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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랑류 영남춤 연구보존계승학회 1월22일 오후 7시30분 창덕궁 소극장 온(蘊)공연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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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공연명 : 춤길여정2 -藝鄕ROAD

2.일시 : 2015년 3월 31일(화) 오후 7시 30분

3.장소 : 국립부산국악원 예지당

3.주최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연구 보존계승학회

4. 후원 : 예원예술대학무용학과 남해안별신굿보존회 돈비치관광호텔

5.문의 : 010-8859-9561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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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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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명 : 2014 백재화의 춤공연 - 藝鄕 ROAD(춤길 旅程)
2. 장소 : 마포아트센터 플레이 맥
3. 날짜 : 2014년 12월 14일 (일)
4. 시간 : 오후 5시
5. 문의 : 마포아트센터 www.mapoartcenter.or.kr 010-8866-9561
6. 기타 : 전석 20,000원
공연 정보 더보기 ☞ http://www.mapoartcenter.or.kr/new_contents/calendar/sub_01_01_01.asp?idx=1022&ticketcode=&mode=view&s_genre=무용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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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화 박선영 성예진 조미나의 종횡무진 공연 중 진쇠춤 (국립국악원 우면당)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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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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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국립 국악원 우면당

백재화 박선영 조미나 성예진 영남교방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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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박경랑의 춤 남산국악당 故김수악선생님 추모공연 (하얀나비) 박경랑무용단의  바라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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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이 맥을 짚어가고, 이어가는 춤! 영남교방청춤 

백재화(kenzo71@hanmail.net)

 

1.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오늘의 이 시간, 오늘을 장식했던 사회 전반의 이슈와 사건들도 일정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차를 지나게 되면 역사의 궤 속에 들어가게 되며, 선택과 선별의 잣대에 의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는 문화, 예술이 될 것이다.

지금 광풍처럼 몰아치고, 대중세계를 압도하는 사건, 흐름, 유행이 모두 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찰나의 유행과 전통의 밑동이 되고 초석으로 자리매김할 재목은 한마디로 시간이라는 흐름이 그 유사성을 분별해 내게 된다.

오늘의 문화가, 이 시각의 춤이 전통의 옷을 자연스럽게 입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 바람의 시각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라고 생각한다.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백재화, 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 69).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우리춤 연구소, 2007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p.6).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척박한 땅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예로부터 경상도를 태산준령(泰山峻嶺)이라 하여,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한 면을 그 특징으로 꼽고 있다. 영남은 우조(굵직한 소리)형태의 소리가 예술에 영향을 미쳤다. 섬세한 면도 있지만 우직스럽게 나가는 성향이 춤과 소리의 대표적 특징이 되었다. 일례로 ‘밥 먹으로 가자!’ ‘음악~!’ 이렇듯 처음에 지른다. 처음에 차고 나가는 말씨의 특성이 영남의 특징이다. 덧배기, 배김사위가 영남의 특징이 된 것이 이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한다(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한마디로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다.

교방(敎坊)은 역사기록에 고려의 교방이라는 궁중에 설치된 기관으로 교방기와 지방기로 구분되어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 원류를 찾아보자면 고구려 시대에서부터 국가행사에서 전문무용수의 출현을 볼 수 있기에 이때부터 교방의 원류를 찾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기녀는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 존재하던 기녀의 유형을 보면, 관(官)에 적을 둔 기녀로는 궁중에 설치된 교방에 소속된 교방기(敎坊妓)와 지방 관청에 적을 둔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었다. 관에 매이지 않고 기업(妓業)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사기(私妓)가 있었으며, 사가에 기거하면서 관기와 마찬가지로 춤과 노래를 익혀 사대부의 예술성을 고취시키고 때로는 외간남자들의 수청을 들기도 하는 가기(家妓)가 있었다(성기숙, 1999,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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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악선생님 추모하얀나비공연중 박경랑 무용단의 바라춤(백재화 정선희)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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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은 오는 4일부터 19일까지 국립무용단(예술감독 윤성주)의 신인 안무가 발굴 프로젝트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를 국립극장 별오름극장에 올린다.

'바리바리 촘촘 디딤새'는 12년간 관객들에게 해설과 시연이 있는 전통춤과 창작춤을 소개해 프로젝트로, 올해는 영호남 지역의 독특한 전통춤을 총 5명의 안무가들을 통해 선보인다.

공연의 마지막은 백재화의 '영남교방청춤'으로 18~19일 이틀간 선보인다. 교방청은 과거 역사 속에서 전문예능기관의 역할을 수행한 곳이다. '교방청춤'을 바탕으로 선보이는 창작춤은 '레테의 강'이다.

생과 사, 삶과 죽음의 세계는 엄숙하면서도 성스러운 세계이다.죽음은 또 다른 삶의로의 시작이라는 암묵적 제시로 동서고금에 공통적인 인식의 한 조각으로 자리 잡고 있다.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망각의 강이 레테의 강이다. 이승에서의 모든 번뇌와 추억까지 모두 잊게 만드는 레테의 강!
 
이번 작품의 주된 의도는 레테의 강을 건너가는 망자를 위로하며 또 다른 생으로의 탄생을 축원하는 두 가지 상반적이고 상충적인 행위가 끝내는 조화와 조율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그 조화와 조율 속에서 동서양의 인식세계를 무리 없이 넘나드는 우리 전통 민속 문화의 우수성과 세계성, 더 나아가 우리 전통문화의 궁극의 어울림을 제시한다.
 

Posted by 古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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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임 지 애

국문초록

 

본 논문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전통춤의 구조적, 형태적 미적고찰은 나아가 전통춤 전반의 철학적 구조 연구에 초석과 반석 및 발전의 한 영역이 되리라 사료된다.

