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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영남교방청춤 춤사위 연구 : 운파 박경랑류 중심으로

저자
이채영
학위논문(석사)
발행
중앙대학교 |2013

초록

본 논문은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전반에 나타난 춤사위연구를 시도하였다. 교방청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그 중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던 동래권번 소속의 기방춤들이 전속되면서 영남권의 교방에서 추어오던 춤사위의 흐름이 비슷해지거나 동일한 춤사위들이 많아지면서 운파 박경랑으로 그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그동안 학문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와 장단을 분석하여 무보화 하였다. 이를 통하여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구조 분석과 외형미, 내재미로 구분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다섯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굿거리 67장단, 자진모리 60장단, 다시 마지막 굿거리 6장단으로 총 133장단으로 반주음악이 구성되어있다.
둘째, 영남교방청춤에서 보여지는 상체의 특징적인 춤사위 명칭으로는 회뿌림 사위, 학체 사위, 활궁체 사위, 훼치기 사위, 터벌림 사위, 버들가지 사위, 타래엮음 사위, 휘몰이 사위가 보여진다.
셋째, 영남교방청춤에서 보여지는 하체의 특징적인 춤사위로는 덧배김 사위, 외발들기 사위, 좌・우 달걸음 사위, 디딜방아 사위, 홍두깨 사위, 용트림 사위가 보여진다.
넷째, 영남교방청춤의 내재미는 정서적으로는 넘치는 기교의 존재, 우리춤의 기본정신인 예, 법, 도의 세계가 내재되어 있다. 지역적으로는 척박하고 폐쇠적인 영남지역의 지리적 특성이 춤에 고스란히 묻어나서 호남지역보다 투박한 강인함이 대두되고 있다. 형태적으로는 다양한 동작소, 몸 사용법의 차별화, 작품의 과학적 무대화를 들 수 있다.
다섯째,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은 검정겉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주의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공연의 의미와 사계에 따라 의상의 색상을 달리할 수 있다. 소품으로는 “황룡백학무”라는 글귀가 쓰여진 합죽선 부채를 사용한다.

This study examined the dancing motions presented in Yeongnamgyobangcheong Dance in general, focusing on the school of Unpa, Park Gyeong-rang. Gyobangcheong Dance is a collective body on which ordinary people’s life patterns and artistic trends in the later part of the Joseon Dynasty were projected. Among its many variations, Gibang dances, which belonged to the Dongrae Gisaeng Call-office and preserved until a recent date, have been transmitted, And they have become similar to the flow of dancing motions that performed in Gyobang in Yeongnam area or had lots of dancing motions that are the same with Gyobang Dance, thus retaining its life by Unpa, Park Gyeong-rang.
On this account, this study analyzed the dancing motions and jangdans of Unpa Park Gyeong-rang School’s Yeongnamgyobangcheong Dance, which had not been studied academically, and then worked out its dancing score. Based on study findings, the structure, external beauty and internal beauty of Unpa Park Gyeong-rang School’s Yeongnamgyobangcheong Dance can be classified into following five characteristics:
First, the accompaniment music of Yeongnamgyobangcheong Dance consists of 133 jangdans, such as 67 gutgeori jangdans, 60 jajinmori jangdans and 6 gutgeori jangdans.
Second, the characteristic dancing motions of upper body, presented in Yeongnamgyobangcheong Dance, can be classified into hoebburim motion, crane-body motion, bow-shape motion, hwechigi motion, ddeobeollim

목차
I. 서론 7
1. 연구의 목적 및 필요성 7
2. 연구범위 및 방법 9
II. 이론적 배경 10
1. 운파 박경랑의 예술생애 10
2. 영남교방청춤의 시대적 배경 12
3.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15
4.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16
III.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특징 19
1.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19
2.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외형미 21
1) 상체 춤사위 무보 21
2) 하체 춤사위 무보 31
3) 상·하체의 춤사위 특징 38
3.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내재미 42
1) 정서적 측면 43
2) 지역적 측면 44
3) 형태적 측면 47
4.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의 특징 47
IV. 결론 50
참고문헌 52
부록 54
〈굿거리〉 55
〈자진모리〉 88
〈굿거리〉 118
〈악보〉 121
국문초록 133
Abstract 135
표목차
〈표 1〉 회뿌림 사위 22
〈표 2〉 학체 사위 23
〈표 3〉 활궁체 사위 24
〈표 4〉 훼치기 사위 26
〈표 5〉 터벌림 사위 27
〈표 6〉 버들가지 사위 28
〈표 7〉 타래엮음 사위 29
〈표 8〉 휘몰이 사위 30
〈표 9〉 덧배김 사위 31
〈표 10〉 외발들기 사위 32
〈표 11〉 좌·우 달걸음 사위 33
〈표 12〉 디딜방아 사위 34
〈표 13〉 홍두깨걸음 사위 35
〈표 14〉 용트림 사위 37
〈표 15〉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복식 49
원문 다운로드 :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57044212&dir_id=0&page=0&query=%EC%98%81%EB%82%A8%EA%B5%90%EB%B0%A9%EC%B6%A4&ndsCategoryId=10202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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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이 맥을 짚어가고, 이어가는 춤! 영남교방청춤 

백재화(kenzo71@hanmail.net)

 

1.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오늘의 이 시간, 오늘을 장식했던 사회 전반의 이슈와 사건들도 일정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차를 지나게 되면 역사의 궤 속에 들어가게 되며, 선택과 선별의 잣대에 의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는 문화, 예술이 될 것이다.

지금 광풍처럼 몰아치고, 대중세계를 압도하는 사건, 흐름, 유행이 모두 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찰나의 유행과 전통의 밑동이 되고 초석으로 자리매김할 재목은 한마디로 시간이라는 흐름이 그 유사성을 분별해 내게 된다.

오늘의 문화가, 이 시각의 춤이 전통의 옷을 자연스럽게 입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 바람의 시각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라고 생각한다.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백재화, 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 69).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우리춤 연구소, 2007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p.6).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척박한 땅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예로부터 경상도를 태산준령(泰山峻嶺)이라 하여,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한 면을 그 특징으로 꼽고 있다. 영남은 우조(굵직한 소리)형태의 소리가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섬세한 면도 있지만 우직스럽게 나가는 성향이 춤과 소리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다. 일례로 ‘밥 먹으로 가자!’ ‘음악~!’ 이렇듯 처음에 지른다. 처음에 차고 나가는 말씨의 특성이 영남의 특징이다. 덧배기, 배김사위가 영남의 특징이 된 것이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한다(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한마디로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다.

교방(敎坊)은 역사기록에 고려의 교방이라는 궁중에 설치된 기관으로 교방기와 지방기로 구분되어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 원류를 찾아보자면 고구려 시대에서부터 국가행사에서 전문무용수의 출현을 볼 수 있기에 이때부터 교방의 원류를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기녀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 존재하던 기녀의 유형을 보면, 관(官)에 적을 둔 기녀로는 궁중에 설치된 교방에 소속된 교방기(敎坊妓)와 지방 관청에 적을 둔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었다. 관에 매이지 않고 기업(妓業)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사기(私妓)가 있었으며, 사가에 기거하면서 관기와 마찬가지로 춤과 노래를 익혀 사대부의 예술성을 고취시키고 때로는 외간남자들의 수청을 들기도 하는 가기(家妓)가 있었다(성기숙,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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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서 채우는 길

최 은 숙

 

1. 삶의 춤결

그는 수업시간마다 외친다. 발목 접고 깊이 눌러라. 무겁게 해라. 바닥에서 발을 떼지 마라. 눌러라. 계속 눌러라. 우리춤이 중력을 뿌리치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서양춤과 다르다고 하지만 이렇게 한없이 누르다간 바닥에 달라 붙다가 땅 밑으로 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근의 무게를 강조한다. 그의 춤 선은 참 예쁘고 고운데 실제로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호흡과 기교 심지어 얼굴 표정까지도 깊고 진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춤을 추면 저런 묵직한 팔 다리와 진중한 분위기가 나올까 연구하게 만든다.

그는 ‘멈춰, 서’게 한다. 화려한 움직임은 ‘멈춤’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세상에서 정지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침묵이 없는 말은 소음이 되고 어둠이 없으면 밝음의 소중함을 알 수가 없듯이 쉼이 없다면 드러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위대한 멈춤이다. ‘딱 멈추’지를 못해 몸이 혼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더 중심을 잡아가는 것은 몸보다 정신 쪽이었다.

가식으로 만들어 내지 않고 진정 자신의 무게로만 움직일 때 진국이 되는 춤사위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음을 녹이는 그의 화려한 발 디딤새는 단순한 겉멋이 아닌 진국을 향한 열정의 결과였다. 자신을 향한 진지한 시선으로 내면을 다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는 살인적인 연습시간이 있었기에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 동안 일 년에 두 번 씩 열리는 연수에 거의 참여했는데 하루는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숙소에서 그와 같은 방을 쓰면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다가 잠들었는데 갑자기 잠꼬대로 춤 장단을 치시는 것이 아닌가. 새벽 연수부터 시작해서 저녁 시간까지 꼬박 채우고 피곤한 몸으로 겨우 몇 시간 잠드는데 꿈에서도 장단을 치고 우리 자세를 잡아 주고 있었던 거였다. 허리 펴고 명치 접고 겨드랑이 들어! 시선 옆으로! 쿵 기덕 쿵 따아악. 춤으로 가득 찬 치열한 삶이 그대로 전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얼굴은 손에 잡힐 듯이 작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몸은 단단하고 밀도있게 다져진 정갈한 멋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렇게 밤낮없이 하는 춤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2006년 여름 교방춤 연수 장소가 해운대였는데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던 홀이었다. 수평선에 배가 떠있는 그림 같은 장소를 우리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해 일부러 잡으신 것 같았다. 그때 연수의 주제는 바다와 함께 춤을 추라는 것이었다. 파도가 밀려오면 움직이는 물결 따라 추라고 했다. 물결이 내 품으로 밀려들듯이 한 호흡으로 밀어 올리고 내려 앉아라는 말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때 각인된 물결 이미지는 교방춤 속의 하나의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이미지를 주문한다. 춤 속에 각자의 이미지를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내도록 한다. 내가 자연인양 먼 수평선의 아득함과 흐르는 구름을 마음에 담아내라고 했다.

교방춤의 춤사위는 조금 많은 기교가 필요하다. 처음에 복잡한 동작을 배우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켜야 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치가 아파야 했다. 동작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으면 몸이 따라가질 않았다. 그는 동작을 이해시키기 위해 끈질기게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자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있자면 내 몸의 구조와 관절 하나하나가 다 보이는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는 데 따라 자연스럽게 나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가면 억지스럽지 않은 편안한 춤길이 나온다 한다. 그렇게 무르익어 편안해진 경지가 되면서 그의 춤사위는 독특하게 멋지다.

춤의 비밀을 조금씩 발견해 가는 이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주었다. 그의 춤에 대한 자세는 나의 숨어 있던 열정을 깨우게 했고 이렇게 치열하게 몰입하고 다구쳐 보라고 자극했다.

 그는 엇박자를 즐긴다. 인생이란 대부분 엇나간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엇박이 들어가지 않은 안무가 별로 없다. 세상은 정박이 아니므로 엇박의 묘미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 된다. 나와 님 사이에 사랑의 방향이 다르고 시작점이 다르고 크기도 다르기 때문에 그 엇나감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생이 괴롭다는 걸 아는 것처럼. 그 엇나감만큼 우리는 방황하지만 그래서 그만큼 또 성숙한다. 너와 내가 말이 섞이는 데는 몇 번이나 서로 다른 장단을 돌아 나온 끝이다. 내 속에서 나온 자식도 내 품에 안을 수 있는 경지는 수 년이 걸리는 긴 가락을 다 알고 난 뒤다. 하지만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맞추지 못한 한 조각은 다른 데서 우리도 모르게 힘을 발휘하면서 아름답게 피어난다고 그는 믿는다. 그의 엇박은 너무 절묘하여 자꾸 보고 싶다. 엇박이 들어가는 순간 세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하다. 경계에 끄달렸던 마음들이 부질없어짐을 확인한다.

그런데 그는 자주 서럽다. 무엇을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서러운 것일까. 한 시인은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의 설움이 전해져 온다. 언젠가 전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승과 제자가 목이 메어 대화를 하지 못할 서러움이 삶의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을 너머 선 것을 바랐기 때문에 끝나지 않을 서러움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적이다. 그건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불가능한 것을 항상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 어디쯤에서 서성이다 잠깐씩 그와 눈빛이 마주칠 때 나를 발견한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고 싶다고 했다.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다 가슴에 안고 춤을 춘다. 그래서 그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흰 수건은 날릴 때면 가슴이 복받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사랑했던 아버지와 남동생을 묻고 사랑하는 스승과 님과 떠난 제자까지 가슴에 안았으니 응어리가 너무 깊다. 아무리 풀고 풀어도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홀로 법당을 다닌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누군가 야속할 때는 절을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에 절합니다. 세상 어떤 것도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는 늪과 같다고 했으니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감사합니다.

그는 주말이면 법당에서 그 누구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천도하고 빌어준다. 더불어 참회한다. 나에게 소중한 것임을 몰랐던 죄.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죄. 돌봐주지 못한 죄. 감싸고 덮어주지 못한 죄. 죄스러운 마음은 북장단을 타고 영남승무 회색빛 장삼을 흔든다. 먹장삼에 빨간 가사를 입고 추는 그의 승무를 처음 보았을 때 소름이 돋았다. 장삼을 던질 때 온 마음을 다하는 진정성이 무대를 꽉 채웠고 뿌린 장삼 끝으로 그려지는 유연한 포물선은 내 마음에도 이어졌다.

오열과 희열이 섞인 그의 북장단은 사람 마음을 찢어 놓는다. 북소리는 작아졌다 커졌다 하면서 인간사 희노애락의 고비를 넘나들다가 다시 숭고하게 울린다.

그는 다 준다. 자기가 가진 것을 언제나 아낌없이 내어 주기 때문에 가난하다. 다 주어라. 전수관 벽면에 그렇게 적어놓았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우니 마음에 욕심을 쌓지 말라고. 자신을 끝없이 비워내어 항상 새롭고자 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춤사위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떤 이는 좋아하고 어떤 이는 괴로워한다. 오늘의 창조적인 박경랑은 당신의 스승이 날마다 춤사위를 바꿔 다양한 동작으로 춤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란다. 우리도 그를 따라 하다 보면 그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공공연히 우리는 그를 철인이라 부른다. 무쇠팔 무쇠다리로 전국을 누비는 철의 여인이라고. 수많은 공연과 수업을 뚫고 자기 춤을 선보이는 신비주의자. 언제 울고 언제 사랑했을까. 거미처럼 긴 두 팔로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는 아무래도 길 위에서 생겨난 것 같다.

 그는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사람이다. 자분자분하던 말씨가 흥이 나면 인심좋은 경상도 여인이 된다. 주례학원 찬 마룻바닥에 큰 대자로 누워 더운 열기를 식히면서 제자와 같이 어울리는 소탈함이 있다. 밤 수업 뒤 팥빙수를 나누어 먹고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를 즐겼던 편안한 사람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내 입에 새우를 까서 넣어줄 때 그 다정함에 당황하였던 기억이 난다. 제자들 연습하라고 손수 밥을 지어 먹이는 그런 사람이다. 그의 말은 처음엔 시가 되고 편지가 되었다가 나중엔 춤이 된다. 일상의 말과 행동이 다음에 나올 춤의 집이 된다.

 

2. 다른 빛깔로

그와 처음 마주친 순간은 다른 세상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의 젊은 그는 자태가 매혹적이었고 말소리며 표정이 가냘프고 정다워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어떤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드는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적지 만나보지 못했던 오묘한 감성이 주는 그 떨림을 지금도 기억한다. 곧바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길을 가르쳐 준 이정표가 되었다.

한동안 국어교사의 처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흔들렸고 저쪽 춤의 세계가 부러웠다. 학교를 마치면 모든 시간을 춤에 집중했고 너무 행복했다. 원래 우리 춤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는지 그의 기운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갈피를 못 잡는 사이에 십 수 년이 흘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탈을 벗기 위해 탈을 쓴다’는 말에 나를 크게 돌아 본 적이 있다. 춤을 배우면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안 되고 또 얼마나 굳어 있는지 괴로워하고 있던 때였다. 몸을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주어진 신분과 역할에 갇혀 딱딱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지금까지 틀에 얽매인 줄도 몰랐고 자신을 바로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나에게 균열이 생겼다. 벌어진 작은 틈새로 아름다운 물이 스며들면서 나는 다른 빛깔로 물들 수 있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3. 숙련

 몸으로 하는 공부는 고달프다. 물론 공부 자체가 고달픈 일이고 세상의 모든 공부는 마지막에는 몸으로 승부를 본다. 몸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강점은 정직함이다. 신체에 새겨진 흔적은 의식하지 않은 순간에도 그대로 표출되어 버리는 투명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자리 잡아 바로 그 사람이 된다.

일주일에 한 번 그의 기를 받으러 두 시간 이상 걸리는 길을 오고 갔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태풍이 몰아쳐도 어김없이 그를 찾았다. 새로운 내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운은 오고가는 고달픔을 덮을 뿐 아니라 일주일을 살아갈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새로운 춤을 익힐 때마다 나는 부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거칠게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내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운 작은 조각으로 섬세하게 나누어져 갔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얻어 가면 성공이다는 그의 말을 믿고 먼 길을 오가도 성급하지 않으려 애썼다. 죽을 때까지 나를 구원하는 거라 생각하고 욕심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춤을 배운 지 4년 정도 지나서부터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지 느껴보라고 그는 의도적으로 무대에 서게 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배운 것의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생음악 앞에 어쩌다 서게 되면 그동안 배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살아 있는 음악 속에 춤가락을 살려 낼 수 있는 힘이 없어서 춤이 무너졌다. 그가 판소리, 산조 등 음악을 많이 들으라고 한 이유를 알았다. 수업 시간에 장구 장단으로 춤 앞에 서게 하는 깊은 뜻을 알았다.

순서를 빨리 익혀서 성급하게 한 판 끝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면 춤은 거칠어지고 몸만 피곤했다. 잘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춤을 추면 그 잘난 마음이 춤 속에 보인다는 걸 알았다. 추는 사람의 기질과 마음, 심지어 그의 세계관까지 다 드러나는 걸 알고 정말 마음으로 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고 내려 놓는 공부를 해야 했다.

기교를 익히는데 3년, 버리는데 30년.

어설픈 우리는 춤은 없고 몸짓만 있다. 우리가 기교를 익힐 때 그는 모든 기교를 버리고 간결해지고 승화되어 갔다. 하루 종일 제자와 춤추면서 자신의 춤을 갈무리해서 정화시켰다. 삶의 굴곡따라 고비고비 춤이 나왔다. 춤이 변하고 발전하는 과정을 보았다. 스승의 변화 만큼 큰 감동을 주는 공부가 있겠는가. 몸에서 익고 삭아서 나오는 춤. 인생을 묵혀서 깊게 배어 나오는 것이어서 진정 그는 안 보이인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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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장단분석

이 채 영

국문초록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음악에 나타난 장단의 구조적 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춤을 이해하는데 앞서 음악의 구조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면서 전통춤 전반의 음악적 연구에 발전될 하나의 영역이라 사료된다.

또한 우리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음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장단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춤의 유명세에 비해 장단의 음악적 특성연구는 미미한 편이다. 즉 장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장단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연구는 아직도 선행 연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쟁점이다.

따라서 본고는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장단을 분석하여 악보화하고, 리듬분석을 목적으로 김청만선생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 음악은 총 261장단이며 1995년 운파 박경랑이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후 영남교방청춤의 전용 반주음악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기획, 제작된 음악으로 굿거리 131, 자진모리 119, 마지막굿거리 11장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연구는 총261장단 중 굿거리 48장단으로 장구와 징 장단을 먼저 채보하여 연구하였으며, 나머지는 추후 지속적인 연구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은 매 장마다 특색 있는 하나의 악기 출현이 특징으로 자리잡은 연주형식을 취하는데 이는 박경랑의 개인적인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구조와 장단의 흐름은 단조로움 속에 나름의 규칙과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굿거리장단은 오로지 연주자의 기량과 춤추는 이의 즉흥성의 반영을 위해 기본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 연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음악의 리듬구조는 제 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며, 제 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제 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 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이상과 같이 영남교방청춤의 굿거리장단은 본문에 기보된 것과 같이 여러 갈래의 단순한 형태로 여러 가지 변화들이 나타났다. 그 변화들은 춤의 근원을 바탕으로 표현양상이 그만큼 다양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운파 박경랑, 교방청, 리듬, 장단 연구, 영남교방청춤

목 차

Ⅰ. 서론

2.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굿거리

48장단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3.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박자구조와

장단구현양상

2. 연구방법 및 한계

 

Ⅱ.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특징

Ⅲ. 결론

참고문헌

1.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시나위구조

Abstract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전통음악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장단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여러 장르의 음악에서 장단은 한국음악형식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고 있으며, 가락이 생성되는 기본적인 틀거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음악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 장단이다. 즉 장단의 구조가 느리고 복잡하며 어려울 때 보다 쉽고 단순하여 그 장단의 반복구조를 빨리 파악할 수 있을 때 더 그 음악을 이해하기가 쉬워진다는 것이다.

그만큼 음악 안에서 사용되는 장단구조는 규칙적이고 일정할 때 그 음악의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함을 가지고 있는 장단의 음악적 특성에 대하여 밝히지 못한 춤이 있다. 즉 장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1991년 한국국악학회에서 ’한국전통 음악의 장단’이라는 주제로 국악학 전국대회에서 장단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논문들이 발표되었지만 장단에 대한 연구에는 아직도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다.

이렇듯 장단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시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연구는 아직도 선행 연구되어 있지 않은 점이 가장 큰 쟁점이다.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대부분의 민속춤은 글로 체계화한다던지, 무보로 작성하여 활발하게 전승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록의 부재(不在)로 인해 그 연구의 한계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는 영남교방청춤의 장단과 함께 연계하여 그 동안 간과되었던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와 장단의 관계를 심층적으로 살펴보고, 아울러 장단을 분석하여 악보화하고, 리듬형태를 분석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2. 연구방법 및 한계

본 연구의 연구범위는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 춤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본 음악은 1995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후 녹음된 음악이며, 영남교방청춤 전용 음악을 목적으로 제작된 음악이다. 총261장단중 굿거리48장단으로 장구와 징 장단을 채보하였으며, 김청만선생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또,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학습하면서 전체상을 파악하였으며 음악과 춤의 부분적 특징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영남교방청춤 전 과정의 ‘2009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白衣百舞)’ VTR 녹화물을 자료로 삼았으며, 영남교방청춤 보존회에서 기획한 VTR 녹화물을 중심으로 영남교방청춤 장단에 따라 굿거리 48장단만 컴퓨터 finale file과 일러스트레이터 CS 3를 이용하여 본인이 직접 채보하여 진행되었다.

 

 

Ⅱ.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적 특징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교방에서 추어졌던 춤으로 박경랑의 외증조부인 故 김창후 그리고 그의 제자인 故 조용배 그리고 운파 박경랑에 의해 현재까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남교방청춤은 즉흥무의 형식으로 추는 사람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의 형태로 풀어낼 수 있다.

본고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음악은 1995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후 녹음된 음악이며, 영남교방청춤 전용 음악을 목적으로 음악실에서 제작된 음악이다. 총 261장단으로 굿거리 131, 자진모리 119, 마지막굿거리 11장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 연구는 총 261장단 중 굿거리 48장단으로 김청만이 반주한 장구 장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의 연주형식은 굿거리에서 합주-거문고 독주- 합주-대금독주- 합주-아쟁독주- 합주 순으로 진행되며, 자진모리에서는 합주-해금독주-합주-피리독주-합주-가야금독주-합주 순이며, 마지막 굿거리에서는 합주로 마무리된다. 매 장마다 특색 있는 악기의 출현은 운파 박경랑의 개인적인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영남교방청춤 음악의 특징이다. 춤이 매 장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이유에 근거하며, 전체적인 영남교방청춤 음악에 있어서 춤과 합을 이루는 매력이 되어주고 있다.

 

1.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시나위구조

이 춤의 음악은 시나위 합주로 굿거리(또는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구조를 갖고 있다. 시나위의 구조는 한강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 지방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무속 계통의 시나위 음악이 이 지역에서 주로 발달된 것은 한강 유역을 경계로 하여, 남부지방과 북부지방이 각기 무당의 유형이 다름에서 기인한다. 북부지방은 강신무가 많아서 소위 신이 내려서 무당이 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은 무업을 하기 위한 수련기간이 적어서 남부지방의 무당보다 굿이 가지고 있는 연희적인 면이 다소 떨어진다 할 수 있다. 반면, 남부지방은 세습무가 대부분이어서 이들은 예로부터 집안 대대로 이을 가업으로 계승하였다. 따라서 남쪽의 당골(세습무인 무녀)들은 노래와 춤을 일찍부터 접하게 되어 기예가 뛰어났다. 이 지역의 무의식에서 쓰였던 음악이 오늘날 같이 예술 음악화 된 것으로 일정한 형식 없이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음악으로 경기남부, 충청도, 남도지방의 민속악인 무악에서 유래된 가락의 하나이다. 시나위 가락은 판소리와 산조의 계면조 가락과 비슷하며, 시나위의 악기편성은 어느 것이나 타악기와 관악기가 중심이 된다. 또, 산조와 마찬가지로 장구가 장단을 잡아서 이끌어가는 음악이기에 어떤 형태의 음악에도 장구가 빠지는 일이 없으며, 시나위의 악기편성이 다양해지고 한 종류의 악기가 둘 이상 편성될 때에는 장구 이외에도 징이 첨가되는데, 징이 사용됨으로써 무속적인 분위기는 더욱더 고조된다. 시나위는 원래 관악기만의 합주였으나 타악기(장구, 징)와 현악기(가야금, 거문고, 아쟁)를 첨가시켜 연주하기도 한다.

