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서예 대가로 전국 무대 누벼 당대 춤꾼 고성하면 ‘조한량’ 불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일찌감치 예인기질을 발산시켰다.
세인들은 한량에도 급수가 있다면 故
춤이면 춤, 악이면 악, 그림이면 그림, 글씨면 글씨, 문장이면 문장 이 모두를 두루 섭렵했던 한량
그는 타고난 끼를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하다 기어코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승화시키면서 91년 예순셋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를 가리켜 고성사람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풍류객들은 이렇게 이름 지어 놓았다.
‘조한량’ 이라고….
여늬 사람들 같으면 그가 세상을 향해 풀어놓았던 그 출중한 예인기질을
그래서 그를 가리켜 한량 9단이라는데 아무런 주저 없이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허리춤에 호리병과 표주박을 메달고 달랑 단소하나 챙기면 전국방방 곡곡을
그의 예술의 세계는 고성보다 부산 동래와 예향의 도시 광주에서 더 극찬했다.
부산 동래에서 생활하는 한 동안은 동래가 술렁거렸다고 한다. 예술인이 모이는 곳이면 금산은 항상 그 모임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많은 예술인들이
그렇게 금산의 예술세계는 더욱 깊어지고, 높아졌으며, 무르익어 간 것이다. 특히 예향의 도시라고 자부하는 전남 광주는
그러나 금산의 춤과 서예, 서화 앞에서는 이들조차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 금남로 다방에서 서예전을 가진 뒤 전남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경남 고성산 금산
당시 ‘경상도 보리문디’에 대해서는 썩 좋잖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었던데 비해
예순셋의 생을 살다 가면서도 결코 단 하루도 평범한 날을 보내지 않았던
그는 1929년 9월 거류면 용산리 157번지에 태어났다.
이 때부터 ‘조선의 한량
어린 시절 그는 동네 메구패를 따라다니면서 신명을 배웠다.
서당에 다닐 때는 훈장이 없는 때를 틈타 솥뚜껑, 밥그릇, 숟가락으로 농악장단을 맞추며
청소년기를 접어들면서 부산동래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이 입산이 그를 ‘한량’이라는 이름으로 이끌어 내는데 큰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이곳에서 입산수도를 정진하면서 글씨와 그림, 문장을 익히면서 풍류의 기본이 되는 학문에 전념한다.
이후 외아들의 입산을 안타까워하며 하산을 종용하던 부모님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그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풍류의 기질이 꿈틀대며 그를 다시 절 생활로 이끈다.
해관암부터 시작된 그의 승려생활 10년 동안
이런 금산이 잠시 마음을 다잡고 고향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있었으니
이때 그의 나이 31세.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월치에 3만평의 농장을 구입, 과수원 농사를 지으며
그러나 이도 잠시, 고성읍 남산경로당에서는
이를 놓칠 리 없는 금산은 한달음에 달려와 이들로부터 고성오광대 전수에 몰두한다.
그렇잖아도 잘 타는 마른 장작에 기름까지 껴얹은 양 그의 춤은 마치 신들린듯한 모습으로
지금의 고성오광대가 우리나라 민속예술계의 한 산맥으로 우뚝 솟게 한 데는
생전에 그는 “춤사위는 혼이 들어 있어야 하고
“요즘 젊은 놈들은 재주는 있는데 인간이 안되고, 춤은 잘 추는데 멋이 없어.
그 자신이 문둥북춤을 추어 보이면 천형을 안고 사는
고성이 낳은 예술인 |
한국의 멋진 한량閑良 조용배趙鏞培와 고성오광대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lsteel&logNo=2201143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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