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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교방의 변천사



교방의 변천사

김 예 진

국문초록

교방(敎坊)의 전신(前身)을 찾는데 있어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용수의 역할을 짐작해보면, 삼국시대이전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는 직업적인 무용수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교방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이었던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이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통의 단절을 꿰하던 일제강점기의 매서움도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에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에 속한 교방,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같은 음악기관에 예속된 교방사 등의 역사적 흔적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전통문화예술의 교육과 전승, 전파에 오랜 세월 그 소임을 다해 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교방, 권번

1)

목 차

Ⅰ. 서론

Ⅳ. 근대, 현대 교방(敎坊)의 변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2. 연구 방법

2. 현대 교방의 흔적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Ⅴ. 결론

1. 삼국시대

 

2. 발해시대

참고문헌

 

Abstract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가.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모든 한국춤의 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천해 온 교방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춤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춤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생춤이라며 천시하는 인식의 과오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일부 안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기생의 기예(技藝)를 예술의 주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전면에 보여지는 남성들의 유희적 놀음으로만 기생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평가와 가치는 훗날 파생되는 역사의 줄기와 뻗어나간 가지의 역할로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궤 안에서 응당한 사적(史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지난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나간 시간들의 과오의 인식이 덮혀지고 그 틀이 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은 그저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 켜켜히 묵혀낸 곰삭은 절대시간을 넉넉히 품은 탄력성을 지닌 문화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탄력성이 존재하는 ‘교방’은 그 시작점에서 오늘날까지 품고 온 전통의 낱알들이 이뤄낸 풍부한 역사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은 온전한 사적(史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있었고, 이러한 ‘교방’을 향해 왜곡의 거플을 벗겨내고 그릇된 인식을 거둬내 간과된 사고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 우리 예술계에서 시작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전통춤의 모태와 전신이며, 현재 전통춤계의 골(骨)과 근(筋)을 형성하는 역할은 수 천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교방(敎坊)이 이루어내었다.

교방이 존재할 당시의 예술을 장려하고 관장(管掌)한 나라의 관심도와 영향력을 추산해보면, 오늘날 현 정부가 풀어내는 예술정책에 비해 앞설 뿐 아니라, 그 비중 면에 있어서도 크다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전하는 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새것을 익힌다는 뜻처럼 교방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 선조들의 뜻과 밝은 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전통예술을 향한 과거로부터의 진귀함을 터득해낼 것이다.

본 연구는 교방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과정과 시대별 변천과정을 통해 현 시점에서 취해야할 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고찰이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사적고찰이 갖는 방법으로 사료(史料)분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3)

교방의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교방의 변천과정을 다룬 선행연구 및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1) 1. 삼국시대

고구려시대 무용총(舞踊塚) 벽화 속에서 장삼자락처럼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은 고구려시대에도 무녀, 즉 직업적인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 긴 소매의 옷차림은 중국 중원 한족의 춤 복장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춤 예술이 서로 교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의 회랑에 나타난 군주행렬도(君主行列圖)에서의 검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분 묘실 남벽에서의 군무의 한 장면에서 고구려시대 무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설치된 음성서(音聲署)에는 무척(舞尺), 가척(歌尺), 금척(琴尺) 등의 전문적인 예인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무척(舞尺)은 춤 잡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기녀의 존재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악·가·무가 어울어진 종합예술이 분야별로 세분화, 전문화되어 국가에서 관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관제가 정비되어진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던 삼국시대에는 벌써,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서의 효용성과 유용성으로 나라의 통치자들은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전문화된 예술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출현이 갖는 사적 의미만으로도 이미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예술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2. 발해시대

발해시대는 교방(敎坊)이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시기에 국가의 악과 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사(太常寺)가 있었으며, 이때 무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교방의 역할을 담당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재현, 2007).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역사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 한 후,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서게 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고구려의 시대를 따르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고자 노력한 흔적이 존재한 나라라고 평가되어진다. 그러한 자주성과 주체성이 예술을 향한 노력과 관심으로 이어져 신라와 같은 왕립음악기관을 설립하고 장려하는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전통적인 무교의식과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더불어 음악에서도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관기들에 의해 연등회에서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가 추어 졌다고 전해진다(박지은, 2006).