영남교방청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의 내재와 함께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문화예술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으로 추어지고 있다. 우선적으로 현재적 시점에서 가까운 조선후기에 집중하여 교방춤의 발생요인을 살펴보면서 영남교방청춤이 가지는 춤사위의 특질과 형태적 측면에서 보여진 미적 특질을 고찰해 보았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의식적 환기를 일으키며 연구되어 지고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변혁에 상응하는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미비하고 춤의 기록 또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본 연구자는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작게나마 부분적인 분석과 춤의 미적분석 연구를 통하여 근원적 미의식을 발견하고자 한다. 또, 이를 살펴봄으로써 전통춤의 미의식 영역을 명확히 파악하여 다음의 결론에 도달하였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이 영남지방의 지역성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하듯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어 움직임적인 특징도 춤 속에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외에도 음악과의 혼연일체, 다양하고 풍부한 동작소의 존재감,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 작품의 무대 과학화,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 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신체의 사용법에서 기존의 전통춤이 표현해내고 고수해내는 신체운용법을 확연히 뛰어넘는 세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교방문화의 시작점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으면서도 면면히 잘 고수해 온 영남교방청춤만의 전승의 세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핵심어 : 영남교방청춤, 교방청,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2. 연구방법 및 제한점

2. 영남교방청춤의 외면적 특징

Ⅱ. 교방청춤의 개념

3.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적 특징

1. 조선조 후기 교방춤 발생요인

Ⅳ. 결론

2. 교방청춤의 배경

참고문헌

3. 교방청춤의 변화양상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춤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그 내면에는 시대가 풀어내는 역사와 지배원리에 따른 사상적 영향, 그리고 수적으로 우월한 민중들의 소리 없는 움직임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춤의 구조 속에서 보여 지는 특성은 민족의 정서와 시대적 배경이 바탕을 이룬다.

우리민족의 특성으로 자주 등장하는 ‘한(恨)’은 한으로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한을 풀어내는 과정을 통하여 소극적인 정서와 적극적인 정서가 공존하는 상충적이고도 호환되는 이중구조로 성립되어있다. 소극적인 정서는 맺히고, 삭히고, 움켜 안는 등의 정지된 상태로 본다면 적극적인 정서는 포용하고 풀어내고 떨쳐내는 긍정적인 자세로 움직임이 많으며 적극적인 힘을 표출시켜 예술적으로 충분한 승화를 이루어 숭고의 미로 완결되어진다. 이는 춤이 단순한 행동들의 영속적 나열을 상위하며 동작과 행위에서 표출되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표출하고자 의도되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내면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교방춤은 조선후기 민중들 삶의 모습과 예술의지가 투영되어 있는 하나의 집결체로서 민속무용의 근원적 미의식을 내재하고 무엇보다 한국적 정서를 잘 대변하고 있으므로 한국춤의 원형적 가치가 존중된다. 이 춤은 종교적인 기능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인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발전하였고 그 변천과정에서 기방 예인들에 의해 한층 기교적이며 세련된 춤사위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운파 박경랑에 의해 승화되고 있다.

교방춤은 한국 민속무용 가운데서도 기방춤의 대표작으로 우리춤의 멋과 태, 신명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춤으로서 춤 안에는 우리 민족의 한의 속성뿐 아니라 흥이나 신명과 같이 상반된 의미가 같은 선상에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의미의 한과 신명이 어떻게 같은 춤 안에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본 연구는 한국민속춤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표명하기 위한 하나의 연구방법으로서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을 시도하였다. 이는 한국민속춤의 지향하는 바를 표명함에 있어서, 현재 전통춤계의 밀도있는 춤으로 호평받는 운파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와 미적 특징에 관한 고찰과 점진적 해석으로 한국민속춤의 본질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근래 들어 널리 알려지며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어 지고 있기는 하나 체계적인 이론의 정립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춤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다. 나아가 우리 민족문화의 특성을 재점검, 정비할 시대적 필요성에 기인하여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총체적 미적분석을 통하여 미래지향적인 전통춤의 지표로 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본 고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고찰하여 보고 그 춤이 상징하는 미적특질이 내포하는 바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데에 큰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체험하여 학습하는 연구자로서 본 연구를 통하여 제대로 된 춤의 표현원리의 지각과 각각의 춤사위와 춤의 흐름이 지향하는 바를 파악하여 우리춤의 생명력, 역동성, 순박함 등의 형용할 수 없는 철학적 본질을 찾고자 하며, 이로 인해 영남교방청춤의 원형을 찾고, 원활한 전통춤 보급에도 일조 할 수 있을 것이다.

 

1.2.2.

1.2.3. 2. 연구방법 및 한계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첫째,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을 직접 학습하고, 춤의 상황을 기록 및 녹취하여 전체상을 파악한 뒤, 춤의 부분적 특징을 찾는데 주력하였다. 이외에도 영남교방청춤 전 과정의 이해도를 위해 ‘2009 박경랑의 춤 백의백무(白衣百舞)’ 공연영상을 보조자료로 삼았다. 또, 운파 박경랑선생과의 수차례 면접과 무대공연 및 수업참관, 평상시 관찰을 통하여 춤의 특징 및 세부사항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둘째, 주제와 관련 있는 참고서적 및 논문, 선행연구자료 등을 참고하였으며 관련문헌이 없는 경우에는 그 분야 전문가들과의 면담을 통해 수행하였다.

셋째, 영남교방청춤의 숙련된 춤꾼 및 학술적 연구자 3인 이상과의 지속적인 연구토론으로 삼중검증법을 택하여 연구자의 주관적 견해의 치우침에 따른 연구의 오류 범주를 좁혀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제기된 문제점은 추후 지속적이고 저변화된 연구로 보완 해 나갈것으로 예견된다. 또한 이번 연구를 계기로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다양한 후속연구가 지속적으로 시도되어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1.3. Ⅱ. 교방청춤의 개념

 

1.3.1. 1. 조선조 후기 교방청춤 발생요인

교방기(敎坊妓)는 대부분 미(美)와 재예(才藝)를 겸비한 관청의 기생과 관비 또는 무당 등으로 된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예악의 담당기관이며 교습소였던 교방을 통하여 가무(歌舞)를 전문적으로 교습 받았다.

원래는 무녀는 신 그 자체였으나 신격과 정치권력의 분화과정에서 퇴화함으로써 신에 봉사한 무녀가 지방의 토호와 결부되어 매춘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녀가 되고 무악의 예능적인 면에서 익힌 예기로 권력층에 예악의 가척(歌尺), 무척(舞尺)으로 봉사하는 기녀가 되는 것이다.

기녀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궁중에 국한한 교방기(敎坊妓)가 표면적이지만 지방 관청에 속하는 기녀도 포함되었다. 그래서 지방의 큰 고을이나 감영, 주군에도 상당수의 관기가 배치되었다.

