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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박경랑소개'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7.09.15 운파 박경랑의 춤에 대한 몇가지생각
  2. 2015.05.20 운파 박경랑의 돌아가신 스승님들
  3. 2015.01.12 雲破박경랑 소개영상(tapestry of sacredmusic)
  4. 2014.10.13 故 김수악 선생의 살풀이춤 (1986년 국립극장 대극장)
  5. 2014.09.28 박경랑의 스승 故김수악선생의 진주교방 굿거리춤(Gutgeori Dance of Jinju Gyobang)
  6. 2014.09.22 박경랑 심사이력
  7. 2014.07.14 운파 박경랑 소개
  8. 2014.05.04 박경랑의 스승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 강옥남
  9. 2014.03.03 박경랑의 스승 김진홍선생
  10. 2014.02.06 운파 박경랑 사진
  11. 2014.02.01 박경랑의 스승 금산 故조용배옹
  12. 2014.01.15 운파 박경랑 영문소개
  13. 2013.08.24 박경랑의 외증조부 고성오광대 중시조 故김창후옹입니다
  14. 2013.01.21 박경랑의 스승 영남 제일의 만능엔터테이너 ‘김수악’
  15. 2012.12.22 박경랑의스승 김진홍선생의 한량무
  16. 2012.12.14 최근국악관련 심사이력
  17. 2012.11.17 박경랑의 스승 김수악선생님의 교방굿거리춤 (korean traditional dance)
  18. 2012.10.22 박경랑선생의 외증조부 故 김창후옹의 프로필입니다.
  19. 2012.10.02 진주검무,진주교방굿거리춤의 예능보유자 故 김수악 (金壽岳) 선생님
  20. 2012.08.14 운파 박경랑의 스승 2002 김진홍선생의 동래 한량춤
  21. 2012.06.20 박경랑의 외증조부 故김창후옹
  22. 2012.05.29 <부산 춤 텃밭을 일군 사람들-10> 전통춤 김진홍
  23. 2011.08.10 2011춘천아트페스티벌 _ 2011년 8월 5일(금) 오후 8시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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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TV팟에서 보기              자세히 알기 --> 故 김수악 명인



2012/05/26 - 진주검무,진주교방굿거리춤의 예능보유자 故 김수악 (金壽岳) 선생님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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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 14회 세계 한국국악 경연대회                 미국
2014 제9회 황산벌전국국악경연대회 충남
2014 제9회 전국풍남춤페스티벌 전북
2013 제23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10회 전국국악대전(서울) 서울
2012 제22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38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전북
2012 제1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경남
2012 제12회 세계한국국악경연대회 기타
2012 제30회 전국국악대전(전북) 전북
2010 제17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2010 제11회 국창권삼득선생추모전국국악대제전 전북
2009 제16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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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破 朴璟娘

 

1961년 경남 고성 출생. 중요 무형 문화재 제 7호 고성 오광대 초대 문화재이셨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견 춤꾼으로 보기 드물게 농익은 춤의 기량을 간직하고 있다.


 

4세에 춤에 입문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황무봉 故김애정 故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들에게 우리춤을 사사받았고 지금은 서울, 부산을 오가며 개인 공연 및 기획 공연 국악 무용 경연대회 심사 및 우리춤을 연구, 전수 ,보급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수상이력

 

93년 제 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전체 종합대상 (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3년 제4회 대구국악제 전체 종합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4년 진주 개천 예술제 제12회 개천 한국 무용제 특장부문 대상(문화체육부 장관상)수상, 95년 제21회 전주 대사습 놀이 무용부문 장원(문화체육부 장관상) 수상, 96년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 최우수상(국무총리상)수상 등을 거처 97년 제 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 하였다.

 

활동사항

 

현재 경상남도 무형 문화제 제 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 이며 한국 영남춤 문화 예술 연구소 대표. 박경랑 전통예술단 단장. 영남춤 보존회 대표. 국립국악원 문화학교 강사, 부산 경남정보대학 및 동서 대학교 사회교육원 전통예술과 한국무용 지도 교수로 부산에술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전통문화 예술대학원 전통춤 외래지도교수로 역임한바 있으며 각종 세미나를 통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박경랑의 영남 교방청춤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받은 춤으로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널리 알려진 춤이다. 민속학자 정상박 교수는 박경랑의 춤을 흔히 난초와 대나무에 비교하며 또한 '영남 춤의 규격속의 비규격 정형속의 비정형, 유형속의 강건 절제 속의 자유에서 박경랑의 춤의 멋을 느낀다'라고 표현했다

박경랑은 여러 명인 선생님들의 장단에 익숙해진 영남춤을 추어 왔으며 이제는 음악을 자유자재로 춤 사위에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전통춤의 깊이를 느끼게 하며 영남춤의 지킴이로서 이미 우리시대의 춤꾼 정동극장 명인전,팔무전,고궁명무전 등의 기획공연을 통하여 명무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다.


 


 

박경랑_공연이력.hwp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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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 Vol 63. 2009. 9/10. 49-51쪽 배 학수(경성대 교수/ 철학) --> 블로그보기

“뭣보다 교방이라는 담장, 그 담장이 가두기엔, 너무 큰 예인이었다"(KBS 황진이). 드라마에서는 예인藝人이라고 미화된 황진이 같은 기생들은 조선 시대 궁중이나 관청의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공연했다.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교방敎坊인데, 교방은 을사조약으로 폐지되었고, 그 후 교방의 기생들은 새로 생겨난 민간 조직인 기생 조합, 권번券番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권번은 서울, 평양, 부산, 대구, 진주 등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동기童妓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화대花代를 관리했다.

강 옥남(姜玉南)은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다. 그에게는 남기고 기록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언론에 한번도 대담 기사가 실린 적이 없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여러 번 부탁하여 마침내 그녀를 2009년 6월 15일 부산 서구의 새진주 식당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해 달라
.
1938년 일본 나고야 태생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대구 출신인 어머니는 자식 셋(오빠, 언니, 나)을 데리고 해방되자 귀국했다. 돈 3만원을 가지고 왔는데 환전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삼천포로 갔다가 부산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부민 국민 학교를 다녔고, 가정 형편상 졸업후 학업을 중단하다. 그 당시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았다. 오빠는 동아대학을 졸업했다. 어머니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어떻게 무용을 배우게 되었나?

