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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춤'에 해당되는 글 61건

  1. 2014.11.21 박선영의 박경랑류 영남교방춤
  2. 2014.11.14 박경랑류 교방소반춤(구음 : 유금선/정영만)
  3. 2014.09.26 '백재화'의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 고운 빛과 소리의 향기
  4. 2014.07.14 운파 박경랑 소개
  5. 2014.01.07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덕수궁중화전)
  6. 2013.12.06 2011 종횡무진 박경랑류 영남 교방춤(백재화 박선영 조미나 성예진)
  7. 2013.12.02 2012 박경랑의 춤 온고지신 교방굿거리춤
  8. 2013.08.20 2011박경랑의춤 제주 同行사진모음 (법능스님 찬불가 나무아미타불)
  9. 2013.08.12 [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10. 2013.06.18 2013 덕수궁 풍류 6월20일 박경랑선생출연
  11. 2013.02.01 무용평론가/시인 故김영태선생의 무용일기
  12. 2013.01.26 봄맞이 가세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보존회원)
  13. 2013.01.21 부산수영전통예술대학 수강 모집 안내
  14. 2012.12.21 하얀나비공연중 진주교방굿거리춤
  15. 2012.11.30 2010 박경랑의 춤 리허설장면 1
  16. 2012.11.01 진주교방굿거리춤 - 박경랑, 김지성, 김세희
  17. 2012.10.26 교방춤사진
  18. 2012.10.24 비워서 채우는 길
  19. 2012.10.18 부산경성대홀 교방무사진
  20. 2012.10.08 웅부무담 풍류가화(雄府舞談 風流家化)(2009년)
  21. 2012.09.20 전통이라 부르지 마라. 이것은 그냥 우리 자체다. 2007 시댄스 '판ㆍ굿'
  22. 2012.09.08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장단분석
  23. 2012.09.04 2012 서울 인연 교방춤(1)
  24. 2012.08.01 교방의 변천사
  25. 2012.07.18 영남 교방춤 등 전통 춤을 현대시각으로( 2010년 수성아트피아 어버이날‘조율 TUNE’공연)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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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교방에서 추어지던 즉흥무의 일종을 박경랑이 재현하였다.

소품으로 접시를 머리에 이고 추는 아주 고난이도의 춤이며 매우 집중력이요구되는춤으로
교방소반춤으로 불리기도 한다
2012 박경랑의 춤 온고지신 공연 (2월17일국립국악원 우면당)

구음에는 동래학춤문화재  유금선선생님과 남해안별신굿문화재 정영만선생님     영상   서재준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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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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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破 朴璟娘

 

1961년 경남 고성 출생. 중요 무형 문화재 제 7호 고성 오광대 초대 문화재이셨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견 춤꾼으로 보기 드물게 농익은 춤의 기량을 간직하고 있다.


 

4세에 춤에 입문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황무봉 故김애정 故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들에게 우리춤을 사사받았고 지금은 서울, 부산을 오가며 개인 공연 및 기획 공연 국악 무용 경연대회 심사 및 우리춤을 연구, 전수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상이력

 

93년 제 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전체 종합대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3년 제4회 대구국악제 전체 종합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4년 진주 개천 예술제 제12회 개천 한국 무용제 특장부문 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5년 제21회 전주 대사습 놀이 무용부문 장원(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6년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 최우수상(국무총리상)수상 등을 거처 97년 제 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활동사항

 

현재 경상남도 무형 문화제 제 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 이며 한국 영남춤 문화 예술 연구소 대표. 박경랑 전통예술단 단장. 영남춤 보존회 대표. 국립국악원 문화학교 강사, 부산 경남정보대학 및 동서 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예술과 한국무용 지도 교수로 부산에술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 예술대학원 전통춤 외래지도교수로 역임한바 있으며 각종 세미나를 통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경랑의 영남 교방청춤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받은 춤으로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널리 알려진 춤이다. 민속학자 정상박 교수는 박경랑의 춤을 흔히 난초와 대나무에 비교하며 또한 '영남 춤의 규격속의 비규격 정형속의 비정형, 유형속의 강건 절제 속의 자유에서 박경랑의 춤의 멋을 느낀다'라고 표현했다

박경랑은 여러 명인 선생님들의 장단에 익숙해진 영남춤을 추어 왔으며 이제는 음악을 자유자재로 춤 사위에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전통춤의 깊이를 느끼게 하며 영남춤의 지킴이로서 이미 우리시대의 춤꾼 정동극장 명인전,팔무전,고궁명무전 등의 기획공연을 통하여 명무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다.


 


 

박경랑_공연이력.hwp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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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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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국립 국악원 우면당

백재화 박선영 조미나 성예진 영남교방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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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학춤 구음 예능보유자 유금선선생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선생의

장구장단과구음이 같이 하는 진주교방굿거리춤

                                                                         영상   서 재준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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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박경랑의 춤 동행(同行)
2011 05 17 제주특별자치도 문화회관
영상 : 고원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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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영남춤 맥 잇는 춤사위… 전통과 퓨전의 어울림

  • 국제신문 2006-06-28 20:39
"춤을 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몸짓으로/ 호박꽃 같은 춤을 추고 싶다/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춤을 추다가/ 춤으로 녹아 흐른 호박꽃 꿀을 따다가/

호박꽃 속에 갇히어 죽을지라도/ 슬픈 영혼을 품은 푸른 별로 남으리/

춤은 내 인생이다, 눈물이다/ 아니 그것은 내 사랑이다, 열정이다."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살풀이춤, 지전춤, 교방춤(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을 추고 있는 박경랑 씨.
지난 26일 저녁 부산문화회관 대강당 무대. 이하월백(梨下月白)보다 더 파르스름한 소복으로 살풀이춤을 추며 '호국영령'을 위무하고 있는 박경랑. 젊은 광대들이 저어대는 해금 가락은 애간장을 끊는 듯 구슬픈데, 휘어져 감기우고 돌아서 다시 뻗는 춤꾼의 소매 끝을 스치며 너풀너풀 허공을 가르는 수건자락은 길 잃은 영령을 인도하는 구름이 되고, 다리가 되고, 반야용선이 되었다.

시나위 가락이 빨라지면서 춤은 지전춤으로 바뀌고, 지전은 어느새 영령들의 노잣돈이 되었다. 흡사 전통춤에 맞춘 듯한 박경랑의 단아한 몸매에서 솟구쳐 나오는 춤사위는 폭풍이요, 뇌운이었다. 무심한 영령인들 어찌 감응치 않으랴.

박경랑(45) 씨는 영남춤의 맥을 정통으로 잇고 있는 전통 춤꾼이다. 네 살 때부터 춤을 익혔다니 무력(舞歷)으로야 완숙기에 접어든 중견이지만, 마음이 열려있는 신세대 춤꾼이다.

이날 무대는 '박경랑과 광대들의 놀음'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 그가 젊은 혈기로 시도하는 섞음(퓨전)무대. 전통 국악기에 신시사이저, 피아노까지 동원되었다. 그리고 고성오광대 전수생들로 이루어진 'the광대'의 사물놀이와 오광대춤 일부가 나왔다. 특히 박경랑의 춤곡 연주를 맡은 '젓광대 공감'은 20대의 신세대 국악도들로, 그들의 발랄함은 구차한 형식을 타파하는 발칙함으로 통한다.

이날 공연은 강당을 가득 채운 관중과 광대들이 함께 어우러진 일종의 마당놀이였다. 관중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춰주고 무대 앞에서는 물론 무대 위에까지 올라가 연희자들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장면. 이날 공연을 기획한 (사)부산문화 박흥주 대표는 "문화대중이 박경랑을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단언했다.

이들 광대의 재치와 익살은 뒤풀이까지 이어졌다. 박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는 그들의 여흥을 깨지 않기 위해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결례를 무릅쓰고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박 씨와 마주할 수 있었다. 장소는 대연동 뒤풀이 집에서 옮겨 앉은 주례동 기사식당. 박 씨의 무용학원 이웃으로,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이다.

<ㅏ-2>"교방춤에 대한 내력이 궁금하네요."

"예전 기생들이 추었던 춤이죠. 우리 전통춤의 원전이라고 할까요. 이를 기초로 해서 모든 춤이 생성되고 파생된다고 보면 됩니다."

"교방춤을 잘 춰야 다른 춤도 잘 출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기생들에 대한 교육을 맡은 곳이 교방청이었고, 영남교방청은 기생으로 명성이 높은 진주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방문화가 가장 오래된 곳은 부산(동래)이랍니다. 그 때는 기생들이 춤선생에 대한 오디션을 봤다네요. 춤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해 춤을 배운 거죠."

"살풀이춤은 어떤가요. 그 춤을 보노라면 공연히 눈물이 나올 것만 같던데요."

"일종의 무속춤이지요. 지금은 교방춤으로 편입됐습니다만. 살풀이춤은 가장 섹시한 춤입니다. 소복을 통해 비칠 듯 말 듯 한 여인의 속살은 처절한 한(恨)의 몸짓인데, 그게 섹시미를 더하는 거지요."

"그래서 더욱 슬픈가 봐요. 아까 지전춤은 여느 지전과 다른 것 같던데요?"

"채 양쪽에 지전이 달려 있는 거요? 보통은 한 쪽에만 있는데, 그만큼 힘이 듭니다. 기교도 더 필요하고요."

"그래선지 매우 장엄하고 다이내믹하더군요. 그 춤사위에 해원(解寃) 못할 원혼(寃魂)은 없겠지요?"

"그럴 것으로 믿습니다. 제 춤에 영령들께서 평안을 찾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지요."

"교방춤에서는 선비가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선비가 멀리 떠나면서 정인(情人)의 증표로 속치마에다 서화를 남기는 모습이죠. 옛 조상들의 운치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남원에서 한양으로 떠나던 이몽룡이 춘향이에게, 서화담이 동짓달 기나긴 밤 잠 못 드는 황진이에게도 그리 했을까. 이 날 공연에서는 도예가 서종훈(경기도 여주 민예총지부장) 선생이 박경랑의 치마폭에 난초를 치는 일을 대신 했다.