고종 때는 기녀들이 어느 시기에 못지않게 자주 진연정재를 베풀었고 출연한 기녀나 무동들은 행사가 끝나면 귀향하여 궁중에서 새로 익힌 가무를 동료들에게 전수시켰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궁중의 가무(歌舞)가 지방에서 파급된 것이다. 이렇게 창우 출신들의 무동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이 교방청에 들어가 선생이 되어 기녀들에게 춤을 가르치게 된다. 이와 같이 창우 출신과 기녀들은 선비취향의 춤과 평민취향의 춤을 조화롭게 융합시켜서 근세 전통춤을 형성한 것이다.

조선후기 19세기부터는 넓은 광장이나 마당에서 추었던 것이 상업화 내지는 도시화됨에 따라 한층 공연예술로 급속히 변화하여 춤판이 옥내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부잣집 대청마루를 무대화로 하는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춤으로서 자연히 뛰는 동작이 없어지고 정적 지향의 춤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소리광대의 판소리판에서도 추는 경우가 많아짐으로서 그 춤들이 판소리와도 상호관계가 있는 공연예술로서의 고전적 춤이 된 것이다.

교방청춤은 교방청에서 다듬어졌지만 예술적으로 발전한 것은 교방이 폐지된 후의 기방(妓房)이였으므로 이른바 판소리, 가야금산조, 삼현육각과 같은 개인적 멋과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는 춤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교방청춤은 서민들의 심성과 양반들의 심성을 조화시켜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춤이라 할 수 있다.

1.3.2.

1.3.3. 2. 영남교방청춤의 배경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 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 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활달함과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춤의 성향을 지닌 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방은 한마디로 전문예능인의 교육기관이자, 내·외의 연희에서 악(樂)·가(歌)·무(舞)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렇듯 교방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예능기관이며 그곳에서 시대상을 반영한 악(樂)·가(歌)·무(舞)이 발전되었으며, 그 명맥을 오래도록 유지하였다고 하겠다. 나중에 권번과 기생조합으로 그 명칭과 기능이 다소 분리 발전되었지만, 예능을 관장하고, 예능을 교육하고, 예능을 향유하였던 기관이라는 점에는 상이점이 없다.

 

1.3.4. 3. 영남교방청춤의 변화양상

교방은 쉽게 말해서 정부관하소속이었기에 개성, 평양교방부터 남쪽으로 모두 소속관청이 있었다. 다만 시대적 영향으로 가장 오래 잔재해 있던 교방이 진주, 고성, 통영, 마산, 부산, 대구를 포함한 영남권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 중 가장 최근까지 남아 있던 것이 부산 동래권번이었다. 그러기에 교방청에서 교육받은 관기들이 관기제도가 폐지되면서 여러 곳으로 권번(기생조합, 예기조합)소속의 기방으로 전속되면서 이동이 많았을 것으로 보아진다. 그런 영향으로 영남권의 교방에서 추어오던 춤사위의 흐름이 엇비슷하거나 동일한 춤사위가 많으며 박경랑의 스승 또한 이곳저곳을 다니던 이름 높던 한량이었기에 총체적인 교방의 입춤 ‘영남교방청춤’으로 명명하게 된 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현재 운파 박경랑에 의해 활발히 보급, 전수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그 인지도를 끊임없이 드넓히고 있다.

또, 영남교방청춤은 가계도의 명맥에서 영남교방청춤의 정통성을 다시 한 번 찾을 수 있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초대문화재였던 故 김창후 선생이 박경랑의 외증조부이며,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에게로 이어지는 맥을 지금은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운파 박경랑은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을 찾기 위해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 이었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동고동락하면서 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시키는 영남교방청춤에 대한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를 잇고 있다.

 

1.4. Ⅲ. 운파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운파 박경랑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93년 제18회 전통 예술 경연대회 대상, 1994년 제12회 개천 한국무용제 특장부문 대상,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을 비롯한 다수의 수상을 거쳐 제5회 서울 전통 공연예술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 19명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명무로서의 위치를 굳혔던 운파 박경랑은 타고난 춤꾼이며 현재 영남교방춤을 보급하고 있는 명무이다. 경남고성 출신으로 고성오광대 초대 문화재였던 외증조부의 대를 이어 영남 춤의 맥을 잇고 있는 춤꾼으로 4세에 춤에 입문해 故 김창후, 故 조용배, 故 황무봉, 故 김수악, 김진홍, 박성희, 강옥남 선생에게서 전통춤과 발레 등을 사사한 운파 박경랑은 경남도립무용단, 창원시립무용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경상남도 무형 문화재 제21호 진주 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중요 무형문화제 제7호 고성 오광대전수자로 우리 춤의 연구·전수·보급에 노력하고 있다.

 

1.4.1. 1.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영남교방청춤의 춤 특성을 보면 곡선이나 원형의 무대진행법을 사용하였으며 사방의 어느 방향에서도 감상할 수 있는 원형적인 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뒷모습을 보여주는 동작은 보통의 전통춤에서 나타나는 초연한 모습이나 담담함 또는 한을 승화시키는 미보다는 ‘뒷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관객을 의식하고 일면 교태스럽기까지하며, 또한 사대부의 귀족적인 취향과 멋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춤은 닫혀진 좁은 공간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관객의 시선을 의식한 듯 각 동작의 움직임이 짜임새 있게 명확해야 하며 많은 기교와 기술이 필요한 춤이다.

영남교방청춤은 다른 전통춤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단박에 휘어잡는 매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춤이다. 그 매력을 살펴보면 대체로 간략하게 다음의 몇 가지를 짚어 볼 수 있다.

첫째, 음악과의 혼연일체이다. 보통 우리는 악(樂)·가(歌)·무(舞)라 칭한다. 악이 노래가, 춤이 서열화 된 것도 아니요, 어느 한 대복 처지거나 앞서거나 하지 않고 정삼각형의 도형을 이루는 것처럼, 악(樂)·가(歌)·무(舞)는 그렇게 다함께 어우러짐을 표출해야 한다.