관악기는 젓대와 피리가 주로 쓰이며, 젓대와 피리로 시나위를 연주할 때에는 시나위 청으로 하여서 여러 가지로 손을 잡는 방법이 틀리며, 음조직도 올라가는 경우와 내려가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시나위에 있어서 악기의 청이 달라지는 것은 시나위가 본래 무속음악의 형태로써, 무녀가 음역을 맞추어 노래에 맞는 선율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서 연주하는 수성가락의 형태를 취했기 때문이다. 시나위와 산조는 불협화의 협화 또는 부조화의 조화 등으로 설명된다. 이는 현장, 곧 연주장소에서 즉흥적으로 창작해 가는 음악이며, 따라서 엄밀한 음악에서 시나위라는 악곡은 같은 것이 둘 이상 존재치 않는 현장음악이며, 즉흥연주인 것이다.

 

2.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굿거리 48장단

영남교방청춤에서 반주음악의 음양의 표현은 춤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음양에서 음의 소리는 궁채의 연주가 중심이 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장구의 궁편과 채편의 타격에 의해서 생기는 음양의 표현은 음색과 음질이 결합하여 소리의 밝음, 어두움, 깊음, 얇음, 무거움, 가벼움 등을 표현한다. 음양의 표현은 장단의 진행 속에서 춤공연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장단의 맛을 느끼게 하며 일체의 감정으로 춤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굿거리장단은 무수히 변주될 수 있다. 그것은 8분의 3박을 단위로 한 리듬꼴의 다양한 변화에서 비롯하며 특히 8분의 6박을 단위로 나타나는 관습적인 리듬꼴을 제외한 각 박의 리듬꼴은 대부분이 독자적이어서 8분의 3박 단위 리듬형으로 묶어지는 조합의 방식이 무수히 가능하다. 이러한 다양한 변주는 장구의 궁편과 채편을 교차하며 이루어지는 잔가락에서 비롯된 것 같다.

본 장에서는 시나위 장단의 분석과 음악적 특징을 분석해 본 결과 형식적으로 매우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음악적인 면에서 장구의 타격, 음양의 표현 등이 상호작용하여 김청만의 연주와 운파 박경랑의 춤 속에서 사람들을 몰입하게 함을 알 수 있다. 또 김청만의 타격에는 음악적 내용에 따라 소리의 질적 변화를 동반하여 선율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타격의 선율적 표현은 리듬동기의 형태로 결합되면서 장단의 즉흥성을 구현하게 된다. 이 타격의 선율성은 춤의 모든 음악에서 드러나면, 특히 영남교방청춤에서는 이야기식 춤판이 끊이지 않도록 감정을 유지시키는 힘을 갖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이성이다.

다음 <악보1>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반주음이 되는 굿거리 48장단의 장구와 징 장단채보이다.


 

 

 

 

 

 

<악보 1>

 

 

3. 영남교방청춤 반주음악의 박자구조와 장단구현양상

영남교방청춤의 총 261장단 중 굿거리 131장단, 자진모리 119장단, 마지막굿거리 11장단 중 굿거리장단 48장단의 리듬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영남교방청춤 굿거리 46장단까지를 3분박으로 나누어 제1,2,3,4박으로 구분될 때, 제 1박에서는 리듬형이 몇 개가 있으며 어떤 리듬형의 사용이 많은지를 알아보고, 제2박과 제3박, 제4박에서도 같은 형식으로 리듬형을 분석하고자 한다. 47,48장단은 2분박의 맺음장단으로 리듬형 분석에는 포함하지 않았다.

 

다음은 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에서 보이는 리듬형 분석사항이다.

 

1) 영남교방청춤 48장단 리듬형 분석

 

가) 제1박의 리듬형

,

제1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45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1번 출현된다. 제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 되며 이는 장단이 시작의 눈을 확실히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나) 제2박의 리듬형

,

,

, , , ,

 

제2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2번,

③번은 20번, ④은 11번, ⑤은 1번, ⑥번은 10번, ⑦번은 1번 출현된다.

제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다) 제3박의 리듬형

,

 

제3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2번, ③번은 1번, ④은 38번, ⑤은 2번, ⑥번은 1번, ⑦번은 1번, ⑧번은 1번 출현된다.

제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라) 제4박의 리듬형

,

,

 

제4박의 리듬형에서는 ①의 장단이 1회 출현했으며, ②의 장단에서는 1번, ③번은 1번, ④은 15번, ⑤은 9번, ⑥번은 13번, ⑦번은 1번, ⑧번은 2번, ⑨, ⑩, ⑪은 각 1번씩 출현된다.

제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제2박과 4박에서 조금 더 다양한 리듬형이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영남교방청춤 굿거리 48장단의 출현빈도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 48장단의 출현빈도를 분석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영남교방청춤 굿거리장단의 출현빈도

리듬형태

출현장단

회 수

1

1

1

1

1

1

4,6,7,12,14,15,19,21,29,40

10

5,11,13,16

4

8,17,38

3

1

1

1

1

18,20,26,28,31,32,33,35,41,42,44,46

12

1

1

1

1

1

1

25,30,39

3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표 1>의 굿거리48장단의 출현빈도를 살펴보면 장단이 10번, 장단이 12번으로 48장단 중에 눈에 띄게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다.

춤 반주 장단에서는 장구가 가장 핵을 이루는 악기로, 모든 장단의 변환과 빠르기를 조절한다. 특히 영남교방청춤 음악은 매 장마다 특색 있는 악기가 하나씩 도드라지게 연주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장구가 첫 박과 끝 박을 정확히 짚어주고 사이에 있는 잔가락은 거의 들릴 듯 안 들릴 듯 짚어주며 있으며, 그사이 가락은 징이 채워주고 있다.

Ⅲ. 결론

본 연구에서는 영남교방청춤 음악 중 48장단을 대상으로 분석하였다. 김청만이 연주한 장구장단에 관하여 분석 연구한 결과, 음악적 구조는 장단의 흐름이 단조롭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서 나름의 규칙과 원리가 내재해 있으며, 영남교방청춤에 쓰이고 있는 굿거리장단의 기본요소는 시나위장단으로 기본틀 안에서 조금씩 변형연주되고, 오로지 연주자의 기량과 춤추는 이의 즉흥성이 절묘하게 합일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단의 형식은 대표적인 시나위 장단들의 기본리듬형과 자주 나타나는 변형장단이 있었으며, 장단 형식이 자유롭고 즉흥성이 강한 음악인 반면, 시나위는 악기 편성도 일정치 않은 채 불협화음인 듯 하면서도 그 소리들이 조화의 극치를 이뤘다.

 

영남교방청춤 음악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나위 장단의 경우 대게 살풀이장단과 자진모리장단으로 구성되는데 중모리 장단과 진양조장단을 포함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산조의 경우 정해진 장단 속에 엄격히 자리잡은 음악인 반면, 시나위는 다듬어지지 않은 덜 형식적인 음악이다.

둘째, 일반적인 굿거리장단에 비해 두, 세번째 박을 장구가 치지 않고 징을 친다. 또, 37마디와 43마디에서 채편의 수가 많아지면서, 장단 안에서는 11마디와 13마디가 장단이 같다.

셋째, 계면조 음계만으로 선율이 짜여 져 있으며,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음악이 아닌 자신이 즐기기 위한 음악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서민의 음악이며 즉흥성이 강하다. 또한 음의 강·약은 첫 박과 마지막 박에만 사용되고 있으며, 장단의 기술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다.

넷째, 4박으로 구성된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리듬형의 종류로는 제 1박에서는 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45회로 가장 많이 연주 되며 이는 장단이 시작의 눈을 확실히 나타냄을 알 수 있다. 제 2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20회로 가장 많다. 제 3박에서는 9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의 리듬이 38회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제 4박에서는 13종의 리듬형이 있으며 , 의 리듬이 15회로 가장 많이 연주되었다.

따라서 제 2박과 4박에서 조금 더 다양한 리듬형이 구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굿거리48장단의 출현빈도를 살펴보면 장단이 10번,

장단이 12번으로 48장단 중에 눈에 띄게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기본형의 특징들을 주로 장단구조로 사용하지만,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민속춤들은 장단의 리듬을 악사에 따라 흐름의 붙임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점이다. 이렇게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민속음악의 즉흥성과 다양성의 표현인데 주어진 틀은 비슷하지만 춤을 추는 흐름의 맥에 따라 즉흥적으로 달리할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현재 추어지고, 연주되어 지고 있는 장단형이 단조로움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남교방청춤에서도 운파 박경랑의 춤과 음악이 합일이 되면서 완성도를 더욱 높여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다.

본 연구는 이렇게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리듬의 분석을 통해, 리듬에 따라 장단구조와 붙임 형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고찰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단순하다고만 생각했던 영남교방청춤의 굿거리 48장단이 정형화된 형태가 아닌 다양하게 연주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음악적 표현이야말로 우리 민속음악의, 우리 민속춤의 본질일 것이다. 앞으로도 영남교방청춤의 음악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전통음악의 즉흥성과 현장성에 기여할 연구자료가 되길 기대한다.

이상의 결론을 통해 영남교방청춤의 장단구조는 단조롭지만 나름의 규칙성과 춤의 움직임이 합일됨으로 그 원리에 따라 즉흥적인 장구반주나 소리악기반주가 가능하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틀에 박힌 정형성에서 벗어나 반주자가 즉흥적으로 자기 멋과 흥을 소리에 실어서 부르고 어우러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앞으로 장단과 춤의 관련성뿐 아니라, 선율 악기의 반주에 대한 춤사위 연구도 더욱 심도 있게 진행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서적

이보형(1994), 한국민속음악 장단의 리듬형에 관한연구, 민족음악학.

길석근(2006), 한국음악의 장단 이해, 서울, 우리가락연구회.

이용식(2009), 한국 음악의 뿌리 팔도 굿 음악, 서울대학교출판부.

 

 

논문

최병길(2009), 동해안 별신굿 장단연구,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이주연(2003), 민요의 굿거리 장단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하진경(1988), 음악적 리듬구조의 분석론 연구,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진영란(2009), 강성영류 태평무 장단의 분석, 중앙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정기간행물

2011, 계간 예술문화비평 제2호 가을,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우리춤 연구소, 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기타

2012, 1, 30, 운파 박경랑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Woon Pa-Park, Kyung Lang Yoeng Nam Gyobang Cheng Chum Analysis of Rhythm

  ,

Lee, chae yeo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structural features of rhythm expressed in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Prior knowledge of the structure in Music before dance is an essential factor and a spectrum that lead the development of Music in Classic Dance.

Also study of rhythm is able to help us understand and recognize the music. Although the Yeong Nam Gyoban Chum has been very well known, there has not been researched about the rhythm of the work.

In this point that the rhythm plays a very important role in this dance, this is an issue that there has no advanced research.

Thus, this study made a music score and analyzes the rhythm based on accompaniment of Master Kim, Cheong Man.

The music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all 261 rhythms. In 1995, the Music had compopsed only for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This music is constituted Goodguri 131 rhythms, Jajinmori 119 rhythms, and Last Goodguri 11 rhythms.

This study researched 48 rhythms in front part among the 261 rhythms. The last of part will be researched continually. The each music part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very characteristic and this is because each part has one special instrument.

The music structure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simple flow but improvised in order to reflect dancer’s ability to impromptu.

 In rhythmical structure, the beat 1 has 3 types which are played mostly for 45 times, the beat 2 has 13 types of rhythm and played for 20 times, the beat 3 has 9 types of rhythm and played for 38times, and the beat 4 has 13 types and played 15times.

Thus, the rhythm of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has simple forms but variety at the same time and emerged various changes. The various changes of music have performed and that is derived from the modes of dynamic dance representation.  

 

Key work : Woon Pa Park, Kyung Lang, Gyobang Cheng, Rythm, Research of Rythm, Yeong Nam Gyobang Cheong Chum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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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복식

조 미 나

국문초록

 

전통무용은 춤을 추어 온 신분과 장소에 따라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으로 분류한다. 민속무용은 민중의생활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궁중무용에서 볼 수 없는 고정된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짓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현란한 의상이나 무대장치 없이 세련된 동작만으로 평민계급의 소박한 생활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승무, 살풀이, 농악무, 소고춤, 장고춤 등이 대표적이다.

교방춤 복식은 살풀이나 승무 같은 종교적인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무용처럼 정해진 복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채는 무대화시키면서 의상과의 일치를 위해 때에따라 의상에따라 바뀌기도 하며 의상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바뀌어지기도 하나 대체로 춤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교방춤와의 구별을 하기위해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 그리고 고름과 디자인을 특성화시켜다고 본다.

속치마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 것을 입기도 하는데 그것은 옛날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시, 서, 화, 악, 가, 무 등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치마폭이나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 시 를 써주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들고 흥이나면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또한 정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이것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과정에서 부채나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기도 한다.

부채는 황, 룡, 기, 백, 학, 무라는 한자로 백학이 황룡의 기운처럼 춤춘다. 또는 황룡의 기운처럼 힘차고 백학처럼 부드럽게 춤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교방춤의 이미지나 동작의특성을 살펴보면 다소 답답해 보일수 있는 전통무의 느낌에 비해 시원 시원 하고 여성스러운동작과 남성스러운동작의 조화가 잘 짜여져 있다.

복식의 색과 디자인은 이와 잘 연관되어 있는데 대체로 흑색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입고 디자인의 특색이라 한다면 저고리가 짧은 편이며 고름은 가슴을 띠 띠우듯 학고 남은 부분을 세로 고름으로 맨다. 치마는 팻치를 입지 않는 홋 치마이며 속바지는 통 속바지를 입는다.

남성스러운 흑색치마, 여성스러운 노란 저고리 그리고 하체동작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홋치마를 입으며 빠르게 도는 동작의 효과를 위해 속치마를 겉치마화 시키고 통속바지로 예의를 갖춘다.

또한 색의 내제된 의미를 보면 검정 치마는 물의 성질처럼 무용수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감을 의미한다. 노란 저고리는 관객의 내면에 에 숨어있는 감흥을 흔들어 끄집어 내는 활동성을 의미한다.

교방무의상의 초기 복식은 기본적으로 검정치마에 노란배색을 선택하였고 중기의 복식어깨부분의 색이 다양해지고 속치마의색이나 문양으로 인해 겉치마 못지않은 의상의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후기의 복식은 저고리가 화려해지고 치마와 속치마에도 변화를 주었다.

영남교방무의복식은 무용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치장이 아닌 관객을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써의 역할을 지향한다.

예쁘게 보이려는 디자인보다는 동작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정직함으로 관객의 흥미유발을 위해 즉흥적으로 사용되어지는 의상과 소품의 사용또한 그러할것이다. 그래서 추는 자가 추어 지게 만드는 새로운 공간의 창조가 될수 있다.

1.1.

1.2.

목 차

Ⅰ. 서론

3. 영남교방청춤 복식의 내적의미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Ⅲ. 영남교방청춤이 지향하는 복식의미

 

 

Ⅱ. 영남교방청춤의 복식

 

1. 전통춤의 일반적인 복식

참고문헌

2. 영남 교방청춤 복식패턴의

외형적 변천연구

Abstract

1.3.

1.4. Ⅰ. 서론

1.4.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복식은 격식이라는 말이 있다. 이말이 지향하는 뜻은 간결하고도 깊다. 옷이 곧 무엇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냄을 말하는 것이다. 복식의 상징성은 시대성과 함께 변모되어가고 있다. 춤에 있어서 복식이 갖는 의미와 지향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일반적인 복식의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대동소이하지 않을 것이며,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일반적인 옷과는 상이한 점을 보일 것이다.

춤은 인간육체의 시 공간적인 동작조성을 통해 가시적인 의미체를 형성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순수발생적인 원시무용, 오락무용과 같은 형태에서는 예외가 되겠지만 종합예술로써의 무용에서는 동작 그 자체뿐만 아니라 장치, 조명, 의상과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특히 무용의상은 시각예술의 형태로 종합예술로써의 무용에 새로운 무대를 제시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무용의상은 무용이 본래 의도하는 주제를 관객에게 쉽게 전달하게 해서 관객의 이해와 흥미를 주며 조명과 장치의 일관성 있는 통일을 통해 무용의 시각적 효과에 도움을 주며 공연자의 신체적 결합 및 배역의 성격을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에 관하여 복식의 의미와 그 의미가 내포하는 사상 등 복식에 관련하여 면밀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1.4.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서 전승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복식에 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문헌연구에 집중하였으며, 사실적인 묘사와 탐구에 있어서는 운파 박경랑선생님과의 인터뷰를 시도하여 세부적으로 참고하였다.

연구의 제한점은 영남교방청춤의 현 전승자인 운파 박경랑선생의 개인적인 복식의도에 맞추어 복식의 의미를 구현해 내려 했으므로 일반적인 춤 복식의미와 상충하는 부분과 같은 주관적인 해석이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1.5. Ⅱ.영남 교방청춤의 복식

 

1.5.1. 1. 전통춤의 일반적인 복식

 

한국의 전통무용은 춤을 추어 온 신분과 장소에 따라 궁중무용과 민간무용으로 분류한다.

 

1) 궁중무용복(宮中舞踊服)

 

궁중무용은 일명 정재(呈才)라고 하는데 이는 재조(才操)를 드린다는 뜻으로 나 라의 경사, 궁중의 향연, 외국 국빈을 위한 연회 등의 궁중잔치 때에 하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를 말한다. 이는 신라시대 발생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30여종의 무용이 만들어졌고 조선 말기에는 약 50여종에 달했다.

궁중무용은 특히 조선 후기 순조조에 이르러 정리되고 그 종목도 대폭 증대되어 전성기를 이룬다. 궁중에 내외연이 성행될 때에는 외연을 무동(舞童)이, 내연은 여령(女伶)이 각각 거행하게 되며, 대기 무동은 악공 중에서 대치하고 여령은 각도에서 선출하였다.

 

(1) 무동복(舞童服)

상례적으로 궁중에서의 향연에는 여악(女樂)이 주가 되어 왔으나 고려 때부터 있어 왔던 여악에 대한 시비는 세종조에 이르러 새로운 정재무동을 낳게 했다. 그러나 이는 곧 폐지가 되었다가 경오년(문종즉위년, 1450)에 다시 복구 되었다. 조선말기 궁중무용의 전성기까지 이어진 전통무용 중 무동이 등장하는 춤은 29 종이다. 이는 복식의 형태가 동일한 26종의 복식과 첨수무의 복식, 처용무의 복식 그리고 학무의 복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일반무동의 복식

일반적인 무동복식은 정재의 수도 많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무동의 수도 상당히 많으므로 이들의 복식이 대표적인 궁중남무복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중단의(中單衣)에 상(裳)과 각 색의 단령(團領)을 입었으며, 그 위로 야자대(也字帶)를 두르고 흑화자(黑靴子)를 신었다.

 

(2) 첨수무(尖袖舞)의 복식

순조 28년에는 공작깃이 달린 피변(皮弁)을 쓰고 녹문첨수의를 입고 홍자문반비의(紅紫紋半臂衣)를 입었으며 남전대를 두르고 청말에 자색 행전을 두르고 흑화자를 신었다.

첨수의는 일반무동들이 단령 속에 입은 중단의와 같은 형태로 직령에 좁은 소매이며, 반비의는 이 시대의 여령들이 착용했던 양옆과 뒷솔기가 터진 4자락의 쾌자와는 달리, 뒷솔기가 터지지 않은 3자락의 옷이며, 앞자락의 길이가 뒷자락 보다 훨씬 짧은 것이 특징이다.

(3) 처용무(處容舞)의 복식

삼국유사의 처용량조에 의해 처용무가 신라 헌강왕 때 지금의 울산지방에서 발생되었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신라 때는 검은색 도포에 사모를 쓰고 추었으며 뒤에 오방처용무가 되었다.

악학궤범에 나타난 처용무에 대한 복식을 각 위복별로 나누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모(紗帽)

처용가면을 쓴 다음 사모를 쓰는데 사모에는 수공화(首拱花) 2지를 꽂았다.

이 수공화는 모란꽃을 가리키며 사모 뒤에는 후수가 늘어져 있다.

 

② 의(衣)

의는 오방의 색에 따라 청, 황, 홍, 백, 흑색의 비단으로 만든다. 형태는 앞자락이 짧고 뒷자락이 길며 앞가슴 부분에 모나고 긴 흉배를 달고 앞뒤와 소매에 만화를 그리며, 옆솔기의 밑부분은 거의 허리선까지 터져있다.

 

③ 천의(天衣)

천의는 녹색비단을 쓰고, 만화를 그리며, 안은 홍색 명주를 쓴다.

 

④길경(吉慶)

길경은 안팎 모두 홍색 초를 쓰며, 양 끝에 녹색비단을 잇대어 깁는다.

 

⑤ 상(裳)

상은 황색 초를 쓰며, 상 가운데는 세로 녹색비단으로 첨(簷)을 만들고, 첨 아래는 가로 홍금선과 황색 초를 잇대어 깁고, 첨 위에서 홍색 초 끝 2개를 드리우고 끈 끝에 녹색 비단을 잇대어 깁는다.

 

⑥ 말군(襪裙)

처용무의 말군은 무릎에 채화사각(彩花四角)의 꽃문양이 붙어 있는데 이 문양은 방슬(方膝)을 말한다. 이 방슬에는 수가 놓여져 있으며 오방에 따라 말군과 방슬의 색상이 달라진다.

 

⑦ 한삼(汗衫)

한삼은 도련한 백색비단으로 한다.

 

⑧ 대(帶)

홍색 가죽띠를 쓰고, 고리로는 여주가지를 새긴 나무로 쓰고 쇠를 붙인다.

 

⑨ 화(靴)

백색가죽으로 만들고 끈이 있다.

 

(4) 학무의 복식

학무는 학이 연통을 쪼면 그 속에서 두 동녀가 나오는 춤이다. 학무의 발생 연대는 고려대이고 조선조 성종 때 크게 발전하여 전선말까지 궁중에서 성장하여 전해져 왔다. 사람이 학의 형체를 뒤집어 쓴 형태이다.

 

2) 여령복(女伶服)

 

순조 29년부터 고종말까지 내연에서 거행된 총 34종 중 처용무와 학무를 제외 하면 여령이 추는 무용은 32종이다. 이들 여령무복은 6종류의 복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일반 여령무의 복식

 

아박무, 향발무, 헌선도, 무고, 가인전목단, 선유락, 연화대무, 첨수무, 몽금척 등 25종의 일반 여령무는 정재의 수도 많지만 여기에 참여하는 무기(舞妓)의 수도 상당히 많으므로 이들의 복식이 곧 이 시대의 궁중여무의 대표적인 복식을 말해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평복차림에 화관을 쓰고 홍초상(紅梢裳)과 황초삼(黃梢衫)을 입은 위로 수대(繡帶)를 매었으며 오색한삼을 끼우고 초록화를 신었다. 이 차림은 일반 여령들과도 같으며 무(舞)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의물이나 악기를 들었다.

 

(2) 춘앵전(春鶯囀)의 복식

 

이 춤은 순조의 세자 익종이 순종숙황후의 보령 40세를 경축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1인이 추는 독무이다.

이의 복식으로는 평복차림에 화관을 쓰고 홍초상과 황초삼을 입은 위로 홍수대(紅繡帶)를 매었으며 비구(臂構)를 차고 오색한삼을 끼었으며 어깨에 하피(霞帔)를 두르고 비두리(飛頭履)를 신었다.

 

(3) 검기무(劍器舞)의 복식

 

검기무는 검무 또는 황창랑무라고도 하는 무무(武舞)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검기무는 민간에서 가면무로 연희되기 시작하다가 궁중에 들어가면서 가면이 없어지고 여령에 의해 이조말까지 전승되어 옷 듯하다.

이들의 복식으로는 전립(氈笠)을 쓰고 금향협수 위로 괘자(掛子)를 입고 남전대를 띠었으며 양손에 무검을 들었다.

 

(4) 선유락 집사(船遊樂 執事)의 복식

 

선유락이란 채선(彩船)을 끌고 배 떠나는 정경을 그린 춤으로서 2명의 동기(童妓)는 닻과 돛을 잡으면 나머지 여령들은 2명의 집사의 행선령(行船令)에 따라 배를 끌게 된다.

이들 집사들은 주립(朱笠)을 쓰고 협수(挾袖)를 입은 위로 철릭을 입고 진홍광대(眞紅廣帶)를 띠었으며 수화자(水靴子)를 신고 등에는 통개(筒箇), 양손에는 환도와 등편(籐鞭)을 들고 있다. 이것은 무관의 복식과도 같다.

 

(5) 무산향(舞山香)의 복식(服飾)

 

무산향은 익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대모반(玳瑁盤)을 놓고 1인이 추는 독무로서 춘앵전과 비슷한 점이 많다.