관기(官妓)들의 역할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중궁정재가 활발히 유입되어가면서 커져갔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로는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오양선, 연화대무, 곡파로 무보가 고려사(高麗史)와 악지(樂志)에 전하며 향발무와 학무가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기녀들은 천민 출신의 무당과 관청의 기녀와 관비로 당시 여악 담당기관인 교방(敎坊)에서 기예를 익혔으며 교방은 교방기(敎坊妓)와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는데 교방기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官妓) 중 색과 예가 가장 뛰어난 자로 가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교방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가무를 익혔다.

또한 지방기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열릴 시에는 교방기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문 기녀양성기관인 교방이 설치됨에 따라 기녀들은 한층 격식 있는 가·무·악(歌·舞·樂)을 정립하였다.

고려시대 안정된 정치로 인하여 궁중연희가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기녀들은 왕의 풍류를 돕거나 외교 사신들의 접대연에서 연희를 하였다. 연희의 형태는 점차 사치스러워져 사대부의 개인 연희시에도 기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기(地方妓)나 사기(私妓)에 의해서 사대부의 집안의 행사나 서민잔치 마당에 가무악을 공연함으로서 사대부 개인의 문화적 특성과 서민의 취향에 따른 다른 형태의 가·무·악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고려시대의 교방은 대중화되는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들을 위한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대비나 중궁전 또는 내명부 등의 여자들을 위한 잔치인 내연(內宴)으로 잔치가 구분되는데 이러한 잔치의 공연활동을 담당하던 왕립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진연청(進宴廳), 진찬소(進饌所), 풍정도감(豊呈都監) 같은 임시 관청에서 궁중잔치를 위한 행정적인 임무를 담당 했다(고재현, 2007).

공연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임금의 거동과 같은 의식 절차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공연과 잔치에서 반주음악과 함께 기녀들의 춤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정재 춤을 추기위해 기녀들은 창사(唱詞)와 춤사위 또는 구호를 장악원의 악사들로부터 지도 받았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교방의 체제나 제도를 거의 이어 받았으며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악무제도가 조선 초기부터 발달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녀들의 궁중연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의 기녀들이 올라와 공연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궁중에서 연행되는 정재공연을 지방의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중계자 역할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던 춤을 정재라고 칭하고 정재 무동과 정재 기녀로 무희를 구분 하여, 외연에서는 무동만을 내연에서는 기녀만을 구분하여 출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생차비(妓生差備)라는 일종의 교사로부터 궁중정재 뿐 아니라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지도 받으면서 교육이 보다 구체화 되었으며 학과 과목명이 제시되었고, 춤사위별로 전공자가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관기(官妓)를 경기(競妓)와 지방기(地方妓) 또는 외방기(外方妓)로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경기에는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의녀와 공조와 상의원의 침선비까지 포함된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들어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렸음으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똑똑한 관비를 선발하여 제생원에 소속시켜 글과 의술을 지도하였고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자들만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 궁중의 연희에도 참석 시켰다.

외방에서 여기가 올라오게 하면 폐단을 끼침이 많음으로 검소히 하기 위해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 하도록 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는 장악원(掌樂院)에서 여기들이 가·무·악(歌·舞·樂)을 연마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녀와 침선비가 평소에는 의술과 바느질을 연마하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가무에 참여했다.

순조 때에는 정재가 정리되어 정재의 종류가 5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에 달하였고 순조28년(1828)에는 외연(外宴)과 내연(內宴) 모두에서 무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한 순조29년(1829)에는 순조 즉위 30년을 맞는 진연에서 가인전목단을 비롯하여 보상무,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등 김창하에 의해서 다양한 정재 안무를 창작하였고 효명세자에 의해 창사를 지어 정재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절정을 맞은 정재의 활동은 궁중의 대소 연희와 나라의 행사에서 여기들에 의해 연희 되어졌다. 효명세자 때 융성한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이던 궁중정재는 훗날, 연희의 장소 및 연희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민중들에게도 선보이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현대에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이어지게 된다.