<ㅏ-3>"춤을 추실 땐 무아지경에 빠지겠지요?"

"관객을 의식하면 춤이 되지 않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춤을 춘다는 사실 그 자체마저 잊어야 합니다. 제가 춤의 진가를 알게 된 건 한 5년쯤 됐나 싶어요. 오직 춤을 출 뿐, 일체의 상념을 벗어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일각에서는 전통의 파괴라거나 격이 낮다는 비판이 없지 않은 줄 압니다만.

"개의치 않습니다. 저는 철저히 전통을 고수하며, 그 정통성을 지키고 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대중을 상대로 한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절실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은 고수하되, 연희형식은 과감히 변화를 해보자 하는 차원에서 이번 섞음공연이 기획됐습니다. 다행히 관객들의 호응이 좋아 성공하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물론 시류에 영합하는 지나친 상업주의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 시대흐름에 맞춰가는 것이 문화 예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주로 생음악으로 안무를 하시는데요. 더러는 요란한 음악에 춤이 묻히는 경향도 있지 않는지요.

"그렇다고 음악 없이 할 수는 없지요. 물론 음악에 춤이 빨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춤이 음악을 이끌어야지요. 지난 93년 처음으로 했던 개인 발표회를 이생강 선생의 대금 독주로 했어요. 그 때 모두가 놀랐지요. 젊은 혈기랄까, 오기랄까 뭐 그런 거였죠."

"공연하랴, 후학 지도하랴 많이 힘드시리라 봅니다. 연습은 어떻게 하시나요."

"1997년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때까진 하루 2시간도 채 잠을 자지 않았어요. 먹고 살아야 하기에 낮에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 했고, 제대로 춤을 배우기 위해 여러 스승님을 찾아다녔죠. 게다가 서울에도 전수소를 차려 오르내리기도 했고요. 발을 무척이나 혹사시켰죠."

그러면서 그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외간남자에게 외씨버선을 벗어 발을 보여줬다. 발가락 마디마디는 말할 것도 없고 발가락 사이에까지 못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발등과 발목은 버선목에 주리를 당해 푸르스름한 멍과 함께 굳은살로 변해 있었다. 처절함 바로 그것, 최고 고수가 되는 과정의 고난이 얼마만큼 치열한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박 씨는 차를 몰고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린단다. 운전대를 잡고도 음악을 들으며 어깻짓을 하는 등 잠시도 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밤중에 차를 몰고 가다가 여명을 느끼면서, 해돋이를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환희를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감동과 감정을 춤에 끌어들이려 애쓴단다.

몸을 던져 완성해 가는 수도자와 같은 노력이 오늘날 '박경랑에 대한 주목'을 낳게 한 원동력인가 싶었다. 새벽 3시가 돼서야 인터뷰를 마친 기자는 그의 앞에서 감히 졸린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편집위원 songsun@kookje.co.kr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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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사일정 : 2013년 5월 2일 ~ 9월 26일 / 매주 목요일 19시 30분 / 총 22회
○ 행사장소 : 덕수궁 정관헌
○ 6월 ‘희노애락’


- 6월 6일(노(怒))

공연구성

출 연 진

사회자

구음

시나위

정영만

중요무형문화재 제82-라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이희문

살풀이

박성호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판소리

염경애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이수자

- 6월 13일(애(哀))

공연구성

출 연 진

사회자

판소리

임현빈

남원시립국악원 수석단원

박애리

아쟁

산조

이태백

중요무형문화재 진도씬김굿 제72호 고법 이수자

한량무

백경우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 6월 20일(락(樂))

공연구성

출 연 진

사회자

채상

소고춤

이동주

인천부평전통연희단 예술감독

이희문

교방춤

박경랑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교방 굿거리춤 이수자

밀양

북춤

하용부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

- 6월 27일(희(喜))

공연구성

출 연 진

사회자

설장고

신만종

한국국악협회 이사

박애리

진도

북춤

임수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

남도

민요

정옥향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전수조교

※ 행사문의 : 사업담당자 (02-2270-1236)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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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첫무대에 선을 보인 박경랑은 그의 외증조부 김창후에게서 춤을 배웠고 동래권번 마지막 춤선생 강옥남의 제자이다

요즘 유행을 타는 아무개이수자공연등에서 얼굴을 비춘적이 없다

교방춤을 추었다

굿거리장단이 주가되는 경상도 춤이었다

박경랑에게 “영남춤의 지킴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박경랑의 춤에서 나는 고고한 품위를 만난다

그품위를 다른말로 풀어쓰면 동작의 크기보다 밀도를 중시하는 그의 춤은 장단에서 조금 삐걱거렸지만 “40대 냉수같은 춤”이었다

휘어감기는 제몸의 버팀에 정결했고 박경랑이 한손으로 뻗어 부채를 잡는 그정중동의 묘(妙)는 굿거리장단을 때묻지 않게 소화하는 흥이요 격이었다

박경랑의 교방춤을 보면서 여러 이수자들이 이춤을 추었지만 이 “냉수같은 여인”의 허심탄회한 춤사위를 능가하지는 못했었다

5주년 공연의 백미였고 또한사람 영남춤후예의 등단이었다

평론가 진옥섭의 “고른 호흡을 불어 넣어 이음새의 틈이 보이지 않게 치밀하게 맞물림했다”는 지적에 동감한다.
 

                                            

                                                   공연과 리뷰 2009년 3월호 봄호  김영태의 무용일기중에서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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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박경랑의 춤 '인연' 진주공연 중 영남 교방청춤 보존회 회원들의
'봄맞이 가세' 라는 박경랑의 창작무
                                             가야금연주 백인영      영상 서재준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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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전통예술대학 수강 모집 안내

2013년도 수영전통예술대학 수강생을 다음과 같이 모집하오니 전통무용, 풍물, 택견에 관심 있는 여러분께서는 참고하시어 수강 신청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접수기간

:

1차 접수(기존회원) : 12월 21일까지 2차 접수(신규 수강생) : 12월 28일까지

□ 개강일

:

2013년 1월 8일 화요일

□ 문 의

:

(사) 수영고적민속예술보존협회 ☎ 051 - 752 – 2974, 051 – 610 - 4066

 

■ 전통무용과 (매주 금요일) (3개월 단위로 접수함)

수업시간

수강 과목

수강료

교육기간

수업정원

1

10 : 00 ~ 11 : 00

한국무용 기초배우기

1개월

2만원

1년

25명

2

11 : 00 ~ 12 : 00

교방춤 배우기

1개월

2만원

1년

25명

3

12 : 40 ~ 13 : 40

살풀이춤 배우기

1개월

2만원

1년

25명

4

13 : 40 ~ 14 : 40

선비춤 배우기

1개월

2만원

1년

25명

 

■ 전통무용과 (매주 화요일) (1년 단위로 접수함)

수업시간

수강 과목

수강료

교육기간

수업정원

1

중급과정

10 : 00 ~ 12 : 00

수영예술대학에서 이수한 작품들 위주로 수업(살풀이, 선비, 진쇠, 북춤 등)

1년

30만원

1년

15명

2

최고과정(영남교방청춤)

12 : 30 ~ 14 : 00

접수 후 오디션 있음

1년

30만원

1년

15명

3

신규과정(응용불교무용)

14 : 00 ~ 15 : 00

천도춤, 고풀이춤, 지전춤, 천도살풀이, 연화무 등 응용 불교무용 수업

1년

50만원

1년

15명

4

작품연구반

15 : 00 ~ 16 : 30

접수 후 오디션 있음

(추후 오디션 합격 후 과목은 정함)

1년

50만원

1년

15명

5

신규과정(실용무용)

16 : 30 ~ 17 : 30

복지관, 노인대학, 유아원 초등학교 등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작품을 위주로 수업한다. 덩더쿵춤, 신나는 우리춤

1년

50만원

1년

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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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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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춤사진

사진/춤사진 2012. 10. 26.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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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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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서 채우는 길

최 은 숙

 

1. 삶의 춤결

그는 수업시간마다 외친다. 발목 접고 깊이 눌러라. 무겁게 해라. 바닥에서 발을 떼지 마라. 눌러라. 계속 눌러라. 우리춤이 중력을 뿌리치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서양춤과 다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한없이 누르다간 바닥에 달라 붙다가 땅 밑으로 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근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의 춤 선은 참 예쁘고 고운데 실제로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호흡과 기교 심지어 얼굴 표정까지도 깊고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춤을 추면 저런 묵직한 팔 다리와 진중한 분위기가 나올까 연구하게 만든다.

그는 ‘멈춰, 서’게 한다. 화려한 움직임은 ‘멈춤’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세상에서 정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침묵이 없는 말은 소음이 되고 어둠이 없으면 밝음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듯이 쉼이 없다면 드러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위대한 멈춤이다. ‘딱 멈추’지를 못해 몸이 혼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중심을 잡아가는 것은 몸보다 정신 쪽이었다.

가식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 진정 자신의 무게로만 움직일 때 진국이 되는 춤사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을 녹이는 그의 화려한 발 디딤새는 단순한 겉멋이 아닌 진국을 향한 열정의 결과였다. 자신을 향한 진지한 시선으로 내면을 다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는 살인적인 연습시간이 있었기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동안 일 년에 두 번 씩 열리는 연수에 거의 참여했는데 하루는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숙소에서 그와 같은 방을 쓰면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갑자기 잠꼬대로 춤 장단을 치시는 것이 아닌가. 새벽 연수부터 시작해서 저녁 시간까지 꼬박 채우고 피곤한 몸으로 겨우 몇 시간 잠드는데 꿈에서도 장단을 치고 우리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던 거였다. 허리 펴고 명치 접고 겨드랑이 들어! 시선 옆으로! 쿵 기덕 쿵 따아악. 춤으로 가득 찬 치열한 삶이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손에 잡힐 듯이 작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몸은 단단하고 밀도있게 다져진 정갈한 멋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밤낮없이 하는 춤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2006년 여름 교방춤 연수 장소가 해운대였는데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던 홀이었다. 수평선에 배가 떠있는 그림 같은 장소를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잡으신 것 같았다. 그때 연수의 주제는 바다와 함께 춤을 추라는 것이었다. 파도가 밀려오면 움직이는 물결 따라 추라고 했다. 물결이 내 품으로 밀려들듯이 한 호흡으로 밀어 올리고 내려 앉아라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때 각인된 물결 이미지는 교방춤 속의 하나의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이미지를 주문한다. 춤 속에 각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한다. 내가 자연인양 먼 수평선의 아득함과 흐르는 구름을 마음에 담아내라고 했다.