이의 복식으로는 춘앵전에서와 같은 화관을 쓰고 홍착수의를 입은 위로 초록괘자를 입고 금사자를 두르고 남전대를 띠었으며 오색한삼을 끼우고 홍수혜를 신었다.

 

(6) 동기(童妓)의 복식(服飾)

 

여러 의궤의 정재도를 보면 동기는 3개의 무용에 참여하고 있다. 즉 연화대무 에 2명, 선유락에 2명 그리고 학무에서 연꽃 속에 2명의 동기가 보인다.

이들의 복식을 보면 홍초말군(紅綃襪裙)과 홍라상을 입은 위에 단의(丹衣)를 입고 금화라대(金花羅帶)를 띠었으며 한삼을 끼우고 수초혜를 신었다. 이러한 복식은 3개의 무용에 참여한 동기가 모두 같았는데 다만 서로 다른 것은 관이다.

연화대무의 동기는 고종 24년 진찬까지는 합립(蛤笠)을 썼으나 그 이후는 연화관을 썼다.

 

1.5.2. 2. 민속무용복(民俗舞踊服)

 

무속무용, 사찰무용, 가면무용과 농악 기타 살풀이, 강강수월래 등이 있다. 이중에서 실용성과 표현성을 고루 갖추고 우리 민족의 문화적 배경인 무속, 불교, 군의 요소가 습합된 놀이복식으로서의 농악복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 농악의 유래와 유형

농악의 기원은 고대의 제천의식이라 할 수 있다.

농악은 그 내용이나 구조, 형식 그리고 연희하는 목적과 기능에 따라 성립과정에 대해 말할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축원형태의 농악에서 시작하여 농경적인 노작농악(勞作農樂), 걸립농악(乞粒農樂), 연예적인 형태의 농악 등 네 단계로 변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농악의 복식유형

 

농악대는 기본적으로 사물(꽹과리 ․ 징 ․ 장구 ․ 북)과 기(旗)대 ․ 소고 ․ 잡색 ․나팔 등으로 편성되는데 그 조직은 대체적으로 농기(農旗) 1인, 영기 2인, 쇠 2인, 징 1인, 장구 2인, 북 2인, 소고 8인과 무동 ․ 중 ․ 각시 ․ 양반 ․ 대포수(총잽이) 등의 잡색으로 구성된다.

① 상쇠

상쇠는 농악단을 지휘하는 사람이기에 옷이나 장식품이 가장 화려하다.

이 상쇠의 복식은 지방마다 약간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호남우도(湖南右道)의 경우 전립에 부포(꽃상모)를 달고 반소매 창옷(홍동지기)를 입으며 등에는 원형의 쇠붙이인 거울을 양 옆에 달고 안에는 적황녹색의 천을 늘어뜨리며 청색띠를 허리에 맨다.

 

② 쇠꾼

상쇠와 비슷하며 장식이 없고, 모자는 전립을 쓰거나 고깔을 쓴다.

 

③ 징수

 

쇠꾼과 비슷하며 패랭이나 고깔을 쓴다. 색띠는 한쪽만 매거나 삼색띠를 감고매는 것이 있다.

 

④ 장구수 ․ 북수

쇠꾼의 복식과 같이 전립을 쓰거나 고깔을 쓴다.

 

⑤ 소고잽이

쇠꾼과 복식이 기본적으로 동일하나 종이로 만든 꼬리가 달린 채상모를 쓰는 경우와 고깔을 쓰는 경우가 있다.

 

⑥ 농기수

흰 옷에 패랭이를 쓰거나 꽃수건 그리고 고깔을 쓰는 경우도 있고 삼색띠를 허리에 두르거나 맨다. 걸립농악에서는 먹장삼과 홍장삼을 입는 경우도 있다.

 

⑦ 영기수

농기와 같으나, 지역에 따라 쾌자나 더그레를 입거나, 상모 없이 전립을 쓰고 꽃두건을 쓰는 경우도 있다.

 

⑧ 잡색

기본적인 잡색은 무동, 대포수, 각시, 중, 양반 등이다.

● 무동: 고깔을 쓰고 남쾌자를 입으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 대포수: 옷의 색깔이나 옷차림이 일정하지 않으나 장식품은 공통적이다.

● 양반: 경기․ 충청에서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으며, 호남에서는 정자관을 쓴다.

● 각시(색시); 지역마다 색상이 일정치 않으나 저고리에는 치마를 걸치고 일부 지방에서는 바가지로 만든 탈을 쓰기도 한다.

 

● 중: 장삼에 송낙을 쓰고 허리에는 바랑을 진다. 장삼이 없으면 색두루마기를 입기도 한다. 송낙은「조리」라고도 하는데 짚으로 주저리같이 엮어 만들며 꼭대기에 꽃을 길게 달기도 한다. 일부지방에선 탈을 쓰기도 한다.

 

● 참봉: 도포를 입고 탈을 쓰며 큰 갓을 쓰며 홍적삼은 붉은 장삼에 붉은 탈을 쓰고 붉은 고깔과 버선을 신는다.

이 밖에도 얼굴에다 방울을 달아 소리를 내는 방울쇠, 쇠옷에 부포 상모를 쓴 농구, 붉은 창옷에 초립을 쓴 화동(花童), 쾌자를 입고 전립을 쓴 집사(執事), 나팔수, 새납 등이 있다.

 

3) 기타 복색

 

전립(戰笠), 상모, 고깔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상모는 부포상모와 채상모가 있는데 부포상모는 뻣뻣하게 서 있는 뻣상모와 부드러운 부들상모가 있다. 채상모는 부포와 같이 전립꼭대기에 석조시를 붙 이고 구슬을 단다.

마을 농악에서 볼 수 있는 고깔은 삼각형 형태로서 꽃을 다는데 당배꽃, 모란, 함박꽃, 백일홍 등을 달며 잎이 달린 것도 있다.

지역별로 양상이 다른 농악복식은 복식유형의 특징은 다르나, 기본으로 잡색과 무동을 제외한 전원이 고깔이나 전립을 쓰고 흰색 바지저고리를 입고 3색 띠를 맨다.

또한 편성에 있어 잡색들은 복색이 화려하며 꽹과리수를 제외한 모두는 채상모나 고깔을 쓴다. 색띠 매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다르며 고깔이나 띠, 전립, 더그레, 쾌자 등의 요소들은 불교적 군, 무속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백, 청, 홍, 흑, 황색의 오방색(五方色)이 사용되고 지방에 따라 색채의 선호가 상이함을 볼 수 있다.

 

4) 승무

 

승무는 한국민속무용의 백미라고 할만큼 춤의 기교와 예술성이 뛰어나며 민속춤 특유의 ‘정 중 동’ ‘동 중 정’의 정취가 가장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어, 앞서 연구 민속무용을 대표하는 춤이다. 승무의 무복은 장삼, 가사, 고깔로 이루어져 있는데 옷감은 갑사로 만들고 속옷은 무명으로 만들며, 버선은 옥양목으로 만들어 신는다. 원레 남자와 여자는 같은 의상으로 바지,저고리를 입었지만, 현재 남자는 바지,저고리,여자는 치마저고리에 긴소매가 달린 장삼을 입고 머리에 고깔을 쓰고 어깨에 사선으로 홍가사를 입는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양손에 북채를 든다. 승무에 있어 무복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승무의 무복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승복은 아니고, 장삼의 명칭은 조선시대전부터 사용되었다.

 

5) 살풀이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해의 나쁜 운을 쫓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 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추는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꿈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춤이라는 말을 쓴데서부터 이름이 비롯되었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꽃고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나타내기 위해 수건을 들고 살풀이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살풀이 춤은 춤꾼의 치마와 저고리가 모두 흰색이다. 흰색은 곧 무색無色이며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간직한 색이다. 무색, 있는 그대로의 색 곧 자연 그 자체이다.

 

1.5.3. 2. 영남 교방청춤 복식패턴의 외형적 변천연구

 

1) 영남교방청춤의 고유복식패턴의 특징

 

교방춤복식은 살풀이나 승무 같은 종교적인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무용처럼 정해진 복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채는 무대화시키면서 의상과의 일치를 위해 때에 따라 의상에 따라 바뀌기도 하며 의상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바뀌어 지기도 하나 대체로 춤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 또는 여러 교방춤와의 구별을 하기위해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그리고 고름과 디자인을 특성화 시켰다고 본다.

 

속치마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 것을 입기도 하는데 그것은 옛날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시,서, 화, 악, 가, 무 등으로 여흥을 즐기면서 치마폭이나 부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시 를

써주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들고 흥이 나면 춤을 추기도 하였으며 또한 정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하기에 이것을 무대에서 재현하는 과정에서 부채나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주기도 한다.

 

부채는 황, 룡, 기, 백, 학, 무라는 한자로 백학이 황룡의 기운처럼 춤춘다. 또는 황룡의 기운처럼 힘차고 백학처럼 부드럽게 춤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박경랑선생의 인터뷰내용<2011년 11월 29일 PM.12시. 박경랑류 영남 교방청 춤전수관>)

(1) 저고리의 특징

먼저 색의 배색에서 저고리와 어깨부분의 배색을 대비되는 색을 사용한다. 전체적인 노란색에 자주색을 덴다던지 초록계통의 녹두색이나 공연자의 이미지에 맞게 여러 색을 선택하기도 한다. 저고리의 배레선은 통이 좁은편이며 소매와 동정 둘레 부분의 색도 대비되는 색을 사용한다.가장 차별화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저고리의 고름은 일반적으로 매어지는 형식과는 다르게 가슴B.P선을 높이로 전체 돌레로 띠 띠우듯 두르고 나머지 남아있는 부분으로 중앙보다 조금 오른쪽에 가로 고름이 아닌 세로 고름을 맨다.

 

(2) 치마

치마또한 디자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인 치마의 주름은 치마 윗 부분부터 시작이 되지만 교방복식의 치마는 속 치마의 가슴 말기처럼 겨드랑이 높이부터 시작하여 젖가슴 아래 부분까지 흰색민무늬 천으로 되어 있고 그 아래부터 치마의 주름이 잡혀있다 치마의 색은 기본적으로 검정을 사용한다. 하지만 속치마의 색깔이 비추어 지는 무늬의 감을 선택하기도 한다.

 

(3) 속치마

속치마는 일반적인 속치마와 기능적인 면에서 아주 차이가 있다. 그야말로 겉옷을 살려주기 위한 속 옷 이라기 보다는 겉옷 못지 않는 의상의 역할을 한다. 광택이 나는 소재에 큰 꽃 자수가 그려지기도 하고 아주 선명한 색또는 다양한 색깔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속치마의 개념이 아닌 또 하나의 치마의 역할을 한다.

 

(4) 속바지

속바지 또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 다른 속바지에 비해서 통이 아주 넓고 아랫단의 모양은 사각이다. 그리고 보통 속에 속바지를 하나 더 입어서 비춰지지 않게 하는 것 도 있지만 더 풍성해 보이게 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1.5.4.

1.5.5. 3. 영남 교방청춤이 의미하는 복식의 내적의미

 

한국전통무용, 외국무용, 그리고 대중가요와 함께 공연되어지는 댄스도 그 동작을 잘 부각시켜주고 이미지전달을 극대화 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이 바로 의상이다.

대표적인 전통무용을 예를 들면 살풀이는 기원의 뜻이 있는 다소 정신적인 춤사위를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 전통 민복을 바탕으로 하얀 치마와 저고리를 입는 것이 대체로 정형화 되어있다. 한복의 형태는 특별한 것이 없으나 흰색이 주는 경건함으로 춤의 깊이와 기원의 마음을 잘 나타내어준다.

승무는 남자는 바지저고리 여자일 경우는 치마저고리를 안에 받치고 위는 긴 장삼을 입는다. 승무동작은 염불장단부터 아주 느리게 시작하는데 오래 정지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동작을 진행하다가 한꺼번에 큰 동작을 한다. 이때 한삼을 크게 뿌리는데 장삼이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그림 그려지듯 뿌려진다.(춤은, 인간의 신체 움직임을 이용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간에 그리는 하나의 그림과도 같다.)

이 처럼 의상은 그 춤의 이미지나 동작을 잘 살려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박 경랑 류 교방 춤의 이미지나 동작의 특성을 살펴보자.

먼저 춤의 이미지를 보면 다소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전통무의 느낌에 비해 시원 시원 하고 선이 확연히 드러나 보여서 가끔씩 상체동작에서는 남성스러운 굵직한 선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곡선과 직선을 번갈아 조화롭게 짜여 져 있어 적당히 시원스럽고 적당한 무계감이 느껴지게 한다. 전체적인 동작 선(자신이 위치한 공간속에서 동작의 이동을 통해 그 공간을 채웠다 비웠다 하는 연희자의 움직임으로 해서 끊임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수 많은 공간 여백 활동 까지 포함하며, 이러한 움직임이 만드는 선을 ‘동작선’이라 정의한다)은 크고 확실한 편이지만 중간 중간 잔재주를 부리듯 아주 여성적인 동작이 간간이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는 춤이다.

박 경랑 류 교방무의상은 일단 검정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는 경우가 많다.

저고리색은 여성적인 황색계통이며 치마색은 남성적인 흑색이다. 저고리는 배래선이 좁은 편이며 치마는 완전히 흑색을 입기도 하지만 속치마가 약간씩 비추어지는 무늬가 그려진 치마를 입기도 한다. 그리고 속바지는 보통 두 개 정도를 입는데 가장 겉에 입는 속바지는 통이 넓은 통속바지를 입는다.

그러면 앞에서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있는 춤의 이미지와 황색의 여성스러움과 흑색의 남성적인 이미지의 색이 서로 잘 연관되어 있다.

좁은 배래선의 저고리는 시원스러운 상체동작과 사선과 직선의 팔 사위를 할 때 팔선이 더 길어 보이는 효과를 준다. 그리고 교방 춤 후반부엔 큰 원을 돌면서 다시 작은 원을 함께 도는 동작이 있는데 이때 동작이 다소 크고 빠르기 때문에 속바지가 보여 지는 부분이 다른 춤에 비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속바지를 입고 속에 다른 속바지를 하나 더 입어 비치지 않게 하므로 관객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

검정치마에 노랑저고리의 한복배색은 그리 흔한 배색의 조합은 아니다. 보통은 교방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다소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을 많이 입는다. 황색저고리에는 금박이나 수를 놓아 다소 화려하게 하기도 하지만 흑색치마가 무계 감을 줌으로써 잔재주를 부리는 동작이나 어깨춤이 있는 동작처럼 기교를 부리는 동작에서도 애교가 있어 보이기는 하나 절대 가벼워 보이지는 않고 넘치지 않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민속무용은 일반 서민이나 대중과 왕후, 귀족 등이 있는 계층화된 사회에 있어서 그 민족의 시층 사회에 있어서 그 민족의 기층사회에서 전승된 무용을 말한다. 기층사회의 전승자는 서민이나 대중이며, 이사회의 문화는 유형적, 일상적, 반복적으로 전승이 강한 문화이다. 즉, 민속무용이란 직업적으로 무용가나 특정의 작가나 안무가에 의해 만들어진 춤이 아니라 그 민족의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 무용으로써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춤이 아닌 상당히 오렌 기간동안 전승된 무용을 말하며 남에게 보이기 위한 춤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가 즐기는 춤이다.

민속무용은 민중의생활 체험에 기반을 두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그 표현방식에 있어서 궁중무용에서 볼 수 없는 고정된 형태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짓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개인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현란한 의상이나 무대장치 없이 세련된 동작만으로 평민계급의 소박한 생활감정을 춤으로 표현한다.

박경랑류 영남 교방무는 민속무용의 성격을 많이 표현하려 한다. 보통 전통무용처럼 춤만 행하여지는 형식을 벗어나 극적인 구성을 만들고 등장인물에 각각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함으로써 춤추는 공연자와 예를 들어 반주를 하는 악사들도 같은 이야기의 인물들로 묶어 보는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를 유발하게 한다. 등장인물이 반주를 하는 악사 단 1인 일 때도 있고 여러 등장인물이 있을 때는 수 십 명이 있을 때도 있다.

반주자와 춤추는 공연자만 있을 때는 때로는 춤만 추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반주자에게도 약간의 대사 없는 연기를 행하게 하여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이때 악사는 오랜만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온 선비이고 춤추는 공연자는 오랫동안 기다린 님을 반기는 여인이 되어 춤을 춰 나간다. 이럴 때는 보통 입어지는 흑색 치마에 황색 저고리는 입지 않고 그 어느 색보다 화려한 색을 선택하여 보고 싶은 님을 맞이하는 여인의 설레는 마음과 사랑의 열정을 표현한다.

이런 경우에는 선명한 보라색과 미색저고리를 입기도 하고 옛날 시집가기 전에 쳐녀들이 가장 많이 입었던 홍색치마에 연두저고리같이 아주 선명한 색 그 외에도 다양하게 화려한 장신구나 머리 모양의 변형을 하기도 하여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데 다양성을 준다.

그리고 교방 무 에서는 잘 선택하지 않는 흰색저고리와 치마를 입을 때도 있다. 처음 등장할 때 는 살풀이의상처럼 아주 깨끗하고 전갈한 이미지이기 때문에 보통의 교방무보다 더 차분한 춤이 행하여 질것 같은 느낌을 먼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흰 치마와 저고리는 춤이 행하여 지는 동안 변화 무쌍하게 변화를 한다.

이때에도 극적인 요소가 사용되어 지는데 무대의 상황은 잔치가 벌어 지고 있는 연희장면이며 한쪽에서는 걸쭉한 술판이 벌어지고 또 한쪽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화선지에 시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방무가 행하여 지는데 부채또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부채를 들고 춘다.

초반부는 똑같이 진행하다가 자연스럽게 붓을 들고 있는 선비에게로 가서 살포시 앉아 팔을 내밀어 저고리 배래에 글 한줄 써 줄 것을 요청한다. 선비는 아주 흥쾌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흰 저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이 다 써지면 글이 쓰여진 부분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관객에 대한 하나의 이벤트를 선사한다. 그렇게 되면 흰 저고리는 글씨가 쓰여 진 다른 옷으로 변화를 한다. 같은 방법으로 치마에 또는 속치마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흰 부채에 글씨를 쓰기도 한다.

이 같은 방법은 극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의상에 변화를 줌으로써 의상을 활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즉흥적인 변화를 줌으로써 관객과의 소통거리를 더 좁히는 하나의 매계체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즉흥이란 어느 자극에 대하여 복잡한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신체활동은 통하여 표현하는 것이며 순간적인 창작으로써 표현형식이 불완전해도 새롭게 만들어 내는데 가치가 있다.)

 

그리고 소품이 사용되는 경우에서도 단지 춤을 추기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도 하지만 관객에게 더 가까이 접근하여 춤판으로 끌어 들이는 흥을 돋구어 내는 즉흥적인 요소 또한 가질수 있게 한다.(여러 이미지와 소품들도 즉흥무를 경험하는데 적합하게 사용 될 수 있다)대표적인 예로는 탈춤이나 농악, 북춤이 있다. 살풀이나 승무 같은 경우도 마당에서 자주 행하여 지던 때에는 즉흥무가 많이 행하여 졌지만 무대공연으로 많이 공연되어 지면서부터 즉흥적인 부분이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영남교방무의 소품은 부채이다. 굿 거리 장단에는 부채가 사용되어지지 않고 자진모리장단으로 변할 때 부터 부채가 사용되어 지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부터는 춤의 동작도 빨라지고 동작선이 더더욱 커진다. 이렇게 흥이 점점 더 고조 되어 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지면 관객가까이로 다가와서 부채를 내밀고 잠깐의 무언의 대화가 오간다. 그리고 어깨춤이나 잔재주를 부리면서 흥을 돋운다. 이때 부채는 소품으로써의 역할 보다 더 큰 영역을 넘나들어 관객과 춤추는 공연자를 합일 시키며 무대와 객석으로 분리되었던 공간을 같은 흥을 가진 하나의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그 공간은 더 이상 무대가 아닌 원래 우리의 문화인 마당의 문화로 공간이 재 창조 되어 진다.(마당은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일을 제 각각 분리 시키는 분업적 관점을 파기하며 나아가서는 하나의 총체로 결속 시킨다)

영남교방무의복식에서 특징적인 디자인이 있다면 고름이다. 보통 가슴앞에서 매어지는 고름과는

영남교방무의 다르게 가슴을 띠 띠우듯 두르고 남겨진 띠로 고름을 매는데 새로 방향으로 맨다. 그리고 저고리의 풀어서 벗으려면 안쪽에 한번 더 매어져 있는 작은 고름을 풀어야 벗을수 있다.

가로로 매어지는 고름에 비해 세로로 매어지는 고름은 야무지게 매어진다.

이것은 정조를 지키려는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복식에서는 치마를 더 풍성하게 보이기 위해서 팻치를 입는 경우가 흔하다.

하지만 영남 교방무 복식에서는 패치를 입지 않고 속치마와 속바지만 입는다. 하지만 다른 속치마처럼 흰색이나 단색이 아니고 꽃수가 들어 가거나 화려한 무늬가 들어 가기도 하는데 치마의 풍성함 때문에 가려지는 발디딤이나 하체동작들을 드러내기 위함도 있다. 살짝 살짝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는 하체 동작들이 아니기 때문에 춤을 추는 사람은 자신있게 내 보여 줄수 있을만큼의 실력을 갖추어야 하는 책임이 따르게 된다.

교방무의 가장후반부에는 빠르게 돌아 가는 동작을 하는데 이때 속치마의 역할이 나타나게 된다. 이때는 두가지 색의 치마가 마치 두가지 색을 가진 하나의 치마가 돌아가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해서 마치 두가지 의상을 본것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고 가장 상승되는 분위기를 더 상승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교방청춤의 의상은 대개 검정치마나 노란 저고리이다. 일반적으로 검정은 오행 중 수이다. “흑색은 방위로는 북쪽, 계절로는 겨울에 속한다. 오행 중 수(水)로서,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고 스며들기를 좋아하는 물과 같이 음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검정 치마는 이러한 물의 성질처럼 무용수의 마음이 관객의 마음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공감을 의미한다. 노란색은 감정을 자극하는 화려한 색이다. “일반적으로 황색은 환하고 자극성 있는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자유스럽고 개방된 감정과 상응하며, 적극적인 감정으로부터 변화되어 가는 자유로운 관계를 찾는 색이다.“ 노란 저고리는 관객의 내면에 에 숨어있는 감흥을 흔들어 끄집어 내는 활동성을 의미한다.

 

교방무에서 선명한 보라색이 자주 사용된다. 보라색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보라색은 고급스러움, 비정상적인 등의 이중적 의미가 강하며,...“ 기생은 매우 고급스러우면서도 일반적인 가정생활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므로, 교방무의 보라색은 고상함과 비정상성이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교방무에게 가끔씩 흰색 저고리와 치마가 사용된다. 흰색은 일반적으로 순결이다. “흰색은 순결, 청렴 등을 상징하며 우리 민족의 심성과 기질에 부합되어 한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교방무의 백색은 여자의 순결과 정조를 의미한다.

 

 

 

(2)영남교방청춤의 복식의 변천

 

①초기 : 교방무의상의 초기 복식은 기본적으로 검정치마에 노란저고리의 배색을 사용한다.

 

● 저고리 : 기본형태는 일반적인 복식과 비슷하나 다른 특징이 있다면 길이가 조금 짧은 편이어서 가슴아래까지 다 덮이지 않고 거의 반만 덮여지는 높이이다. 그리고 저고리 배래선이 넓지 않고 좁다. 저고리 동정을 중심으로 어깨 부분에 자주색으로 천이 덧 대어져 있어 색이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고름도 일반적으로 매는 형식이 아닌 가슴부분을 가로로 띠 띠우듯하고 남겨진 띠로 가로 고름을 매지 않고 세로 고름을 맨다.

● 치마 : 저고리의 길이가 짧은 편이기 때문에 가슴부위는 하얀색 굵은 띠처럼 단단하게 되어있고 그 아래부터 치마의 주름이 만들어져 나간다.

속치마는 흰색속치마를 입는데 다른 속 치마와는 다르게 광택이 나는 소재를 사용한다. 속바지는 기본 속바지 위에 통이 넓고 아래부분이 사각모양인 통속바지를 입는다.

 

② 중기 : 중기의 복식은 색의 다양성으로 변화를 주었다.

 

● 저고리 : 초기의저고리는 전체적인 노란색에 어깨부분에는 자주색,그리고 가슴띠 부분의 자주색이 전부였다. 중기에 와서는 동정돌레로 녹두색을 덫 대기도 하고 다양하게 대비대는 색을 사용한다. 그리고 어깨부분에는 꽃자수를 놓아서 더 여성스러운 느낌을 강조하기도 한다.

● 치마 : 치마의 색이나 다지인의 변화는 없지만 초기의 치마는 저고리의 길이에 맞춰 가슴부위 흰색천의 길이도 정해져있어 팔을 올리지 않으면 보여지지 않았다. 중기에 와서는 흰색천의길이가 조금더 길어져 저고리 아래로 조금 보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상체를 더 길고 가늘게 보여지는 효과가 있다.

●속치마,: 중기때부는 속치마의 변화가 가장 큰 변화를 하고 있었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민무늬 치마에서 아주 큼직한 꽃수가 전체 둘레로 놓아지기도 하고 먹으로 그린 그림이나 글씨가 쓰여지기도 하면서 단순한 속옷의 역활에서 겉치마 못지 않은 의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③ 후기 : 후기의 복식은 저고리가 화려해지고 치마와 속치마에도 변화를 준다.