교방에서 여령(女伶), 여기(女妓)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던 여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의 유형에는 소속에 의한 분류로 관기(官妓: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 (家妓: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자유로운 여기)로 구분된다.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지방관에 적 (籍)을 둔 여기)로 나뉘게 된다.

또,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 기), 색기(色妓: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가 있으며,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 牌: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 이패(二牌:일패에서 타락 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 다.)로 나뉜다(김지은, 2007).

고려시대의 ‘교방’기구의 설치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교방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역에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성기숙, 2005).

라.

마. Ⅳ. 근대와 현대의 교방(敎坊)의 변천

1)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904년 신분제 철폐로 관기들은 신분이 자유로워졌지만 실질적인 관기의 해체는 1908년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관기들이 경시청 관할로 옮기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손유주, 2006).

1907년 12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과 1908년 5월 28일 횡성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서양식 극장무대 위에서 기생들이 공연한 춤 종목인 승무와 한량무를 볼 수 있으며, 이춤은 무극(舞劇) 형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말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는 상관없이 자주 거행되는 진연으로 서울로 뽑혀온 기생들이 증가하게 되며, 진연을 마친 기생들이 서울에 계속 머물러 기생 수는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그들을 관리할 ‘기생 단속령’이 1908년 9월 25일에 내려지게 된다. 기생 단속령 내용으로는 “기생이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를 하고 인가증을 받아야하며 그만둘 시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한다”. 등의 기생의 활동을 단속, 통제하고 경시청의 명령권 안에 넣고자 만든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직된 기녀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한성기생조합’이라는 기생 조합이 생겼으며, 그들은 국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에 절과 고아원 등의 연주회에 공연을 하는 등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이설희, 2009).

또한, 유부기조합(有夫妓組合)인 한성기생조합에 대항하여 다동기생조합을 정악원 학감(正樂院 學監) 하규일이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으로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생조합의 춤 교육은 장악원의 전임자, 민속춤 전문인, 은퇴한 노기, 선배기생 들이 관계하였다(김윤주, 2002).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기생의 활동은 경찰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일본 기생의 활동방식이 조선의 기생에게 스며들면서 기생들의 예술 활동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외래문화의 수입으로 권번 이전의 교방의 흔적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변신을 이룩해 낸 시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발판은 바로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1905년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자 1908년 여악에 소속됐던 관기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방황하던 기생들은 일본 경시청을 통해 하달된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는 조직에 묶여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은 1909년 경시청에 의한 ‘창기 조합조건 명령건’이라는 기생 단속령의 시행과정에서 생겨났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에서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전화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하규일의 수제자로 당시 명기(名妓)로 알려졌던 평양출신 이난향이 서울 입성과 기생 입적 경로 미 활동 내력을 회고한 글에서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였다.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때였다.”라고 1970년 12월 25일 중앙일보에 기재된 내용이 전해진다(성기숙, 2005).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던 권번은 서울의 경우, 한성권번・대정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 등이 있었고 대금・금천・동래・창원・광주・수원・평양・진남포・개성・안성・연기 등에 권번 또는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은 대부분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바로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전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이 존재했다. 평양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권번이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지역이다. 진주는 한말 정현석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생들에 의한 다양한 유형의 춤이 전승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진주교방 역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후에 생겨난 것이 진주권번이다(성기숙, 2005).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예술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 등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던 분들이 대부분 동래권번 출신이거나, 마지막에 동래권번에 모여든 예인들이었다고 한다.

2)

3) 2. 현대 교방(敎坊)의 흔적

교방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 발해의 태상사를 만나게 된다. 국가의 통치이념과 운영에 있어 예술의 가치와 유용성의 통찰이 삼국시대에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왕립으로 음악전문기관인 음성서(音聲署)와 태상사(太常寺)가 설립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처음 교방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은 음악과 춤의 전승기관으로 건재했었다. 역사의 급격한 변화와 나라의 기운이 모든 것을 뒤바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명칭이 옮겨 가지전까지 교방은 오랜 시간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전폭적으로 책임지던 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번으로 모든 기능과 존립이유가 변환의 시기를 겪은 후, 권번은 영롱한 전통문화예술의 단절의 기로에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필요의 역사가 되어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잃기 쉬었던 우리전통예능의 교육의 산실 역할을 권번은 잃어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주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교방의 관기들이 대부분 권번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통은 끊겨졌을 것이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연희를 목적으로 예능인을 양성하던 교방의 흔적은 단연 국립국악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에서 교방은 현대의 현재적 모습인 국립국악원으로 1951년 설립되어졌다. 국립국악원은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진흥과 발전에 있어 다양한 노력과 시도로 국가의 대표적 ‘흥’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다.