교방춤의 춤사위는 조금 많은 기교가 필요하다. 처음에 복잡한 동작을 배우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켜야 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치가 아파야 했다. 동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으면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그는 동작을 이해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자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있자면 내 몸의 구조와 관절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자연스럽게 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가면 억지스럽지 않은 편안한 춤길이 나온다 한다. 그렇게 무르익어 편안해진 경지가 되면서 그의 춤사위는 독특하게 멋지다.

춤의 비밀을 조금씩 발견해 가는 이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주었다. 그의 춤에 대한 자세는 나의 숨어 있던 열정을 깨우게 했고 이렇게 치열하게 몰입하고 다구쳐 보라고 자극했다.

 그는 엇박자를 즐긴다. 인생이란 대부분 엇나간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엇박이 들어가지 않은 안무가 별로 없다. 세상은 정박이 아니므로 엇박의 묘미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 된다. 나와 님 사이에 사랑의 방향이 다르고 시작점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그 엇나감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생이 괴롭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 엇나감만큼 우리는 방황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또 성숙한다. 너와 내가 말이 섞이는 데는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장단을 돌아 나온 끝이다. 내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경지는 수 년이 걸리는 긴 가락을 다 알고 난 뒤다. 하지만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맞추지 못한 한 조각은 다른 데서 우리도 모르게 힘을 발휘하면서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그의 엇박은 너무 절묘하여 자꾸 보고 싶다. 엇박이 들어가는 순간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하다. 경계에 끄달렸던 마음들이 부질없어짐을 확인한다.

그런데 그는 자주 서럽다. 무엇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서러운 것일까. 한 시인은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의 설움이 전해져 온다. 언젠가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과 제자가 목이 메어 대화를 하지 못할 서러움이 삶의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을 너머 선 것을 바랐기 때문에 끝나지 않을 서러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적이다. 그건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불가능한 것을 항상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 어디쯤에서 서성이다 잠깐씩 그와 눈빛이 마주칠 때 나를 발견한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다 가슴에 안고 춤을 춘다. 그래서 그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수건은 날릴 때면 가슴이 복받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사랑했던 아버지와 남동생을 묻고 사랑하는 스승과 님과 떠난 제자까지 가슴에 안았으니 응어리가 너무 깊다. 아무리 풀고 풀어도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홀로 법당을 다닌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누군가 야속할 때는 절을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절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는 늪과 같다고 했으니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는 주말이면 법당에서 그 누구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천도하고 빌어준다. 더불어 참회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임을 몰랐던 죄.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죄. 돌봐주지 못한 죄. 감싸고 덮어주지 못한 죄. 죄스러운 마음은 북장단을 타고 영남승무 회색빛 장삼을 흔든다. 먹장삼에 빨간 가사를 입고 추는 그의 승무를 처음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다. 장삼을 던질 때 온 마음을 다하는 진정성이 무대를 꽉 채웠고 뿌린 장삼 끝으로 그려지는 유연한 포물선은 내 마음에도 이어졌다.

오열과 희열이 섞인 그의 북장단은 사람 마음을 찢어 놓는다. 북소리는 작아졌다 커졌다 하면서 인간사 희노애락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다시 숭고하게 울린다.

그는 다 준다. 자기가 가진 것을 언제나 아낌없이 내어 주기 때문에 가난하다. 다 주어라. 전수관 벽면에 그렇게 적어놓았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우니 마음에 욕심을 쌓지 말라고. 자신을 끝없이 비워내어 항상 새롭고자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춤사위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는 괴로워한다. 오늘의 창조적인 박경랑은 당신의 스승이 날마다 춤사위를 바꿔 다양한 동작으로 춤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도 그를 따라 하다 보면 그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공공연히 우리는 그를 철인이라 부른다. 무쇠팔 무쇠다리로 전국을 누비는 철의 여인이라고. 수많은 공연과 수업을 뚫고 자기 춤을 선보이는 신비주의자. 언제 울고 언제 사랑했을까. 거미처럼 긴 두 팔로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아무래도 길 위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다. 자분자분하던 말씨가 흥이 나면 인심좋은 경상도 여인이 된다. 주례학원 찬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더운 열기를 식히면서 제자와 같이 어울리는 소탈함이 있다. 밤 수업 뒤 팥빙수를 나누어 먹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를 즐겼던 편안한 사람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내 입에 새우를 까서 넣어줄 때 그 다정함에 당황하였던 기억이 난다. 제자들 연습하라고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말은 처음엔 시가 되고 편지가 되었다가 나중엔 춤이 된다. 일상의 말과 행동이 다음에 나올 춤의 집이 된다.

 

2. 다른 빛깔로

그와 처음 마주친 순간은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그는 자태가 매혹적이었고 말소리며 표정이 가냘프고 정다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떤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드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적지 만나보지 못했던 오묘한 감성이 주는 그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곧바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을 가르쳐 준 이정표가 되었다.

한동안 국어교사의 처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흔들렸고 저쪽 춤의 세계가 부러웠다. 학교를 마치면 모든 시간을 춤에 집중했고 너무 행복했다. 원래 우리 춤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는지 그의 기운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에 십 수 년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탈을 벗기 위해 탈을 쓴다’는 말에 나를 크게 돌아 본 적이 있다. 춤을 배우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안 되고 또 얼마나 굳어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던 때였다. 몸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주어진 신분과 역할에 갇혀 딱딱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지금까지 틀에 얽매인 줄도 몰랐고 자신을 바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나에게 균열이 생겼다. 벌어진 작은 틈새로 아름다운 물이 스며들면서 나는 다른 빛깔로 물들 수 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3. 숙련

 몸으로 하는 공부는 고달프다. 물론 공부 자체가 고달픈 일이고 세상의 모든 공부는 마지막에는 몸으로 승부를 본다. 몸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강점은 정직함이다. 신체에 새겨진 흔적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도 그대로 표출되어 버리는 투명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 잡아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일주일에 한 번 그의 기를 받으러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오고 갔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태풍이 몰아쳐도 어김없이 그를 찾았다. 새로운 내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운은 오고가는 고달픔을 덮을 뿐 아니라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새로운 춤을 익힐 때마다 나는 부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거칠게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내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운 작은 조각으로 섬세하게 나누어져 갔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얻어 가면 성공이다는 그의 말을 믿고 먼 길을 오가도 성급하지 않으려 애썼다. 죽을 때까지 나를 구원하는 거라 생각하고 욕심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춤을 배운 지 4년 정도 지나서부터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 느껴보라고 그는 의도적으로 무대에 서게 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배운 것의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생음악 앞에 어쩌다 서게 되면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살아 있는 음악 속에 춤가락을 살려 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춤이 무너졌다. 그가 판소리, 산조 등 음악을 많이 들으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수업 시간에 장구 장단으로 춤 앞에 서게 하는 깊은 뜻을 알았다.

순서를 빨리 익혀서 성급하게 한 판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춤은 거칠어지고 몸만 피곤했다.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춤을 추면 그 잘난 마음이 춤 속에 보인다는 걸 알았다. 추는 사람의 기질과 마음, 심지어 그의 세계관까지 다 드러나는 걸 알고 정말 마음으로 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내려 놓는 공부를 해야 했다.

기교를 익히는데 3년, 버리는데 30년.

어설픈 우리는 춤은 없고 몸짓만 있다. 우리가 기교를 익힐 때 그는 모든 기교를 버리고 간결해지고 승화되어 갔다. 하루 종일 제자와 춤추면서 자신의 춤을 갈무리해서 정화시켰다. 삶의 굴곡따라 고비고비 춤이 나왔다. 춤이 변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았다. 스승의 변화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공부가 있겠는가. 몸에서 익고 삭아서 나오는 춤. 인생을 묵혀서 깊게 배어 나오는 것이어서 진정 그는 안 보이인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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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부무담 풍류가화(雄府舞談 風流家化)
연출 : 강병규 PD

오랜만에 만날 수 있었던 잔치였다. 10년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다녀간 가장 한국적인 고장 안동, 퇴계 이황 선생을 탄생시킨 한국 정신문화의 태두에 서 있는 안동에서 만난 잔치였다. 지난 6월 12일 안동 대도호부 관아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웅부공원에서 잃어버린 우리 잔치를 찾는 춤판이 열렸다. 안동MBC가 마련한 잔치판, 웅부무담 풍류가화(雄府舞談 風流家化). 이 날 잔치에는 웅부공원을 가득 메운 500여 명의 관객들은 예전 우리 잔치의 모습 그대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옛날 차일치고 멍석 펴고, 한 편에서는 술 빚고 떡을 치며 거방지게 놀았던 잔치. 가족의 경사를 마을의 잔치로 치르던 성대한 축제. 어느덧 사라져 이제는 옛 풍경이 되어버린 잔치마당을 다시 재현하고자 마련한 무대였다.

2년 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 있는 300년 고택 구담정사에서 벌어졌던 잔치를 잊지 못해 언젠가 다시 한 번 잔치 마당을 펼쳐보고자 했던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그 어느 곳보다 고택이 많이 남아 있는 안동의 오래된 종택을 찾아 올려보고 싶었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잔치판을 마련하고자 웅부공원을 택했다. 다행이도 그곳은 고려 공민왕이 원의 침략을 피해 몽진을 온 인연으로 대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안동의 관아 자리였다. 600년 역사의 웅부(雄府) 안동의 관아 터에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잔치판을 펼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2007년 구담에서의 인연 덕분에 우리 고유의 잔치 풍경이 조금 낯설기도 했었던 연출자에게, 이번 잔치판을 꾸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영남춤을 이어가고 있는 박경랑이라는 걸출한 춤꾼과, 북 하나에 사람 좋은 웃음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무형문화재 밀양북춤의 하용부 선생, 그리고 역시 무형문화재 남해안 별신굿의 정영만 선생 등이 주축을 이뤄 판을 벌여 나가기로 했다. 여기에 국립창극단 주역을 맡고 있는 왕기철, 김지숙 두 명창과 최우칠 민속악 반주단의 흥에 겨운 우리 악기 연주야 말로 더 이상의 명품 잔치 마당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주는 요소였다. 물론 거기에는 대중가요가 판을 치는 현대사회에서도 우리 것에 대한 신명과 흥이 찾아오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공연판이었다.