둘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이다. 한국전통춤의 특징을 말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부분이 반복성이다. 이 뜻의 이면에는 다양한 춤태의 부재가 숨어 있다. 다른 춤에서 쉽사리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동작소, 춤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다양한 표현체의 개체수가 넉넉한 동작소의 저장고를 지녔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다른 전통춤보다도 음악의 한 장단 안에 존재하는 춤태가 현격하게 많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비주얼의 현대적 감각 수용이다. 이 부분은 전통문화예술의 미래의 존재성과 생명력을 가늠하는 중요요소이다. 느림의 미학과 경쾌함의 적절한 충족, 이 둘의 완급조절이 현시점에서 전통문화예술이 풀어내야 할 과제라고 볼 수 있겠다. 영남교방청춤은 느림으로 일관되지 않으며, 또한 빠름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 영남의 지역적 맥과 교방청춤의 맥을 살리면서도 현대 대중들의 전통문화예술을 향한 목마름과 갈증을 해소시키는 변모를 적절히 배합하는 춤태를 감각적으로 지니고 있다.

넷째, 작품의 무대 과학화이다. 현대 예술은 서구의 무대예술인 프로시니엄의 무대를 기본형으로 하여 많은 무대장비의 첨단 과학화를 수용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춤이 되고자 노력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안방문화의 사방위 방향성을 고려하는 춤태에서 프로시니엄 무대로의 전환을 고려하는 춤태로의 다각적 변화를 이룬 춤이다. 프로시니엄 무대의 특성과 관객의 시선을 전적으로 고려하여 몸 방향과 팔 사용법에 사선의 선사용을 감각적으로 이루어냈으며, 시선의 사용 역시 맞물려가며 춤꾼의 신체활용도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영남의 활달함에 남성성과 섬세함의 여성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다섯째, 네 번째 항목의 세부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겠는데, 몸 사용법의 차별화이다.

 

1.4.2.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외형미

영남교방청춤은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하며, 곡선과 직선의 조화, 여성미와 남성미를 표출하며 몸통 전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춤의 강·약이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다. 즉, 다른 교방춤과는 달리 활달하면서도 휘감아 들어가는 허리의 곡선, 어깨의 곡선미가 여성적인 매력이 느껴지는 춤이다. 또, 호흡은 소리의 호흡과 동일하게 하여야 한다.

판소리의 호흡법과 민요풍의 토속적인 호흡법이 병행되어 단전에서부터 공굴려 깊이 있게 끌어 올리면서 대삼소삼(大三小三)에서 다시 호흡의 세분법이 음악의 세분법과 일치하여야 움직이는 듯, 정지되는 듯 하는 이 춤의 특징을 잘 살릴 수 있다.

시선은 어느 춤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춤은 반드시 시선을 던지면서 가며, 턱선과 어깨선이 거의 일치되면서 자연적으로 턱선이 낮게 드리워지고 다소곳한 느낌이 느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렇게 할 때 몸의 동작선도 곡선미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영남교방청춤의 여러 특징 중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크게 상·하체의 움직임으로 구분하면서 의상이 주는 외형미를 주력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상체

① 상체의 손사위 : 활궁체 사위, ,, 훼치기 사위, 터벌림사위(일자로 뻗기형, 사선형), 휘몰이사위, 학체사위, 버들가지사위, 회뿌림사위 등이 상체 손사위의 위주이며

손동작들은 두 팔을 펼치며 크게 추어야하며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손목놀음 또한 이 춤의 주된 특징들이다.

② 어깨 사용법 : 신체역학 측면에서의 어깨는 팔과 몸통을 이어주는 이음새 역할과 함께 팔의 지지대 역할을 수행하는 중요부위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사선의 팔사용의 기본형을 어깨에서부터 다르게 사용한다. 어깨를 누르면서 가하는 롤링의 변화는 팔의 각도와 높이를 조절하게 된다. 이 점이 좀 더 시원한 상체의 표현, 활달함과 섬세함이 교차 표현되는 점이며, 안정감 있는 상체의 고저 변화를 이끌어 낸다.,

③ 시선과 턱과 어깨의 조합 : 영남교방청춤에서 시선과 턱과 어깨의 세 신체 부위는 동작 가운데 합일점을 보여주는 부분이 등장한다. 시선을 지향하는 춤태 가운데 시선과 턱과 어깨의 합일점을 보여주는 동작에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소곳함과 세련미의 공존일 것이다. 춤의 향기를 담당하는 듯 한 이 세 신체부위의 합일은 고혹적인 매력을 내적발산하는 영남교방청춤의 일등공신과도 같은 부분이라고 본다.

④ 허리사용법의 다양화 : 다양한 춤사위의 급감과 함께 신체 부위의 사용법, 빈도의 급감이 허리사용법이다. 신체 중심의 정점인 허리사용법은 다른 춤에서는 이제는 보기 드문 신체 활용법이 되어버렸지만 영남교방청춤에서는 세밀하게 잘 나타나 있다. 활궁체사위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선의 방향성에 또 다른 매력을 첨가하는 신체 사용법이 허리사용법이라고 하겠다. 허리 양 옆의 굴곡 있는 선의 사용법이 쉬운 신체사용법은 아닌 것처럼 다양한 허리사용법의 백미는 고혹적 매력의 발산을 넘는 광풍매력의 발산이라고 칭할 만큼 관객에게 색다른 깊이가 있다.

몸을 사용하는 법에 있어서 교방청춤은 굉장한 유연함을 필요로 한다. 하체는 객석정면을 향하고 허리를 비틀어 상체는 감았던 손을 천천히 펴면서 태극을 그려내며 천천히 회전하는 동작을 비롯하여 모든 동작소에는 유연함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또, 유연함에 이어 자진모리의 빠른 장단에서는 흥과 신명이 어우러지는 동적인 동작을 연출하여 민첩한 기교 역시 요구되는 춤이다.

⑤ 손목사용 : 맺고 풀고 어르는 동작을 넘어 강·약의 완급조절이 손목과 손끝에서 나타나는데, 손목의 사용법에 각도가 부여됨으로 그 묘미가 살아난다. 역시 여느 춤에서는 쉽게 만나기 힘든, 풀고 조이고의 자연스러움의 교차가 손목에서 나타난다.