 

●저고리: 후기에 와서는 저고리가 매우 화려해진다. 기본적인 노란색도 다양한 채도를 이용하여 밝은 개나리색을 쓰기도 하고 장중한 황금색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금박이나 은박을 찍어 빛을 주기도 하고 어깨쪽에 놓는 수는 물론이고 배래에 큰 꽃수를 놓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소매도 점점 넓어지고 한색이 아닌 여러색을 단계적으로 덫덴다. 이처럼 후기의 저고리는 오히려 다른 복식의 저고리보다 더 화려해졌다.

●치마 : 후기에 와서는 치마가 단순한 검정치마일때도 있지만 속 치마가 비치는 무늬의 검정 치마를 입는 경우가 많아졌다. 어떤 속치마를 입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 변화의 효과도 있고 더 여성스러워 보이는 효과도 가지게 되었다.

●속치마 : 후기에 와서의 속치마는 흰색에서 여러 색으로 변화가 시작되었다.

노란저고리와 배색이 어울리는 녹두색 속치마를 받쳐 입기도 하고 입는 사람의 이미지에 따라 어울리는 다양한색을 선택한다. 속치마의색이 드러나는 겉치마를 입음으로써 속치마를 입었다기 보다는 치마를 두 개 입은 것 같은 효과를 준다.

 

(3) 영남교방청춤의 복식과 소품

 

1.6. Ⅲ. 영남 교방청춤이 지향하는 복식의미

 

영남 교방청춤의 복식은 색의 의미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먼저 흘러 들어 가고 다시 함께 흘러 나오는 분리가 아닌 교감과 합일이다.

그저 관객에게 예쁘게만 보이려는 자신의 치장을 넘어서는 교방의 복식은 관객을 위한 복식 그 이상의 의미도 될수 있다.

숙련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 예쁜 한복의 디자인을 과감히 포기 하기도 하고, 관객을 위한 볼 꺼리를 제공하기 위해 단 한번밖에 입을수 없는 일회성 의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영남 교방 춤의 복식은 관객과의 소통과 교감을 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로 역할을 지향한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목적으로 춤을 추는 자가 춤을 추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춤추는 자의 목적은 그 이상이 없을 듯 하다.

 

 

 

 

 

 

 

 

 

 

 

 

 

참 고 문 헌

 

1) 출처;다음까페 한복 스튜디오 <한복의변천사,한국의전통무용복식>

 

2) 임성수 2004 승무의 동작선을 이용한 한국 민속 무용 극장계획

 

3) 이화진 20005 살풀이 춤에 내제된 음향오행 사상에 관한 연구

 

임성수 2004 승무의 동작선을 이용한 한국 민속 무용 극장계획

 

채희완,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길사, p.34

 

조성환 1990 민속무용 정의와 기능을 중심으로

 

남윤경 2001 피나바우쉬 작품에 나타난 즉흥성 연구

 

남윤경 2001 피나바우쉬 작품에 나타난 즉흥성 연구

 

김채현 1989 춤과 삶의 문화 서울: 민음사

 

황경숙,윤미정 2011 한국무용에 내제된 색채의 의미

 

황경숙,윤미정 2011 한국무용에 내제된 색채의 의미

 

한귀자 2011 보라색의 고급스러운 연상에 관한 연구

 

 

 

The Costume of Park Gyeongrang Yeongnam-Gyobang Dance

 

Cho mi nah

 

Depending on the social status and venue of choreography, traditional Korean dances are categorized into court dance and folk dance. The folk dance originated from ordinary folks' life experiences and is hence native-born in origin. As such, in terms of its method of expression, the folk dance features free body movements that are usually absent in more formalistic court dance. Also, the folk dance conveys the ingenuous life emotions of the common folks through refined moves without the aid of flowery costumes or stage apparatus.

The folk dance includes Seung-mu, Salpuri-chum, Nongakmu, Sogo-chum, and Jango-chum.

 

The costume of Gyobang dance lacks any fixed design unlike religious ritual based dances such as Sungmu or Salpuli. The fan is staged and changes from time to time to match the overall costume. The costume itself also changes from season to season, but typically features a black skirt and a yellow top, as well as knots and other design patterns as distinguishing features from other Gyobang dances.

 

On occasions, the females dancer wears an undergarment with calligraphy or drawings thereon. This practice is effective in creating a dramatic ambience and reenacts the ancient custom that while entertaining with confucian scholars by means of poems, paintings, songs, dances, etc, the scholars sometimes drew a painting on the surface of the dancer's skirt or fan, and the dancer danced with such decorated skirt or fan afterwards as a symbol of affection.

 

The fan represents the six Chinese characters of 黃, 龍, 飛, 白, 鶴, 舞, and denotes a flying yellow dragon and a dancing white crane or the crane dancing like the force of the dragon. If one examines the image and bodily movements of Kyobang dance, one can see that, unlike the traditional dance, it feature breezy movements and seamless intertwining of both masculine and feminine moves.

 

Color and design-wise, the dancer usually puts on a black skirt with a yellow top. In terms of certain signature features of design, the top is relatively short, and the knot is tied as if tying around the chest with the remaining finished off as a vertical knot. The skirt is single layered without any patch, and the undergarment is one-piece.

 

The dancer hence puts on a masculine black skit and the feminine yellow top. The single layered skirt makes lower body moves more readily visible, and the undergarment is externalized to enable swifty circular moves. The one-piece undergarment shows courtesy.

 

Also, if ones probes into hidden meanings behind each color, the black skirt represents water-like consensus through which the mind of the dancer flows out unto and captures the mind of the audience. And the yellow top symbolizes energy with which the dancer can arouse and instill a sense of inspiration among the audience.

 

In its early phase, the Kyobang dance costume featured the black skirt with yellow coloring. In the intermediate phase, the color around shoulder areas diversified gradually, and the undergarment increasingly played a role of outer skirt due to its color and design patterns. In its advanced phase, the top became more colorful which in turn had an impact on the skirt and undergarment alike.

   

The Kyobang dance costume is not a mere extraneous accessory, but serves as a medium for mutual interaction with the audience. Its functional integrity certainly enables the dancer to cre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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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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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의 변천사

연구논문 2012. 8. 1. 13:57


교방의 변천사

김 예 진

국문초록

교방(敎坊)의 전신(前身)을 찾는데 있어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용수의 역할을 짐작해보면, 삼국시대이전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는 직업적인 무용수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교방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이었던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이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통의 단절을 꿰하던 일제강점기의 매서움도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에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에 속한 교방,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같은 음악기관에 예속된 교방사 등의 역사적 흔적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전통문화예술의 교육과 전승, 전파에 오랜 세월 그 소임을 다해 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교방, 권번

1)

목 차

Ⅰ. 서론

Ⅳ. 근대, 현대 교방(敎坊)의 변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2. 연구 방법

2. 현대 교방의 흔적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Ⅴ. 결론

1. 삼국시대

 

2. 발해시대

참고문헌

 

Abstract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가.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모든 한국춤의 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천해 온 교방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춤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춤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생춤이라며 천시하는 인식의 과오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일부 안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기생의 기예(技藝)를 예술의 주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전면에 보여지는 남성들의 유희적 놀음으로만 기생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평가와 가치는 훗날 파생되는 역사의 줄기와 뻗어나간 가지의 역할로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궤 안에서 응당한 사적(史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지난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나간 시간들의 과오의 인식이 덮혀지고 그 틀이 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은 그저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 켜켜히 묵혀낸 곰삭은 절대시간을 넉넉히 품은 탄력성을 지닌 문화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탄력성이 존재하는 ‘교방’은 그 시작점에서 오늘날까지 품고 온 전통의 낱알들이 이뤄낸 풍부한 역사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은 온전한 사적(史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있었고, 이러한 ‘교방’을 향해 왜곡의 거플을 벗겨내고 그릇된 인식을 거둬내 간과된 사고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 우리 예술계에서 시작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전통춤의 모태와 전신이며, 현재 전통춤계의 골(骨)과 근(筋)을 형성하는 역할은 수 천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교방(敎坊)이 이루어내었다.

교방이 존재할 당시의 예술을 장려하고 관장(管掌)한 나라의 관심도와 영향력을 추산해보면, 오늘날 현 정부가 풀어내는 예술정책에 비해 앞설 뿐 아니라, 그 비중 면에 있어서도 크다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전하는 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새것을 익힌다는 뜻처럼 교방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 선조들의 뜻과 밝은 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전통예술을 향한 과거로부터의 진귀함을 터득해낼 것이다.

본 연구는 교방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과정과 시대별 변천과정을 통해 현 시점에서 취해야할 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고찰이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사적고찰이 갖는 방법으로 사료(史料)분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3)

교방의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교방의 변천과정을 다룬 선행연구 및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1) 1. 삼국시대

고구려시대 무용총(舞踊塚) 벽화 속에서 장삼자락처럼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은 고구려시대에도 무녀, 즉 직업적인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 긴 소매의 옷차림은 중국 중원 한족의 춤 복장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춤 예술이 서로 교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의 회랑에 나타난 군주행렬도(君主行列圖)에서의 검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분 묘실 남벽에서의 군무의 한 장면에서 고구려시대 무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설치된 음성서(音聲署)에는 무척(舞尺), 가척(歌尺), 금척(琴尺) 등의 전문적인 예인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무척(舞尺)은 춤 잡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기녀의 존재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악·가·무가 어울어진 종합예술이 분야별로 세분화, 전문화되어 국가에서 관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관제가 정비되어진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던 삼국시대에는 벌써,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서의 효용성과 유용성으로 나라의 통치자들은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전문화된 예술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출현이 갖는 사적 의미만으로도 이미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예술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2. 발해시대

발해시대는 교방(敎坊)이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시기에 국가의 악과 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사(太常寺)가 있었으며, 이때 무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교방의 역할을 담당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재현, 2007).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역사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 한 후,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서게 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고구려의 시대를 따르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고자 노력한 흔적이 존재한 나라라고 평가되어진다. 그러한 자주성과 주체성이 예술을 향한 노력과 관심으로 이어져 신라와 같은 왕립음악기관을 설립하고 장려하는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전통적인 무교의식과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더불어 음악에서도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관기들에 의해 연등회에서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가 추어 졌다고 전해진다(박지은, 2006).

관기(官妓)들의 역할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중궁정재가 활발히 유입되어가면서 커져갔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로는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오양선, 연화대무, 곡파로 무보가 고려사(高麗史)와 악지(樂志)에 전하며 향발무와 학무가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기녀들은 천민 출신의 무당과 관청의 기녀와 관비로 당시 여악 담당기관인 교방(敎坊)에서 기예를 익혔으며 교방은 교방기(敎坊妓)와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는데 교방기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官妓) 중 색과 예가 가장 뛰어난 자로 가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교방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가무를 익혔다.

또한 지방기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열릴 시에는 교방기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문 기녀양성기관인 교방이 설치됨에 따라 기녀들은 한층 격식 있는 가·무·악(歌·舞·樂)을 정립하였다.

고려시대 안정된 정치로 인하여 궁중연희가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기녀들은 왕의 풍류를 돕거나 외교 사신들의 접대연에서 연희를 하였다. 연희의 형태는 점차 사치스러워져 사대부의 개인 연희시에도 기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기(地方妓)나 사기(私妓)에 의해서 사대부의 집안의 행사나 서민잔치 마당에 가무악을 공연함으로서 사대부 개인의 문화적 특성과 서민의 취향에 따른 다른 형태의 가·무·악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고려시대의 교방은 대중화되는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들을 위한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대비나 중궁전 또는 내명부 등의 여자들을 위한 잔치인 내연(內宴)으로 잔치가 구분되는데 이러한 잔치의 공연활동을 담당하던 왕립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진연청(進宴廳), 진찬소(進饌所), 풍정도감(豊呈都監) 같은 임시 관청에서 궁중잔치를 위한 행정적인 임무를 담당 했다(고재현, 2007).

공연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임금의 거동과 같은 의식 절차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공연과 잔치에서 반주음악과 함께 기녀들의 춤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정재 춤을 추기위해 기녀들은 창사(唱詞)와 춤사위 또는 구호를 장악원의 악사들로부터 지도 받았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교방의 체제나 제도를 거의 이어 받았으며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악무제도가 조선 초기부터 발달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녀들의 궁중연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의 기녀들이 올라와 공연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궁중에서 연행되는 정재공연을 지방의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중계자 역할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던 춤을 정재라고 칭하고 정재 무동과 정재 기녀로 무희를 구분 하여, 외연에서는 무동만을 내연에서는 기녀만을 구분하여 출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생차비(妓生差備)라는 일종의 교사로부터 궁중정재 뿐 아니라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지도 받으면서 교육이 보다 구체화 되었으며 학과 과목명이 제시되었고, 춤사위별로 전공자가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관기(官妓)를 경기(競妓)와 지방기(地方妓) 또는 외방기(外方妓)로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경기에는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의녀와 공조와 상의원의 침선비까지 포함된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들어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렸음으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똑똑한 관비를 선발하여 제생원에 소속시켜 글과 의술을 지도하였고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자들만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 궁중의 연희에도 참석 시켰다.

외방에서 여기가 올라오게 하면 폐단을 끼침이 많음으로 검소히 하기 위해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 하도록 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는 장악원(掌樂院)에서 여기들이 가·무·악(歌·舞·樂)을 연마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녀와 침선비가 평소에는 의술과 바느질을 연마하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가무에 참여했다.

순조 때에는 정재가 정리되어 정재의 종류가 5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에 달하였고 순조28년(1828)에는 외연(外宴)과 내연(內宴) 모두에서 무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한 순조29년(1829)에는 순조 즉위 30년을 맞는 진연에서 가인전목단을 비롯하여 보상무,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등 김창하에 의해서 다양한 정재 안무를 창작하였고 효명세자에 의해 창사를 지어 정재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절정을 맞은 정재의 활동은 궁중의 대소 연희와 나라의 행사에서 여기들에 의해 연희 되어졌다. 효명세자 때 융성한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이던 궁중정재는 훗날, 연희의 장소 및 연희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민중들에게도 선보이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현대에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이어지게 된다.

교방에서 여령(女伶), 여기(女妓)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던 여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의 유형에는 소속에 의한 분류로 관기(官妓: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 (家妓: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자유로운 여기)로 구분된다.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지방관에 적 (籍)을 둔 여기)로 나뉘게 된다.

또,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 기), 색기(色妓: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가 있으며,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 牌: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 이패(二牌:일패에서 타락 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 다.)로 나뉜다(김지은, 2007).

고려시대의 ‘교방’기구의 설치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교방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역에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성기숙, 2005).

라.

마. Ⅳ. 근대와 현대의 교방(敎坊)의 변천

1)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904년 신분제 철폐로 관기들은 신분이 자유로워졌지만 실질적인 관기의 해체는 1908년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관기들이 경시청 관할로 옮기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손유주, 2006).

1907년 12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과 1908년 5월 28일 횡성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서양식 극장무대 위에서 기생들이 공연한 춤 종목인 승무와 한량무를 볼 수 있으며, 이춤은 무극(舞劇) 형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말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는 상관없이 자주 거행되는 진연으로 서울로 뽑혀온 기생들이 증가하게 되며, 진연을 마친 기생들이 서울에 계속 머물러 기생 수는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그들을 관리할 ‘기생 단속령’이 1908년 9월 25일에 내려지게 된다. 기생 단속령 내용으로는 “기생이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를 하고 인가증을 받아야하며 그만둘 시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한다”. 등의 기생의 활동을 단속, 통제하고 경시청의 명령권 안에 넣고자 만든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직된 기녀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한성기생조합’이라는 기생 조합이 생겼으며, 그들은 국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에 절과 고아원 등의 연주회에 공연을 하는 등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이설희, 2009).

또한, 유부기조합(有夫妓組合)인 한성기생조합에 대항하여 다동기생조합을 정악원 학감(正樂院 學監) 하규일이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으로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생조합의 춤 교육은 장악원의 전임자, 민속춤 전문인, 은퇴한 노기, 선배기생 들이 관계하였다(김윤주, 2002).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기생의 활동은 경찰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일본 기생의 활동방식이 조선의 기생에게 스며들면서 기생들의 예술 활동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외래문화의 수입으로 권번 이전의 교방의 흔적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변신을 이룩해 낸 시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발판은 바로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1905년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자 1908년 여악에 소속됐던 관기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방황하던 기생들은 일본 경시청을 통해 하달된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는 조직에 묶여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은 1909년 경시청에 의한 ‘창기 조합조건 명령건’이라는 기생 단속령의 시행과정에서 생겨났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에서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전화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하규일의 수제자로 당시 명기(名妓)로 알려졌던 평양출신 이난향이 서울 입성과 기생 입적 경로 미 활동 내력을 회고한 글에서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였다.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때였다.”라고 1970년 12월 25일 중앙일보에 기재된 내용이 전해진다(성기숙, 2005).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던 권번은 서울의 경우, 한성권번・대정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 등이 있었고 대금・금천・동래・창원・광주・수원・평양・진남포・개성・안성・연기 등에 권번 또는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은 대부분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바로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전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이 존재했다. 평양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권번이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지역이다. 진주는 한말 정현석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생들에 의한 다양한 유형의 춤이 전승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진주교방 역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후에 생겨난 것이 진주권번이다(성기숙, 2005).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예술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 등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던 분들이 대부분 동래권번 출신이거나, 마지막에 동래권번에 모여든 예인들이었다고 한다.

2)

3) 2. 현대 교방(敎坊)의 흔적

교방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 발해의 태상사를 만나게 된다. 국가의 통치이념과 운영에 있어 예술의 가치와 유용성의 통찰이 삼국시대에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왕립으로 음악전문기관인 음성서(音聲署)와 태상사(太常寺)가 설립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처음 교방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은 음악과 춤의 전승기관으로 건재했었다. 역사의 급격한 변화와 나라의 기운이 모든 것을 뒤바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명칭이 옮겨 가지전까지 교방은 오랜 시간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전폭적으로 책임지던 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번으로 모든 기능과 존립이유가 변환의 시기를 겪은 후, 권번은 영롱한 전통문화예술의 단절의 기로에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필요의 역사가 되어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잃기 쉬었던 우리전통예능의 교육의 산실 역할을 권번은 잃어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주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교방의 관기들이 대부분 권번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통은 끊겨졌을 것이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연희를 목적으로 예능인을 양성하던 교방의 흔적은 단연 국립국악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에서 교방은 현대의 현재적 모습인 국립국악원으로 1951년 설립되어졌다. 국립국악원은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진흥과 발전에 있어 다양한 노력과 시도로 국가의 대표적 ‘흥’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다.

교방의 역사를 짊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능의 교육으로, 연희기관으로 그 소명을 다했던 권번은 장악원이 해체 된 후, 이왕직 아악부, 구왕궁 아악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에 있어서 가교적인 숨은 역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사라져버린 교방의 기능을 다했던 권번이 있었기에 훗날 자리하게 된 국립국악원이 예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온전한 형태미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정악과 민속악을 전승하여 보존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설립된 이 기관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송방송, 2006).

바.

사.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사에 춤의 비중에서 전통춤 영역에 존재하는 교방, 권번, 기생들의 역할이 빚어낸 공로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교방의 역사와 변천사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각 시대별 교방의 존재와 역사, 기능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교방의 시작점은 한반도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고 나라의 기운이 뿌리를 내리던 삼국시대로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먼저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왕명으로 존재했으며 발해에는 태상사(太常寺)가 신라처럼 왕립음악기관으로 기록되어져있었다.

둘째, 정확한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궁중정재의 활동상을 다 소화해낸 교방은 교육과 연희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해낸 곳이다. 궁내의 모든 대소연희에 활약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교육이 결국엔 예술성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말, 열강들의 어지러운 문호개방과 정치적 혼탁 속에 예술의 목적과 가치가 국가차원에서는 희석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예술성의 애환은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순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넷째,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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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영. 2009.「권번여기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The Evolutions of Gyobang

 

Ye-jin Kim (completed Ph.D. course work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In searching the predecessor of Gyobang, the Muyongchong murals of Goguryeo from the Three Kingdoms era suggest that dancers were involved with the various affairs of the state even before the Three Kingdoms era. The historic origin of the name Gyobang can be traced to Daeahkseo, which w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Goryea era, and the musicians of Kwanhyeonbang. The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music and dance while involving with the court dance. The name of Gyonbang changed from Gyogang to Gyobangsa, Gyobangi and some other name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era. Meanwhile, however, there was no material change in the overall substance and function of Gyobang over the centuries.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or geisha system in 1907, scattered gisaeng constituents got together and formed 'Kweonbeon'. Kweonbeon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preserving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especial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s suc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needs to be assessed in a new light.

 

As the state-wide unions of gisaeng, Kweonbeon played a big part in withstanding the Japanese attempts at decimating traditional cultural norms and practic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in laying out the found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as we know and relish today.

 

Gyobang was a public entity in charge of music, dance, and songs, among other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ose who belonged to Gyobang were named Yeogi, Yegi, Yeoahk, and Yeoryong. In terms of affiliation, Gyobang can be classified into Kwangi, Sagi, and Gagi; in terms of region, Kyeonggi, and Jibanggi; in terms of function, Yegi and Sekgi; and, finally in terms of hierarchical level or class, Il-pae, E-pae, and Sam-pae.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system, Kweonbeon first started off as Joyang-gurakbu in 1909 and again as Chosun Jeongahkjeonsupso in 1911. Afterwards, Kweonbeon was operated as Dadong-johap in 1913 as a spin-off division of the Chosun Jeongahkjeonsupso. Kweonbeon continued to grow as Kwangyo-johap, and, in 1914, the era of Kweonbeon took off through Chosun Kweonbeon, Hanseong Kweonbeon and other entities. Numberous Kweonbeon existed in Seoul and other provinces, and, until recently, Dongrae Kweonbeon had produced sizable traditional artists.

 

In conclusion, Gyobang served as a public purveyor of traditional cultural practices and values for centuries, and then laid out the foundational roots for the function and roles of Kweonbeon following the end of the state gisaeng system.

 

As can be seen from pertinent historical traces, Gyobang is an institution par excellence for training, disseminating, and passing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for ages lon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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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임 지 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전통춤의 구조적, 형태적 미적고찰은 나아가 전통춤 전반의 철학적 구조 연구에 초석과 반석 및 발전의 한 영역이 되리라 사료된다.

영남교방청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의 내재와 함께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문화예술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으로 추어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현재적 시점에서 가까운 조선후기에 집중하여 교방춤의 발생요인을 살펴보면서 영남교방청춤이 가지는 춤사위의 특질과 형태적 측면에서 보여진 미적 특질을 고찰해 보았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의식적 환기를 일으키며 연구되어 지고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변혁에 상응하는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미비하고 춤의 기록 또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본 연구자는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작게나마 부분적인 분석과 춤의 미적분석 연구를 통하여 근원적 미의식을 발견하고자 한다. 또, 이를 살펴봄으로써 전통춤의 미의식 영역을 명확히 파악하여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이 영남지방의 지역성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하듯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어 움직임적인 특징도 춤 속에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외에도 음악과의 혼연일체, 다양하고 풍부한 동작소의 존재감,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 작품의 무대 과학화,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 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신체의 사용법에서 기존의 전통춤이 표현해내고 고수해내는 신체운용법을 확연히 뛰어넘는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교방문화의 시작점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으면서도 면면히 잘 고수해 온 영남교방청춤만의 전승의 세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핵심어 : 영남교방청춤, 교방청,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2. 연구방법 및 제한점

2. 영남교방청춤의 외면적 특징

Ⅱ. 교방청춤의 개념

3.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적 특징

1. 조선조 후기 교방춤 발생요인

Ⅳ. 결론

2. 교방청춤의 배경

참고문헌

3. 교방청춤의 변화양상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춤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그 내면에는 시대가 풀어내는 역사와 지배원리에 따른 사상적 영향, 그리고 수적으로 우월한 민중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춤의 구조 속에서 보여 지는 특성은 민족의 정서와 시대적 배경이 바탕을 이룬다.

우리민족의 특성으로 자주 등장하는 ‘한(恨)’은 한으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한을 풀어내는 과정을 통하여 소극적인 정서와 적극적인 정서가 공존하는 상충적이고도 호환되는 이중구조로 성립되어있다. 소극적인 정서는 맺히고, 삭히고, 움켜 안는 등의 정지된 상태로 본다면 적극적인 정서는 포용하고 풀어내고 떨쳐내는 긍정적인 자세로 움직임이 많으며 적극적인 힘을 표출시켜 예술적으로 충분한 승화를 이루어 숭고의 미로 완결되어진다. 이는 춤이 단순한 행동들의 영속적 나열을 상위하며 동작과 행위에서 표출되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표출하고자 의도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내면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방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을 내재하고 무엇보다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운파 박경랑에 의해 승화되고 있다.

교방춤은 한국 민속무용 가운데서도 기방춤의 대표작으로 우리춤의 멋과 태,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춤으로서 춤 안에는 우리 민족의 한의 속성뿐 아니라 흥이나 신명과 같이 상반된 의미가 같은 선상에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의미의 한과 신명이 어떻게 같은 춤 안에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본 연구는 한국민속춤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표명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방법으로서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는 한국민속춤의 지향하는 바를 표명함에 있어서, 현재 전통춤계의 밀도있는 춤으로 호평받는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과 점진적 해석으로 한국민속춤의 본질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근래 들어 널리 알려지며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어 지고 있기는 하나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나아가 우리 민족문화의 특성을 재점검, 정비할 시대적 필요성에 기인하여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총체적 미적분석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전통춤의 지표로 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본 고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찰하여 보고 그 춤이 상징하는 미적특질이 내포하는 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에 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체험하여 학습하는 연구자로서 본 연구를 통하여 제대로 된 춤의 표현원리의 지각과 각각의 춤사위와 춤의 흐름이 지향하는 바를 파악하여 우리춤의 생명력, 역동성, 순박함 등의 형용할 수 없는 철학적 본질을 찾고자 하며, 이로 인해 영남교방청춤의 원형을 찾고, 원활한 전통춤 보급에도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1.2.2.