 

 

 

초여름이라 하기에는 꽤나 열기가 뜨거웠던 6월의 태양이 지기를 기다려 안동도호부를 지켜주고 있었던 부신목(府神木)의 신령께 고하는 꽹과리 소리는 시작됐다. 정영만(중요 무형문화재 제82-라호 남해안 별신굿 예능보유자)선생의 구슬픈 구음으로 잔치를 치러낼 모든 춤꾼들과 소리꾼들이 함께 마당의 성공을 기원하고, 잔치판을 찾아 함께할 관객들과 시민들의 안녕을 비는 들맞이 굿이 올려졌다. 그러는 동안 무대에서는 청․홍 두 폭의 천에 각각 잔치마당의 이름과 옛날 선비들이 즐겨했던 난을 치고 마당에 거는 만장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백연 박문환 선생과 안동서화원의 라창교 원장이 각각 잔치마당의 이름과 난을 올렸는데, 그 방법 또한 독특해서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달걀 흰자를 풀어 큰 붓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 후 밀가루(옛날에는 들깨 가루를 썼다고 한다)를 뿌리고 달걀의 점성에 의해 글씨가 나타나면 나머지를 털어내는 방식이었다. 청․홍의 만장이 영가헌에 걸리자 관객과 시민들을 대표해 김휘동 안동시장이 환영의 인사로 별신굿패를 맞이했고, 곧이어 올림춤이 펼쳐졌다. 올림굿은 사방팔방 모든 잡신을 물리치며 노는 마당을 정갈하게 하고 부정을 가시며 천지신명에게 고을 사람들의 정성을 기원하고 무수대길 안가태평을 기원하며 올림(바치는)하는, 즉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신을 높이 칭호하는 굿이다

 

 

 

 

출연자들과 관객들이 고사를 올리며 한 판 춤을 펼친 후, 역시 청․홍의 두 마리 용선이 무대에 올랐다. 용선은 춤판에 참가하는 예인들이 직접 수백조각의 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배다. 용선이 올림춤을 추는 춤꾼들과 함께 춘 용선춤은 당산신령을 용선이라고 하는 최상의 배에 모셔 와서 살아있는 고을 백성들에게 명과 복, 행운을 주고 가며 액운은 거두어가고 물을 건너가는 형상을 춤으로 표현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춤이다. 이로서 웅부무담 풍류가화의 잔치마당은 관객들과 함께 호흡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

곧이어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최종민교수로부터 오늘 벌어지는 잔치마당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졌다. 안동 출신이기도 한 최교수는 이 춤판이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되고, 신과 사람이 하나 되며, 너와 내가 하나 되는 축제를 뜻한다고 했다. 또한 천인합일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던 풍류정신은 고려와 조선을 거쳐 내려오면서, 고려 때는 차(茶)문화를 발달시켰고, 조선조에는 놀이문화 특히 수양음악과 춤을 발달시켰다고 전했다.

 

 

 

원래 풍류란 춤이든 노래든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 겨레는 과거에 한 해 동안 살면서 또는 봄철 한 해 농사를 시작할 때 축제로 하나 되는 체험을 하면서 묵은 때를 벗겨내고 새로운 다짐을 하며 살아왔다. 이런 풍류를 잔치가 사라져 버린 지금 현대사회에서 오늘의 춤판을 빌어 재현하고자하는 마당이 웅부무담 풍류가화라 하겠다.

최우질 민속악 반주단과 남해안 별신굿 악사들의 즉흥적인 시나위 합주로 본격적인 마당을 시작했다. 무대 옆 한쪽에서는 이수다원이 마련한 다상(茶床)에서 차를 우려 관객들의 목을 축여주면서 잔치 마당의 풍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분위기 넘치는 시조창에 맞춰 여인들의 설레는 마음 부채에 담아 그린 채선무와 멋과 흥을 아는 양반 사대부들의 여유로움과 자재(自在)로움이 담긴 영남 선비춤이 주 무대와 종각 앞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펼쳐졌다. 마당에 모여 앉은 관객들은 무대에 모여 앉았던 기생들이 직접 건네는 술 한 모금과 흥겨움에 취해 모두들 어깨춤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우리의 악, 가, 무를 한데 모아 선조들의 예기와 멋, 흥과 한의 조화를 한무대에 재현하며 선조들의 문화정서를 느껴 보고자 구성한 작품이다.

이어진 왕기철, 김지숙 명창의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마당은 두 사람이 펼친 연기와 함께 관객들의 많은 호응을 얻어냈다. 아마도 판소리 중 가장 대중적인 대목이라 모여 있는 관객들 그 어느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서 더했으리라 생각되는 대목이다. 사랑가를 마친 왕기철 명창의 ‘아니리’는 여느 대중가요 공연처럼 굳이 따로 진행자를 두지 않더라도 객석과 호흡하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다음 판을 이어주기에 충분했다.

다음 마당 역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성주풀이였다. 원래 ‘성주의 본향은 경상도 안동 땅에 제비원이라’고 하는 사설에도 있듯이 웅부 안동을 찾은 춤꾼들은 성주풀이로 제비원 미륵불에 대한 예를 갖췄다. 본래 성주풀이는 무당이 성주 받이를 할 때 복을 빌려고 부르는 노래였다. 우리 민속에서 집터를 맡은 신령인 성조왕신과 그의 아내인 성조 부인은 집을 짓는 일로부터 일문일족의 번영에 이르기까지 그 집의 길한 일이나 흉사를 도맡아 직접 다스린다고 믿어왔다. 김지숙 명창이 부른 성주풀이는 경상도 노래다운 꿋꿋한 멋과 시원스런 느낌을 준다. 굿거리장단에 맞춰 부르는데, 춤을 곁들이기도 한다. 5음 음계로 되어 있으며 장절 형식이다. 연이어 왕기철 명창이 부른 판소리 단가 흥부가 중 박타는 장면은 관객들과 함께 잔치 마당의 신명을 적절히 살려내는 분위기 메이커로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이제 공연은 서서히 절정으로 다다르며 춤판을 이어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8호 밀양 백중놀이 예능보유자인 하용부 선생이 북 하나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밀양북춤은 일양 백중놀이 중 ‘신명놀이’ 과장에 있는 춤으로 오체가 성하고 오곡이 잘되어 만사가 순조롭기를 빌며 온 백성이 오복을 우릴 수 있기를 기원하며 신명나게 한 판 추었던 북놀음이다. 춤을 추며 간간히 흘러나오는 하용부 선생의 추임새와 북채 끝에서 웃음 띤 그의 눈빛으로 이어지는 섬세하면서도 흥이 묻어나는 선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넘쳐흘렀다. 객석의 흥이 점점 더 차오르자 하용부는 북을 내려놓고 객석으로 뛰어 내려왔다. 앉아서 바라보는 관객들을 향해 눈길을 주며 던졌던 몸짓은 이러고도 마냥 앉아만 있겠느냐면서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졌다. 때로는 어르신들과 그리고 또 때로는 우유병을 든 어린 아이들과 함께 어우러진 그의 춤사위는 웅부공원에 모여든 관객들을 하나로 만들기에 그만이었다.

이윽고 이날 잔치판의 백미 박경랑의 영남교방청 춤이 선을 보였다. 교방은 원래 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노래와 춤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이곳을 통해 전해진 춤이 교방춤이며 영남교방청 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초대문화재이셨던 박경랑의 외증조부인 故김창후 선생, 그리고 그의 제자 故금산 조용배에게로 이어져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다. 이 춤의 특징은 음․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졌고, 남성적인 활달한 상체의 동작과 밀도가 높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지는 하체 중심의 발 놀음(디딤사위)이며, 이를 통해 영남지역 교방춤의 기교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 지를 엿볼 수 있었다. 부채 하나를 들고 무대를 누비며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버선발의 모양새에서 미 춤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영가헌의 대청으로 올라간 기생은 수줍게 속치마를 내밀어 정표를 청했고, 선비는 유려하게 흘러가는 초서로 자신의 마음을 담아 기생의 속내를 받아주었다. 어느새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입을 벌려 교방춤의 정점을 감탄했다. 치마폭에 글을 내려받아든 박경랑은 그대로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며 잔치마당에 참가한 모든 이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고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팔을 올리고 소리를 높여 춤을 추게 했다.

이런 마당에 그 누가 하나 되지 않겠느냐며 우리 전통의 잔치판을 찬양하는 최종민 교수의 다음번 새로운 마당을 기약하는 맺음말로 공연을 마친 춤꾼들은 왕기철 김지숙 명창의 남도민요 진도아리랑을 관객들과 함께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이 날 웅부공원은 말 그대로 잃어버린 우리의 잔치판을 되찾아준 그 곳이었다. 그리고 초여름 밤하늘에는 보름을 조금 넘긴 달이 사람들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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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채로운 세계인의 무용축제인 ‘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시댄스)’는 올해도 어김없이 관객들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시댄스는 세계 유수의 무용단을 초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고유의 음악과 무용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바로 12일 펼쳐진 판ㆍ굿의 공연이 바로 그것이다.
판ㆍ굿은 풍물굿의 종합적 연희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굿’은 단순히 무당에 의해 주재되는 의례라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볼만한 것의 총체를 말한다. 즉, ‘판ㆍ굿’은 춤을 추되 소리와 한 데 어우러지게 하는 판이요, 춤을 추어 널리 뵈게 했던 옛 굿을 복원하는 굿이다. 오늘의 판ㆍ굿은 지난 2004년 시댄스에 초청되어 격찬을 받았던 ‘보다 무대화한 공연이다.