16살쯤 한 순섭(여자. 서울에서 무용 학원을 하고 있다)을 권 명화 학원에서 만났다. 한 순섭의 아버지가 잘 살아서 학원을 차렸는데 거기에 이 매방을 초청하여 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권 명화 학원에서 딱 한달을 배웠는데, 이건 무용이 아닌 것 같아 한 순섭의 권유를 따라 이 매방 학원으로 옮겼다. 이 매방, 권 명화 두 사람 모두 그 당시 부산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권 명화도 이 매방에게서 배웠다.

이 매방은 어떻게 지냈는가?

이 매방은 학원이 잘 안되어 양춤(스포츠 댄스)추는 사람에게 낮에 학원을 빌려 주었다. 이 당시에는 이렇게 안하면 운영이 안 되었다.

이 매방은 김 진홍, 조 광, 전 무영(스페인춤, 지금 양정에 있다) 등과 함께 하야리야 부대에서 가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대영 극장에서 공연을 함께 한 기억이 있다. 이 매방, 김 진홍, 성민(이 매방의 제자이며 정 진욱의 스승이다), 그리고 내가 참가했다.

이 매방은 대신동에 어떤 부자가 학원을 차려 주어서 거기로 옮겼다. 나도 따라 갔다. 이 매방은 서울에서 전 무영을 데리고 왔다, 그는 딱춤(스페인춤)을 추는 사람이다. 어린이 시간에는 그분이 가르치고, 학부형 시간(법원장 부인, 변호사 부인 등)에는 내가 가르쳤다. 성 민이가 그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 나오면 내가 가르쳐 주었다.

강습료는 많이 받았는가?


아니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려고 거기에 있었던 거지 돈 벌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춤을 배웠는가?

입춤, 소고춤, 승무, 살풀이 다 배웠다. 그런데 이 매방은 춤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매방은 욕쟁이였다.

이 매방은 왜 춤을 잘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이 매방은 춤을 잘 추어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생짜(기생)들이 좋아한다. 고관 부인들도 돈 보따리를 들고 이 매방을 찾아왔다. 밤만 되면 화장을 똑딱하고 놀러 나갔다. 이 매방은 낮에 온천장, 별장, 호텔에서 기생들과 장구를 치고 놀았다. 김 진홍과 일본말을 하면서 같이 놀았다. 김 진홍은 예뻤다. 화장을 하면 여자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예뻤다.

이 매방 학원에서 언제까지 조교를 했나?

최 장술(노래)이 이 매방 학원을 그만두고 동래 온천장 권번에 춤을 가르쳐 주러 오라고 했다. 권번에 가니 기생이 120명 정도 앉아 있었다. 기생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먼저 권 명화가 춤을 추고 나갔다. 기생 한 사람이 장구를 치고 나는 춤을 추었다. 권 명화가 춤을 춘 줄도 몰랐는데, 기생이 나를 선택했다. 춤 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 나이 스물 한 두살 정도였다. 4.19이전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선거 유세에 기생들 데리고 가서 춤을 추어 주기도 하였다.

이 매방 외 다른 스승은 없는가?

김 온경 아버지가 학원을 할 때 강 태홍(가야금)이 그 뒤에 살았다. 한 순섭을 따라 강태홍에게 놀러갔다. 강태홍은 ‘살풀이는 앉은 사위에서 울고, 승무는 염불 장단에서 완전히 중이라는 것을 객석에 보여주라’라고 하였다. 거기서 나는 많이 배웠다.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고, 표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권번이란 어떤 곳인가?

기생 조합이다. 동래 호텔. 대성장, 동래 별장으로 기생이 간다. 춤추고 노래한다. 화대를 전표로 받는다. 두 방 들어가면 두장 받는다. 여기 동래 호텔인데 어느 기생 불러 주세요. 이렇게 손님이 주문한다.

권번은 4.19, 5.16과 함께 끝이 난다. 공무원이 술을 마시면 목 날아간다. 동래 권번을 운영한 사람은 이북 출신 여자이다.

기생은 무슨 일을 하나?

출근을 해서 조합장이 이름을 뒤집어 놓으면 오늘 일이 있으니 집에 가서 화장을 한다. 끝까지 이름이 그대로 있으면 공치는 날이다. 화대는 음식 값에 포함되어 있다.

기생은 방에서 상 하나 치우고 춤을 춘다. 동래 호텔은 방문이 두꺼워서 방음이 잘 된다. 단체 손님이 서울에서 많이 온다.

기생은 입춤, 살풀이, 민살풀이(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춤), 소고품을 춘다.

기생의 한이란 무엇인가?

기생 어머니가 기생을 영감에게 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아침에 남자는 가고 나서 기생은 다음날 잔치를 한다. 동기가 남자와 자고 난 후 조합에서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동료 기생과 하는 격이다. 이것이 기생의 한이다. 동기는 남자와 자고 나서(머리를 올리고 나서) 다음에 기생 일을 시작한다. 동기 3사람을 머리 올려 주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기생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동래 권번에서 무엇을 가르쳤나?

기생에게 조합에서 승무, 살풀이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기간은 기생의 소질에 따라 다르다. 춤 가르치는 사람, 악기 가르치는 사람, 소리 가르치는 선생이 따로 있었다.

공연을 한 적이 있는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작품 공연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지도를 많이 했다. 기생들을 데리고 온천 극장에서 한번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동래 권번에서 얼마 동안 가르쳤나?

2,3년 있다가 공 대일(공 옥진의 아버지)의 초청으로 광주 호남 국악원에 갔다. 거기에도 주로 기생이 배웠다. 동기는 별로 없었다. 함평, 영광에서도 가르쳤다.

스승인 이 매방의 춤과 당신은 춤은 어떻게 다른가?

생음악을 잡으면 이 매방도 춤이 달라진다. 녹음된 걸로 하면 거기서 꼼짝 못한다. 순서대로 나가야 하거든. 이 매방도 생음악을 추면 떵떵 고개 짓을 한다. 그러나 녹음에 하면 그냥 못출까 싶어서 놀라서 기계적으로 춘다. 나는 항상 춤을 생음악으로 춘다.

강옥남 류의 특징은 무엇인가?