1.2.3. 2. 연구방법 및 한계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첫째,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학습하고, 춤의 상황을 기록 및 녹취하여 전체상을 파악한 뒤, 춤의 부분적 특징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영남교방청춤 전 과정의 이해도를 위해 ‘2009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白衣百舞)’ 공연영상을 보조자료로 삼았다. 또, 운파 박경랑선생과의 수차례 면접과 무대공연 및 수업참관, 평상시 관찰을 통하여 춤의 특징 및 세부사항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둘째, 주제와 관련 있는 참고서적 및 논문, 선행연구자료 등을 참고하였으며 관련문헌이 없는 경우에는 그 분야 전문가들과의 면담을 통해 수행하였다.

셋째, 영남교방청춤의 숙련된 춤꾼 및 학술적 연구자 3인 이상과의 지속적인 연구토론으로 삼중검증법을 택하여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의 치우침에 따른 연구의 오류 범주를 좁혀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점은 추후 지속적이고 저변화된 연구로 보완 해 나갈것으로 예견된다. 또한 이번 연구를 계기로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다양한 후속연구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1.3. Ⅱ. 교방청춤의 개념

 

1.3.1. 1. 조선조 후기 교방청춤 발생요인

교방기(敎坊妓)는 대부분 미(美)와 재예(才藝)를 겸비한 관청의 기생과 관비 또는 무당 등으로 된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예악의 담당기관이며 교습소였던 교방을 통하여 가무(歌舞)를 전문적으로 교습 받았다.

원래는 무녀는 신 그 자체였으나 신격과 정치권력의 분화과정에서 퇴화함으로써 신에 봉사한 무녀가 지방의 토호와 결부되어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녀가 되고 무악의 예능적인 면에서 익힌 예기로 권력층에 예악의 가척(歌尺), 무척(舞尺)으로 봉사하는 기녀가 되는 것이다.

기녀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 국한한 교방기(敎坊妓)가 표면적이지만 지방 관청에 속하는 기녀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지방의 큰 고을이나 감영, 주군에도 상당수의 관기가 배치되었다.

고종 때는 기녀들이 어느 시기에 못지않게 자주 진연정재를 베풀었고 출연한 기녀나 무동들은 행사가 끝나면 귀향하여 궁중에서 새로 익힌 가무를 동료들에게 전수시켰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궁중의 가무(歌舞)가 지방에서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창우 출신들의 무동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이 교방청에 들어가 선생이 되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된다. 이와 같이 창우 출신과 기녀들은 선비취향의 춤과 평민취향의 춤을 조화롭게 융합시켜서 근세 전통춤을 형성한 것이다.

조선후기 19세기부터는 넓은 광장이나 마당에서 추었던 것이 상업화 내지는 도시화됨에 따라 한층 공연예술로 급속히 변화하여 춤판이 옥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부잣집 대청마루를 무대화로 하는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춤으로서 자연히 뛰는 동작이 없어지고 정적 지향의 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소리광대의 판소리판에서도 추는 경우가 많아짐으로서 그 춤들이 판소리와도 상호관계가 있는 공연예술로서의 고전적 춤이 된 것이다.

교방청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였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산조, 삼현육각과 같은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교방청춤은 서민들의 심성과 양반들의 심성을 조화시켜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춤이라 할 수 있다.

1.3.2.

1.3.3. 2. 영남교방청춤의 배경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 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 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활달함과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춤의 성향을 지닌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방은 한마디로 전문예능인의 교육기관이자, 내·외의 연희에서 악(樂)·가(歌)·무(舞)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렇듯 교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예능기관이며 그곳에서 시대상을 반영한 악(樂)·가(歌)·무(舞)이 발전되었으며, 그 명맥을 오래도록 유지하였다고 하겠다. 나중에 권번과 기생조합으로 그 명칭과 기능이 다소 분리 발전되었지만, 예능을 관장하고, 예능을 교육하고, 예능을 향유하였던 기관이라는 점에는 상이점이 없다.

 

1.3.4. 3. 영남교방청춤의 변화양상

교방은 쉽게 말해서 정부관하소속이었기에 개성, 평양교방부터 남쪽으로 모두 소속관청이 있었다. 다만 시대적 영향으로 가장 오래 잔재해 있던 교방이 진주, 고성, 통영, 마산, 부산, 대구를 포함한 영남권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중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던 것이 부산 동래권번이었다. 그러기에 교방청에서 교육받은 관기들이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여러 곳으로 권번(기생조합, 예기조합)소속의 기방으로 전속되면서 이동이 많았을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 영향으로 영남권의 교방에서 추어오던 춤사위의 흐름이 엇비슷하거나 동일한 춤사위가 많으며 박경랑의 스승 또한 이곳저곳을 다니던 이름 높던 한량이었기에 총체적인 교방의 입춤 ‘영남교방청춤’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활발히 보급, 전수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그 인지도를 끊임없이 드넓히고 있다.

또, 영남교방청춤은 가계도의 명맥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정통성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초대문화재였던 故 김창후 선생이 박경랑의 외증조부이며,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에게로 이어지는 맥을 지금은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파 박경랑은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을 찾기 위해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 이었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동고동락하면서 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시키는 영남교방청춤에 대한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를 잇고 있다.

 

1.4. Ⅲ.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93년 제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대상, 1994년 제12회 개천 한국무용제 특장부문 대상,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을 비롯한 다수의 수상을 거쳐 제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무로서의 위치를 굳혔던 운파 박경랑은 타고난 춤꾼이며 현재 영남교방춤을 보급하고 있는 명무이다. 경남고성 출신으로 고성오광대 초대 문화재였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잇고 있는 춤꾼으로 4세에 춤에 입문해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 황무봉, 故 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에게서 전통춤과 발레 등을 사사한 운파 박경랑은 경남도립무용단, 창원시립무용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로 우리 춤의 연구·전수·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1.4.1.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영남교방청춤의 춤 특성을 보면 곡선이나 원형의 무대진행법을 사용하였으며 사방의 어느 방향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원형적인 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뒷모습을 보여주는 동작은 보통의 전통춤에서 나타나는 초연한 모습이나 담담함 또는 한을 승화시키는 미보다는 ‘뒷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관객을 의식하고 일면 교태스럽기까지하며, 또한 사대부의 귀족적인 취향과 멋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춤은 닫혀진 좁은 공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객의 시선을 의식한 듯 각 동작의 움직임이 짜임새 있게 명확해야 하며 많은 기교와 기술이 필요한 춤이다.

영남교방청춤은 다른 전통춤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단박에 휘어잡는 매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춤이다. 그 매력을 살펴보면 대체로 간략하게 다음의 몇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첫째, 음악과의 혼연일체이다. 보통 우리는 악(樂)·가(歌)·무(舞)라 칭한다. 악이 노래가, 춤이 서열화 된 것도 아니요, 어느 한 대복 처지거나 앞서거나 하지 않고 정삼각형의 도형을 이루는 것처럼, 악(樂)·가(歌)·무(舞)는 그렇게 다함께 어우러짐을 표출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이다. 한국전통춤의 특징을 말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분이 반복성이다. 이 뜻의 이면에는 다양한 춤태의 부재가 숨어 있다. 다른 춤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동작소, 춤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다양한 표현체의 개체수가 넉넉한 동작소의 저장고를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다른 전통춤보다도 음악의 한 장단 안에 존재하는 춤태가 현격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이다. 이 부분은 전통문화예술의 미래의 존재성과 생명력을 가늠하는 중요요소이다. 느림의 미학과 경쾌함의 적절한 충족, 이 둘의 완급조절이 현시점에서 전통문화예술이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볼 수 있겠다. 영남교방청춤은 느림으로 일관되지 않으며, 또한 빠름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영남의 지역적 맥과 교방청춤의 맥을 살리면서도 현대 대중들의 전통문화예술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을 해소시키는 변모를 적절히 배합하는 춤태를 감각적으로 지니고 있다.

넷째, 작품의 무대 과학화이다. 현대 예술은 서구의 무대예술인 프로시니엄의 무대를 기본형으로 하여 많은 무대장비의 첨단 과학화를 수용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춤이 되고자 노력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안방문화의 사방위 방향성을 고려하는 춤태에서 프로시니엄 무대로의 전환을 고려하는 춤태로의 다각적 변화를 이룬 춤이다. 프로시니엄 무대의 특성과 관객의 시선을 전적으로 고려하여 몸 방향과 팔 사용법에 사선의 선사용을 감각적으로 이루어냈으며, 시선의 사용 역시 맞물려가며 춤꾼의 신체활용도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영남의 활달함에 남성성과 섬세함의 여성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다섯째, 네 번째 항목의 세부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겠는데, 몸 사용법의 차별화이다.

 

1.4.2.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외형미

영남교방청춤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하며, 곡선과 직선의 조화, 여성미와 남성미를 표출하며 몸통 전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춤의 강·약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즉, 다른 교방춤과는 달리 활달하면서도 휘감아 들어가는 허리의 곡선, 어깨의 곡선미가 여성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춤이다. 또, 호흡은 소리의 호흡과 동일하게 하여야 한다.

판소리의 호흡법과 민요풍의 토속적인 호흡법이 병행되어 단전에서부터 공굴려 깊이 있게 끌어 올리면서 대삼소삼(大三小三)에서 다시 호흡의 세분법이 음악의 세분법과 일치하여야 움직이는 듯, 정지되는 듯 하는 이 춤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다.

시선은 어느 춤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춤은 반드시 시선을 던지면서 가며, 턱선과 어깨선이 거의 일치되면서 자연적으로 턱선이 낮게 드리워지고 다소곳한 느낌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렇게 할 때 몸의 동작선도 곡선미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영남교방청춤의 여러 특징 중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크게 상·하체의 움직임으로 구분하면서 의상이 주는 외형미를 주력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상체

① 상체의 손사위 : 활궁체 사위, ,, 훼치기 사위, 터벌림사위(일자로 뻗기형, 사선형), 휘몰이사위, 학체사위, 버들가지사위, 회뿌림사위 등이 상체 손사위의 위주이며

손동작들은 두 팔을 펼치며 크게 추어야하며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손목놀음 또한 이 춤의 주된 특징들이다.

② 어깨 사용법 : 신체역학 측면에서의 어깨는 팔과 몸통을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과 함께 팔의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부위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사선의 팔사용의 기본형을 어깨에서부터 다르게 사용한다. 어깨를 누르면서 가하는 롤링의 변화는 팔의 각도와 높이를 조절하게 된다. 이 점이 좀 더 시원한 상체의 표현, 활달함과 섬세함이 교차 표현되는 점이며, 안정감 있는 상체의 고저 변화를 이끌어 낸다.,

③ 시선과 턱과 어깨의 조합 : 영남교방청춤에서 시선과 턱과 어깨의 세 신체 부위는 동작 가운데 합일점을 보여주는 부분이 등장한다. 시선을 지향하는 춤태 가운데 시선과 턱과 어깨의 합일점을 보여주는 동작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소곳함과 세련미의 공존일 것이다. 춤의 향기를 담당하는 듯 한 이 세 신체부위의 합일은 고혹적인 매력을 내적발산하는 영남교방청춤의 일등공신과도 같은 부분이라고 본다.

④ 허리사용법의 다양화 : 다양한 춤사위의 급감과 함께 신체 부위의 사용법, 빈도의 급감이 허리사용법이다. 신체 중심의 정점인 허리사용법은 다른 춤에서는 이제는 보기 드문 신체 활용법이 되어버렸지만 영남교방청춤에서는 세밀하게 잘 나타나 있다. 활궁체사위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선의 방향성에 또 다른 매력을 첨가하는 신체 사용법이 허리사용법이라고 하겠다. 허리 양 옆의 굴곡 있는 선의 사용법이 쉬운 신체사용법은 아닌 것처럼 다양한 허리사용법의 백미는 고혹적 매력의 발산을 넘는 광풍매력의 발산이라고 칭할 만큼 관객에게 색다른 깊이가 있다.

몸을 사용하는 법에 있어서 교방청춤은 굉장한 유연함을 필요로 한다. 하체는 객석정면을 향하고 허리를 비틀어 상체는 감았던 손을 천천히 펴면서 태극을 그려내며 천천히 회전하는 동작을 비롯하여 모든 동작소에는 유연함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또, 유연함에 이어 자진모리의 빠른 장단에서는 흥과 신명이 어우러지는 동적인 동작을 연출하여 민첩한 기교 역시 요구되는 춤이다.

⑤ 손목사용 : 맺고 풀고 어르는 동작을 넘어 강·약의 완급조절이 손목과 손끝에서 나타나는데, 손목의 사용법에 각도가 부여됨으로 그 묘미가 살아난다. 역시 여느 춤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풀고 조이고의 자연스러움의 교차가 손목에서 나타난다.

2) 하체

① 하체움직임 : 교방이라는 의미와 함께 안방춤이였기 때문에 아주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춤의 묘미를 살리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앗아갈 수 있고 흥과 멋을 전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아주 미세한 버선발의 움직임과 섬세한 디딤과 작은 움직임을 주는 발디딤은 작은 동선을 이용하면서 크게 보이는 굴신법과 호흡법을 일치 시키는 순간 미묘한 동선의 차이가 나타나는 춤이다.

② 발목 사용범위 강화 : 일반적인 춤보다는 발목사용에 있어서 각도의 범위가 큰 편이다. 이러한 사용법은 급격한 신체의 높낮이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다. 물 흐르듯이 안정감 있게 변모하는 신체중심과 신체의 고저 변화는 각이 큰 발목의 사용법에서 찾을 수 있는 점이다.

③ 발바닥의 세분법 : 발은 다리의 자유로운 이동과 지지에 첫 단계와 같다. 이러한 첫 단계의 발에서 발바닥의 세분법은 춤의 중심을 좀 더 잘게(여러개) 쪼개어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이로 인해 춤의 안정성이 더 강화되고, 호흡 또한 세밀하게 표현 할 수 있게 되는 원천의 힘이다. 영남교방청춤에서 발바닥의 세분화된 표현법은 어찌 보면 다양한 동작소와 맞물려있기에, 다양성의 동작소, 춤사위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원천이라고 본다.

④ 발의 움직임 : 발사위에 있어서는 발을 들어 살짝 돌려 뒤로 딛는 동작을 비롯하여 디딜방아 사위, 좌·우 달걸음사위, 홍두깨걸음사위, 덧배김사위, 외발들기사위, 용트림사위(용이 물에서 몸을 휘감아 돌며 승천하는 느낌의 공회전하는 동작)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첫 박에 솟아올라 잔걸음으로 걸으면서 숨을 내려 앉혀 다시 첫 박에 맺는 것으로 관객의 춤의 즐거움, 호흡의 맛과 멋을 동시에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⑤ 신체 각 부위 : 영남교방청춤은 춤 안에서도 즉흥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흐르는 대로 춤은 추어야한다. 몸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춤을 추는 사람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끄럽지 못함을 느낀다면 영남교방청춤 안에서 그것은 정확한 동작의 완성도가 결여된 것이다. 몸의 중심인 골반이 빠지면 춤의 자세는 흐트러진 상태이기에 골반을 시작하여 등은 곧아야하며 가슴(흉부)은 안으로 감기우고 어깨선은 흘러야 하며, 상·하체가 동작의 형태미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고는 특별한 동작 외에는 분리되면 되어서는 안된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모든 신체의 기운이 같이 흘러야 정확하게 맥의 풀고 맺음을 확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교태미가 흘러나와야 하며 춤을 보면서 마음을 앗아 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특성을 살펴보면 먼저 무대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항상 관객을 존중하는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무대진행법에 있어서 무대 중앙에서 시작하여 긴장감 있게 천천히 제자리에서 추다가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하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왼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한다. 다시 무대 중앙에서 무대 중앙 정면으로 전진하다 다시 제자리로 이동하는 등 대부분의 관객을 향한 사선이나 직선, 원형을 사용하여 관객이 춤을 감상하기에 가장 편안한 선을 사용하고 있어 관객을 존중한 춤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순한 선을 사용하는 무대 사용법은 영남교방청춤을 더 깨끗하고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꼿꼿함과 숭고함이 함께 깃들어 있어 깊이 있고, 감성적이다.

 

3) 의상

이 춤의 춤사위에서 가장 두드러진 동작은 부채를 드는 장면이다. 무대 중앙에서 부채를 들어 춤을 추는 것은 이 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와 함께 이 춤의 외형적인 미는 의상과 부채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진 1, 2>와 같이 춤의 의상을 살펴보면 운파 박경랑은 검정 겉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주의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공연의 의미와 계절별로 색을 달리 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속바지 두벌, 허리 묶는 속치마 두 벌, 겉치마, 저고리, 천노리개를 덧댄다. 다른 민속무용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검정치마에 노란 저고리와 천노리개를 매치하는 것은 시각적 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며 색사로 수를 놓은 천노리개를 더함으로 복식의 미를 더 화려하게 장식한다. 또, 춤에 사용되는 부채는 교방에서 전해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특징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글체는 놀음판에서 선비가 춤을 보고 써주었을것을 전제하에 운파 박경랑이 고정이미지화 시켰다. ‘황룡백학무(黃龍氣白鶴舞)’ 라는 의미로 ‘황용의 날아갈 듯 한 기운을 받아 백학이 춤춘다.’ 또는 ‘백학이 용과 같이 힘찬 기운으로 춤추며 움직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춤은 기운으로 추는 것이고, 힘으로 추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백학처럼 부드럽게 긴 선을 나타내며 곡선과 유연함을 가르친 뜻이다. 또한 이면에는 사랑의 정표를 상징하기도 하며 부채를 살짝 펴고 얼굴을 가리면서 이어지는 동작의 의미는 여러 가지의 상징점이 내포되어 있다. 순백의 기면(器面) 위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려 만들어냈던 청화백자와 같이 부채를 펴 들어 얼굴을 가리며 이어지는 동작들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하고 도도한 품위가 흐르는 청화백자와 같다.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쳐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중도를 지켜 균형을 잃지 않는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우리의 토속 맛이 절로 베어 나오며 교방의 멋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상에서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춤은 흐르는 듯 한 유연한 선이 춤동작의 민첩함을 더하고, 자태를 뽐내듯 강렬한 빛을 발하는 청화백자와 같이 그 당당함이 기방예술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숙련된 고도의 춤 동작과 기술, 그리고 화려하고 귀족취향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

 

<사진 1,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1.4.3. 3.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내면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드러나지 않고 삭혀도 내면에 흐르고, 젖어드는 멋과 흥이 호기심을 알 듯, 말 듯 유발해야한다.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내면의 감정표출이 분명해야하며 각자의 생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속내음이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내면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박경랑의 춤을 “살아있는 영혼이었고 그 춤이 만들어 내는 절정과 내적 에너지는 관객의 혼을 끌어 올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교방청춤을 비롯하여 춤을 추는 사람은 예(禮), 법(法), 도(道)를 갖춘 의식 있는 춤이 되어야하며,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운파 박경랑은 언급했다. 춤은 수련의 내공을 쌓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禮), 법(法), 도(道)에 따른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했다. 또, 천박한 이미지를 주어서는 안되기에 조선의 기생들은 가(歌), 무(舞), 악(樂), 시(詩), 서(書), 화(畵)를 잘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선비들과의 교류가 가능하였듯이 모든 예능적인 면에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어야 했다.

 

1) 정서적 측면

이제까지 언급한 내용들을 전제로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을 살펴본다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언어의 본질처럼 기방적인 것이며, 기교가 넘친다. 둘째,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셋째, 우리춤의 기본 정신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다. 넷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 다섯째,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미적 특질 가운데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세계에 함축된 정서적 측면을 언급해보는 것은 한국 민속무용의 특징을 밝혀보는 과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민족정서를 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데이비츠(Davitz)는 “정서의 정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의 본질 때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정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정서의 정의를 ‘행동하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외적표현과 내적 감각과 관련된 복합된 인식상태’로 규정짓고자 한다. 이에 따라서 민족정서를 춤으로 그 민족이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정서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성에 나타나는 한과 신명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정서라 할 수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무수한 외세의 침입 속에서 한이 맺힌 민족이며, 양반제도, 노비제도 등을 통해 사회의 하층계급 또한 한을 간직한 채 살아 왔으며, 남존여비의 불평등한 가치관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이 있었다.

계층적인 핍박과 문화적인 억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사회의 멍이 되고 맺힘이 된다. 즉 응어리진 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파 박경랑은 춤으로서의 심리적인 해방감, 생리적인 발산에 사회적 자유 등과 같은 풀림의 현상이 극대화되는 현장에서 다 같이 해결 될 수 있음을 뜻하여 영남교방청춤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즉, 춤을 통해 한이 풀리고 흥이 있고, 정이 되살아나고 신명이 솟는다. 영남교방청춤의 기능은 종교성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추어지고 있다. 우리춤의 미적 특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요소인 소위 예(禮), 법(法), 도(道)의 모습을 현시한다. 또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곧장 정(靜)·동(動)의 관계에 조용된다. 고요하면서 그 고요가 단순한 죽음의 고요가 아니라 무수한 생명력을 내포하는 역동적 고요, 곧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 움직임 속에 무한한 고요를 내포한 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 갖은 뜻을 다해 추는 춤”이라 그는 언급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베어 나오게끔 자연적인 멋으로 추어져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밖에도 “직접 춤을 추는 춤사위의 태도는 다소곳하면서, 정갈하고, 단아하면서도 도도하게 버들가지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바람에 거센 파도가 일어도 부서지지(흐트러지지 않는)않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으로 추어야한다.”는 그의 말 속에서 춤의 미적 특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적 자연주의를 즉흥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고요’과 ‘움직임’의 역설적 관계는 정서적 측면에서 보여 지는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임을 알 수 있다.

 

2) 지역적 측면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영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지니는 춤사위의 특질과 미의식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사료된다.

우선적으로 경상도라는 지역은 야류를 비롯한 경남농악, 학춤, 한량무 등이 발달되었던 지역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많은 예능인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예술 또한 널리 보급,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다.

영남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면 정교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부드럽고 굴곡이 많고 남성적인 수식과 기교가 많다. 또 장구장단의 경우 장단의 붙임새에 변화가 많으며 사설과 장단이 서로 엇물리는 엇붙임을 많이 쓴다.

해안지방에 위치한 영남지역은 지방색이 강하여 농악에서의 가락도 상당히 빨리 몰아내며, 진모리(덧뵈기) 가락이 많고 빨라서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준다. 그와 함께 향토적이며 소박함을 내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영남지역은 보통 음악이나 춤에 있어서 생동감과 뛰어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춤동작은 나긋나긋하기보다 민첩하며 세련된 편으로 개인놀음이 발달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소리의 특징과 같이 춤에 있어서도 잔기교가 많고 변화가 다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로움을 자아내며 엑센트가 강하게 표출되어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굴곡이 많아 전체적 흐름이 단순함과 평면적인 선율보다는 입체적 선율로 보여 지는 것이 특징이다.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한마디로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다.

이러한 음악의 지역적 특성들이 춤에서도 그 지역색으로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지역성이 내포된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감칠맛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또, 고도로 다듬어진 전형적인 기방예술의 산물로서 춤사위의 기교가 뛰어나며 한과 멋과 흥을 다른 어떤 춤보다 몸의 사용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춤의 기법에서도 호흡을 맺고 푸는 춤사위의 빈도수가 많이 드러나는 점, 그 외에 발끝, 손끝, 시선, 몸통사용 등 섬세하게 마무리 되어지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교방춤에 비해 춤사위가 많고 까다로운 편으로서 부채의 테크닉과 발놀음이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그의 춤의 멋은 정교한 발디딤과 다양한 몸 사용법에 있으며 깊은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출발시키고 절제하는 호흡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서 느낄 수 있는 우아미와 절제미를 나타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내면적 상징성은 호흡과 발디딤을 통해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흡과 발디딤은 이 춤의 정적인 특성에 역동성을 더해주는 요인으로서 발디딤은 발뒤꿈치, 발끝, 발허리의 세부분이 각각 섬세하게 움직여져 선명한 정확도를 보여준다.

또, 용트림사위를 보면 용의 용트림처럼 세찬 힘으로 곡선을 그리기도 하는 남성성과 학체사위와 같이 새의 날개짓처럼 가볍게 허공을 가르기도 하는 여성성의 교태로움이 더하여 남성성의 힘 있고 우직한 면과 여성성의 기교스러움이 모두 갖춰진 복합적 요소를 잘 조화시킨 춤태가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특징이 잘 어우러져, 음과 양이 잘 조화된 춤이며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게 한쪽으로 쏠린 춤사위가 아니며 상체는 남성적인 활달함이 강조되고 하체는 여성적인 섬세함이 강조되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춤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도도하고 가볍지 않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둔탁하지 않는 춤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러한 영남지역의 특성은 곧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특성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형태적 측면

교방청춤, 안방의 춤은 무대의 격식이 없는 춤이었으나 보는 이가 자리한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무대화 되어가는 우리전통공연은 극장형식에 맞추어 삼면(앞, 양측면)에 따른 춤의 감상척도가 거의 비슷해야만 그 춤동작을 균등하게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기에 일찍이 박경랑교방춤은 동작의 무대방향에 따른 동작의 형태미는 이미 미래를 예측하고 정해진 것 같다.