공연장 밖에서 시작된 여성농악단의 공연은 객석을 지나 무대까지도 한참을 이어진다. 유랑농악단의 마지막 세대인 이 여성농악단은 이제 나이 지긋한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어있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이번 2007 시댄스로 다시 뭉쳤다고 한다. 몸에 ‘인’으로 박힌 리듬은 머릿속에서 생각할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이들의 구성진 ‘농부가’ 한가락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보면 우리도 어쩔 수없는 한국 사람인가 보다.

이들의 텅 빈 무대는 곧 ‘오채진굿’으로 가득 메워진다. 구성진 태평소 가락에 여성농악단은 자유로움을 마음껏 만끽한다. 그 자유로움 속에 바로 질서 정연함이 있다. 동선의 규칙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이미 많은 세월로 예전과 같은 기량을 보이지 못해 아쉽다는 사회자(예술감독 진옥섭)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뛰어난 호흡을 보이고 있다. 그 균형과 불균형의 기준을 탐닉하는 것, 바로 관객의 몫이다.
베이스 없이도 시끄럽지 않고 안정된 느낌은 강약의 조절로 매우 적절하다. 그것은 이미 서로의 눈짓만으로도 최고의 공연을 선사하는 이들이 오랜 역사를 품고 있다는 그 증거이다.

이어 ‘설장구춤(유점례, 이영단)’과 ‘징춤(김정숙)’이 이어졌다. 설장고춤은 장고 2명이 빠른 호흡으로 신들린 장고 가락을 연주하며, 징춤은 징이라는 악기만이 줄 수 있는 그 여유로움과 긴 호흡이 매우 매력적이다. 특히 시연자(김정숙)의 어깨, 팔 동작과 시선처리가 더욱 그러하다. 서로의 눈짓으로 박자를 맞추는 것이 무척 경이롭다. 징의 소리처럼 묻혀있는 소리가 살아나야 풍물전체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어 밀양북춤(하용부)의 시연이 이어졌다. 북을 끈으로 매어 무릎정도에 두고 북채를 들고 사물놀이 반주에 맞춰 연주와 춤이 동시에 빠른 전개로 이어진다. 춤꾼의 호흡과 선, 표정 손끝까지 힘이 넘친다. 강,약,중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박자와 세기는 결코 서양의 오선지에 표현되어 질 수 없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압권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 행복함에 젖어있는 그는 이미 전부를 다 가졌다. 이 세상을 큰 무대로 벌이는 진짜 한 ‘판’이다.

‘교방춤(박경랑)’은 정말 아름다웠다. 이미 젊은 시절을 춤꾼으로 보내고 그 자태와 온화한 미소가 그대로 보이는 그녀의 손짓, 발짓은 기교를 부리지 않음에도 그 힘이 객석에까지 전달된다. 그녀는 넓은 무대에 혼자였지만 빈틈이 없다. 손목, 손끝, 팔, 손가락, 손에 들린 부채자루 끝까지 그 힘이 느껴진다. 호흡을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이어 김운태 연출의 긴 세월의 유장함이 묻어나는 ‘채상소고춤’과 ‘부포춤(유순자)’이 이어졌다. 특히 부포춤은 상쇠가 머리에 쓴 부포의 깃털이 날리면서 사람의 얼굴 표정과도 같은 모양으로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게 한다.

우리의 옛 놀이는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 오늘 펼쳐진 이들의 ‘판ㆍ굿’은 진정 자유로웠고 진짜 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잠시의 쉼도 없이 다시 장고와 북을 집어 들었던 이들의 젊은 시절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그 노래 한 자락에 다시금 힘을 얻어 일터로 나갔던 우리 옛 선조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우리의 놀이 한 판을 ‘아트(Art)'가 아닌 ’하트(Heart)‘로 봐달라는 사회자(예술감독 진옥섭)의 농담한마디가 참으로 진짜 같다. 그냥 즐기라는 이들의 한마디가 더욱 특별히 느껴진다.


공정임기자 kong24@hanmail.net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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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장단분석

이 채 영

국문초록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음악에 나타난 장단의 구조적 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춤을 이해하는데 앞서 음악의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전통춤 전반의 음악적 연구에 발전될 하나의 영역이라 사료된다.

또한 우리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음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장단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춤의 유명세에 비해 장단의 음악적 특성연구는 미미한 편이다. 즉 장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장단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연구는 아직도 선행 연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쟁점이다.

따라서 본고는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장단을 분석하여 악보화하고, 리듬분석을 목적으로 김청만선생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 음악은 총 261장단이며 1995년 운파 박경랑이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후 영남교방청춤의 전용 반주음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기획, 제작된 음악으로 굿거리 131, 자진모리 119, 마지막굿거리 11장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연구는 총261장단 중 굿거리 48장단으로 장구와 징 장단을 먼저 채보하여 연구하였으며, 나머지는 추후 지속적인 연구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은 매 장마다 특색 있는 하나의 악기 출현이 특징으로 자리잡은 연주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박경랑의 개인적인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구조와 장단의 흐름은 단조로움 속에 나름의 규칙과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굿거리장단은 오로지 연주자의 기량과 춤추는 이의 즉흥성의 반영을 위해 기본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 연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음악의 리듬구조는 제 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며, 제 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제 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 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상과 같이 영남교방청춤의 굿거리장단은 본문에 기보된 것과 같이 여러 갈래의 단순한 형태로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났다. 그 변화들은 춤의 근원을 바탕으로 표현양상이 그만큼 다양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운파 박경랑, 교방청, 리듬, 장단 연구, 영남교방청춤

목 차

Ⅰ. 서론

2.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굿거리

48장단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3.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박자구조와

장단구현양상

2. 연구방법 및 한계

 

Ⅱ.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특징

Ⅲ. 결론

참고문헌

1.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시나위구조

Abstract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전통음악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단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여러 장르의 음악에서 장단은 한국음악형식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고 있으며, 가락이 생성되는 기본적인 틀거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음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장단이다. 즉 장단의 구조가 느리고 복잡하며 어려울 때 보다 쉽고 단순하여 그 장단의 반복구조를 빨리 파악할 수 있을 때 더 그 음악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음악 안에서 사용되는 장단구조는 규칙적이고 일정할 때 그 음악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함을 가지고 있는 장단의 음악적 특성에 대하여 밝히지 못한 춤이 있다. 즉 장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91년 한국국악학회에서 ’한국전통 음악의 장단’이라는 주제로 국악학 전국대회에서 장단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장단에 대한 연구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이렇듯 장단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연구는 아직도 선행 연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쟁점이다.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속춤은 글로 체계화한다던지, 무보로 작성하여 활발하게 전승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록의 부재(不在)로 인해 그 연구의 한계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영남교방청춤의 장단과 함께 연계하여 그 동안 간과되었던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와 장단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아울러 장단을 분석하여 악보화하고, 리듬형태를 분석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2. 연구방법 및 한계

본 연구의 연구범위는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 춤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본 음악은 1995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후 녹음된 음악이며, 영남교방청춤 전용 음악을 목적으로 제작된 음악이다. 총261장단중 굿거리48장단으로 장구와 징 장단을 채보하였으며, 김청만선생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또,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학습하면서 전체상을 파악하였으며 음악과 춤의 부분적 특징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영남교방청춤 전 과정의 ‘2009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白衣百舞)’ VTR 녹화물을 자료로 삼았으며, 영남교방청춤 보존회에서 기획한 VTR 녹화물을 중심으로 영남교방청춤 장단에 따라 굿거리 48장단만 컴퓨터 finale file과 일러스트레이터 CS 3를 이용하여 본인이 직접 채보하여 진행되었다.

 

 

Ⅱ.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특징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교방에서 추어졌던 춤으로 박경랑의 외증조부인 故 김창후 그리고 그의 제자인 故 조용배 그리고 운파 박경랑에 의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남교방청춤은 즉흥무의 형식으로 추는 사람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형태로 풀어낼 수 있다.

본고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음악은 1995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후 녹음된 음악이며, 영남교방청춤 전용 음악을 목적으로 음악실에서 제작된 음악이다. 총 261장단으로 굿거리 131, 자진모리 119, 마지막굿거리 11장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 연구는 총 261장단 중 굿거리 48장단으로 김청만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의 연주형식은 굿거리에서 합주-거문고 독주- 합주-대금독주- 합주-아쟁독주- 합주 순으로 진행되며, 자진모리에서는 합주-해금독주-합주-피리독주-합주-가야금독주-합주 순이며, 마지막 굿거리에서는 합주로 마무리된다. 매 장마다 특색 있는 악기의 출현은 운파 박경랑의 개인적인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영남교방청춤 음악의 특징이다. 춤이 매 장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유에 근거하며, 전체적인 영남교방청춤 음악에 있어서 춤과 합을 이루는 매력이 되어주고 있다.

 

1.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시나위구조

이 춤의 음악은 시나위 합주로 굿거리(또는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시나위의 구조는 한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 지방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무속 계통의 시나위 음악이 이 지역에서 주로 발달된 것은 한강 유역을 경계로 하여,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각기 무당의 유형이 다름에서 기인한다. 북부지방은 강신무가 많아서 소위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은 무업을 하기 위한 수련기간이 적어서 남부지방의 무당보다 굿이 가지고 있는 연희적인 면이 다소 떨어진다 할 수 있다. 반면, 남부지방은 세습무가 대부분이어서 이들은 예로부터 집안 대대로 이을 가업으로 계승하였다. 따라서 남쪽의 당골(세습무인 무녀)들은 노래와 춤을 일찍부터 접하게 되어 기예가 뛰어났다. 이 지역의 무의식에서 쓰였던 음악이 오늘날 같이 예술 음악화 된 것으로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으로 경기남부, 충청도, 남도지방의 민속악인 무악에서 유래된 가락의 하나이다. 시나위 가락은 판소리와 산조의 계면조 가락과 비슷하며, 시나위의 악기편성은 어느 것이나 타악기와 관악기가 중심이 된다. 또, 산조와 마찬가지로 장구가 장단을 잡아서 이끌어가는 음악이기에 어떤 형태의 음악에도 장구가 빠지는 일이 없으며, 시나위의 악기편성이 다양해지고 한 종류의 악기가 둘 이상 편성될 때에는 장구 이외에도 징이 첨가되는데, 징이 사용됨으로써 무속적인 분위기는 더욱더 고조된다. 시나위는 원래 관악기만의 합주였으나 타악기(장구, 징)와 현악기(가야금, 거문고, 아쟁)를 첨가시켜 연주하기도 한다.