2) 하체

① 하체움직임 : 교방이라는 의미와 함께 안방춤이였기 때문에 아주 좁은 공간에서 얼마나 춤의 묘미를 살리며 보는 이의 마음을 앗아갈 수 있고 흥과 멋을 전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러기에 아주 미세한 버선발의 움직임과 섬세한 디딤과 작은 움직임을 주는 발디딤은 작은 동선을 이용하면서 크게 보이는 굴신법과 호흡법을 일치 시키는 순간 미묘한 동선의 차이가 나타나는 춤이다.

② 발목 사용범위 강화 : 일반적인 춤보다는 발목사용에 있어서 각도의 범위가 큰 편이다. 이러한 사용법은 급격한 신체의 높낮이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무릎에 가해지는 하중을 분산시키는 효과도 있다. 물 흐르듯이 안정감 있게 변모하는 신체중심과 신체의 고저 변화는 각이 큰 발목의 사용법에서 찾을 수 있는 점이다.

③ 발바닥의 세분법 : 발은 다리의 자유로운 이동과 지지에 첫 단계와 같다. 이러한 첫 단계의 발에서 발바닥의 세분법은 춤의 중심을 좀 더 잘게(여러개) 쪼개어 사용할 수 있을뿐더러, 이로 인해 춤의 안정성이 더 강화되고, 호흡 또한 세밀하게 표현 할 수 있게 되는 원천의 힘이다. 영남교방청춤에서 발바닥의 세분화된 표현법은 어찌 보면 다양한 동작소와 맞물려있기에, 다양성의 동작소, 춤사위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원천이라고 본다.

④ 발의 움직임 : 발사위에 있어서는 발을 들어 살짝 돌려 뒤로 딛는 동작을 비롯하여 디딜방아 사위, 좌·우 달걸음사위, 홍두깨걸음사위, 덧배김사위, 외발들기사위, 용트림사위(용이 물에서 몸을 휘감아 돌며 승천하는 느낌의 공회전하는 동작)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첫 박에 솟아올라 잔걸음으로 걸으면서 숨을 내려 앉혀 다시 첫 박에 맺는 것으로 관객의 춤의 즐거움, 호흡의 맛과 멋을 동시에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⑤ 신체 각 부위 : 영남교방청춤은 춤 안에서도 즉흥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흐르는 대로 춤은 추어야한다. 몸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춤을 추는 사람이 어느 한 부분이라도 매끄럽지 못함을 느낀다면 영남교방청춤 안에서 그것은 정확한 동작의 완성도가 결여된 것이다. 몸의 중심인 골반이 빠지면 춤의 자세는 흐트러진 상태이기에 골반을 시작하여 등은 곧아야하며 가슴(흉부)은 안으로 감기우고 어깨선은 흘러야 하며, 상·하체가 동작의 형태미를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고는 특별한 동작 외에는 분리되면 되어서는 안된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모든 신체의 기운이 같이 흘러야 정확하게 맥의 풀고 맺음을 확연하게 표현할 수 있다.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교태미가 흘러나와야 하며 춤을 보면서 마음을 앗아 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특성을 살펴보면 먼저 무대를 철저하게 의식하고 항상 관객을 존중하는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무대진행법에 있어서 무대 중앙에서 시작하여 긴장감 있게 천천히 제자리에서 추다가 오른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하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왼쪽 사선 방향으로 전진한다. 다시 무대 중앙에서 무대 중앙 정면으로 전진하다 다시 제자리로 이동하는 등 대부분의 관객을 향한 사선이나 직선, 원형을 사용하여 관객이 춤을 감상하기에 가장 편안한 선을 사용하고 있어 관객을 존중한 춤이라는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단순한 선을 사용하는 무대 사용법은 영남교방청춤을 더 깨끗하고 담백한 맛을 느끼게 하는 반면에 꼿꼿함과 숭고함이 함께 깃들어 있어 깊이 있고, 감성적이다.

 

3) 의상

이 춤의 춤사위에서 가장 두드러진 동작은 부채를 드는 장면이다. 무대 중앙에서 부채를 들어 춤을 추는 것은 이 춤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와 함께 이 춤의 외형적인 미는 의상과 부채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사진 1, 2>와 같이 춤의 의상을 살펴보면 운파 박경랑은 검정 겉치마에 노란저고리를 주의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공연의 의미와 계절별로 색을 달리 할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속바지 두벌, 허리 묶는 속치마 두 벌, 겉치마, 저고리, 천노리개를 덧댄다. 다른 민속무용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데, 검정치마에 노란 저고리와 천노리개를 매치하는 것은 시각적 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며 색사로 수를 놓은 천노리개를 더함으로 복식의 미를 더 화려하게 장식한다. 또, 춤에 사용되는 부채는 교방에서 전해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특징적으로 사용하였으며, 글체는 놀음판에서 선비가 춤을 보고 써주었을것을 전제하에 운파 박경랑이 고정이미지화 시켰다. ‘황룡백학무(黃龍氣白鶴舞)’ 라는 의미로 ‘황용의 날아갈 듯 한 기운을 받아 백학이 춤춘다.’ 또는 ‘백학이 용과 같이 힘찬 기운으로 춤추며 움직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춤은 기운으로 추는 것이고, 힘으로 추는 것이 아니며 또한 백학처럼 부드럽게 긴 선을 나타내며 곡선과 유연함을 가르친 뜻이다. 또한 이면에는 사랑의 정표를 상징하기도 하며 부채를 살짝 펴고 얼굴을 가리면서 이어지는 동작의 의미는 여러 가지의 상징점이 내포되어 있다. 순백의 기면(器面) 위에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그림을 그려 만들어냈던 청화백자와 같이 부채를 펴 들어 얼굴을 가리며 이어지는 동작들은 단아하면서도 화려하고 도도한 품위가 흐르는 청화백자와 같다.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쳐지지도 않으며 언제나 중도를 지켜 균형을 잃지 않는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우리의 토속 맛이 절로 베어 나오며 교방의 멋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의상에서도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 춤은 흐르는 듯 한 유연한 선이 춤동작의 민첩함을 더하고, 자태를 뽐내듯 강렬한 빛을 발하는 청화백자와 같이 그 당당함이 기방예술문화의 영향을 받아 오랫동안 숙련된 고도의 춤 동작과 기술, 그리고 화려하고 귀족취향적인 면도 보여주고 있다.