교방의 역사를 짊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능의 교육으로, 연희기관으로 그 소명을 다했던 권번은 장악원이 해체 된 후, 이왕직 아악부, 구왕궁 아악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에 있어서 가교적인 숨은 역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사라져버린 교방의 기능을 다했던 권번이 있었기에 훗날 자리하게 된 국립국악원이 예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온전한 형태미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정악과 민속악을 전승하여 보존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설립된 이 기관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송방송, 2006).

바.

사.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사에 춤의 비중에서 전통춤 영역에 존재하는 교방, 권번, 기생들의 역할이 빚어낸 공로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교방의 역사와 변천사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각 시대별 교방의 존재와 역사, 기능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교방의 시작점은 한반도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고 나라의 기운이 뿌리를 내리던 삼국시대로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먼저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왕명으로 존재했으며 발해에는 태상사(太常寺)가 신라처럼 왕립음악기관으로 기록되어져있었다.

둘째, 정확한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궁중정재의 활동상을 다 소화해낸 교방은 교육과 연희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해낸 곳이다. 궁내의 모든 대소연희에 활약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교육이 결국엔 예술성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말, 열강들의 어지러운 문호개방과 정치적 혼탁 속에 예술의 목적과 가치가 국가차원에서는 희석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예술성의 애환은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순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넷째,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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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volutions of Gyobang

 

Ye-jin Kim (completed Ph.D. course work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In searching the predecessor of Gyobang, the Muyongchong murals of Goguryeo from the Three Kingdoms era suggest that dancers were involved with the various affairs of the state even before the Three Kingdoms era. The historic origin of the name Gyobang can be traced to Daeahkseo, which w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Goryea era, and the musicians of Kwanhyeonbang. The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music and dance while involving with the court dance. The name of Gyonbang changed from Gyogang to Gyobangsa, Gyobangi and some other name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era. Meanwhile, however, there was no material change in the overall substance and function of Gyobang over the centuries.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or geisha system in 1907, scattered gisaeng constituents got together and formed 'Kweonbeon'. Kweonbeon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preserving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especial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s suc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needs to be assessed in a new light.

 

As the state-wide unions of gisaeng, Kweonbeon played a big part in withstanding the Japanese attempts at decimating traditional cultural norms and practic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in laying out the found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as we know and relish today.

 

Gyobang was a public entity in charge of music, dance, and songs, among other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ose who belonged to Gyobang were named Yeogi, Yegi, Yeoahk, and Yeoryong. In terms of affiliation, Gyobang can be classified into Kwangi, Sagi, and Gagi; in terms of region, Kyeonggi, and Jibanggi; in terms of function, Yegi and Sekgi; and, finally in terms of hierarchical level or class, Il-pae, E-pae, and Sam-pae.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system, Kweonbeon first started off as Joyang-gurakbu in 1909 and again as Chosun Jeongahkjeonsupso in 1911. Afterwards, Kweonbeon was operated as Dadong-johap in 1913 as a spin-off division of the Chosun Jeongahkjeonsupso. Kweonbeon continued to grow as Kwangyo-johap, and, in 1914, the era of Kweonbeon took off through Chosun Kweonbeon, Hanseong Kweonbeon and other entities. Numberous Kweonbeon existed in Seoul and other provinces, and, until recently, Dongrae Kweonbeon had produced sizable traditional artists.

 

In conclusion, Gyobang served as a public purveyor of traditional cultural practices and values for centuries, and then laid out the foundational roots for the function and roles of Kweonbeon following the end of the state gisaeng system.

 

As can be seen from pertinent historical traces, Gyobang is an institution par excellence for training, disseminating, and passing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for ages l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