관악기는 젓대와 피리가 주로 쓰이며, 젓대와 피리로 시나위를 연주할 때에는 시나위 청으로 하여서 여러 가지로 손을 잡는 방법이 틀리며, 음조직도 올라가는 경우와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시나위에 있어서 악기의 청이 달라지는 것은 시나위가 본래 무속음악의 형태로써, 무녀가 음역을 맞추어 노래에 맞는 선율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연주하는 수성가락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시나위와 산조는 불협화의 협화 또는 부조화의 조화 등으로 설명된다. 이는 현장, 곧 연주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창작해 가는 음악이며, 따라서 엄밀한 음악에서 시나위라는 악곡은 같은 것이 둘 이상 존재치 않는 현장음악이며, 즉흥연주인 것이다.

 

2.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굿거리 48장단

영남교방청춤에서 반주음악의 음양의 표현은 춤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음양에서 음의 소리는 궁채의 연주가 중심이 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장구의 궁편과 채편의 타격에 의해서 생기는 음양의 표현은 음색과 음질이 결합하여 소리의 밝음, 어두움, 깊음, 얇음, 무거움, 가벼움 등을 표현한다. 음양의 표현은 장단의 진행 속에서 춤공연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장단의 맛을 느끼게 하며 일체의 감정으로 춤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굿거리장단은 무수히 변주될 수 있다. 그것은 8분의 3박을 단위로 한 리듬꼴의 다양한 변화에서 비롯하며 특히 8분의 6박을 단위로 나타나는 관습적인 리듬꼴을 제외한 각 박의 리듬꼴은 대부분이 독자적이어서 8분의 3박 단위 리듬형으로 묶어지는 조합의 방식이 무수히 가능하다. 이러한 다양한 변주는 장구의 궁편과 채편을 교차하며 이루어지는 잔가락에서 비롯된 것 같다.

본 장에서는 시나위 장단의 분석과 음악적 특징을 분석해 본 결과 형식적으로 매우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음악적인 면에서 장구의 타격, 음양의 표현 등이 상호작용하여 김청만의 연주와 운파 박경랑의 춤 속에서 사람들을 몰입하게 함을 알 수 있다. 또 김청만의 타격에는 음악적 내용에 따라 소리의 질적 변화를 동반하여 선율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타격의 선율적 표현은 리듬동기의 형태로 결합되면서 장단의 즉흥성을 구현하게 된다. 이 타격의 선율성은 춤의 모든 음악에서 드러나면, 특히 영남교방청춤에서는 이야기식 춤판이 끊이지 않도록 감정을 유지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이성이다.

다음 <악보1>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반주음이 되는 굿거리 48장단의 장구와 징 장단채보이다.


 

 

 

 

 

 

<악보 1>

 

 

3.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박자구조와 장단구현양상

영남교방청춤의 총 261장단 중 굿거리 131장단, 자진모리 119장단, 마지막굿거리 11장단 중 굿거리장단 48장단의 리듬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 굿거리 46장단까지를 3분박으로 나누어 제1,2,3,4박으로 구분될 때, 제 1박에서는 리듬형이 몇 개가 있으며 어떤 리듬형의 사용이 많은지를 알아보고, 제2박과 제3박, 제4박에서도 같은 형식으로 리듬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47,48장단은 2분박의 맺음장단으로 리듬형 분석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다음은 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에서 보이는 리듬형 분석사항이다.

 

1) 영남교방청춤 48장단 리듬형 분석

 

가) 제1박의 리듬형

,

제1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45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1번 출현된다. 제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 되며 이는 장단이 시작의 눈을 확실히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나) 제2박의 리듬형

,

,

, , , ,

 

제2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2번,

③번은 20번, ④은 11번, ⑤은 1번, ⑥번은 10번, ⑦번은 1번 출현된다.

제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다) 제3박의 리듬형

,

 

제3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2번, ③번은 1번, ④은 38번, ⑤은 2번, ⑥번은 1번, ⑦번은 1번, ⑧번은 1번 출현된다.

제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라) 제4박의 리듬형

,

,

 

제4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1번, ③번은 1번, ④은 15번, ⑤은 9번, ⑥번은 13번, ⑦번은 1번, ⑧번은 2번, ⑨, ⑩, ⑪은 각 1번씩 출현된다.

제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제2박과 4박에서 조금 더 다양한 리듬형이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영남교방청춤 굿거리 48장단의 출현빈도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 48장단의 출현빈도를 분석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의 출현빈도

리듬형태

출현장단

회 수

1

1

1

1

1

1

4,6,7,12,14,15,19,21,29,40

10

5,11,13,16

4

8,17,38

3

1

1

1

1

18,20,26,28,31,32,33,35,41,42,44,46

12

1

1

1

1

1

1

25,30,39

3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표 1>의 굿거리48장단의 출현빈도를 살펴보면 장단이 10번, 장단이 12번으로 48장단 중에 눈에 띄게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다.

춤 반주 장단에서는 장구가 가장 핵을 이루는 악기로, 모든 장단의 변환과 빠르기를 조절한다. 특히 영남교방청춤 음악은 매 장마다 특색 있는 악기가 하나씩 도드라지게 연주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구가 첫 박과 끝 박을 정확히 짚어주고 사이에 있는 잔가락은 거의 들릴 듯 안 들릴 듯 짚어주며 있으며, 그사이 가락은 징이 채워주고 있다.

Ⅲ. 결론

본 연구에서는 영남교방청춤 음악 중 48장단을 대상으로 분석하였다. 김청만이 연주한 장구장단에 관하여 분석 연구한 결과, 음악적 구조는 장단의 흐름이 단조롭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나름의 규칙과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영남교방청춤에 쓰이고 있는 굿거리장단의 기본요소는 시나위장단으로 기본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연주되고, 오로지 연주자의 기량과 춤추는 이의 즉흥성이 절묘하게 합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단의 형식은 대표적인 시나위 장단들의 기본리듬형과 자주 나타나는 변형장단이 있었으며, 장단 형식이 자유롭고 즉흥성이 강한 음악인 반면, 시나위는 악기 편성도 일정치 않은 채 불협화음인 듯 하면서도 그 소리들이 조화의 극치를 이뤘다.

 

영남교방청춤 음악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나위 장단의 경우 대게 살풀이장단과 자진모리장단으로 구성되는데 중모리 장단과 진양조장단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산조의 경우 정해진 장단 속에 엄격히 자리잡은 음악인 반면, 시나위는 다듬어지지 않은 덜 형식적인 음악이다.

둘째, 일반적인 굿거리장단에 비해 두, 세번째 박을 장구가 치지 않고 징을 친다. 또, 37마디와 43마디에서 채편의 수가 많아지면서, 장단 안에서는 11마디와 13마디가 장단이 같다.

셋째, 계면조 음계만으로 선율이 짜여 져 있으며,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음악이 아닌 자신이 즐기기 위한 음악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서민의 음악이며 즉흥성이 강하다. 또한 음의 강·약은 첫 박과 마지막 박에만 사용되고 있으며, 장단의 기술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

넷째, 4박으로 구성된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리듬형의 종류로는 제 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 되며 이는 장단이 시작의 눈을 확실히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제 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제 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 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제 2박과 4박에서 조금 더 다양한 리듬형이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굿거리48장단의 출현빈도를 살펴보면 장단이 10번,

장단이 12번으로 48장단 중에 눈에 띄게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본형의 특징들을 주로 장단구조로 사용하지만,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민속춤들은 장단의 리듬을 악사에 따라 흐름의 붙임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민속음악의 즉흥성과 다양성의 표현인데 주어진 틀은 비슷하지만 춤을 추는 흐름의 맥에 따라 즉흥적으로 달리할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현재 추어지고, 연주되어 지고 있는 장단형이 단조로움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남교방청춤에서도 운파 박경랑의 춤과 음악이 합일이 되면서 완성도를 더욱 높여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본 연구는 이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리듬의 분석을 통해, 리듬에 따라 장단구조와 붙임 형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고찰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단순하다고만 생각했던 영남교방청춤의 굿거리 48장단이 정형화된 형태가 아닌 다양하게 연주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야말로 우리 민속음악의, 우리 민속춤의 본질일 것이다. 앞으로도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전통음악의 즉흥성과 현장성에 기여할 연구자료가 되길 기대한다.

이상의 결론을 통해 영남교방청춤의 장단구조는 단조롭지만 나름의 규칙성과 춤의 움직임이 합일됨으로 그 원리에 따라 즉흥적인 장구반주나 소리악기반주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틀에 박힌 정형성에서 벗어나 반주자가 즉흥적으로 자기 멋과 흥을 소리에 실어서 부르고 어우러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앞으로 장단과 춤의 관련성뿐 아니라, 선율 악기의 반주에 대한 춤사위 연구도 더욱 심도 있게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서적

이보형(1994), 한국민속음악 장단의 리듬형에 관한연구, 민족음악학.

길석근(2006), 한국음악의 장단 이해, 서울, 우리가락연구회.

이용식(2009), 한국 음악의 뿌리 팔도 굿 음악, 서울대학교출판부.

 

 

논문

최병길(2009), 동해안 별신굿 장단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주연(2003), 민요의 굿거리 장단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하진경(1988), 음악적 리듬구조의 분석론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진영란(2009), 강성영류 태평무 장단의 분석,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정기간행물

2011, 계간 예술문화비평 제2호 가을,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우리춤 연구소, 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기타

2012, 1, 30, 운파 박경랑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Woon Pa-Park, Kyung Lang Yoeng Nam Gyobang Cheng Chum Analysis of Rhythm

  ,

Lee, chae yeo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tructural features of rhythm expressed in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Prior knowledge of the structure in Music before dance is an essential factor and a spectrum that lead the development of Music in Classic Dance.