겉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정지 상태이면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움직임이 하나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 즉 집중된 동작이 불러일으키는, 순간적인 일탈과 파란으로써 일상적인 시공간을 미적시공간으로 자리바꿈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겉으로는 빙산의 일각만 보이면서 속으로 알 수 없는 덩어리를 숨쉬고 있는 것과 같은 침묵적 내면의 역동성이다.

1.5. Ⅳ. 결론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서로 바르게 교감하는 가운데 행복해질 수 있는 춤이며, 무참히 짓밟혀도 살아나는 끈끈한 생명력을 가지고, 삶에 대한 은근한 역동성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어울리는 기기묘묘한 춤으로, 약함과 강함이 조합된 중성적인 춤이다. 풍속화속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박한 서민적 정서와 조선조 후기의 교방춤을 현대에 이르러 무대화시킨 운파 박경랑의 춤 무대에서 보여 지는 교감을 토대로 영남교방청춤의 내면 및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상·하체로 구분하여 큰틀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영남교방청춤에는 내적 에너지의 집약과 이완의 작용을 충분히 담아내어 독특한 미의식을 춤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배합하여 맺고 풀고 어르는 한국춤의 묘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즉흥성의 원리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즉,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모든 한국춤은 고유한 민족정서와 연계성을 가지므로 한국인의 심성에 내포된 한과 신명이라는 정서를 즉흥적 원리를 통해 표출하고 이것은 곧, 감정이 춤으로 보여지는 행동양식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영남교방청춤의 흐름은 심성의 자연적 표출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춤의 특징은 형식상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율동이지만 내용면으로는 풍부한 감정이 스며있으며 낙관적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살펴 본 영남교방청춤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자태가 드러나는 사방춤이며 몸통의 쓰임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이다. 유난히 잦은걸음으로 장단을 타는 사위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몸동작이 매우 기교적이며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발끝, 손끝, 손목, 허리사용 및 시선처리 등이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감칠맛을 자아내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춤의 네 가지 미적요소인 한과 흥 그리고 멋과 태를 고루 갖춘 춤으로 한국적 자태를 엿볼 수 있는 춤사위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므로 민속무용의 특질을 살펴봄에 있어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은 충분한 연구대상이 된다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에 고찰은 뿌리 깊은 한국인의 미의식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민속춤의 한 특성을 밝혀보고 우리 민속무용의 사관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시기 이후 이른바 무대 양식화를 통해 변화, 발전되어 온 전통춤들은 오늘날 전체 춤공연문화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 시점에 그의 영남교방청춤을 통해 또 다른 춤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춤에 대한 뚜렷한 가치기준을 세우는 일은 한국무용의 전통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춤전통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영남교방청춤 뿐 아니라 전통은 지켜가기 위하여 지켜져야 할 부분과 또, 지켜내기 위해 더해지는 점이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이것을 계기로 현대의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기초자료로서의 의미를 갖기를 바란다.

참 고 문 헌

 

서적

김매자(1996), 한국무용사, 삼신각.

채희완(1985)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길사 p.23.

 

논문

김동민(1966), 아시아문제연구소논문집 제5집, 李朝枝女史, p.75.

김용숙(1990), 韓國女俗史, 民音社, p.264.

백재화(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69.

안미아(2001), 조선조 후기 교방(敎坊)춤 특징에 관한 연구, p.5.

정병호(1889), 무용론, 서울六百年史, 서울특별시, p.1297.

 

정기간행물

2011, 계간 예술문화비평 제2호 가을,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248-253.

우리춤 연구소, 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p.6.

 

기타

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 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2012, 1, 30, 운파 박경랑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ABSTRACT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Yim, Ji Ae(Dongduk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structural significance and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Park Gyeongnang Youngnam Gyobang Dance. Structural, aesthetic analysis of traditional dance will contribute positively to researches on philosophical structural studies of traditional dance in general.

Youngnam Gyobang Dance reflects the life and arts of the people of Late Joseon Dynasty. It represents Korean ethos and reflects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Youngnam Gyobang Dance evolved to be artistic and recreational dance, rather than religious dance. In the process, professional Gyobang dancers developed elegant and elaborate dance movements. This study focus on late Joseon period in search of the origin of Gyobang Dance, examining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So far, theoretical works on Woonpa Park Gyeongneng's Youngnam Gyobang Dance and records of the dance are far from comprehensive. The author attempted to analyze Youngnam Gyobang Dance performed by Woonpa Park Gyeongnang on micro-level, in search of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The conclusion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the following: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turned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into artistic prope,rties. Cultural characteristics of Youngnam region, which is often thought of as masculine are reflected to the movements of the dance.

In addition, perfect harmony with music, various movements, modern sensation of visuals, scientific approaches to proscenium performance characterizes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Especially,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goes beyond the traditional limitations of body movement. This was possible because it inherits the tradition stemming from the beginnings of Gyobang culture.

 

Key : Youngnam Gyobang Dance, Gyobangcheong, aesthetic characteristic, Woonpa Park Gyeongnan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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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백 재 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존재했었기에 지나간 시간의 그릇된 사고(思考)에 발목 잡힌 ‘교방’이 이제서야 가치가 되살아난 인식의 대접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춤꾼의 무던하면서도 끈기있는 노력에 의해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해 온 전통춤의 인식 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교방청춤을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둘째, 영남교방청춤을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및 선행연구 검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의 인터뷰 및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남교방청춤은 여느 전통춤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점이 존재했다.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유지한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역사의 춤이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르는 춤이다. 운파 박경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 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영남교방청춤의 맥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연구의 제한점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Ⅳ. 결론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참고문헌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과거로부터 계승된 온갖 표현방식, 약속(conventions), 기교(technique), 어법(dictions)에 관계하여 일정한 지속적 특성을 지니면서 민족적, 지역적 예술정신으로 일관되어 민족의 고유양식을 바탕 지우는 형식 또는 정신상의 규제력이나 실천성을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전통은 사회, 민족 또는 여러 문화영역에 있어 과거에 형성되어 역사적 생명을 가지고 미래에 적극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행동, 관습, 의식, 사상, 양식, 태도 등의 가치 체계로서 수 많은 시대를 통하여 전승되는 하나의 규범적인 힘이 되며 인간을 역사적 존재답게 만들어 후세의 문화창조를 근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뿌리’(根, foundation)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꺼내는 것은 흔한접근방식으로 메뉴얼화 된 사고이며 수순이다. 보편에서 진리가 나오는 법이다.

오롯이 시간만 입은 과거의 예술이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니듯 지난간 시간을 덧대인 것이 모두 역사의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절대 시간의 날실과 민족의 혼이 깃든 시실의 만남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역사와 전통이 탄생하게 된다.

본 연구는 춤의 한 카테고리를 형성하며 독보적인 색감을 지닌 ‘영남교방청춤’의 역사, 문화, 사상, 더 나아가서는 의미를 포괄하게 되는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진실은 시대의 시간성에 상대적으로 더디게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다.

관료적인 제도에서 시작된 ‘교방’이라는 문화도 진실을 강탈 당한 왜곡에 갇히고, 곱지 않는 시선 속에 밟힌채 오랜세월을 진실을 향한 시간만을 기다리던 역사의 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수 차례 함께하고 넘겨왔던 궁중과 민속의 교방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한순간에 치명적인 인식의 철퇴를 맞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산술적인 시간 35년보다 더 무서운것은 교방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혹한의 추위와 같이 매서운 시선이다. 곱절의 시간만큼 보내고 난 지금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올바른 인식으로 향하는 사회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는 시작점과 같은 발아점이 존재한다. 교방의 인식이 새물결을 타고, 인식의 변곡점을 맞게 된것은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춤의 명칭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의 변곡점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관심을 갖으며 본 연구의 필요성이 착안되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 해 온 전통춤의 인식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하나의 깨우침과 일깨움은 또 다른 세계로의 방향지시등이 되어주게 된다. 운파 박경랑에 의해 전승되고 전파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연구는 나아가 우리 전통춤판 및 전통문화예술의 신선하고도 활기찬 대중적 문화관조와 함께 전통의 학문적 발전에도 크나큰 기여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1.2.2.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본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내용을 구명하기 위한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검토, 생존해 계시는 예능보유자선생님들 및 석학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구결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1.2.3. 3. 연구의 제한점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은 시대별로 괄목한만한 역사적 사건, 변혁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승의 측면에 있어서 가계도, 예맥 가계도, 영남지역의 예술적 특색에 초점을 맞추어서 춤의 특색을 연구하였다.

 

1.3.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영남교방첨춤의 춤 명칭에서 도드라지는것은 단연 ‘교방’이다. 교방에서 기녀를 유추해내게 되고, 기녀를 통해 기생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며 그로 인해 궁극에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색채를 가늠하게 되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일게 된다. 그러기에 ‘교방’의 역사적 탐구가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구명하는 첫 연구단계라고 생각한다.

 

1.3.1.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교방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연구에는 국가기관이라는 명패가 함께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의 국가기관에서 예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은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音聲署)를 그 시조로 삼을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족중심의 귀족사회에서 연주되었던 음악문화를 관장했던 왕립음악기관은 대악서・관현방・아악서로 압축해서 설명되어질수 있다. 왕립음악기관 소속의 공인들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렀으니, 여기(女妓)가 궁중정재를 연주할 때에는 여령(女伶) 또는 교방(敎坊)이라고 불렀고, 음악연주를 맡았던 공인들은 때에 따라서 영인(伶人)이라고도 부른 듯 하며, 영관(伶官)・악관・교방악관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의 위상과 사회적, 정치적 대우와 신분적 위치가 귀족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왕립기관으로 음성서가 존재하였다. 예술교육기관의 차원 높은 출발점이 고려시대의 교방의 전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고려는 신라와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화예술과 사회경제력 변형이 없는 왕조를 설립하여 불교를 국시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문화를 번성 시켰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교방이 우리나라의 궁궐에 설치되어 여악을 담당하였으며 기녀들에게 악, 가, 무(樂歌舞)를 교습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의 발달은 우리나라 가무역사를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기녀의 예술적인 교육은 신라시대의 음악서(淫樂書), 고려시대에서는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을 중심으로 이조시대에는 교방(敎坊)에서 가무와 악기를 익혔다고 본다.

이조시대에 와서 정책적인 변화는 소불종유(小佛從遊)의 사회적 기운에 관계되어 여악의 성격이 다소 교체되어 태종(太宗) 6년에 여악에 관한 제도의 개정으로 의녀(醫女), 침선비(針線婢)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수계층이나 귀족 계층들의 의료진료를 위하여 의녀제도(의녀제도)를 설치하였으나 의녀와 침선비는 자연 궐내에서 주연을 위한 가무(歌舞)를 겸하였기 때문에 고려이후부터 계승되어 온 관비(官婢)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기녀(妓女)가 조선왕조 더 나아가서는 한국역사상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燕山君)시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기녀(妓女)의 수를 늘려 그 수가 서울에만도 수 천명이 되었으며 기녀수의 증가는 전국의 경제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대규모적인 기녀제도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해체되었만 기녀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성리학에 물들어 있는 선비들에 의해 기녀의 폐단이 줄곧 비판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체제상 어쩔 수 없이 허용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한말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기녀제(妓女制)로 바뀌었다.

한말 교방(敎坊)조직은 일제치하에서 무산되어 버렸으며 다만 민간인 운영으로 예기(藝妓)조합인 권번(券番)을 통하여 기녀들이 소수나마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관에 의한 여악 교육이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관에서 활동하던 관기를 포함한 각 지방의 기생들이 조합을 창설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무용기관에 그 소임을 넘기게 되었다.

궁중예식(宮中禮式)에 따른 음악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면서 여악(女樂)의 교방(敎坊) 역할을 했던 장악원(掌樂院)을 통해 궁중정재(宮中呈才)는 많은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한말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고종31년)을 지나면서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하기에 이르러 그 이듬해인 고종 32년에 장악원은 장례원(掌隷院)에 통합되고 협률사로 축소되었다. 1897년(광무1년 고종34년) 교방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고종 44년(1907년, 융희원년)에는 궁내부관제가 다시 개정되면서 장악원으로 바뀐다.

표 1. 예술에 관여한 국가교육・행정기관의 변천사

신라시대 왕립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 7세기 중엽 설립

고려의 왕립음악기관 대악서(10세기말)・관현방(1076년 문종30년)・아악서(1391년 공양왕 3년)

조선시대 아악서・전악서・봉상시(1392년 태조1년), 관습도감(1393, 태조2년 : 관습도감에 교방여기가 속함)

장악서(1457년 세조3년) (우방 : 전악서, 좌방 : 아악서)

장악원(1469년 성종)

교방사(궁내부) (1897년 고종 32년)

장악과 및 아악대 (구한말 1907 – 1910)

이왕직 아악부(1910 – 1945 일제강점기)

구왕궁 아악부 (1945 – 1950)

국립국악원(1951 – 현재 :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

이렇듯, 예술에 관여한 국가기관은 신라의 음성서부터 현대의 국립국악원에 이르는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가장 주지할 사항은 삼국시대의 음성서부터 예능은 국가차원에서 설립・관리되어지면서 장려되어져 왔다는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의 명칭이 보이면서 ‘교방’이라는 역사가 민간차원보다는 나라의 관리와 장려하에 생성되어져 왔다는 점이다.

 

1.3.2.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 대악서・관현방・아악서의 음악기관에 속한 여기(女妓)가 궁중정재에 관여하는 곳을 일컫던 것으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조에 교방기(敎坊期) 교방사(敎坊司)의 명칭으로 바뀌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표. 1> 에서도 보이듯이 교방사는 고종 32년에 개칭된 후, 구한말까지 존속되어지다가 1907년 관기가 폐지된 이후 교방에 관련된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관기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관기의 역할을 하던 이들의 활동은 다시 권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게 되고 일제강점기 속에서 전통춤과 전통음악의 전승에 있어 매우 존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통춤의 교량역할을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전통문화예술에 춤의 영역이 형태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는데, 관기는 1905년 여악제도가 폐지된 후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영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된다.

 

 

표. 2 조선시대 여기의 유형 분류표

소속에 의한 분류

관기(官妓)

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家妓)

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

자유로운 여기

주거지에 의한 분류

경기(京妓)

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

지방관에 적(籍)을 둔 여기

기능에 의한 분류

예기(藝妓)

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기

색기(色妓)

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

등급에 의한 분류

일패(一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이다

이패(二牌)

일패에서 타락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

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으로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수 있다.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권번을 통해 많은 명기가 배출되었다.

권번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때 까지 존속 되어지다가 해방 이후 지방에서 서서히 그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부산의 동래권번이 그 생명력에 있어서는 권번역사의 끝자락을 장식한 곳이다. 부산의 동래감영 산하 동래교방청이 한말까지 존재하다가 1910년 이후 동래교방청이 해체되자 아전집안 자손들과 유지들 자식들 중 풍류를 즐기던 소위 한량들이 돈을 모금하여 동래예기조합을 만들었고 얼마 후 동래권번으로 바뀌었다.

1.3.3.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의 시기를 가늠하자면, 시기적으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들 수 있다. 그 시점부터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많은 문호개방과 조약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개방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자들과 쇄국정책을 옹호하는 자들간의 신, 구의 대립이 갑신정변, 동학동민운동 등의 배경이 되었다.

근대화를 향해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쁨 변혁과 그 변혁을 담아내는 의식의 전환은 전통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교방의 명칭을 갖춘 고려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던 교방은 구한말 근대화의 굴곡진 과정(문호개방, 일제강점기)을 거치면서 권번으로 핵심적 성격의 전환을 겪어야만 했다.

교방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관기들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기들의 뜻이 하나 둘씩 모여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는 변화의 시기를 갖는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고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하게 된다.

교방문화는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다음의 변화와 변혁을 갖게 되었다.

첫째, 교방은 근대화 과정에서 먼저 권번으로 모든 직제가 바뀌고 난 후, 교방이 지켜 온 문화예술의 향응, 향유 방식에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둘째, 교방의 설립역사 이후, 대부분의 향유대상이었던 일부 특정계층을 벗어났으며, 공연목적이 집단적인 형태의 일원에서 개인능력 위주로 집중되는 예술성의 개인성향충족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학습방법도 지역별 권번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르게 변화했다.

셋째, 교방문화의 권번으로의 이동은 자칫 사장(死藏)되고 단절될 뻔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원형을 고수하게끔 이끈 존재방식이라고 말할만큼 중요한 변혁이다.

 

1.4.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수년째 전통무대에서 변혁의 눈(目)이 되어온 작품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살펴본 교방이라는 국가예속기관으로부터 예술맥을 잇는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영남이라는 지역적 맥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1. 1. 영남교방청춤의 맥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慶尙道)’를 이르는 말로 호남(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말)과 함께 팔도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영남이라는 지역은 지형적 산세(山勢)가 험준하고 호남에 비해 비옥한 농지 보다는 척박한 토지가 지배적인 형질의 땅이다. 이러한 땅의 성질은 확연하게 삶에 투영되고, 민중의 생활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춘천아트페스티벌 中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닫혀있는 지형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지형적 형질이 춤의 본 바탕의 맥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남교방청춤의 춤세를 논할 때, 여는 전통춤에서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활달함의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특징은 바로 영남지역의 형세(形勢)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유구한 역사적 맥을 이으며, 춤태에서는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활달함과, 여성성을 지탱하는 하체의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외적표현의 내적특징이 존재한다.

1.4.2.

1.4.3.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영남교방청춤을 추어 오고 있는 운파 박경랑의 예술적 맥락은 스승의 스승 자리에 자리잡은 이가 故 김창후(1887∽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초대 예능보유자. 원양반 )선생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바이다. 故 김창후 선생은 박경랑의 외증조부로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1929∽1991 중요무형문화재 제 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중)에게로 이어지는 예맥(藝脈)을 짚어 볼 수 있다.

또한 박경랑은 가계도의 예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 단순 만족하기 보다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의 원형에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끊임없는 노력은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학습하는 기간을 스스로 택했다. 춘정 강옥남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구전심수의 개인학습을 통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 시켰다. 이와같은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의 예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깃든 책임감의 수행이 있어왔기에 오늘날의 영남교방청춤이 존재한다고 본다.

故 김창후선생은 교방이 권번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사대부집안의 풍류를 즐기던 양반신분으로 권번 생성과 권번의 활동영역에 근접하게 사셨던 분이다. 이는 운파 박경랑선생을 통해 듣게 된 외증조부의 삶의 패턴과 생애이야기에서 자주 확인되는 부분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1.4.4.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예맥의 전승이 형태와 기능면에서 균형있게 자리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독특한 사적 접근이 될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신 故 김창후선생의 생전에 삶과 예술을 영위하던 패턴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는 고성이라는 한정적 지역성을 벗어나, 영남지역 전체를 휘감아 도는 폭이 큰 풍류(風流) 활약상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고 한다.(196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경랑선생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주신 故 김창후선생의 모습의 기억과 윗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된 사실)

영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풍류정신과 영남이 지닌 예술의 맥을 자신의 춤에 풍요롭게 담아내셨기에 지금의 영남교방청춤이 외증조부의 고향이자 운파 박경랑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한정적 지역성과 맥락을 뛰어넘는 춤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김창후 선생의 출생연도를 보면 1887년도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대부의 풍류를 아는 자제들이나 양반들이 권번의 예술향유를 누릴 수 있던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이는 김창후 선생의 일가친척들의 증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 해주고 있다.

초대 문화재의 자리에 오르신 이유가 물론 고성오광대의 놀음과장을 전승시킨 점과 전수 능력에 있어서 누구보다 탁월하셨기도 하겠지만, 평상시의 그의 삶의 패턴이 전통문화가 배어있는 풍류를 여유롭게 즐기는 자연스러운 형태였기에 더욱 가능했던 부분이라고 본다. 쉽게 표현해서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는 식으로 영남지역에서 소리와 춤과 악기의 연주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가 흥을 나누고 멋에 취하는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박경랑 선생의 외가쪽 어르신들이 기억하시는 故 김창후 선생의 모습을 설명해주시는 증언이 자주 있었음).

영남지역의 예술상이 걸출한 외적활동을 한 중대한 역사의 단편이 된 일이 故 김창후 선생 생전에 있었다.

1901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난 황웅도는 젊은 시절 고향에 교육사업과 양잠산업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저항한 지사이다.

황웅도는 고성에서 인생의 변화를 몰고오는 김홍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홍주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무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던 예술인이었으며, 고성의 권번에서는 김홍주를 학습시키기를 원했기도 했었고,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고성 옛어르신들의 의견과 증언).

여기서 김홍주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숨어 있는데, 김녹주(1896∼1923)의 여동생이 김홍주이다. 또한 김녹주는 故 김수악의 스승이시다.

김홍주의 짧은 고성 권번에서의 활약시도와 학습에 고성의 고착화된 예술성이 자연스럽게 입혀졌을 것이며, 또한 故 김창후선생과 같이 풍류에 통달한 선생들로부터 한마디, 한절, 한가락씩 가르침을 받아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김홍주는 연인 황웅도와 끝내는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이때 김홍주의 예술성은 일본 각지에서 조국의 예술에 목말라 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가무악의 혼을 전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김홍주는 고성권번에서의 활약으로 자신의 예술성 위에 고성의 예술성과 특성을 덧입게 되고, 연인 황웅도와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며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는 예술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故 김창후 선생과의 문화예술적 교류가 여러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예견해보는 예술의 상호적 교류가 김홍주 선생의 예술에 영향을 필경 미쳤을 것이며, 이러한 영향은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종합해보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초대 창시자이신 故 김창후 선생의 영남지역을 자유롭게 휘감아 다니시던 풍류정신에 의해 폭넓게 영남 전 지역을 아우르는 영남의 특색을 고루 입혀진 춤을 정리해 내시게 된다.

둘째, 故 김창후 선생은 고성 지역의 유지이자, 남다른 예술성으로 권번 출입이 잦은시기에 김홍주와의 문화예술적 상호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되며, 그러한 교류가 긍극엔 그녀가 뿌리 내린 일본에서의 조선 가무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1.5. Ⅳ. 결론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과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해보고자 했다.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을 구명하기 위해서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을,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을,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를 각각 연구하였다.

국가교육기관은 삼국시대의 신라로 거슬러올라 갔으며, 음성서의 설립이 ‘교방’과 같은 예능전문관장기관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교방’과 조선시대의 교방사, 장악원의 ‘교방’을 거치면서 국가예속기관으로 전문예술인을 교육, 활용하는 성격의 틀은 유지되었다. 근대화를 거치고 국가의 운명이 달라지면서 교방은 오랜세월의 역사를 뒤로 한채, 권번으로의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번의 기능과 활약이 있었기에 다행히도 현대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일제강점기의 모진 정책에도 쇠잔함 없이 원형을 보전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교방문화는 가시적으로 권번으로의 형태적 변환을 맞게 되는데, 이때 가장 주지할 점이 이전까지의 교방문화가 개인의 예술성 발휘 측면 보다는 일부 특정계층을 향한 수준높은 향략제공과 국가의 대소 내연의 집단춤에 있어 일원의 역할에 그치는 수준이였으나, 권번으로의 이동 후, 교방문화보다는 비교적으로 개인의 예술성 발휘와 무대로의 예술성 발산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궁중무용의 학습과 공연이 일부 특정계층만을 향한 춤의 성격을 벗어났으며 춤 자체의 역사성 이음새에도 권번의 기능은 너무 훌륭히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하기 위하여 1. 영남교방청춤의 맥을,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았다.

영남교방청춤의 맥은 영남지역의 지리적 특색과 지형적 기운이 녹아 들어간 춤으로, 상체는 남성의 활달한 기개가 표현되었고, 그 상체를 받치는 하체는 여성성을 지향하며 섬세와 세련미를 자아낸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외증조부 故 김창후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故 조용배선생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데, 영남지역의 예술의 혼이 두루 담길 수 있게 김창후 선생의 활약상이 두터웠었다. 고향 고성에만 머무르며 권번 출입을 한게 아니라 영남 전역의 춤, 소리를 찾아 헤매면서 영남의 풍류의 맥을 익히셨다.

영남교방청춤은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에서는 독립운동가인 황웅도의 연인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며 활동한 김홍주와의 예술인연을 살폈다.

김녹주의 여동생으로 가무에 능한 김홍주는 고성의 권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홍주의 예술성과 고성의 예술성이 상호 교류 하는 관계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 김홍주의 일본에서의 가무악 활동상에 뿌리는 고성에서의 예술활동이 그 뿌리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추측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문화예술 전승의 관점에서는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이어간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춤이다

또한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의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른다. 운파 박경랑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 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영남교방청춤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참 고 문 헌

 

김지은. 2007. 조선시대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기녀의 변화양상 고찰.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미학예술사전 예술사전 시리즈Ⅰ. 미진사. 1989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성기숙. 2005. 『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송미정.1999. 현 전통무용에 내재된 기방무 성향에 관한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송방송. 2006.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우리춤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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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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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지무(傾國之舞) 운파 박경랑

- 영남교방청춤에 대해서

 

이학박사 백 재 화

** Intro (들어가기)

경국지색(傾國之色), 나라를 뒤흔드는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을 일컫는다. 운파(雲破)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춤판을, 관객을, 예술계를 여실히 뒤흔들었기에 경국지무(傾國之舞)라 칭할 수 있겠다.

