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버스 한 정거장 거리에 국립부산국악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답지 않게 세인들이 흔히들 문화의 불모지라 부르는 부산에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국립국악원이 있다는 것은 제게 행운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쉬는 시간에 무료히 앉아 있는데 박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저녁, 깊어가는 이 가을에 좋은 무용공연 보러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삶의 단조로움과 권태를 피해 무엇인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제게 단비와도 같은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얼른 약속 시간을 잡았습니다. 서예를 하루 빼 먹고 금요기도회 시간에 조금 늦더라도 가야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장로님은 자신이 얼마 전에 출간한 ‘아름다운 예절 귀한 섬김’이란 책 한 권과 ‘기드온 콰이어’ 합창 시디를 선물로 주시고 저녁까지 사주셨습니다.
전모(氈帽, 지삿갓)를 쓰고 객석으로부터 등장하는 시작이 파격이었고 A4용지 한 장에 ‘인연(因緣)’이란 제목을 붓글로 써서 반으로 접은 팜플렛도 특이합니다. 거기에는 의례적인 인사말 대신에 ‘2011 박경란의 가을편지’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어! 가을입니다. 가을 단풍에 흘려 세월 가는 줄 몰랐는데요. 그러다 불현 듯 돌아보니 오십이 넘었습니다. 지난 세월 누군들 회한이 없을까요. 저보다 아픔 없는 사람 누가 있을까요. 감히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오늘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지요. 그 오늘에 작은 한 획을 긋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얼굴을 맞대고 싶습니다. 춤의 맷집이 아닌 각자 인연의 크기를 잼질해 보면 안 될까요? 엎어지면 쉬어간다고 또 쉬면 질펀하게 놀다간다고 자신합니다. 놀러 오세요. 박경란‘
저녁 7시 30분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박경랑’이란 춤꾼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자그마한 키에 아기자기한 얼굴을 지닌 그녀는 돌고돌고 살랑살랑거리다가 멈추는 동작을 반복하며 ‘장사익’의 ‘허허바다’란 곡에 맞춰 첫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어깨와 고개를 까닥이며 부드러운 원을 그리는 손동작의 우리나라 전통적인 춤사위에다 자신의 빛깔을 담아 보여주었습니다. ‘최종민’ 교수가 해설 겸 사회를 맡아 작품의 관람을 도왔습니다. 우리나라 제일의 대금 고수인 ‘이생강’님의 연주를 들은 것은 오늘 최고의 수확이자 보람입니다. 아쟁의 명인 ‘백인영’님의 연주와 기타리스트 ‘김광석’과 모듬북의 ‘고석진’의 연주도 자주 접할 수 없는 특별한 보너스였습니다.
천년에 한 번 돌아온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십일(11)이 여섯 번 겹친다는 2011년 11월 11일에 경험한 전통적인 춤사위와 국악 공연은 빼빼로를 팔기위한 기업들의 상술에 휘둘리는 것보다는 백배나 더 보람됩니다. 그리고 장로님이 얻어다 준 떡가래 두 줄과 단술 한 컵은 빼빼로 수십 개를 받은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좋고 의의도 큽니다. 좌석도 무대 중앙 가운데로 배정받아 편안하게 잘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더 기분 좋은 밤입니다. 춤과 음악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고 감동을 주며 그 질을 고양시켜주는가 봅니다.(20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