멋과 한의 춤이다. 우선 춤은 멋이 있어야 한다. 춤을 멋있게 추려면 춤 가락이 좋아야 한다. 보통 무용가들이 춤을 추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춘다. 그런데 하나아 두우울 세에넷 네에엣 이렇게 추어야 한다. 우리 음악은 하나가 삼분박이어서 12분박이면 한 장단이다. 하나둘셋, 둘둘셋, 셋둘셋, 넷둘셋. 삼사 십이가 되어야 온박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다 줄여버리고 하나 둘 셋 넷, 그냥 이렇게 춘다. 춤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같은 네 박자라도 그 안에서 열 둘을 먹든 열 여덟을 먹던 박자만 안고 가면 된다. 이렇게 추어야 멋있고, 지겹지 않다.

한의 춤은 자기가 슬픔이 많아야 한다. 살풀이에서 수건을 떨어뜨리고 주으러 갈 때 헤어진 연인처럼 생각한다. 감정을 잡고 얼굴의 표정에서 전달해야 한다. 동작 하나 하나에서 어떤 감정인지 생각해서 추도록 한다. 살풀이를 추면 관객을 울려야 한다. 못 울리면 못추는 것이다. 나는 상상하면서 춤을 추도록 한다. 나는 춤을 가르칠 때 상황을 떠 올리도록 한다. 죽고 못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를 상상하고. 그것을 느끼고 추라고 강조한다.

강 옥남은 올해 71세이다. 그녀는 등록된 문화재도 아니고, 대학에 자리도 없고 무용 협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언론도 관객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보물처럼 소중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명의 문화재들에게도 경험과 기억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우리의 문화 유산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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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한량춤)

김진홍의 춤사위에는 삶의 굴곡과 달관이 흠뻑 배어 있다.

욕심 없이 깨끗한 자세로 마음을 비운다. 몸짓 하나도 조심스럽게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워야 한다. 넘치는 것을 경계하고 모자라지 않도록 늘 춤집을 채워 넣는다.

김진홍(金眞弘ㆍ58, 1935년 4월 5일생) 씨는 혼자 춤 연습을 하면서도 자신이 춤 인생을 통해 터득한
깨달음을 소홀히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인 홍복순(洪福順ㆍ48, 조교), 박영미(朴英美ㆍ40, 학원 원장), 장선희(張善姬ㆍ36, 새한전통예술보존학원 원장),
박경랑(朴環朗ㆍ33, 리라무용학원 원장), 신치련(42, 학원 원장), 이송희(李松姬ㆍ36, 부산 시립무용단수석), 오숙례(吳淑禮ㆍ29, 시립무용단 단원), 장내훈(33, 시립무용단 수석), 홍기택(洪基澤ㆍ32, 시립무용단 수석) 씨 등도 스승 앞에서의 춤 공부가 여간 정중하고 조심스럽지 않다고 한다.

“춤은 마음으로 춰야지요. 고뇌를 통해 내연시켜 온 정신 세계를 진솔하게 드러내 관중이 느끼도록 해 주는 겁니다. 재주로 춤을 추면 기교에 지나지 않으며 진한 감동을 교감하지 못합니다.”

늘 하심(下心)하는 자세로 선후배 가리지 않고 먼저 인사하는 그. 말소리 발소리조차 조신하게 챙기는 그런 김씨가 일단 무대에 섰다 하면 관중은 몽땅 그가 의도하는 예술 세계로 빨려들고 만다. 그의 한량춤(閑良舞)에서 삶의 굴곡과 생동감을 확인하고 승무에서는 광대무변한 정적과 알 수 없는 소생심(蘇生心)을 느낀다. 명주살풀이와 민살풀이로 교차되는 살풀이 춤짓에서는 소름끼치는 정율과 해탈의 넉넉함이 안도감으로 다가오고······.

“한량춤을 추면서는 박목월의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승무를 안고 돌 때면 조지훈의 ‘승무’를 사뿐이 즈려밟고 학을 탑니다. 살풀이를 휩싸 감을 땐 노천명의 ‘사슴’ 눈을 찾아 모가지를 어루만지고······. 이러다 보면 으레껏 정해진 공연 시간을 초과하기가 일쑤지요.”

김씨는 이매방(李梅芳)제 승무의 이수자 1호이면서 한량춤의 1인자로 손꼽히고 있다. 입춤이나 덧뵈기춤(허튼춤)을 추면서도 손가락의 곡선은 물론, 안 보이는 버선 속 발가락 움직임까지 치열한 자세와 정신으로 임한다. 마치 달관 경지가 이래야 됨을 육체 언어로 토해 내는 듯하다.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일곱 살 때 부산으로 건너오면서 ‘조선놈이 조선말도 못한다.’고 뭇매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아버지(김종명)가 고향인 진주를 떠나 어머니(강매결)와 함께 일본에 건너간 건 1930년 3월. 고물상을 해 큰돈을 벌었지만 ‘큰 사업’에 잘못 손대 둘러엎고 말았다. 어머니는 자홍(진홍 씨 본명)이가 독자라고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 밥주발을 들고 쫓아다니며 밥을 먹여 주었다.

“외삼촌이 진주 기생과 첩살림을 하는데 그리도 고울 수가 없었고 소리와 춤에 반했어요. 그 후에는 외숙모한테 옷고름 뜯기고 멱살잡혀 당하는 외삼촌의 망신과 머리채 휘둘리며 퉁퉁 붓도록 얻어맞은 외숙모도 목격했습니다. 어릴 적 나고 자라는 환경과 보고 들어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잘 알잖습니까.”

한영숙(살풀이) 씨와 이매방(승무) 씨의 잦은 부산 공연은 감수성 예민한 소년 김진홍을 예술 세계로 흡인시켰다. 그 때 나이 열 셋이었다. 가설 극장 에서 만난 이춘우 씨에게 청해 기본무, 입춤, 산조를 배웠고 이매방 씨가 부산에 있는 5~6년 동안 그 유명한 승무와 살풀이 산조까지 전수받는다.

그가 추는 한량춤은 서른이 넘어 당시 부산 민속보존협회장이던 문장원(文章垣ㆍ77, 인간문화재 제18호 동래야유 기능 보유자) 씨한테 사사받은 것이다. 한량춤은 원래 기방(妓房) 무용 계열로 남부 경남에서 추어 오던 무용극 형태의 춤으로 남사당패에서도 연희됐으나 1910년 전후 남사당패가 흩어지면서 넓은 잔디밭이나 마당을 이용해 흥겹게 추어 왔던 것이다.