그녀의 춤은 미인도 속의 여인이 스리슬쩍 화폭을 열어 재치고 걸어 나와 질펀하게 악과 어울리고, 판을 휘어잡으며 춤을 추고는 다시 화폭 안으로 스며 들어가 미소를 머금은 고운 자태로 앉아있는 모습을 만나게 되는 느낌이다.

시간과 공간과 공력을 넘나드는 춤 이상의 춤을 만나게 되는 가슴 설레임을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서는 매 공연마다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의 시간은 단순히 세월의 누적과 누빔이 아닌 시간과 공력이 함께하는 ‘시공’으로 승화되어진다.

오늘의 시간이 흘러 들어가 어제의 시간들이 되어 만들어낸 과거에서 피어나는 맥이 서린 ‘전통’의 여느 공연에서도 쉽사리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과 같은 춤을 넘어서는 춤 이상의 춤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고 휘어 감기는 춤으로 다가올까? 운파 박경랑의 춤을 깊게 들여다보고 넓게 펼쳐 보다보면 눈에 보이는 몇몇 가지가 있다.

이웃나라 중국의 유명한 4대 미인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는 각각 유명한 이야기를 지닌 미인들이다. 침어서시(서시가 연못에서 노니는 물고기가 쳐다보자,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 가라앉았다), 폐월초선(초선의 미모에 달이 부끄러워하며 구름 뒤로 숨어버렸다), 낙안왕소군(날아가던 기러기가 왕소군의 미모에 넋을 잃고 날개짓을 잊어 땅으로 떨어지다), 수화양귀비(양귀비의 미모에 꽃들이 부끄러워하며 잎을 말아 올리다). 그녀들의 미모가 가늠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도 중국의 4대 미인들의 이야깃거리만큼 표현해낼 진귀한 요소가 존재한다. 이제부터는 그 매력덩어리들을 하나씩 풀어 볼까한다. 총 4개의 장으로 나누어 그 매력의 세계를 탐방해보려 한다. 글머리에서 영남교방청춤을 미인도에서 걸어 나온 여인을 연상시키는 춤이라는 표현을 썼기에 중국 4대미인의 전설처럼 4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나름의 연관성을 택했다.

** 묘사의 장(描寫의 場) - 연요즉무(演要卽舞 : 연출력의 중심구도는 ‘춤’이 잡고 있어야 한다.)

 

연출력은 공연전반의 성공과 흥행을 좌우하는 관건이다. 공연을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내놓기, 공연전체 구도 잡기가 명백한 연출력이다. 그저 작품 작품을 굴비 엮듯이 엮어 내놓는 전통공연의 천편일률 획일적인 방식에 더 이상 관객은 발길을, 관심을 주지 않는다.

똑 같은 식자재로 감칠맛 나는 일품요리를 해내느냐, 재료 본연의 빛조차 감추는 안타까운 음식을 만드느냐는 전적으로 요리사의 몫일 것이다. 그 요리사의 몫이 공연에서는 연출력이라 빗대어 설명할 수 있으며, 그 연출력은 춤꾼의 역량에서 빛을 발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공연산업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전문화된 인력의 투입과 세분화된 조직력, 공연시스템에 의해 연출가, 무대감독, 무대스텝, 공연진행자 등등 공연을 완벽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의 일꾼들이 촘촘히 존재한다.

물론 연출가에 의해, 무대 감독에 의해 공연전반의 그림과 전체 연출력은 얼마든지 일정선에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춤을 추는 주인공 춤꾼이 자신이 만들어내야 할 공연의 전반적인 판의 흐름, 공연구도, 공연 스케치를 일차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연출가와 무대감독 등등의 고급인력 또한 그들이 지닌 적정선을 넘지 못하는 애꿎은 노동력의 낭비이자, 활용도가 못 미치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안타까운 공연이 되느냐 마느냐는 주인공 춤꾼의 연출력의 내재 여부에 달려있다. 연출력을 “옷”이라고 비약한다면, 연출가와 그 밖의 무대 관계자는 춤꾼이 그 “옷”을 자연스럽게, 똑 떨어지게 입혀지도록 도와주는 전문조력자들이다. 그 “옷” 자체를 연출자와 무대 관계자의 몫이라고 오인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운파 박경랑은 이 연출력에 있어서 타고난 예인이자, 오랜 세월 갈고 다듬어지고 길러진 상위 1%의 춤꾼이다. 운파 박경랑의 공연은 항상 테마가 존재하며 그 테마가 전달되어지는 방식은 관객의 적절한 취향에서 맞춤형으로 조제되어 무대화 시킨다.

단순 작품의 연결이 아닌 고리 고리 연결성이 매끄럽게 살아 있는 경첩 “액기스 지킴이”라는 전통의 재요소가 중핵으로 자리 잡는 하나의 “판”을 짜내는 춤꾼이 운파 박경랑이다.

이야기형식, 나레이티브 형식의 전체판도의 연출력은 관객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예술성이 아닌 친근한 동화작용을 불러일으키면서 공연에 한 걸음, 두 걸음 빠져들게 한다. 이해하기 불가능한 작품은 예술이 아니며, 감동을 주지 못하는 작품은 훌륭한 예술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역사의 마크, 오래된 소설의 내용, 설화 등의 내용에 운파 박경랑은 그녀의 춤을 입히는 작업을 절묘하게 성사시킨다. 이것이 진정한 춤에 의한, 춤을 위한, 춤을 빛내는 그녀만의 ‘아성’을 이룩하는 춤판의 연출력이다.

운파 박경랑의 최근 2년간 주요공연작의 공연명을 일례로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11. 11

국립부산국악원 박경랑의 춤 “인연”

2011. 9

남산국악당 “황웅도 잠복기”

2010. 6

남산국악당 박경랑의 춤 “사랑을 넘어”

2010. 2

국립국악원 박경랑의 춤 “동행”

2009. 6

남산국악당 “남산편지”

2009. 4

김해문화의 전당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

2009~2011년 2년간의 대표 공연

영남춤의 맥을 잇고자 하는 정신이 춤의 근간을 이루는 운파 박경랑은 각 공연마다 색채가 뚜렷하되, 예술성은 퇴색하지 않으며 또한 자신의 대표 작품 영남교방청춤이 멋들어지게 함께 어우러지는 명쾌한 공연을 이루어낸다. 그 힘의 저력이 항시 궁금하다.

전통춤 공연계의 “판”을 다시 짜는 무소의 뿔처럼 당당히 홀로 가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여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운파 박경랑의 춤에 관련된 소소한 생각이나, 그 맥락을 짚어가 보면 혁명적 ‘판세’의 신세기를 펼쳐가는 운파 박경랑의 의식저변의 사상 틀은 “자연주의”이다. 자연은 억지스러움이 없다. 자연은 푸근함이다. 우리네 전통과 관련된 사상을 짚어보면 쉽사리 접하는 부분이 이 자연주의사상이다. 운파 박경랑이라는 춤꾼 역시 이러한 역사의 고운누적을 거부하지 않고 따르고 순응하는 춤꾼이다. 영남교방청춤의 상체의 활달함은 영남지역의 산세를 연상시키며 시원시원히 뻗어가는 것이며, 하체의 조밀한 밀도 있는 춤사위는 상체를 받치는 여성성의 땅, 대자연의 묵묵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연”을 품고자하는 춤태가 모든 이에게 주목받는 춤이 되며, 매력을 한껏 머금은 춤이 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운파 박경랑은 말한다. “춤은 추는 게 아니라 추어져야 한다.” 이는 자연스러움이 우선시 되어야함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운동역학측면에서도 최고의 아름다운 동작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고 한다. 최소한의 에너지라는 말은 억지스러움이 배제된 동작이며, 극히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자연스러움이 최고의 아름다움을 연출해낸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 은유의 장(隱喩의 場) - 무즉연희지소통장(舞則演戱之疏通場 : 춤이 연희, 의식과의 만남, 소통으로 ‘어우러짐’의 장을 이루어낸다.)

 

은유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냄’을 말한다. 앞장에서 묘사의 장을 연출력으로 설명하였다. 은유의 장은 “어우러짐”을 말하려한다. 둘 이상의 다름이 “또 다른” 것을 함께 이루어 내는 것이 어우러짐이다. 은유의 장이 “어우러짐”을 표현하는 주된 이유가 바로 서로 다른 것이 함께 하면서 그 안에서 내가 되고, 너가 되고, 함께 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운파 박경랑의 춤판은 잘 짜여진, 짜임새가 감탄에 이르는 “거방진 한판”이다. 그 짜임새는 춤을 위한, 춤과 어울리는 전통연희와 의식과의 만남이 있다.

고성 오광대, 남해안 별신굿, 불교 의식무 등 전통 연희와 의식, 또는 타 장르와의 만남과 시도가(일명

) 운파 박경랑의 춤과 어우러질 때, 그 상승효과는 각각의 합보다 훨씬 큰 합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이 진정한 “어우러짐”의 진면목이리라 본다.

하나 하나의 합의 크기를 떠나, 함께 할 때의 합의 크기가 산술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효과를 창출해 내는 것이 “어우러짐”의 최고점 중 하나이다.

이 부분에서 소위 참과 거짓을 가를 수 있는 중대한 항목이 존재한다. 올해 세계의 10대 뉴스에는 분명 애플사의 간판 ‘스티브잡스’의 타계가 포함될 것이다. 스티브잡스의 행보, 연설 등 많은 것들이 언론의 중심에 있었다. 스티브잡스의 생전 지침 가운데, “천재는 훔치고 수재는 모방 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훔치기와 모방” 무엇이 다를까? 훔치기와 모방은 분명 확연히 다르다.

운파 박경랑 역시 평상시 즐겨 사용하는 말이 ‘내 것을 훔쳐가라’이다. ‘내 것을 모방해가라’ 이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 모방은 그저 따라 하기에 불과하다. 누가 만들어낸 것을 똑같이 외형적으로 또는 뒤늦은 기술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모방이다. 그럴싸한 겉모습의 비슷함이 모방이다. 그러나 완벽하게 훔쳐가기는 모방을 한 단계 넘어서는 ‘내 것으로 만들어가기’이다. 운파 박경랑이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되 내이는 ‘훔쳐가라’의 본뜻은 바로 이것이리라. 운파 자신의 춤 세계에서 “중핵”인 꼭 가져갈 것을 가져가되 일정 수준에 이르게 되면 분명 자신의 것으로 다듬는 단계를 거치는 “창조”에 다다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따라 하기의 모방의 단계를 뛰어넘으라는 큰 스승이 중시하는 가르침의 깊은 속내라고 본다.

운파 박경랑과 스티브잡스의 사고방식체계에서의 공통점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거장끼리의, 최고봉끼리의 소통”이 보였다.

연희스러운 춤이 아닌, 연희의 춤이 되며, 의식스러운 춤이 아닌 의식의 춤이 전통의 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모방”이 아닌 “창조(완벽히 훔치기)”의 세계가 되며, 진정한 어우러짐의 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내가 되고, 네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짚을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전통예술이 지닌 덕목 가운데 “소통과 나눔”이 있다. 현대화의 추세에 따라 예술계의 개별적 발전과 영역이 존재하기 전, 우리의 전통예술은 함께하는 “판”의 문화였다. “따로 또 같이”의 문구처럼 각각의 영역은 살아있으되, 함께 어우러지는 궁극의 표현을 이루어내는 “함께”가 유연하게 표현되는 전통문화가 우리의 고차원적인 예술성이었다. 함께하면서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나눔”이 자연적으로 함께 생성되었다.

운파 박경랑은 이 소중한 부분을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춤판에 끌어들였다.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춤을 위한 판세가 궁극엔 전통의 숨결을 거스르지 않고 전통의 맥을 잇는 의식 있는 춤꾼으로 인도하였으며, 나아가서는 함께 “어우러짐”의 판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현해 내는 또 하나의 쾌거를 순차적으로 이루었다.

운파 박경랑의 춤판에서 보여 지는 “어우러짐”을 또 다른 표현체로 대체하자면 “예술의 시너지 효과”라 하겠다. 둘 이상의 세계가 독자적인 세계에서 낼 수 없는 결과치를 함께 어우러지면서 내게 되는 효과이다.

“어우러짐”의 또 하나의 효과는 인식의 새 물결이다. 관객에게, 대중에게 일차적 재미와 신선함으로 우리전통 “한판”의 구조를 선보이며, 지루하고 고루하며 재미없는 것으로 일관되었던 전통의 일그러진 면이 산산조각나면서 다음세대로의 가교 역할을 해줄 현대의 대중에게 인식의 새 물결로 다가서게 된다는 것이다.

백 명이 움직이는 것보다 한명이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듯이, 각양각색의 관객과 대중에게 오라, 와라 손짓하고 소리치기보다는 연희자가, 연희의 주체자가 한 발짝 다가서고 한걸음 가까이 걸음하는 것이 효과적이리라 생각한다.

영남교방청춤의 운파 박경랑처럼 짜임새 있는 ‘거방진 한판’의 전통문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창출해 내고, 소통과 나눔의 정신을 발휘하는 전통문화예술의 덕목을 중시한다면 관객과의 소통 즉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리라 생각한다.

관객을 위하는 관객을 생각하는 의식 있는 춤꾼의 자세는 그리 어렵지도 멀지도 않다는 것을 운파 박경랑의 경우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 표현의 장(表現의 場) - 무악동행(舞樂同行 : 살아있는 춤과 살아있는 음악, 춤은 악과 악은 춤과 늘 함께 한다.)

 

은유의 장이 어우러짐이라는 형태미와 형식미를 다루었다면, 표현의 장은 도구적인,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

운파 박경랑의 춤판이 다른 춤꾼들과 선을 긋는 또렷한 차이점은 단연 생음악 반주(Live)를 고집하는 생동감 있는 판세일 것이다. 춤이 살아 있는데 음악이 죽어 있는 것은 진정한 한판이 아니라고 말하는 춤꾼이 영남교방청춤을 매혹적인 춤으로 등극시킨 운파 박경랑이다. 많은 이들의, 관객의 뇌리 속에 자리 잡은 영남교방청춤의 잔상은 흥이 차오른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흥의 비율과 멋의 배합, 맛의 조율이 수려한 안목과 안배를 지닌 춤태의 주인공 운파 박경랑일 것이다.

생동감 있는 춤, 살아있는 춤을 위해서는 어찌 보면 선택이 아닌 필수적인 요소로 생음악 반주(Live)를 고집해야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스테레오시스템을 구비한 극장이라도 춤이 살아 있을 진데, 음악이 녹음이라면, 벌써 한판이 기묘하게 어그러진 형태라 할 수 있겠다.

경제적인 측면의 고려라는 현실적인 발목에서 대다수의 춤꾼들은 어쩔 수 없이 녹음(MR: Music Recorded)의 음악을 선택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운파 박경랑이 대단히 여유로워서 생음악반주를 무대에서 고집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춤꾼 박경랑은 말한다. “라면을 끓여 먹는 현실이라도, 몸빼(‘왜바지’가 우리말이다. 그러나 실상 이 단어를 쓰셨기에 현실성의 입장에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바지를 입을 수 밖에 없는 궁핍함이 되어도 무대의 한판을 위해서는 생음악을 고집해야하며 그로 인한 경제적 힘겨움을 나는 능히 참고 견딜 수 있으며, 실로 이제까지 그리 견디어왔다.” 진정, 소름 돋는다. 찰나의 예술이라는 무대예술의 흥과 멋과 맛을 위해 현실의 삶을 궁핍함으로 누비면서까지 과감하고도 당차게 생음악반주를 고집하는 영남교방청춤의 운파 박경랑의 정신세계는 여느 춤꾼이 감히 흉내 내기에는 너무 거리감 있는 형세다.

요사이 춤사위라는 용어가 많이 쓰이는데, 옛 어르신이나 큰 선생님들의 표현을 가만히 살펴보면 춤사위라는 용어보다는 춤가락이라는 용어가 쓰임을 알 수 있다. 왜 춤가락이라고 할까? 춤은 본시 장단과 음악이 있어야 하므로 한가락 한가락에 춤을 춰야하기에 춤가락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다. 이 말의 또 다른 속뜻은 음악과 춤이 한배, 한집을 이루며 팀웍(team work)이 중시되어야 함을 심도 있게 뜻하는 것이다.

춤이 짚어지는 호흡에서 악의 강, 약이 나와 주어야하며, 춤의 마디가 있는 곳에 악의 마디와 절도 함께 해야 하며, 춤이 최고조의 흐름을 탈 때 악도 함께 클라이막스를 달려주어야 한다는 이치를 짚어주는 의미심장한 용어가 ‘춤가락’이다.

운파 박경랑이 영남교방청춤을 무대 위에 올릴 때, 생음악이라는 방법론적인 표현, 도구적인 표현을 놓치 않고 고집하는 이유는 일찍이 춤가락의 이치를 통달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성 오광대의 초대 예능보유자이신 외증조부 김창후 선생으로부터 그 예능의 혈통을 이어 받은 것이 단순한 혈육의 맥 잇기 측면이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생음악 반주 역시 춤과 관객의 사이에서 예술의 시너지효과를 창출한다. 객석의 관객과 무대의 춤꾼과 함께 소통과 나눔을 이루며 무대의 현장감을 극대화시키고, 또한 무대의 오묘한 변동성에 탄력적으로 대처하게 된다. 관객들이 환호하는 원동력은 이러한 밑둥에서 나오는 것이다.

악을 디딜 줄 아는, 악을 탈줄 아는, 악을 짚을 줄 아는 춤이 추어지는 춤꾼, 또 그리하라고 가르침을 쏟는 스승이 운파 박경랑이다. 춤꾼 박경랑의 “거방진 판”을 쥐락펴락 칠종칠금(七縱七擒)하는 역량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음악의 개념을 통달하고 악의 세계를 굴곡지게 오랜 세월 익혔기에 춤과의 한판에서 악에 치우치거나 악에 끌려가지 않는 중심 있는 춤가락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신무용을 주류로 행하는 춤꾼의 공연에서 “전통의 뿌리에서 영감을 얻어...”라는 글귀와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대목이 쓰여 지는 경우를 접하게 되는데 십중팔구 아쉬움의 알뜰한 한판이 되곤 한다. 전통을 그저 작품을 한번 익혀 올리면 마치 통달 한 듯이 행세하는 가볍디 가벼운 달그락 거리는 춤태와 어그러지고 일그러진 무대의 단순 행위를 만날 때는 저절로 한숨이 가락을 지어 나온다.

전통은 겉절이가 아니다. 적어도 곰삭은 맛이 있어야 맛깔스런 전통이라 일컬을 수가 있다. 전통은 라면의 세계가 아니라, 사골국물의 세계다. 시간이 머무는 춤가락이, 악을 이해하고 통달하는 저력으로, 어우러짐을 수용할 수 있는 전통문화예술의 폭 넓은 안목과 안배가 존재해야 하는 세계이다.

무대 위에서 절름발이 춤가락이 되지 않으려 악과의 소통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운파 박경랑의 고집스런 프로근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춤꾼으로 그녀의 앞날에 탄탄대로를 약속해주는 엄청난 뿌리의 자산이라고 본다.

** 비유의 장(比喩의 場) - 신장신의(新場新衣 : 새로운 무대에는 매번 새 의상으로 예의를 갖춘다.)

 

어제는 연산대군의 장녹수로, 오늘은 시, 서, 화(詩書畵)에 능했던 황진이로, 내일은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인물로, 고대소설의 주인공 캐릭터로 장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몰입형의 팔색조 춤꾼이 운파 박경랑이다.

이야기가 녹아 있는 춤판의 주인공을 관객은 일차적으로 이해하기 쉬우며, 상식수준의 캐릭터를 춤으로 풀어가는 춤꾼에게 관객은 더 매료되어간다.

비유는 직접적인 설명의 단락을 뛰어넘어 다른 비슷한 현상과 사물에 빗대어 설명함을 말하는데, 수 많은 캐릭터로 분하면서 영남교방청춤과 영남춤을 풀어가는 작품의 해석력을 보고 있노라면 운파 박경랑의 비유의 능력이 짐짓 탁월한 또 다른 세계에서 나온 것 같다.

전통의 작품은 무대화작업을 거치면서 일정한 무보가 체계화되어 연희되어진다. 한마디로 거의 비슷한 수순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 졌다는 것이다. 이런 작품으로 매 공연마다 어김없이 매번 다른 맛과 멋, 넘치는 매력을 발산하는 에너지는 운파 박경랑의 어느면을 깊게 들어가야 알 수 있을까?

“완벽한 변신”과 “끊임없는 시도”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해 보려 한다.

비유의 장 첫머리에 읊었던 장녹수, 황진이의 경우만 보더라도 춤꾼 박경랑은 비녀, 노리개, 뒤꽂이, 속치마 하나 하나 색상에서 전체 매치까지 세세히 신경 써가면서 캐릭터의 춤판을 향한 몰입, 투영, 해석에 노력의 노력을 경주했다. 이는 작은 것의 세심함이 커다란 표현의 밑그림이 됨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작은 실천이라고 본다.

춤만으로, 춤으로 풀어내는 스타일만으로 이야기의 중심인물을 이끌어 내야하는 기술적인 부분이 존재하기에 운파 박경랑은 몇 타래를 틀어 올린 큰머리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위에 얹은 채 영남교방청춤의 막판 하이라이트 연풍대를 서른 바퀴이상 무리 없이 소화해내는 곤혹을 감내하는 춤꾼이다. 역시 어김없이 소름 돋는다.

관객들은 말한다. 춤을 잘 알던, 모르던 “느낌이 너무 좋았다!” “빠져들었다!”. 그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세히 묘사하지는 못해도 그들은 온몸의 솜털들이 일제히 봉기하는 사태가 벌어졌거나, 끝없이 몰입하고 빠져듦을 관객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그것이 운파 박경랑의 “완벽한 변신”을 향한 세세함과 섬세함이 불러일으킨 결과 중 하나이다.

지난 2008년 8월 삼성동 코우스에서 “팔무전”이 열렸었다. 공연제목 그대로 여덟 번의 무대가 굵직한 춤꾼들의 향연으로 채워졌었다. 물론 한 작품으로 여덟 번의 무대를 각기 연출력으로 채워가는 무대였었다. 운파 박경랑의 연출력은 의심할 바 없었다. 악사들은 말한다. 박경랑과의 작업은 그 어떤 춤꾼보다도 믿음이 가며 악사 자체가 편안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을 타는 몇 안 되는, 악을 이해하는 보기 드문 춤꾼이기에 그리 표현할 것이다.

연출력으로 8번 무대의 작품색채를 달리하는 것은 운파 박경랑에게 당연한 것이었으며, 또한 운파 박경랑은 8번의 무대를 위해 8벌의 영남교방청춤 작품의상을 준비하는 세심함을 넘어선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프로의 치밀함까지 보였다.

오랜 세월 박경랑 선생님의 의상을 전담해 오신 장한나 의상선생님도 혀를 내두르며 말씀하셨다. “내가 많은 선생님들의 의상을 해오고 있지만, 이토록 철두철미하게 무대의상을 준비하시는 선생은 박경랑 선생님이 처음 이예요. 8번의 연이은 무대를 위해 각기 조금씩 다른 8벌의 같은 작품의상을 하시는 선생님은 정말 처음 이예요. 의상선생인 나도 놀랬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같은 작품일진데, 왜 그토록 다른 의상을 고집하는가? 왜 매번 다른 연출을 시도하는가? 간혹 혹자는 이 부분에서 실력적인 면에서 흠집을 잡아채내려고 애써 말을 내놓는다. 그러나 관객이 알고, 무대가 알고, 세상이 안다. 무엇이 “끝없는 시도”와 “끝없는 도전”의 정신이 담겨있는 처사인지를 말이다.

운파 박경랑의 답변은 이러했다. “다른 춤꾼들도 그러하겠지만, 8번의 무대는 다 소중하며, 매번 다른 무대입니다. 혹여 8번을 다 보러오는 관객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 관객도 염두 하면서 춤꾼은 노력해야 해요. 비록 연이은 8번의 무대이지만, 무대를 향한 예우이며 춤꾼의 끊임없는 도전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대중가요계의 별이라는 패티킴도 언젠가 이런 비슷한 발언을 했던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자신은 매번 무대에 오를 때 마다 ‘새 구두’를 신고 올라간다고 했다. 그 이유인 즉은, 자신의 무대를 찾아준 관객을 향한 예의이며 또한 신성한 무대를 향한 자신만의 예우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한번 거장들끼리의 “극과 극의 소통, 극체의 통일성”을 발견하는 순간이었다.

금전의 경제성, 시간의 경제성을 무릅쓰며 한결같이 운파 박경랑의 춤판을 찾는 관객과 대중들의 공통된 생각이 그려진다.

그들은 말한다. 운파 박경랑의 춤은 시간을 투자할 충분한 의미가, 매료될 가치가, 또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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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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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Dance Notation of

"Young-nam Gyobangchung-chum" by Park, Kyung-Rang style

- Dance Notation of Gud-geo-ry 46 rhythms

 

Park, Sun Young

 

The understanding about Young-nam Gyobangchung-chum has been changing. About ten years ago, the understanding of this dance is a vulgar dance performed by gisaengs(an official dancing girls). But nowadays, it is changed to 'another new culture'.