Also study of rhythm is able to help us understand and recognize the music. Although the Yeong Nam Gyoban Chum has been very well known, there has not been researched about the rhythm of the work.

In this point that the rhythm plays a very important role in this dance, this is an issue that there has no advanced research.

Thus, this study made a music score and analyzes the rhythm based on accompaniment of Master Kim, Cheong Man.

The music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all 261 rhythms. In 1995, the Music had compopsed only for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This music is constituted Goodguri 131 rhythms, Jajinmori 119 rhythms, and Last Goodguri 11 rhythms.

This study researched 48 rhythms in front part among the 261 rhythms. The last of part will be researched continually. The each music part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very characteristic and this is because each part has one special instrument.

The music structure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simple flow but improvised in order to reflect dancer’s ability to impromptu.

 In rhythmical structure, the beat 1 has 3 types which are played mostly for 45 times, the beat 2 has 13 types of rhythm and played for 20 times, the beat 3 has 9 types of rhythm and played for 38times, and the beat 4 has 13 types and played 15times.

Thus, the rhythm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simple forms but variety at the same time and emerged various changes. The various changes of music have performed and that is derived from the modes of dynamic dance representation.  

 

Key work : Woon Pa Park, Kyung Lang, Gyobang Cheng, Rythm, Research of Rythm,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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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의 변천사

연구논문 2012. 8. 1. 13:57


교방의 변천사

김 예 진

국문초록

교방(敎坊)의 전신(前身)을 찾는데 있어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용수의 역할을 짐작해보면, 삼국시대이전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는 직업적인 무용수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교방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이었던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이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통의 단절을 꿰하던 일제강점기의 매서움도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에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에 속한 교방,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같은 음악기관에 예속된 교방사 등의 역사적 흔적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전통문화예술의 교육과 전승, 전파에 오랜 세월 그 소임을 다해 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교방, 권번

1)

목 차

Ⅰ. 서론

Ⅳ. 근대, 현대 교방(敎坊)의 변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2. 연구 방법

2. 현대 교방의 흔적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Ⅴ. 결론

1. 삼국시대

 

2. 발해시대

참고문헌

 

Abstract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가.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모든 한국춤의 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천해 온 교방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춤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춤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생춤이라며 천시하는 인식의 과오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일부 안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기생의 기예(技藝)를 예술의 주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전면에 보여지는 남성들의 유희적 놀음으로만 기생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평가와 가치는 훗날 파생되는 역사의 줄기와 뻗어나간 가지의 역할로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궤 안에서 응당한 사적(史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지난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나간 시간들의 과오의 인식이 덮혀지고 그 틀이 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은 그저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 켜켜히 묵혀낸 곰삭은 절대시간을 넉넉히 품은 탄력성을 지닌 문화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탄력성이 존재하는 ‘교방’은 그 시작점에서 오늘날까지 품고 온 전통의 낱알들이 이뤄낸 풍부한 역사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은 온전한 사적(史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있었고, 이러한 ‘교방’을 향해 왜곡의 거플을 벗겨내고 그릇된 인식을 거둬내 간과된 사고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 우리 예술계에서 시작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전통춤의 모태와 전신이며, 현재 전통춤계의 골(骨)과 근(筋)을 형성하는 역할은 수 천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교방(敎坊)이 이루어내었다.

교방이 존재할 당시의 예술을 장려하고 관장(管掌)한 나라의 관심도와 영향력을 추산해보면, 오늘날 현 정부가 풀어내는 예술정책에 비해 앞설 뿐 아니라, 그 비중 면에 있어서도 크다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전하는 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새것을 익힌다는 뜻처럼 교방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 선조들의 뜻과 밝은 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전통예술을 향한 과거로부터의 진귀함을 터득해낼 것이다.

본 연구는 교방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과정과 시대별 변천과정을 통해 현 시점에서 취해야할 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고찰이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사적고찰이 갖는 방법으로 사료(史料)분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3)

교방의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교방의 변천과정을 다룬 선행연구 및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1) 1. 삼국시대

고구려시대 무용총(舞踊塚) 벽화 속에서 장삼자락처럼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은 고구려시대에도 무녀, 즉 직업적인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 긴 소매의 옷차림은 중국 중원 한족의 춤 복장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춤 예술이 서로 교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의 회랑에 나타난 군주행렬도(君主行列圖)에서의 검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분 묘실 남벽에서의 군무의 한 장면에서 고구려시대 무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설치된 음성서(音聲署)에는 무척(舞尺), 가척(歌尺), 금척(琴尺) 등의 전문적인 예인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무척(舞尺)은 춤 잡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기녀의 존재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악·가·무가 어울어진 종합예술이 분야별로 세분화, 전문화되어 국가에서 관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관제가 정비되어진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던 삼국시대에는 벌써,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서의 효용성과 유용성으로 나라의 통치자들은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전문화된 예술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출현이 갖는 사적 의미만으로도 이미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예술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2. 발해시대

발해시대는 교방(敎坊)이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시기에 국가의 악과 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사(太常寺)가 있었으며, 이때 무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교방의 역할을 담당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재현, 2007).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역사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 한 후,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서게 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고구려의 시대를 따르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고자 노력한 흔적이 존재한 나라라고 평가되어진다. 그러한 자주성과 주체성이 예술을 향한 노력과 관심으로 이어져 신라와 같은 왕립음악기관을 설립하고 장려하는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전통적인 무교의식과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더불어 음악에서도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관기들에 의해 연등회에서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가 추어 졌다고 전해진다(박지은, 2006).

관기(官妓)들의 역할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중궁정재가 활발히 유입되어가면서 커져갔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로는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오양선, 연화대무, 곡파로 무보가 고려사(高麗史)와 악지(樂志)에 전하며 향발무와 학무가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기녀들은 천민 출신의 무당과 관청의 기녀와 관비로 당시 여악 담당기관인 교방(敎坊)에서 기예를 익혔으며 교방은 교방기(敎坊妓)와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는데 교방기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官妓) 중 색과 예가 가장 뛰어난 자로 가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교방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가무를 익혔다.

또한 지방기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열릴 시에는 교방기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문 기녀양성기관인 교방이 설치됨에 따라 기녀들은 한층 격식 있는 가·무·악(歌·舞·樂)을 정립하였다.

고려시대 안정된 정치로 인하여 궁중연희가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기녀들은 왕의 풍류를 돕거나 외교 사신들의 접대연에서 연희를 하였다. 연희의 형태는 점차 사치스러워져 사대부의 개인 연희시에도 기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기(地方妓)나 사기(私妓)에 의해서 사대부의 집안의 행사나 서민잔치 마당에 가무악을 공연함으로서 사대부 개인의 문화적 특성과 서민의 취향에 따른 다른 형태의 가·무·악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고려시대의 교방은 대중화되는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들을 위한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대비나 중궁전 또는 내명부 등의 여자들을 위한 잔치인 내연(內宴)으로 잔치가 구분되는데 이러한 잔치의 공연활동을 담당하던 왕립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진연청(進宴廳), 진찬소(進饌所), 풍정도감(豊呈都監) 같은 임시 관청에서 궁중잔치를 위한 행정적인 임무를 담당 했다(고재현, 2007).

공연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임금의 거동과 같은 의식 절차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공연과 잔치에서 반주음악과 함께 기녀들의 춤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정재 춤을 추기위해 기녀들은 창사(唱詞)와 춤사위 또는 구호를 장악원의 악사들로부터 지도 받았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교방의 체제나 제도를 거의 이어 받았으며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악무제도가 조선 초기부터 발달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녀들의 궁중연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의 기녀들이 올라와 공연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궁중에서 연행되는 정재공연을 지방의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중계자 역할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던 춤을 정재라고 칭하고 정재 무동과 정재 기녀로 무희를 구분 하여, 외연에서는 무동만을 내연에서는 기녀만을 구분하여 출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생차비(妓生差備)라는 일종의 교사로부터 궁중정재 뿐 아니라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지도 받으면서 교육이 보다 구체화 되었으며 학과 과목명이 제시되었고, 춤사위별로 전공자가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관기(官妓)를 경기(競妓)와 지방기(地方妓) 또는 외방기(外方妓)로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경기에는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의녀와 공조와 상의원의 침선비까지 포함된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들어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렸음으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똑똑한 관비를 선발하여 제생원에 소속시켜 글과 의술을 지도하였고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자들만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 궁중의 연희에도 참석 시켰다.

외방에서 여기가 올라오게 하면 폐단을 끼침이 많음으로 검소히 하기 위해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 하도록 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는 장악원(掌樂院)에서 여기들이 가·무·악(歌·舞·樂)을 연마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녀와 침선비가 평소에는 의술과 바느질을 연마하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가무에 참여했다.

순조 때에는 정재가 정리되어 정재의 종류가 5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에 달하였고 순조28년(1828)에는 외연(外宴)과 내연(內宴) 모두에서 무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한 순조29년(1829)에는 순조 즉위 30년을 맞는 진연에서 가인전목단을 비롯하여 보상무,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등 김창하에 의해서 다양한 정재 안무를 창작하였고 효명세자에 의해 창사를 지어 정재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절정을 맞은 정재의 활동은 궁중의 대소 연희와 나라의 행사에서 여기들에 의해 연희 되어졌다. 효명세자 때 융성한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이던 궁중정재는 훗날, 연희의 장소 및 연희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민중들에게도 선보이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현대에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이어지게 된다.

교방에서 여령(女伶), 여기(女妓)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던 여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의 유형에는 소속에 의한 분류로 관기(官妓: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 (家妓: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자유로운 여기)로 구분된다.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지방관에 적 (籍)을 둔 여기)로 나뉘게 된다.

또,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 기), 색기(色妓: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가 있으며,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 牌: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 이패(二牌:일패에서 타락 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 다.)로 나뉜다(김지은, 2007).

고려시대의 ‘교방’기구의 설치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교방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역에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성기숙, 2005).

라.