도포에 정자관을 쓴 한량, 궁중 별관 복식의 별감, 몽두리에 색한삼을 끼고 족두리를 쓴 궁중 여기(女妓) 차림의 기생, 가사 장삼에 작은 방갓을 쓴 승려 등이 어우러져 계급 사회를 강하게 풍자하며 한바탕 웃어 제끼는 놀이극이다. 줄거리는 한량과 별감이 기생을 데리고 흥겹게 노는 자리에 파계승이 끼여들며 시작된다. 아리따운 기생에 반한 승려가 춤으로 유혹하니 기생은 한량과 별감을 등돌리고 파계승 품에 안긴다는 매우 해학적인 내용이다.

원래 한량은 직업 없이 경제적으로는 부유해 돈 잘 쓰고 만판 놀이만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그 놈, 한량이야’ 하는 나무람 속에는 가진자에 대한 은근한 야유와 함께 ‘건달’이라는 빈정거림도 담겨져 있다. 김씨는 말한다. 한량춤을 제대로 추려면 ‘한량질’을 해 봐야 하고, 승무에 몰입하기 위해선 파계승의 고뇌에 함몰돼 봐야 한다고. 매몰찬 시어미한테 정강이뼈 묻어나게 얻어맞고 부앗김에 잿물 삼켜 물에 빠져 죽은 며느리의 한을 알아야 살풀이를 제대로 삭혀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김씨는 마산 김애정(1992년 작고) 씨한테 그런 한이 묻어난 살풀이를 넘겨 받았다. 한 분의 스승을 새롭게 모실 때마다 ‘나도 제자들을 똑바로 길러 내야지······.’ 하는 각오와 다짐이 들어섰다고 한다.

• 김진홍 한량춤 계보

김진홍 본문 이미지 1



출 처 : 이규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내용 더 자세히보기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7344&cid=3005&categoryId=3037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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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서예 대가로 전국 무대 누벼

당대 춤꾼 고성하면 ‘조한량’ 불려

조용배 그는 1929 9월 거류면 용산리 157번지에 태어났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조용배’의 신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일찌감치 예인기질을 발산시켰다.

세인들은 한량에도 급수가 있다면 故 조용배 선생은 단연 9단이요, 가장 으뜸일 것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춤이면 춤, 악이면 악, 그림이면 그림, 글씨면 글씨, 문장이면 문장 이 모두를 두루 섭렵했던 한량 조용배.

그는 타고난 끼를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다 기어코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승화시키면서 91년 예순셋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가리켜 고성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풍류객들은 이렇게 이름 지어 놓았다.

‘조한량’ 이라고….

여늬 사람들 같으면 그가 세상을 향해 풀어놓았던 그 출중한 예인기질을
한 가지만 익혀도 감탄을 자아냈을 법 한데 ‘文書畵樂舞’를 모두 겸비했던, 금산 조용배.

그래서 그를 가리켜 한량 9단이라는데 아무런 주저 없이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허리춤에 호리병과 표주박을 메달고 달랑 단소하나 챙기면 전국방방 곡곡을
내집처럼 누빌 수 있었던 이 시대의 마지막 풍류객 조용배.

그의 예술의 세계는 고성보다 부산 동래와 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더 극찬했다.

부산 동래에서 생활하는 한 동안은 동래가 술렁거렸다고 한다.

예술인이 모이는 곳이면 금산은 항상 그 모임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의 춤이며, , 서화를 감상하기 위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금산의 예술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높아졌으며, 무르익어 간 것이다.

특히 예향의 도시라고 자부하는 전남 광주는
타지인의 재능을 그리 쉽게 인정하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금산의 춤과 서예, 서화 앞에서는 이들조차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 금남로 다방에서 서예전을 가진 뒤 전남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고성산 금산 조용배선생의 글씨는 전남지방에서 보는 문체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과 힘이 있다. 특히 그의 서화중에서도 매화는 일품이다’고.

당시 ‘경상도 보리문디’에 대해서는 썩 좋잖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던데 비해
광주의 예인들은 금산에게만은 절대적인 호의를 베풀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예순셋의 생을 살다 가면서도 결코 단 하루도 평범한 날을 보내지 않았던 조용배.

그는 1929 9월 거류면 용산리 157번지에 태어났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조용배’의 신화가 싹트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일찌감치 예인기질을 발산시켰다.

청소년기를 접어들면서 부산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남해 해관암으로 입산, 잠적해 버린다.

이 입산이 그를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이끌어 내는데 큰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입산수도를 정진하면서 글씨와 그림, 문장을 익히면서 풍류의 기본이 되는 학문에 전념한다.

이후 외아들의 입산을 안타까워하며 하산을 종용하던 부모님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이락정(二樂亭)’이라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읽고 깨우친다.

그러나 그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풍류의 기질이 꿈틀대며 그를 다시 절 생활로 이끈다.
그 길로 강원도 낙산사, 통도사, 해인사를 거쳐 통영 안정사를 오가며
6
년간의 승려생활이 시작된다.

해관암부터 시작된 그의 승려생활 10년 동안
서예와 사군자, 승무, 장구, , 아쟁, 대금 등을 틈틈이 연마한다.

이런 금산이 잠시 마음을 다잡고 고향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있었으니
부모님에 대한 죄스러움과 아내에 대한 민망함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 31.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월치에 3만평의 농장을 구입,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제법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고성읍 남산경로당에서는
지금은 작고하신 김창후, 홍성락, 천세봉옹 등이 모여 고성오광대 명맥을 잇고자
고증과 발굴에 힘쓰는 한편 후진양성에 혼을 기울이고 있던 때다.

이를 놓칠 리 없는 금산은 한달음에 달려와 이들로부터 고성오광대 전수에 몰두한다.

그렇잖아도 잘 타는 마른 장작에 기름까지 껴얹은 양 그의 춤은 마치 신들린듯한 모습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고성오광대가 우리나라 민속예술계의 한 산맥으로 우뚝 솟게 한 데는
금산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생전에 그는 “춤사위는 혼이 들어 있어야 하고
춤을 추는 사람이 무아지경에 들어야 보는 사람도 같이 춤에 빠져들게 되는 거야.

“요즘 젊은 놈들은 재주는 있는데 인간이 안되고, 춤은 잘 추는데 멋이 없어.
한마디로 풍류가 뭔지 모르는 게지.”라며 제자들에게 호통을 치며
어깨짓 하나에도, 몸짓 하나에도 혼을 불어넣기를 강조했던 금산.

그 자신이 문둥북춤을 추어 보이면 천형을 안고 사는
문둥이의 골수에 맺힌 원한과 처절한 한이
보는 이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고성이 낳은 예술인 조용배의 춤사위를 닮으려 고성오광대 전수생들은 그의 뒤를 이어가고 있다.