The tradition about 'Gyobang' is really in vogue even though Young-nam Gyobangchung-chum is not intangible cultural asset. It is proof that the beauty and value of various tradition about 'Gyobang' is now established.

But until now, it is true that there are no study, commentary, at least dance notation about Young-nam Gyobangchung-chum. So the members of Young-nam Gyobangchung-chum preservation and succession academy realized the need of study all about Young-nam Gyobangchung-chum and its cultural value.

 

Gyobangchung-chum is a sensual dance of a woman of virtue. So, above all, moderate movement is very important in gorgeous and beautiful movements.

This study mainly introduces dance notation of gud-geo-ry 46 rhythms. These are introduction and making an acknowledgement parts of total Young-nam Gyobangchung-chum. In this introduction parts, there is little movement and breath. It shows dancer's inner side through moving shoulder and motion. Dancer should make an impression to arouse audience's curiosity. For this reason, breath and moving weight are very important points in this introduction parts. And also, it is important point after finishing one movement and then doing next movement.

Introduction parts might be boring because of its little movement and breath. So dancer who performs this parts should express every detail so as to breathe together with audiences. Dancer should start every movement liltingly and finish seriously in every rhythm and beat. It can be basis of total dance that will be very big and splendid and also of breathing together with audiences.

Henceforth, we, members of academy, will study more about Young-nam Gyobangchung-chum and develop our study. We will study what is more beautiful and gorgeous movement, what is a sensual dance of a woman of virt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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彼女の座標

연구논문 2012. 2. 29. 16:06


彼女の座標

いまこの時点での韓国舞踊界とパクキョンランの立ち位置

 

李 美 喜

 

ある日の夕刻のこと、わたしは孝昌洞の彼女のスタジオの前にいた。まだ移転して半年たらずのスタジオは、比較的新しい高層マンションのそばの、やはり新しい四角い建物の3階にある。1階と2階は不動産だが、上のフロアは詩調を教えるやはり伝統芸能のスタジオであることが彼女は入居当初かなり気に入っているようだった。約束の時間に十分間に合っていることを確認して、わたしは階段を上り始めた。伝統を意識した雅な文字体で書かれた、看板に明かりが灯る頃だった。

 

その週末は、普段彼女が釜山で教えているお弟子さんたちがソウルにやってきて一泊二日の特別授業が行なわれていることは知っていた。レッスンが終わる時間に合わせて約束をしていたのだが、薄暗い階段を上るにつれなんだか、どうやらいつもと雰囲気が違う。いつもは舞踊の練習曲、つまりオーディオでかける伝統音楽が漏れ聞こえているか、まったく静かな場合は彼女はひとりで床の雑巾がけをしていたりする。わたしは耳を潜めて、今日がそのどちらなのかを前もって判断するのであったが…。何かが聞こえる、だがクッコリ長短のシナウィではない。遠慮なく開け放したドアから聞こえてくるのはポンチャック、演歌歌謡だった。

 

中に入ると阿鼻叫喚図だった。中年をゆうに超える弟子の女性たちと彼女がディスコ入れ子状態で踊り狂っていたのだ。呆気にとられていると若いお弟子さんが訳を話してくれた。レッスンが終わり食事をして、腹ごなしに踊っていたところだったのだという。彼女はDJよろしく次々と曲をかえては同世代の、もしくは彼女よりずっと年上に見える教え子たちをヒートアップさせるのに夢中だ。妖しいダンスはやがて、群舞のエアロビクスへと変わっていった。各々踊っていた女性たち、先生の後ろに列をつくっては、「さあ!さあ!」という彼女の掛け声にあわせて額に汗を浮かべている。小さな体躯から次々と繰り出されるアクションとキレのいい一連の動作、迷いのない振り付け。彼女のエアロビがあまりに堂に入っているのでもう一度訊ねてみた。

 

「先生はね、伝統舞踊だけで生計を維持するのが難しかった頃はエアロビの講師もやっていたの」。今でも若い舞踊家たちがヨガやピラティスなどの講師をバイト感覚でするのはよくあることだが、幼い頃から正統派の舞踊一筋のお姫さまのように見えていた彼女に、そんな過去があったとは知らなかった。正直面食らった。が同時に、もしかしたら彼女はその過去を恥ずかしがるかもしれないが、わたしが彼女に対して抱いていた或るひとつの憶測が確かなものになった瞬間でもあった。彼女は、身体とは何か、を知っている。

 

■ x=身体性

 

わたしは殆どの韓国舞踊家たちと違って、幼い頃から踊りを学んできたのではなかった。オーケストラやインドネシアなどの民族音楽の楽器に触れるうち、楽器を演奏する音楽家の姿勢、それも精神的な意味での姿勢ではなく肉体的な姿勢、動作が気になり始めた。マリンバ奏者の目にも留まらぬ素早いスティックさばきから生まれるアルペジオの連続や、ガムラン奏者がちょっとした音の隙間で空いた手を空中で揺らす動きなど、一流の音楽家たちの動きや身体のブレのなさは一流の舞踊家にも匹敵すると考えていたのだ。やがて演奏することと踊ることは非だが似るもの、音楽を奏でることと踊ることの原初の目的やその根本は同じ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予感を抱くようになったのだった。特に韓国音楽をやっていると、楽師は踊りを理解していなければならない、亦逆も然り、ということをよく耳にした。その言葉を頭では理解できるような気がした。だが頭を超えて身体で理解することとは何か。つまり音楽にも踊りにも流暢になることは可能だろうか。例えば、ソンバンソルチャングの名人などのように。ミュージシャンの身体がダンサーの身体にどれだけ近づけるのだろうか。その二つのからだはまったく別のものなのか?もっと視野を広げて、あるからだを韓国舞踊の身体、バリ舞踊の身体と分け隔てるものとは一体何なのか。身体性に近づくためのその実験を自ら試してみたくなったとき、わたしは最早居てもたってもいられなくなって、チャングチェを置いてポソンを履いていた。

 

しかし韓国の伝統舞踊家たちのほとんどは、身体性に対してあまり意識的ではないようだった。年配の舞踊家には太っている人も多いことは意外だった。跳躍や俊敏でアクロバティックな動きがないせいか、なにか特別な身体能力を兼ね揃えているようにも見えない。韓国舞踊は気の流れや呼吸、という言葉でよく説明されるように、踊りの動きそのものを概念で言い表すことが多く、筋肉がどう関節がどうという言い方をまずしない。バレエやコンテンポラリーダンスの踊り手たちのように練習前後に入念なストレッチをするなどということも見かけない。その理由のひとつには、韓国舞踊家たちは幼い頃から学生時代を終えるまで終始一貫して伝統舞踊科を卒業し、以降も伝統舞踊のみを続けるいわばエリートたちであることも関連しているだろう。伝統舞踊に必要な身体というのが、あらかじめ出来上がっているということだ。しかしそれは一人のダンサーとしてはどうなのだろう。韓国の伝統舞踊手たちはあまりに自分の身体性について無自覚なのではないだろうか、という不満がいつも頭の片隅どこかにあった。

 

彼女は踊る身体について、言葉で説明するのが巧みだ。ひじの関節の角度について、腹筋の使い方について、彼女なりのオリジナルな説明理論というのを確固している。その言葉は、彼女がどれだけたくさんの教える時間を過ごしてきたか、また彼女がひとり練習室の鏡の前でどれだけ孤独な時間を過ごしてきたかをこっそりと打ち明けているようなものだ。エアロビクスを教えていたと聞くと、他の舞踊家たちなら卒倒してしまうだろう。「バレエや体操、他のダンスやスポーツをすると、韓国舞踊に不必要な筋肉がついてしまう。韓国舞踊以外の身体を使うこと全般を避けるべきである」というのはこの世界の不問律なのだが、そういう荒唐無稽なことを言ってはばからない人に彼女の踊りを見てもらいたい。そもそも身体とはなにか、という問いを投げかけるのに伝統舞踊、エアロビクスというジャンルは不問なのではないだろうか。むしろジャンルを超えた一個のからだとしての身体性をより深く追求したことがある点で、他の伝統舞踊家たちよりも経験値は抜きん出ているかもしれないとすら思う。華奢な体躯を見れば誰でもわかると思うが、徹底的に抑制された身体を持っている。それは彼女が踊りのために身体を作ってきた、歴史の証明だ。

 

身体の本質に触れれば、バリ舞踊も韓国舞踊も、さほど差異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思うことがあった。それは例えば、ある和音にもう一音加えるとジャズ風になったり、抜くと古典的になったりする程度の差な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だ。振り付け方の美学や音楽との約束が少々違うだけで、結局ダンサーに必要な身体性への目覚めという点では踊りという行為はなにかひとつのものに集約されてもい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推測だ。その推理が彼女によってひとつの臨床例を得たというような、そんな気分だった。多くの伝統舞踊家たちがあまりにも当たり前に、なんとなく享受している身体感覚を、彼女は非常に自覚的に意識している。それは彼女の運動量の多さ、首や肩の線の見せ方などに顕著に現れている。鋭い計算を可能にする身体能力を、彼女は持っている。身体に対する研究、さまざまな方法で実際に身体を動かしてきた時間が故の技術だと断言できるだろう。

 

■ y=独創性

 

彼女の踊りには、しばしばたっぷりのサービス精神が表れる。観客と踊り手という垣根を越え、客席にアピールしたり、時には観客と手をとって踊ってみたり、という舞台の上から降りてきてのサービスを惜しまない。エアロビクスも、教え子たちに楽しんでもらいたいという彼女のサービス精神のあらわれだったのだろう。もっと身体を動かしてもらいたい、日ごろのストレスを吹き飛ばしてもらいたい。楽しく遊んでもらいたい。レッスンだからといって手を抜いたりリハーサルだからといって加減をして踊ることを許さない、練習と舞台とを区別しない舞踊家としての気持ちが、そんな形で表出したのではなかったか。遊びの心を伝えたいという思い。遊びとは、必ずしもお金を使ったり、酒を酌み交わすことだけではない、風流を楽しむ粋を解する心のことを指すことを、伝統舞踊を志向する者同士、風流を酌み交わそうではないか。という彼女からのメッセージが読み取られる。

 

彼女は風流の場づくり、風流を楽しむということに一層こだわりがあるように見られる。何故ならば彼女の踊り自体が、風流の場から生まれたものであるからだ。教坊舞とはつまり、芸妓の踊り、芸妓が風流を解する者たちの集いの場所で、踊っていた舞が継承されているものだ。しばしば作品の中でもかつての風流の場の再現、教坊舞の根源への問いかけが見られる。舞台の上を風流房と見立てて書道家とのセッション、民謡とのコラボレーション、舞台上で車座に座った客たちが順番に踊りを披露していくように見立てた作り、などがそうだ。かつての教坊とは何だったか、という想像をかき立ててくれると共に、ひとつの作品を毎回踊り続ける伝統を見守る観客たちへの、飽きさせないためのサービスであったことは間違いない。

 

作品数が多くない伝統舞踊は、ともすれば毎公演が同じことの繰り返しだ。ひとりで踊るのか、弟子が踊るのか、ソロなのか、群舞なのか。CDか、生演奏か。サルプリと、僧舞、チャングチュム、太平舞、いくつかのレパートリーを繰り返すばかりだ。例えばバリ舞踊と比べて見ると、

バリ舞踊には女舞、中世的な舞、男舞というのがある。中性的な舞には女性が男装をして踊るものというトランスジェンダー的な設定があり、これは女性が踊るものである。寺院で奉納の際に踊られるものだけでなく、娯楽目的のもの、舞踊劇形式になっていて歌いながら踊るものなど、形式の数も作品の数も大変多い。村で、また学校で今なお新作が作り続けられていおり新作も人気があれば、瞬く間にバリ全土に広がって古典作品と同じように踊られるようになる。

 

そんな中で彼女の公演には、飽きさせないための装置が非常に豊かだ。燕山君の寵愛を受けたジャン・ノクス、稀代の芸妓として歴史に名を残すファン・ジニをモチーフにした舞踊劇への挑戦はその最たるものだ。観客に新鮮なステージを見せたい、という思いと共に教坊舞がこの世に存在する理由に対する解釈を解りやすく切り取ってみたい、という熱意が感じられる。作品の中に出てくるのはサルプリ、教坊舞など古典作品で、踊りに関しては伝統そのものであった。いたずらに伝統をもとに現代的な創作をしたり、捏造したりなどしなくても伝統そのままで本来のすばらしさを現代に伝えることは出来る、という姿勢は、創作舞踊に傾きがちな韓国の舞踊界で異色の光を放っている。

 

こんなエピソードもある。流派の違う現代の名舞踊家8人の作品を一度に鑑賞できる「八舞伝」(2009年・KOUS)では五日間にわたって全8回の公演がなされたのだが、彼女は舞台に立つ度に衣装を変えた、つまり八着の衣装を用意したのだった。舞踊家として毎回新鮮な心持ちで舞台に挑みたいという意欲と、すべての舞台を見に来るマニアックな観客のためのサービス精神が現れた例だ。また、こんなことも言っていた「かつての芸妓たちが毎日同じ衣装で踊っていたかしら」。

 

伝統をいかに大衆化するのか、というのも彼女の舞台からしばしば読み取れるテーマでもある。

伝統を過去のある時点での化石にしてしまうのではなく、今なお息づき人々から愛される伝統の継承の仕方とは何か、という試みだ。伝統芸能の大衆化、現代化というときにすぐに想像されるのは、透けた素材のモダンなチマチョゴリを着た舞踊手たちが飛んだり跳ねたり、パンソリをバックに男性ダンサーが床を転げ回ったり、という方向性に傾きがちなのだが、彼女の試みはかなり赴きが違う。先に述べた舞踊劇形式の公演もそうだが、踊りそのものは決して変えない。見せ方を工夫するだけで伝統舞踊の可能性は無限に広がるのだ、ということを彼女は示したいのだろう。

 

音楽についても彼女の独特な思想が反映されている。長い時間培われた伝統芸能そのものの力を存分に発揮できるように、生伴奏にこだわる彼女だが、コムンゴ一台の独奏に合わせて踊ったり、ときには歌謡曲を作品に使ったりもする。歌謡曲の登用は伝統から遠ざかった大衆へのひとつのアプローチだ。伝統舞踊界の中ではひときわ毛色の異なった手法であり、賛否両論も大きいだろうが、彼女のこだわりも垣間見える。歌謡曲だからといって勿論ポップスやロックを使うのではない。彼女が見つめているのは今も昔も変わらない、韓国人を韓国人たらしめる精神世界の原点-情緒。韓国的な情緒を感じさせてくれる現代の音楽を使って、古典を親近感あるものとしてよみがえらせようとする挑戦を試みる果敢な姿だ。

 

そのように、彼女の作品づくりには、「これはこういうもの」「これは以前からこうして来た不変のもの」という概念がない。固定概念や、常識と信じて疑わなかった事柄に対する姿勢が非常に柔軟なのだ。あの日のエアロビクスも、彼女らしいやわらかい発想に基づいたものだったのだろう。かつての風流の場には、酒と詩と古典舞踊があった。現代の風流の場なら、歌謡曲とエアロビクスがあってもいいんじゃない?そんな茶目っ気の効いた提案だったのではなかっただろうか。

 

■ z=冒険心

 

なによりも彼女の舞踊を唯一無二なものに特徴づけていることといえば、流派がないということだろう。韓国舞踊の世界において、流派への所属は絶対だ。よく目にするのはイ・メバン流、カン・ソンヨン流、ハン・ヨンスク流あたりではないだろうか。理由はいたって簡単で、この三つの流派の「サルプリ」「僧舞」「太平舞」三つの作品が重要無形文化財の指定を受けているからだ。からくりはこうだ。それらの流派の文化財該当作品を何年か学んでいると、免許皆伝つまり資格を取ることが出来る。資格至上主義はなにもMBAや会計、経済、法律などの分野に限った話ではなく社会全体の傾向であるから、舞踊家たちも肩書きを望むのは同じところである。そうやってこの三つの流派の三つの作品に、舞踊家たちは集中するのだ。

 

彼女ももちろん、かつて師匠たちの下で学んでいた頃にそれらの流派に接したことがないわけではない。学生時代を一貫して舞踊科で過ごしていたから、授業ではそれらの作品を長い間踊っていたであろうことは間違いないし、コンクールに出場していた頃はイ・メバン流サルプリを踊っていたこともあった。コンクールに出場する際の作品は以上の三つのどれか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のは暗黙の了解であり、舞踊科入試のときにはそれを明記して指示することがほとんどだ。先にも書いた通り、韓国舞踊のレパートリーはいつの間にか非常に貧弱なものになってしまった。いつしか、そのような流派という大きな力の庇護から離れてオリジナルな踊りを求めるようになったところに、彼女の彼女たる所以がある。

 

オリジナルといえども、彼女の独創的なという意味よりは、原始的なという意味の方が合っている気がするのは、彼女が常に「教坊舞とは何だったのか」という探求を続けているからだ。もしかしたら彼女は、流派から疎外された踊りたちの復活を目論んでいる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かもしれない。舞踊界の視線が三つの作品に集中するほどに、それ意外の作品が関心を引かなくなっていったことは否めない。キム・スクジャ流やイ・ドンアン流などかつての名人たちの名前を冠した流派ももちろん存在するが、圧倒的に少数なのが現実だ。カウンターカルチャー的に人気を集める地方のサルプリ(トルクボル・サルプリや湖南サルプリなど)もあるが、やはり地方の行政地区ごとに定めた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る作品である。いくつかの代表的なレパートリーに飽き足らない若手たちが、踊りの原点を探して昔の作品を復刻している例もある。チョ・ガムニョ流僧舞がそうだ。チョ・ガムニョは若い時分に芸妓であった。芸妓を辞めて数十年踊りから遠ざかっていたが、近年請われて度々舞台に立っている。そのような踊りを研究することは、およそ50年程前の舞台芸術化される以前の伝統舞踊は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かを分析するには役に立つだろうが、技巧が発達した現代の舞台で公演するには、芸術性においてかなり物足りない印象を与えるのも事実だ。

 

そんな中にあって人気を集めながらも、主流ではなく独自の路線を歩く彼女の姿は、前例がないことを避け、師匠の言い伝えを忠実に守り、肩書きや社会的地位に弱い、そんな伝統芸能の世界では非常に異質な存在である。だからこれまでの道のりも決して平たんではなかっただろう。ただでさえ厳しい伝統芸能の世界で、誰も歩まなかった道を歩くというのはどれだけの覚悟を必要としたことが解らない。舞踊家の道というのはおよそ、舞踊団に所属するのか、師匠の下で研鑽を積むのか、博士号を取得して学校教授を目指すのか、くらいに集約されるのだが、彼女の場合はそのどれにも当てはまらない。それでエアロビクスの講師をやっていたことも、すんなりと納得がいったのだった。

 

彼女ほど踊り手らしい踊り手はいないのではないか。まず、公演の数の多さに驚く。請われて踊る、というのは踊り手冥利に尽きるし、ギャランティも発生するわけだから多くなくては困る。実際に外部の企画公演への出演は多い。だが、驚くべきなのは彼女自身が企画する、自主公演の多さだ。ソウル、釜山などを中心に全国規模でおよど年に2,3回のペースで独自公演を行っている。それも、毎回趣向を変えながら-これはレパートリーが少なく、公演の形式事体が形骸化している伝統芸能の世界では本当に珍しいことだ。前述の舞踊劇や、歌謡曲や書道など異なるジャンルと舞踊の融合、彼女は「初めてのこと」にとり組むことに非常に旺盛で、果敢だ。

 

記憶に新しいのは2010年に大阪で活躍する前衛身体表現の劇団である「態変」との共同作業だ。

第二次大戦中、日本の植民地化にあった朝鮮で独立運動の士であったファン・ウンドとその妻で伝統舞踊の名手であったキム・ノッチュを題材にとったストーリーは彼女をすぐに虜にした。

韓国初演に縁あって参加した彼女は、すぐに伝統音楽の生演奏をバックに、自らも出演しての再演を申し込んだ。相手は言葉の通じない前衛パフォーマンスアート集団。作品は韓国伝統をテーマにはしているが、伝統芸能への理解はどう見ても乏しかった。それが彼女には残念で、もっと彼らに伝統芸能の真髄を知ってほしい、そうすればもっとすばらしい作品になるのに、という思いが強かったのだろう。伝統を愛する者として放っておけ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それにしても彼女の思い切りと行動力には舌を巻く。態変とその作品に、出会ったその日にはもうバージョンアップしての再演の提案をしていたのだから。

 

印象に残っている中では、固城五広大に登場する踊りのひとつであるムンドゥンイ・プクチュムを彼女が自らのレパートリー化した作品が強烈だ。国家重要無形文化財7号にも指定されている 固城五広大は、慶南の海沿いの街固城で古くより伝わる仮面をつけた男たちの舞踊である。

その中のムンドゥンイ・プクチュムとは、ハンセン病患者が小さい太鼓を手に持って踊る作品だ。彼女の生まれが固城で、外祖父が五広大の名人であったこととは無関係ではないだろう。

実際に固城五広大の面々たちと共にしてきた公演の数は大変多い。だが、美しい女性の媚態を表現する教坊舞の専門である彼女が、お笑いやコメディ的な文脈で踊られる病身チュムに自ら挑戦したのには何か特別な思いがあったはずだ。

■ 突き抜ける放物線

 

伝統舞踊という枠組みを超えたい、伝統と外の世界の垣根を取り払ってみたい。そうしながら何度でも伝統に立ち返る。彼女の作品づくりからはいつもそのような思いが伝わってくる。流派はなんだって韓国舞踊であることは同じ、ただひたすらに「巧い」「上手い」踊りを目指すのみであるというストイックさ。前衛でも古典でも、身体の真実を追及する心は同じ。男踊りも女舞も、教坊の中での踊りもマダンで踊られる汗臭い踊りも、風流の精神から生まれた同じ踊り。その信念を公演やレッスンを通して実現させていく行動力と、前代未聞の挑戦を次々と成し遂げていく冒険心。だが、彼女ならあっさりとこう言うに違いない。伝統の世界で新しいことをやっているから前代未聞のように思われるだけ。広く芸術の世界を見れば、そんなこともたいした問題ではないのだ、と。

 

果敢な挑戦を続けているわりに、本人はいつも涼しそうな顔なのだ。その表情が、彼女の舞踊への探求がまだまだ止どまることを知らないのを物語っている。小さな体躯とほとばしるエネルギー、大胆不敵な行動力とその舞の繊細さ、そのギャップに魅せられて、今日も孝昌洞のスタジオに人々が足を運んでいることだろう。

국 문 초 록

 

그녀의 좌표 –지금 이 시점에서의 한국무용계와 박경랑의 위치

 

저자는 2006년부터 서울에 살면서 전통예술, 특히 연희와 민속무용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다.

박경랑선생님과는 수많은 공연을 보고 공연장을 돌아다니다가 아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공연장에 가도 박경랑선생님은 무대위에 항상 계셨다. 그 만큼 공연이 많은 실력으로 인정은 받은 인기 무용수이시다.

 

저자는 학교에서 연희를 배우면서 동료인 전통예술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이 감각을 알게되었지만 그 것은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웠다. 그들은 전통에 워한 경의나 탐구심을 품지도 않고 매일 사물놀이를 가지고 용돈을 벌으면서 술을 마시며 재미있게 사는 것에 밖에 관심이 없었다. 편한 친구들과 팀을 만들어 현대인의 감각에 맞게 재구성한 전통연희 공연을 펼치며 스타가 되기를 꿈 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것은 조금 희한하고 복잡한 가락을 사용한 사물놀이일 뿐이었거나 단순한 코메디 연극에 탈춤이나 상모를 돌리는 장면이 나올 뿐인 깊이가 없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용과 접하면서 무용가들의 정신세계에 지쳐버렸다. 그녀들은 이쁘게 꾸미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것이 지상의 기쁨이라고 생각하여 거짓말을 하고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나 선배한테 잘 보일까에 무척 신경을 많이 쓴다. 어릴때부터 춤을 추워 춤밖에 모르는데 남다른 자존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너무나 술을 좋아하고 연습에 개을리며 정신적으로 독립되지 못하고 항상 누군가에게 기대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공연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고 연습을 절처히 하고 몸을 아끼며 스트레칭을 꾸준히 하고, 쓸떼없는 남의 소문이나 욕을 안하고 삶에 열정적이고 춤에 대해서 진지하고, 사람으로써 독립적이고 그러면서도 사람다운 맛도 있는 그런 제가 꿈에 꾸던 무용가는 이제 한국에는 찾을 수 없을 것인가.

 

박경랑선생님은 여러가지로 한국 전통무용계에서 독특한 무용가다. 수업중에는 열정적이고 대충 춤 출줄 모르는 모습은 아름답다. 샘물 처럼 넘치는 새로운 작품 이미지를 들면 언제나 놀리게 된다. 류파에 속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아주 힘겹고 고독한 선택이지만 모둔 일을 해내고 있다. 그리고 춤 실력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가끔 술에 춰하여 눈가를 붉게 물드린 모습을 보면 사랑스럽기도 한다.

 

이 에세이에서는 박경랑선생님의 특칭을 x축을 신체성, y축을 독창성, z축을 모험정신에 설정하고 분석을 해보았다. 선생님이 한국무용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가 죄표위에 입체적으로 떠오를것이다. 일상 생활속에서 또한 무대위에 펼치는 작품을 통해서 박경랑선생님의 매력과 그 예술세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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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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