 

<사진 1, 2>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

 

1.4.3. 3.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내면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드러나지 않고 삭혀도 내면에 흐르고, 젖어드는 멋과 흥이 호기심을 알 듯, 말 듯 유발해야한다.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내면의 감정표출이 분명해야하며 각자의 생각에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속내음이 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내면미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이는 박경랑의 춤을 “살아있는 영혼이었고 그 춤이 만들어 내는 절정과 내적 에너지는 관객의 혼을 끌어 올린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교방청춤을 비롯하여 춤을 추는 사람은 예(禮), 법(法), 도(道)를 갖춘 의식 있는 춤이 되어야하며, 기품이 있어야 한다고 운파 박경랑은 언급했다. 춤은 수련의 내공을 쌓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예(禮), 법(法), 도(道)에 따른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했다. 또, 천박한 이미지를 주어서는 안되기에 조선의 기생들은 가(歌), 무(舞), 악(樂), 시(詩), 서(書), 화(畵)를 잘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 때문에 선비들과의 교류가 가능하였듯이 모든 예능적인 면에 기예능이 높은 수준에 있어야 했다.

 

1) 정서적 측면

이제까지 언급한 내용들을 전제로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을 살펴본다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언어의 본질처럼 기방적인 것이며, 기교가 넘친다. 둘째, 춤사위에 녹아든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셋째, 우리춤의 기본 정신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가 내포되어 있다. 넷째, 다양한 동작소의 존재감. 다섯째, 몸 사용법의 차별화 등 움직임면에서도 다양한 특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 미적 특질 가운데 영남교방청춤의 내면세계에 함축된 정서적 측면을 언급해보는 것은 한국 민속무용의 특징을 밝혀보는 과제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민족정서를 표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심리학자 데이비츠(Davitz)는 “정서의 정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정서의 본질 때문에 대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정서의 의미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으나 본 논문에서는 정서의 정의를 ‘행동하게끔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외적표현과 내적 감각과 관련된 복합된 인식상태’로 규정짓고자 한다. 이에 따라서 민족정서를 춤으로 그 민족이 고유하게 간직하고 있는 정서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성에 나타나는 한과 신명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민족정서라 할 수 있는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무수한 외세의 침입 속에서 한이 맺힌 민족이며, 양반제도, 노비제도 등을 통해 사회의 하층계급 또한 한을 간직한 채 살아 왔으며, 남존여비의 불평등한 가치관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한이 있었다.

계층적인 핍박과 문화적인 억압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주어진 사회의 멍이 되고 맺힘이 된다. 즉 응어리진 사회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파 박경랑은 춤으로서의 심리적인 해방감, 생리적인 발산에 사회적 자유 등과 같은 풀림의 현상이 극대화되는 현장에서 다 같이 해결 될 수 있음을 뜻하여 영남교방청춤을 재구성하게 되었다. 즉, 춤을 통해 한이 풀리고 흥이 있고, 정이 되살아나고 신명이 솟는다. 영남교방청춤의 기능은 종교성보다는 오락적이며, 예술적 색채가 농후한 춤으로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 비중 있는 전통무로서 추어지고 있다. 우리춤의 미적 특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요소인 소위 예(禮), 법(法), 도(道)의 모습을 현시한다. 또한,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곧장 정(靜)·동(動)의 관계에 조용된다. 고요하면서 그 고요가 단순한 죽음의 고요가 아니라 무수한 생명력을 내포하는 역동적 고요, 곧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그 움직임 속에 무한한 고요를 내포한 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 갖은 뜻을 다해 추는 춤”이라 그는 언급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베어 나오게끔 자연적인 멋으로 추어져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밖에도 “직접 춤을 추는 춤사위의 태도는 다소곳하면서, 정갈하고, 단아하면서도 도도하게 버들가지가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바람에 거센 파도가 일어도 부서지지(흐트러지지 않는)않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마음으로 추어야한다.”는 그의 말 속에서 춤의 미적 특질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무기교의 기교라는 한국적 자연주의를 즉흥성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고요’과 ‘움직임’의 역설적 관계는 정서적 측면에서 보여 지는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임을 알 수 있다.

 

2) 지역적 측면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영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지니는 춤사위의 특질과 미의식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사료된다.

우선적으로 경상도라는 지역은 야류를 비롯한 경남농악, 학춤, 한량무 등이 발달되었던 지역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많은 예능인들이 배출되어 우리나라의 전통예술 또한 널리 보급, 보유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다.

영남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면 정교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부드럽고 굴곡이 많고 남성적인 수식과 기교가 많다. 또 장구장단의 경우 장단의 붙임새에 변화가 많으며 사설과 장단이 서로 엇물리는 엇붙임을 많이 쓴다.

해안지방에 위치한 영남지역은 지방색이 강하여 농악에서의 가락도 상당히 빨리 몰아내며, 진모리(덧뵈기) 가락이 많고 빨라서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준다. 그와 함께 향토적이며 소박함을 내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영남지역은 보통 음악이나 춤에 있어서 생동감과 뛰어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춤동작은 나긋나긋하기보다 민첩하며 세련된 편으로 개인놀음이 발달해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러한 소리의 특징과 같이 춤에 있어서도 잔기교가 많고 변화가 다양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흥미로움을 자아내며 엑센트가 강하게 표출되어 부드러움이 있으면서도 굴곡이 많아 전체적 흐름이 단순함과 평면적인 선율보다는 입체적 선율로 보여 지는 것이 특징이다.

예술성은 지방색(지역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삶을 지배하는 배경이 예술의 성향을 지배한다. 이렇듯 영남지역의 예술성향은 지역적 특성에 의해 오랜 시간 개별적으로 변모되어온 그들만의 특성화가 되어 오늘까지 영남의 대표적 성격을 지배해왔다. 한마디로 영남문화의 특징과 특성은 남성성으로 대변될 만큼, 투박하고 힘 있고 우직한 면이 있다.

이러한 음악의 지역적 특성들이 춤에서도 그 지역색으로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지역성이 내포된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감칠맛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충동질하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또, 고도로 다듬어진 전형적인 기방예술의 산물로서 춤사위의 기교가 뛰어나며 한과 멋과 흥을 다른 어떤 춤보다 몸의 사용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임을 알 수 있다.