원기사보기 : http://goseong.newsk.com/bbs/bbs.asp?exe=view&group_name=403&section=14&category=1&idx_num=1807&page=9&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

한국의 멋진 한량閑良 조용배趙鏞培와 고성오광대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lsteel&logNo=220114337248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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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Park Gyongnang was born in 1961 in Goseong, Kyongsangnamdo Province. She is Korea's leading dancer actively engaging in teaching and performance in Seoul and Busan. Her maternal great-grand father had been the first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for the Goseong Ogwangdae performance. Like her great-grand father, she follows in the tradition of Youngnam dance.

At the age of four she became a disciple of renowned dance masters like late Kim Chang-hoo, late Cho Yong-bae, late Hwang Moo-bong, late Kim Soo-ak, Kim Jin-hong, Park Seong-hee, Kang Ok-nam, learning various traditional Korean dances and ballet. She was the principal dancer with Kyongsangnamdo Province dance company, Changwon City dance company. Her traditional Korean dance has been widely acclaimed as masterful. She is devoted to the study, transmission and preservation of traditional Youngnam dance, performing as well as participating as a judge for various dance competitions.

Career

● Completed Jinjoo Gyobang Gukkeori Dance (Kyongsangnamdo Province Intangible Cultural Asset no. 21)

● Instructor of the Goseong Ogwangdae Performance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Asset no. 7)

● Head of Park Gyongnang Traditional Arts Group

● Representative of the Association for the Preservation of Youngnam Dance

● Teaching Korean Dance at the Culture School of the National Gugak Center

● Teaching Korean Dance at the Gimhae Arts and Ports Center

● Visiting Professor at the Sookmyung Women's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Traditional Arts

● Representative of the Korea Culture Institute for Youngnam Dance

Prizes

△ Grand Prix of the 18th National Contest for Traditional Arts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4th National Contest for Traditional Arts in Daegu,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44th Gaecheon Arts Festival,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Grand Prix of the 21th National Competition for Traditional Korean Arts (Jeonjoo Daesaseup Competition), awarded by the Ministry of Culture

△ First Prize of the 4th Seoul Traditional Arts Competition

△ Grand Priz of the 5th Seoul Traditional Arts Competition, awarded by the President

운파 박경랑 영문소개 : http://korakworld.tistory.com/entry/test9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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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金昌後)

1887(고종 24)∼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固城五廣大〉의 예능보유자.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고성읍 동외동에서 살았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군찬에게서 〈고성오광대〉를 배웠고,
정화경·이윤화·이태준·김성범에게서 배워 원양반역을 잘하였다.
1964년 12월에 〈고성오광대〉 원양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후계자로 배갑문(裵甲文)·이윤수(李允洙)·최규칠(崔奎七)·조용배(趙容培)·최인순(崔仁淳) 등이 있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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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최고무(最高舞)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쇠잔한 육체에서 자꾸만 춤이 터져나오니, 병상에 누운 몸은 어쩌란 말인가. 병원과 집을 몇 달 걸러 오가며 몸을 추스르지만 무대와는 점점 멀어지는데, 입에선 소리가 터지고 두 팔과 가슴은 소리에 맞춰 벌써 가락을 타고 있지 않은가.

# 70년을 해도 족함이 없는 전통춤

 
춘당(春堂) 김수악(81)을 몇 번의 전화 약속 끝에 만났다. 진주 엠마우스 요양병원에서 만난 그는 서울에서 내려간 제자들의 문안을 받고 있었다. 춤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로 부족했던지 원미자씨(김수악 전통춤 보존회장)에게 손수건을 달라 했다. 꽃무늬 손수건은 제자 김경란씨의 손에 들려졌고 침상의 스승은 구부러진 등을 추슬렀다. 긴장하는 제자. 스승은 컵라면용 나무 젓가락을 쫙 갈라 양손에 쥐고 침대에 놓인 식탁을 두드리며 슬그머니 장단을 잇는다. 즉흥 레슨이다. “띠리리 릿띠~ 허이 두드드 둥둥” 앞 소리는 젓대고 뒷소리는 가야금 선율. 스승은 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구음으로 엄격한 장단을 더했다. 어쩌랴. 제자, 쑥스러워하면서 병실에 한바탕 굿거리춤을 풀어놓는다. 이제 스승의 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스승의 한 마디 구음, 한 자락 춤사위가 나올 때마다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만 더하다.

“선생님께 배우기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다듬어 정형화하시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이 터져나오는 대로 즉흥춤을 추시니까 저희는 매번 달라지는 춤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물론 다양한 춤사위를 배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김수악 앞에만 갔다오면 춤이 달라진다’는 말이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니다.

아들 김인권씨(54·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장)의 귀띔. “10년 전 오른쪽 골반을 다치셨는데, 지난해 10월에는 춤추며 앉는 순간 왼쪽 골반을 다쳐 5개월 동안 입원하셨죠. 이번에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셨습니다. 치아도 상태가 좋지 않아 틀니를 하셔야 해요.” 무역업을 하던 아들은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사업을 접고 ‘춘당 김수악 전통춤보존회’ 실무위원장을 겸하는 등 남은 인생을 전통춤에 걸었다. 다시 아들의 증언. “어머님께선 예술가의 자존심을 제일로 치십니다. 얼마 전에는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중계방송차가 몇 시간 동안 집 앞에서 대기 중인 데도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대문을 열지 않으셨어요. 결국 중계방송차는 돌아갔고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모두 쏟아야 하는데, 갑자기 춤을 출 순 없다는 주장이셨죠. 무대에서 10분 동안 춤추기 위해 5시간 동안 단장하고 무대에 서시는 분이니까요.”

기자가 병상의 기수악을 촬영하려 하자 춘당(春堂) 김수악은 ‘사진 찍지마’ ‘안돼’ 하면서도 연방 머리를 매만진다. ‘5시간 단장’의 습관이 무섭다.

# 강산 제일의 춤, 강산 제일의 구음-가무악 일체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수악은 함양군 안의읍에서 김종옥과 유몽길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린 순녀를 본 후 명이 짧다며 ‘목숨 수, 뫼뿌리 악’으로 개명해주었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순녀의 아버지는 만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다. 대를 이어야 할 큰 아들. 한량인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떼어받고 본가를 나왔다. 집에선 늘 유성기판을 틀어놓고 거문고와 피리도 수준급이었다. 집에 찾아오는 풍류객들의 분위기가 어린 순녀의 몸에도 익숙했다. 어느날 손님이 안겨준 양금은 여섯살 순녀가 김수악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순녀는 처음 만져보는 양금을 3개월도 안돼 익혔다. 남들은 7개월 걸려야 타는 악기였다.

