 표현하는 승무를 추면, 현대무용가 이용우(29·엘디피무용단 단원)씨가 현대사회를 사는 젊은이의 내면을 표현한 창작 춤으로 화답한다. 음악은 남해안별신굿보존회와 김주홍(40)씨가 이끄는 전통 타악그룹 노름마치가 연주한다.

<조율>의 대미인 ‘신명’ 무대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 하용부(55)씨와 현대무용가 차진엽(31·엘디피무용단 단원)씨의 만남으로 꾸며진다. 영남 춤의 1인자 하용부씨가 ‘밀양백중놀이’의 백미 밀양북춤과 범부 춤으로 흥과 신명을 풀어나가면, 현대무용가 차진엽씨가 창작 춤으로 뒤를 받친다. 노름마치와 원일(43)씨가 이끄는 국악그룹 바람곶이 함께한다. 특히 소리꾼 장사익(61)씨가 특별출연해 절절한 한의 노래와 소리로 세 가지 서로 다른 주제를 잇는다. (02)2005-0114.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엘지아트센터 제공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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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춤사진

사진/춤사진 2012. 3. 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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