춤의 기법에서도 호흡을 맺고 푸는 춤사위의 빈도수가 많이 드러나는 점, 그 외에 발끝, 손끝, 시선, 몸통사용 등 섬세하게 마무리 되어지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교방춤에 비해 춤사위가 많고 까다로운 편으로서 부채의 테크닉과 발놀음이 고도의 기교를 요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그의 춤의 멋은 정교한 발디딤과 다양한 몸 사용법에 있으며 깊은 단전에서부터 에너지를 출발시키고 절제하는 호흡은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에서 느낄 수 있는 우아미와 절제미를 나타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특히 내면적 상징성은 호흡과 발디딤을 통해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호흡과 발디딤은 이 춤의 정적인 특성에 역동성을 더해주는 요인으로서 발디딤은 발뒤꿈치, 발끝, 발허리의 세부분이 각각 섬세하게 움직여져 선명한 정확도를 보여준다.

또, 용트림사위를 보면 용의 용트림처럼 세찬 힘으로 곡선을 그리기도 하는 남성성과 학체사위와 같이 새의 날개짓처럼 가볍게 허공을 가르기도 하는 여성성의 교태로움이 더하여 남성성의 힘 있고 우직한 면과 여성성의 기교스러움이 모두 갖춰진 복합적 요소를 잘 조화시킨 춤태가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영남교방청춤은 영남지역의 특징이 잘 어우러져, 음과 양이 잘 조화된 춤이며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게 한쪽으로 쏠린 춤사위가 아니며 상체는 남성적인 활달함이 강조되고 하체는 여성적인 섬세함이 강조되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춤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도도하고 가볍지 않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둔탁하지 않는 춤이다. 또한 무엇보다 이러한 영남지역의 특성은 곧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특성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 형태적 측면

교방청춤, 안방의 춤은 무대의 격식이 없는 춤이었으나 보는 이가 자리한 각도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무대화 되어가는 우리전통공연은 극장형식에 맞추어 삼면(앞, 양측면)에 따른 춤의 감상척도가 거의 비슷해야만 그 춤동작을 균등하게 감상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기에 일찍이 박경랑교방춤은 동작의 무대방향에 따른 동작의 형태미는 이미 미래를 예측하고 정해진 것 같다.

겉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정지 상태이면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움직임이 하나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 즉 집중된 동작이 불러일으키는, 순간적인 일탈과 파란으로써 일상적인 시공간을 미적시공간으로 자리바꿈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다. 겉으로는 빙산의 일각만 보이면서 속으로 알 수 없는 덩어리를 숨쉬고 있는 것과 같은 침묵적 내면의 역동성이다.

1.5. Ⅳ. 결론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서로 바르게 교감하는 가운데 행복해질 수 있는 춤이며, 무참히 짓밟혀도 살아나는 끈끈한 생명력을 가지고, 삶에 대한 은근한 역동성이 눈에 거슬리지 않게 어울리는 기기묘묘한 춤으로, 약함과 강함이 조합된 중성적인 춤이다. 풍속화속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박한 서민적 정서와 조선조 후기의 교방춤을 현대에 이르러 무대화시킨 운파 박경랑의 춤 무대에서 보여 지는 교감을 토대로 영남교방청춤의 내면 및 외면적 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춤사위를 중심으로 상·하체로 구분하여 큰틀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영남교방청춤에는 내적 에너지의 집약과 이완의 작용을 충분히 담아내어 독특한 미의식을 춤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긴장과 이완을 적절히 배합하여 맺고 풀고 어르는 한국춤의 묘미를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이것은 즉흥성의 원리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즉, 영남교방청춤을 비롯한 모든 한국춤은 고유한 민족정서와 연계성을 가지므로 한국인의 심성에 내포된 한과 신명이라는 정서를 즉흥적 원리를 통해 표출하고 이것은 곧, 감정이 춤으로 보여지는 행동양식인 예(禮), 법(法), 도(道)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상호작용으로 구성되는 영남교방청춤의 흐름은 심성의 자연적 표출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춤의 특징은 형식상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율동이지만 내용면으로는 풍부한 감정이 스며있으며 낙관적이다. 특히 본 논문에서 살펴 본 영남교방청춤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자태가 드러나는 사방춤이며 몸통의 쓰임이 많고 춤사위가 원형지향적이다. 유난히 잦은걸음으로 장단을 타는 사위가 두드러짐과 동시에 몸동작이 매우 기교적이며 잔잔하면서도 엑센트를 지닌 특성과 발끝, 손끝, 손목, 허리사용 및 시선처리 등이 섬세하게 마무리되어 감칠맛을 자아내는 점 등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는 춤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춤의 네 가지 미적요소인 한과 흥 그리고 멋과 태를 고루 갖춘 춤으로 한국적 자태를 엿볼 수 있는 춤사위들로 구성되어져 있으므로 민속무용의 특질을 살펴봄에 있어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은 충분한 연구대상이 된다고 사료된다.

이와 같이 영남교방청춤의 미적 특질에 고찰은 뿌리 깊은 한국인의 미의식을 밝히는 것과 동시에 민속춤의 한 특성을 밝혀보고 우리 민속무용의 사관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다고 할 수 있다.

근대시기 이후 이른바 무대 양식화를 통해 변화, 발전되어 온 전통춤들은 오늘날 전체 춤공연문화에 있어 매우 비중 있는 위치에 놓여있다. 이 시점에 그의 영남교방청춤을 통해 또 다른 춤의 미의식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춤에 대한 뚜렷한 가치기준을 세우는 일은 한국무용의 전통에 대한 올바른 개념정립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새로운 춤전통을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영남교방청춤 뿐 아니라 전통은 지켜가기 위하여 지켜져야 할 부분과 또, 지켜내기 위해 더해지는 점이 있어야 한다. 본 연구는 이것을 계기로 현대의 영남교방청춤 원형에 관한 기초자료로서의 의미를 갖기를 바란다.

참 고 문 헌

 

서적

김매자(1996), 한국무용사, 삼신각.

채희완(1985) 공동체의 춤 신명의 춤, 한길사 p.23.

 

논문

김동민(1966), 아시아문제연구소논문집 제5집, 李朝枝女史, p.75.

김용숙(1990), 韓國女俗史, 民音社, p.264.

백재화(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69.

안미아(2001), 조선조 후기 교방(敎坊)춤 특징에 관한 연구, p.5.