일곱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순녀는 ‘여란(麗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모두 ‘애란’이라 불렀다. 진주의 애란은 영남 제일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가야금병창, 장구, 구음, 검무, 굿거리춤 등 다재다능했다. 애란이 끼지 않으면 예능이 될 수 없었다.

“젊을 때 내 얼굴 보기 힘들었어요. 중요한 자리에는 인력거가 날 데리러 왔어요. 내 창과 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당시 ‘검무’는 4명이 추었는데 스승 최완자, 박국엽, 홍채자, 이현이 추다 그후 ‘사 검무’는 김수악을 비롯해 최예분, 이윤례, 김채옥이 함께 했다.

노랫말도 구성지게 만들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어이하리 어이할꺼나 부모님께 불량하여~”로 시작하는 ‘논개의 얼’을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8년 연상인 김영조(진주 청과조합장 역임)와 결혼 후에는 춤을 접었는데 조용한 세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냥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6·25 전쟁 후 아비를 잃고 60년대 초반 남편을 잃은 후 시골 판에 묻혀 살던 그에게 나라에서 인간문화재가 될 것을 권유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권번에서 배웠던 ‘검무’를 복원·계승하라고 했다. 과거를 알리기 싫었지만 전통춤 계승이라는 정부측 대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67년 당시 월 3만원씩 줄 테니 ‘검무’로 문화재지정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때는 문화재고 뭐고 귀찮기만 해서 싫다고 했죠.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지만, 나는 손에 칼을 비롯, 뭘 들고 추는 게 재미없어서 그리 반갑지 않더라고요.”

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26세와 33세에 남매를 낳았지만 춤이 더 귀했다. 아들도 개천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춤내림을 했는데, 어미가 아닌 이모에게 춤을 배울 만큼 어미는 바빴다. 다재다능한 게 죄였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춤은 경상도, 소리는 전라도라 했지만, 본향의 최고 소리꾼들도 김수악의 구음을 제일로 쳤다.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김수악이 유성준의 동편제 판소리로 인간문화재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개천예술제에서 매년 논개를 기리기 위해 공연되는 ‘논개 살풀이춤’도 김수악의 작품이다. 왜장을 상징하는 빨간 수건과 민중을 의미하는 노란 수건을 양손에 들고 추는 논개 살풀이춤은 기존 살푸리춤과 다른 춤사위를 자랑한다. 논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에 춤의 원형대로 계승되는 한성준의 살풀이춤과 달리 김수악의 창작 춤사위가 중심을 이룬다.

“예술은 마음, 정신, 인내, 공력, 한(恨), 멋, 혼이 어우러져야 해요. 춤도 내가 추는 게 아니고 몸이 추도록 해야 합니다. 맺고 푸는 호흡의 예술이 춤이니까요.” 명무는 춤이야기에 빠져 아픈 줄도 모른다. 침대에 앉은 채 두 팔을 올려 연꽃 사위를 직접 시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다. “제 의상의 대부분이 연분홍색이에요. 분홍색을 좋아하면 마음 약한 사람이라는데….” 그러나 약하고 곱기만 한 건 아니다. 춤과 소리에 엄격하지 않았다면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손수건을 들릴까. 스승은 누누이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스승의 마음이 깊고도 알뜰하다.

▲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중 둘째로 출생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
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
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
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
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
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
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
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
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유인화 선임기자|진주에서 rhew@kyunghyang.com〉

-‘제자들과 함께’ 병실에서-

# 풍경1

병실에서 아들 김인권씨의 보살핌을 받는 김수악 명인.

병실에서의 화제는 얼마 전 김수악이 승소한 소송건이었다. 김수악 측과 김수악의 제자 정모씨가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맞선 재판이었다. 정모씨가 김수악에게 알리지 않고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조직 후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발행한 사실이 드러난 것. 김수악 측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김수악 제자들로 구성된 김수악 전통춤 보존회는 정씨의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무효화하고 정씨가 이수자 자격증을 주지 못하도록 소송을 냈다. 정상적으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김수악이 인정하는 제자에게 김수악의 도장이 찍힌 이수자 자격증을 주어야 한다. 김수악에게 굿거리춤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김수악의 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받는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 그런데 정씨는 김수악의 허락없이 김수악 도장을 위조해 7명의 이수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 풍경2
김수악 병상 옆에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스승 김수악과 정답게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강금실 전 장관은 부산지법 판사 시절부터 20년 넘게 김수악의 제자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김수악에게 굿거리춤과 살풀이춤을 배웠다. 김수악은 “춤을 계속 했으면 성격이 차분하고 성실해 대단한 춤꾼이 됐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오죽하면 스승이 ‘검사 하지 말고 나하고 춤추자’고 권했을까. 강전장관은 요즘도 안부 전화를 자주 한다고 한다. 2005년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 명무전 ‘전무후무’ 공연 때는 법무장관이던 강전장관이 스승이 춤추는 토월극장에 오느냐 못 오느냐가 화제였다.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법무부 측에선 ‘바쁘신 분이니 알아서 하시도록 두라’는 전언을 공연 주최 측에 했다고. 그러나 그는 스승의 분장실을 찾았고 스승은 화답이라도 하듯 노약한 몸을 잊은 듯 살푸리춤에 소고춤을 엮은 ‘교방굿거리춤’으로 무대를 들었다 놓았다.