마. Ⅳ. 근대와 현대의 교방(敎坊)의 변천

1)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904년 신분제 철폐로 관기들은 신분이 자유로워졌지만 실질적인 관기의 해체는 1908년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관기들이 경시청 관할로 옮기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손유주, 2006).

1907년 12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과 1908년 5월 28일 횡성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서양식 극장무대 위에서 기생들이 공연한 춤 종목인 승무와 한량무를 볼 수 있으며, 이춤은 무극(舞劇) 형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말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는 상관없이 자주 거행되는 진연으로 서울로 뽑혀온 기생들이 증가하게 되며, 진연을 마친 기생들이 서울에 계속 머물러 기생 수는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그들을 관리할 ‘기생 단속령’이 1908년 9월 25일에 내려지게 된다. 기생 단속령 내용으로는 “기생이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를 하고 인가증을 받아야하며 그만둘 시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한다”. 등의 기생의 활동을 단속, 통제하고 경시청의 명령권 안에 넣고자 만든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직된 기녀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한성기생조합’이라는 기생 조합이 생겼으며, 그들은 국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에 절과 고아원 등의 연주회에 공연을 하는 등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이설희, 2009).

또한, 유부기조합(有夫妓組合)인 한성기생조합에 대항하여 다동기생조합을 정악원 학감(正樂院 學監) 하규일이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으로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생조합의 춤 교육은 장악원의 전임자, 민속춤 전문인, 은퇴한 노기, 선배기생 들이 관계하였다(김윤주, 2002).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기생의 활동은 경찰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일본 기생의 활동방식이 조선의 기생에게 스며들면서 기생들의 예술 활동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외래문화의 수입으로 권번 이전의 교방의 흔적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변신을 이룩해 낸 시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발판은 바로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1905년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자 1908년 여악에 소속됐던 관기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방황하던 기생들은 일본 경시청을 통해 하달된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는 조직에 묶여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은 1909년 경시청에 의한 ‘창기 조합조건 명령건’이라는 기생 단속령의 시행과정에서 생겨났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에서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전화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하규일의 수제자로 당시 명기(名妓)로 알려졌던 평양출신 이난향이 서울 입성과 기생 입적 경로 미 활동 내력을 회고한 글에서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였다.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때였다.”라고 1970년 12월 25일 중앙일보에 기재된 내용이 전해진다(성기숙, 2005).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던 권번은 서울의 경우, 한성권번・대정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 등이 있었고 대금・금천・동래・창원・광주・수원・평양・진남포・개성・안성・연기 등에 권번 또는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은 대부분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바로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전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이 존재했다. 평양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권번이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지역이다. 진주는 한말 정현석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생들에 의한 다양한 유형의 춤이 전승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진주교방 역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후에 생겨난 것이 진주권번이다(성기숙, 2005).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예술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 등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던 분들이 대부분 동래권번 출신이거나, 마지막에 동래권번에 모여든 예인들이었다고 한다.

2)

3) 2. 현대 교방(敎坊)의 흔적

교방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 발해의 태상사를 만나게 된다. 국가의 통치이념과 운영에 있어 예술의 가치와 유용성의 통찰이 삼국시대에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왕립으로 음악전문기관인 음성서(音聲署)와 태상사(太常寺)가 설립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처음 교방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은 음악과 춤의 전승기관으로 건재했었다. 역사의 급격한 변화와 나라의 기운이 모든 것을 뒤바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명칭이 옮겨 가지전까지 교방은 오랜 시간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전폭적으로 책임지던 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번으로 모든 기능과 존립이유가 변환의 시기를 겪은 후, 권번은 영롱한 전통문화예술의 단절의 기로에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필요의 역사가 되어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잃기 쉬었던 우리전통예능의 교육의 산실 역할을 권번은 잃어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주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교방의 관기들이 대부분 권번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통은 끊겨졌을 것이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연희를 목적으로 예능인을 양성하던 교방의 흔적은 단연 국립국악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에서 교방은 현대의 현재적 모습인 국립국악원으로 1951년 설립되어졌다. 국립국악원은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진흥과 발전에 있어 다양한 노력과 시도로 국가의 대표적 ‘흥’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다.

교방의 역사를 짊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능의 교육으로, 연희기관으로 그 소명을 다했던 권번은 장악원이 해체 된 후, 이왕직 아악부, 구왕궁 아악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에 있어서 가교적인 숨은 역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사라져버린 교방의 기능을 다했던 권번이 있었기에 훗날 자리하게 된 국립국악원이 예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온전한 형태미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정악과 민속악을 전승하여 보존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설립된 이 기관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송방송, 2006).

바.

사.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사에 춤의 비중에서 전통춤 영역에 존재하는 교방, 권번, 기생들의 역할이 빚어낸 공로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교방의 역사와 변천사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각 시대별 교방의 존재와 역사, 기능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교방의 시작점은 한반도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고 나라의 기운이 뿌리를 내리던 삼국시대로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먼저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왕명으로 존재했으며 발해에는 태상사(太常寺)가 신라처럼 왕립음악기관으로 기록되어져있었다.

둘째, 정확한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궁중정재의 활동상을 다 소화해낸 교방은 교육과 연희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해낸 곳이다. 궁내의 모든 대소연희에 활약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교육이 결국엔 예술성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말, 열강들의 어지러운 문호개방과 정치적 혼탁 속에 예술의 목적과 가치가 국가차원에서는 희석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예술성의 애환은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순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넷째,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참고문헌

 

고재현. 2007.「근대 제도개편에 따른 교방 및 기방무용의 변화양상과 특징고찰」, 용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지은. 2007.「조선전기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여기의 변화양상 고찰」,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박지은. 2006. “官妓制度를 중심으로 한 기생(춤)의 기원 및 변천에 관한 고찰”. 『한국무용사학』제5호, 한국무용사학회.

성기숙. 2005.『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민속원.

성무경 역주. 2002.『敎坊歌謠』, 보고사.

송방송. 2006.『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안성희. 2005.「권번 여기 교육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설희. 2009.「‘조선미인보감’에 나타난 기생조합과 권번에 관한고찰」, 한국예술종합 학교예술전문사과정.

임수정. 2008. “한국 여기검무(女妓劍舞)의 예술적 형식”,『공연문화연구』제17집,

한국공연문화학회.

임신화. 2007.「권번과 개인학습의 교육과정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한하영. 2009.「권번여기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The Evolutions of Gyobang

 

Ye-jin Kim (completed Ph.D. course work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In searching the predecessor of Gyobang, the Muyongchong murals of Goguryeo from the Three Kingdoms era suggest that dancers were involved with the various affairs of the state even before the Three Kingdoms era. The historic origin of the name Gyobang can be traced to Daeahkseo, which w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Goryea era, and the musicians of Kwanhyeonbang. The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music and dance while involving with the court dance. The name of Gyonbang changed from Gyogang to Gyobangsa, Gyobangi and some other name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era. Meanwhile, however, there was no material change in the overall substance and function of Gyobang over the centuries.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or geisha system in 1907, scattered gisaeng constituents got together and formed 'Kweonbeon'. Kweonbeon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preserving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especial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s suc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needs to be assessed in a new light.

 

As the state-wide unions of gisaeng, Kweonbeon played a big part in withstanding the Japanese attempts at decimating traditional cultural norms and practic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in laying out the found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as we know and relish today.

 

Gyobang was a public entity in charge of music, dance, and songs, among other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ose who belonged to Gyobang were named Yeogi, Yegi, Yeoahk, and Yeoryong. In terms of affiliation, Gyobang can be classified into Kwangi, Sagi, and Gagi; in terms of region, Kyeonggi, and Jibanggi; in terms of function, Yegi and Sekgi; and, finally in terms of hierarchical level or class, Il-pae, E-pae, and Sam-pae.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system, Kweonbeon first started off as Joyang-gurakbu in 1909 and again as Chosun Jeongahkjeonsupso in 1911. Afterwards, Kweonbeon was operated as Dadong-johap in 1913 as a spin-off division of the Chosun Jeongahkjeonsupso. Kweonbeon continued to grow as Kwangyo-johap, and, in 1914, the era of Kweonbeon took off through Chosun Kweonbeon, Hanseong Kweonbeon and other entities. Numberous Kweonbeon existed in Seoul and other provinces, and, until recently, Dongrae Kweonbeon had produced sizable traditional artists.

 

In conclusion, Gyobang served as a public purveyor of traditional cultural practices and values for centuries, and then laid out the foundational roots for the function and roles of Kweonbeon following the end of the state gisaeng system.

 

As can be seen from pertinent historical traces, Gyobang is an institution par excellence for training, disseminating, and passing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for ages lon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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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교방춤 등 전통 춤을 현대시각으로
수성아트피아 어버이날‘조율 TUNE’공연

 

 
 

 
수성아트피아가 어버이날 기획 공연으로‘조율 TUNE’을 8일 오후 7시 수성아트피아 용지홀에서 연다. 이번 공연은 ‘매혹’‘구도’‘신명’을 주제로 한국 전통 춤의 대표적인 명인들과 현대무용가들이 춤사위를 나누게 된다.

이번에 공연될 작품은 영남 교방춤, 승무, 밀양백중놀이 등 시간을 넘어 한국의 고유한 정신이 살아있는 전통 춤의 주제와 미감을 현대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이다.

박경랑이 보여주는 영남 교방춤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예인집단인 기생들의 춤으로서 기품 있으면서도 고혹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반면 김은희는 이 미감을 현대 사회의 도발적인 이미지로 새롭게 해석한 창작춤을 선보인다. 두 번째 무대는 채상묵과 현대 무용가 이용우가 ‘구도’라는 화두를 파격적으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마지막 무대인 ‘신명’은 밀양백중놀이의 하용부와 현대무용가 차진엽의 만남이다. 하용부의 북춤, 범부춤은 토속적인 흥취를 한껏 느끼게 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대와 고전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공연의 음악은 정영만이 이끄는 ‘남해안 별신굿 보존회’ ‘김주홍과 노름마치’ 음악극 집단 ‘바람곶’이 맡았으며, 소리꾼 장사익이 출연하여 춤과 함께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VIP석 5만원, R석 4만원, S석 3만원(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053)666-3300, 티켓링크.

조두진기자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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