# 풍경 3
서울 제자들이 전한 내용. 역시 2005년 여름이었다. 노스승은 운신할 수 없을 만큼 기진한 상태인 데도 매년 진주에서 열리는 김수악 전통춤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한 워크숍 기간 중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진주 남강 앞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자 강미선씨(한국체육대 무용과 교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피날레에서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른 춘당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꽹과리를 잡자마자 거장의 예혼을 객석에 뿌렸다. 등은 구부러지고 기력이 없는 데도 무대 오른편에 앉은 사물놀이팀 악사를 어르며 맞대화를 펼쳐나갔다. 춘당은 전했다. “좋은 선생에게 올바로 배운 제자들”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피날레를 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 2007년 6월 21일 기사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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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무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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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년도 대회명 지역
                       2012          제10회 전국국악대전(서울) 서울
                       2012          제22회 정읍사전국국악경연대회 전북
                       2012          제38회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전북
                       2012          제15회 창원전국국악경연대회 경남
                       2010          제17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2010          제11회 국창권삼득선생추모전국국악대제전 전북
                       2009          제16회 부산국악대전 부산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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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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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후 프로필

           사진  
         출생년도  1887년 (고종 24)∼1965년 (경남 고성)
       전공 / 분야  한국무용, 고성오광대
       무형문화재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1964년)

       활동 경력  후계자로 배갑문(裵甲文)‧이윤수(李允洙)‧최규칠(崔奎七)‧조용배(趙容培)‧    최인순(崔仁淳) 등이 있다
         특기 사항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군찬에게서 〈고성오광대〉를 배웠고, 정화경‧
 
이윤화‧이태준‧김성범에게서 배워 원양반역을 잘하였다.

         홈페이지  http://gyobang.tistory.com/entry/박경랑의-외증조부-故김창후옹
           기타  한국무용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다.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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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에 도리깨도 춤을 춘다"

 

우리의 전통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가무악이 한데 어우러진 형태이다.

그리고 이 가무악의 어우러짐은 오늘날의 공연예술의 목표가 되기도 했다.

가무악 일체의 최고의 예인을 꼽으려하면 단연 첫 손가락이진주의 김수악 선생일 것이다.

 

김수악 선생은 열 살에 진주 권번에 입적하여 판소리는 유성준, 정정렬, 이선유, 김준섭 등의

쟁쟁한 명인들게게 다섯마당을 떼었고 기악은 김종기, 강태홍, 이순근, 박상근 등으로부터

가야금 아쟁을 배웠고, 춤은 김옥민을 통하여 발걸음을 뗀 후, 한성준에게 승무를, 김해의

김녹주에게 소고무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구한말 관기출신인 최완자에게 굿거리춤, 입춤,검무를 배웠으니

아마 고금의 국악사를 통해 김수악 선생처럼 완벽한 스승을 모신 이도 없을 것이다.

선생은 진주 검무로 국가지정무형문화재로 그리고 교방굿거리춤으로 경남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춤이 두 종이나 지정된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나 혹자들은 선생의 춤이 진주검무

보다 먼저 교방굿거리춤으로 중요문화재가 되었다면 보다 나았을 거라며 아쉬워

한다. 같은 무형문화재라도 군무인 진주검무나 승전무 보다는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등 독무가 선호되는 것이다. 또 독무로 교방굿거리춤이 지정되었을지라도

실속이 적은 지방문화재라는 점 때문에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다한들 어디 구음만 할 것인가. 구음이란 악기를 가르칠 때 악보

격으로 그 소리를 입으로 내는 것인데 구음 자체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곡이 된다.

이 구음이 특히 위력을 발휘하는 곳이 춤판인데, 꾼들은 모두 김수악 선생을

제일로 친다. 원래는 전두영이라는 전라도 사람에게 배웠다고 하는데 이제는

천상 선생의 소리가 되었다.

 

피리나 대금 없이 자신의 장고 장단에 맞추어 갖은

곡조를 얹으면, 그저 제일이라 했었고 그 소리에 놀던 춤꾼들은 그 소리가 오죽이

좋았던지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에 도리깨도 춤을 춘다" 고 했었다.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시고 2009년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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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명 : 우리민속한마당 송진수의 "춤세계"

작품명 : 동래 한량춤

공연일 : 2002.5.11

출연 : 김진홍

행사장소 : 국립민속박물관 공연장

원본소장처 : 예술방송국.com(http://arts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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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고종 24)∼196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의 예능보유자.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고성읍 동외동에서 살았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군찬에게서 〈고성오광대〉를 배웠고, 정화경이윤화이태준김성범에게서 배워 원양반역을 잘하였다.

1964년 12월에 〈고성오광대〉 원양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후계자로 배갑문(裵甲文)이윤수(李允洙)최규칠(崔奎七)조용배(趙容培)최인순(崔仁淳) 등이 있다.

 

출처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조용배와 천세봉의 전설

 

하지만 고성엔 희한하게도 어느 시절 어느 난국에도 언제나 ‘춤에 환장한 영감’ 한둘이 반드시 있었다. 그들이 오광대 춤을 끈질기게 이어갔다. 권번 춤선생이던 김창후(1887~1965), 홍성락(1887~1970), 천세봉(1892~1967)이 모두 타계하자 이어서 전세대보다 더욱 탁월한 춤꾼 조용배(1929~91)와 허종목(1930~95)이 등장했다. 이윤석은 바로 이들에게서 춤을 배웠다. 이윤석뿐 아니라 현재 오광대 춤꾼 모두 두 사람의 문하생이다. 고성읍 동외리 ‘고성 오광대 보존회’ 강당엔 그 어른들의 노랗게 낡은 사진이 액틀에 담겨 드높이 걸려 있다.

 

조용배와 허종목의 행적은 이미 전설이 됐다. 고성 사람들은 군수 이름은 몰라도 애어른 없이 등 뒤에 피리(단소) 꽂고 초서와 매난국죽에 능란한 붓 한 자루 괴춤에 차고 풀 먹인 도포 입고 논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던 조한량(조용배의 별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조한량은 한때 승려생활을 하다 고성 인근에 은거하던 석암 선생에게 한학을 배우던 중 오광대에 입문했고, 허종목 또한 마산상고 재학시절 기방 춤선생에게서 굿거리춤, 지성승무, 양반춤, 학춤을 고루 배운 후 고향에 돌아와 오광대에 입문한다. 그들은 매일 30리 길을 다니며 김창후에게서 양반춤을, 천세봉에게서는 말뚝이와 승무를, 홍성락에게서는 가면제작을 배웠다.

 

신동아 2005년 8월호 [이사람의 삶] 이윤석

김서령 자유기고가 psyche325@hanmail.net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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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한량춤의 1인자 김진홍씨(.1935~ )는 부산춤계의 흐름을 더듬어갈 때 1.5세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초창기 부산춤이 몇몇 선구자들에 의해 막 자리를 잡아갈 즈음 춤 하나 잘추는 신인으로 등장한 그는 50여년간 이 고장을 지키면서 부산 전통춤의 맥을 꿋꿋이 이어가고 있다.

부산의 춤을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연륜이 덧씌여진 춤사위가 "가장 이 고장 춤답다"는 평가로 대변할 수 있다.

이 고장의 춤은 어떤 것인가.

그는 "안으로 삭일수 있는 춤,내재율과 내면세계가 깊이있고 무게있게 녹아나는 춤"으로 부산춤(혹은 영남춤)을 정의한다.

산뜻하고 깨끗한 중부지방의 춤과 솔직담백하게 감정처리를 하는 전라도 지방의 춤에 비해 이 고장의 춤은 멋과 흥,한을 마음으로 삭여서 추는 춤이라는 것이다.

김씨가,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끊임없는 상념의 길 인 춤의 세계에 접어 든 것은 51년 삼일극장에서 열렸던 무용콩쿠르에 입상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곳의 소녀가극단공연과 뮤지컬 영화,극장무대의 공연을 접하면서 예술적 감성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노래와 피아노에도 소질을 보였던 어린 소년은 독학으로 콩쿠르에 입상한 후부터 여러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춤꾼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오늘날 그의 춤이 있기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던 스승들로 김씨는 이춘우 이매방 문장원 박동진 김소희선생을 든다.

춤의 기본과 허튼춤은 춘우선생,승무와 살풀이는 매방선생,한량춤과 덧배기춤은 장원선생을 좇았던 그는 명창 박동진선생과 김소희선생을 대하면서 흐트러짐없는 그들의 치열한 예술가 정신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마음으로 삭였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춤"이듯,그는 단순한 테크닉의 습득에만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춤집을 채워갈 수 있는 정신적 풍요함도 동시에 갖추어 나갔다.

한량춤 에 관한한 독보적인 위치를 인정받고 있는 그는 승무 살풀이 지전춤 에 있어서도 수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통춤은 창작과는 달리 같은 춤사위의 반복인 것 같지만 추면 출수록 어렵다고 춤꾼들은 한결같이 말한다.춤을 출 때마다 춤꾼의 마음상태가 다르고 정신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춤꾼이 된 원죄 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도 춤을 출 때마다 마음을 한결같이 다잡지 못하는 번뇌에는 별 차이가 없다.

50년이 넘게 춤을 추어온 그는 춤을 출 때마다 하나의 시를 떠올린다.평상심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남성적인 춤으로 활달한 느낌이 나야 제맛인 한량춤 을 출 때면 박목월의 <나그네>가 되고,애잔하고 절제된 동작과 마음이 기본요소인 살풀이 를 출 때면 노천명의,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 <사슴>을 떠올린다.긴 장삼 공중에 흩뿌리며 그 움직임으로 자유와 영원을 상징하고 한 획,한 줄 붓으로 공간을 그리듯,선의 의미가 움직임의 극치를 이루는 승무 를 출 때면 역시 조지훈의 시 <승무>를 떠올리는 것이 제격이라고 한다.

이순을 넘어선 나이.

잘보이기 위해 추었던 춤,관객에 몰입해 추던 춤은 이제 춤에 안겨 음악에 몸을 맡기고 나에게 몰입하는 춤으로 원숙함을 더해가고 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춤 마음을 비움으로써 편안하게 출 수 있는 춤 추어지는 춤보다 우러나는 춤 을 추리라는 그의 마음은 김진홍 전통춤 연구회 회원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지고 있다.

강호경(무용협 김해시지부장) 최성희(" 강원도지부장) 박성희(" 경남부지부장) 홍복순 박영미 장선희 박경랑씨 등이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춤을 접해야 제대로 된 춤을 출 수있다"는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다.

어느덧 부산춤의 원로로 자리하고 있는 그는 요즘도 재목이 아닌데 춤을 추고 있는 건 아닌지,춤꾼으로서 손색이 없는지,과연 제대로 된 춤을 추고 있는 지 혼란스러움이 더해간다고 한다.또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춤의 길이 초조하고 불안하게 다가와 일탈 하고 싶은 마음도 문득문득 든다고 한다.

하지만 춤이 있는 언저리 어디에서건 혼신을 다해 춤사위를 펼쳐내고자 하는 김씨의 이같은 치열한 예술혼이 이 고장에 자리하기에 부산춤 의 뿌리는 더욱 단단히 굳어지는 것이다.

그는 부산춤계 1세대와 2세대를 잇는 튼튼가교로서 부산 전통춤의 텃밭을 일구고 가꾸어 왔으며 이 지방의 춤을 대표하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부산일보 <노정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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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랑


고성 오광대 초대 문화재 김창후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중견 춤꾼으로 보기 드물게 농익은 춤의 기량을 간직하고 있다. 4세에 춤에 입문했으며, 활발한 공연 활동과 우리 춤을 연구, 전수,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박경랑은 여러 명인 선생님들의 장단에 익숙해진 영남춤을 추어 왔으며 이제는 음악을 자유자재로 춤사위에 절묘하게 조화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전통춤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영남춤의 지킴이로서 이미 우리시대의 춤꾼 정동극장 명인전, 팔무전, 고궁명무전 등의 기획공연을 통하여 명무로서의 인정을 받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무형 문화제 제 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이며 한국 영남춤 문화 예술 연구소 대표, 박경랑 전통예술단 단장, 영남춤 보존회 대표를 맡아서 인재양성과 보급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 대상(1997),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 최우수상(1996), 전주 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1995), 개천 한국 무용제 특장부문 대상(1994), 전통 예술 경연대회 전체 종합대상(1993), 대구국악제 전체 종합대상(1993)등을 수상했다.


http://cafe.daum.net/pkrang/


  • 2011춘천아트페스티벌 _ 2011년 8월 5일(금) 오후 8시

<영남교방청춤>

안무 및 구성: 박경랑 | 출연: 박경랑


교방은 조선시대 기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노래와 춤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교방청은 원래 중구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 무, 악을 가르치던 기관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교방춤은 교방청이 폐지된 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이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기방을 중심으로 추었던 춤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전되었고 정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영남교방청춤은 진주, 동래, 마산 통영 등의 권번에서 전해져 오던 춤가락을 한 데 묶어 정리한 춤이다. 음, 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춤으로 남성적인 활달한 상체의 동작과 밀도가 높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지닌 하체 중심과 발놀음이 특징이며 영남지역 교방 춤의 기교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받은 춤으로 지금은 박경랑에 의해 널리 알려진 춤이다. ‘난초와 대나무’에 빗대어 ‘규격 속의 비규격, 정형 속의 비정형, 유형 속의 강건, 절제 속의 자유’에서 춤의 멋을 느낀다고 민속학자 정상박 교수는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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