정병호(1889), 무용론, 서울六百年史, 서울특별시, p.1297.

 

정기간행물

2011, 계간 예술문화비평 제2호 가을, 한국예술문화비평가협회, 248-253.

우리춤 연구소, 춤으로 본 지역문화, 한양대학교 출판부, p.6.

 

기타

2011, 8, 4, 중요무형문화재 제 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2012, 1, 30, 운파 박경랑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ABSTRACT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Yim, Ji Ae(Dongdukuniversity)

 

This study examines structural significance and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Park Gyeongnang Youngnam Gyobang Dance. Structural, aesthetic analysis of traditional dance will contribute positively to researches on philosophical structural studies of traditional dance in general.

Youngnam Gyobang Dance reflects the life and arts of the people of Late Joseon Dynasty. It represents Korean ethos and reflects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Youngnam Gyobang Dance evolved to be artistic and recreational dance, rather than religious dance. In the process, professional Gyobang dancers developed elegant and elaborate dance movements. This study focus on late Joseon period in search of the origin of Gyobang Dance, examining the aesthetic characteristics of Youngnam Gyobang Dance.

So far, theoretical works on Woonpa Park Gyeongneng's Youngnam Gyobang Dance and records of the dance are far from comprehensive. The author attempted to analyze Youngnam Gyobang Dance performed by Woonpa Park Gyeongnang on micro-level, in search of fundamental aesthetic consciousness. The conclusion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the following: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turned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into artistic prope,rties. Cultural characteristics of Youngnam region, which is often thought of as masculine are reflected to the movements of the dance.

In addition, perfect harmony with music, various movements, modern sensation of visuals, scientific approaches to proscenium performance characterizes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Especially, Woonpa Park Gyeongnang's Youngnam Gyobang Dance goes beyond the traditional limitations of body movement. This was possible because it inherits the tradition stemming from the beginnings of Gyobang culture.

 

Key : Youngnam Gyobang Dance, Gyobangcheong, aesthetic characteristic, Woonpa Park Gyeongnang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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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백 재 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존재했었기에 지나간 시간의 그릇된 사고(思考)에 발목 잡힌 ‘교방’이 이제서야 가치가 되살아난 인식의 대접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춤꾼의 무던하면서도 끈기있는 노력에 의해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해 온 전통춤의 인식 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교방청춤을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둘째, 영남교방청춤을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및 선행연구 검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의 인터뷰 및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남교방청춤은 여느 전통춤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점이 존재했다.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유지한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역사의 춤이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르는 춤이다. 운파 박경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 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영남교방청춤의 맥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연구의 제한점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Ⅳ. 결론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참고문헌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과거로부터 계승된 온갖 표현방식, 약속(conventions), 기교(technique), 어법(dictions)에 관계하여 일정한 지속적 특성을 지니면서 민족적, 지역적 예술정신으로 일관되어 민족의 고유양식을 바탕 지우는 형식 또는 정신상의 규제력이나 실천성을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전통은 사회, 민족 또는 여러 문화영역에 있어 과거에 형성되어 역사적 생명을 가지고 미래에 적극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행동, 관습, 의식, 사상, 양식, 태도 등의 가치 체계로서 수 많은 시대를 통하여 전승되는 하나의 규범적인 힘이 되며 인간을 역사적 존재답게 만들어 후세의 문화창조를 근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뿌리’(根, foundation)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꺼내는 것은 흔한접근방식으로 메뉴얼화 된 사고이며 수순이다. 보편에서 진리가 나오는 법이다.

오롯이 시간만 입은 과거의 예술이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니듯 지난간 시간을 덧대인 것이 모두 역사의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절대 시간의 날실과 민족의 혼이 깃든 시실의 만남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역사와 전통이 탄생하게 된다.

본 연구는 춤의 한 카테고리를 형성하며 독보적인 색감을 지닌 ‘영남교방청춤’의 역사, 문화, 사상, 더 나아가서는 의미를 포괄하게 되는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진실은 시대의 시간성에 상대적으로 더디게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다.

관료적인 제도에서 시작된 ‘교방’이라는 문화도 진실을 강탈 당한 왜곡에 갇히고, 곱지 않는 시선 속에 밟힌채 오랜세월을 진실을 향한 시간만을 기다리던 역사의 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수 차례 함께하고 넘겨왔던 궁중과 민속의 교방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한순간에 치명적인 인식의 철퇴를 맞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산술적인 시간 35년보다 더 무서운것은 교방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혹한의 추위와 같이 매서운 시선이다. 곱절의 시간만큼 보내고 난 지금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올바른 인식으로 향하는 사회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는 시작점과 같은 발아점이 존재한다. 교방의 인식이 새물결을 타고, 인식의 변곡점을 맞게 된것은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춤의 명칭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의 변곡점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관심을 갖으며 본 연구의 필요성이 착안되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 해 온 전통춤의 인식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하나의 깨우침과 일깨움은 또 다른 세계로의 방향지시등이 되어주게 된다. 운파 박경랑에 의해 전승되고 전파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연구는 나아가 우리 전통춤판 및 전통문화예술의 신선하고도 활기찬 대중적 문화관조와 함께 전통의 학문적 발전에도 크나큰 기여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1.2.2.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본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내용을 구명하기 위한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검토, 생존해 계시는 예능보유자선생님들 및 석학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구결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1.2.3. 3. 연구의 제한점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은 시대별로 괄목한만한 역사적 사건, 변혁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승의 측면에 있어서 가계도, 예맥 가계도, 영남지역의 예술적 특색에 초점을 맞추어서 춤의 특색을 연구하였다.

 

1.3.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영남교방첨춤의 춤 명칭에서 도드라지는것은 단연 ‘교방’이다. 교방에서 기녀를 유추해내게 되고, 기녀를 통해 기생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며 그로 인해 궁극에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색채를 가늠하게 되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일게 된다. 그러기에 ‘교방’의 역사적 탐구가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구명하는 첫 연구단계라고 생각한다.

 

1.3.1.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교방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연구에는 국가기관이라는 명패가 함께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의 국가기관에서 예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은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音聲署)를 그 시조로 삼을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족중심의 귀족사회에서 연주되었던 음악문화를 관장했던 왕립음악기관은 대악서・관현방・아악서로 압축해서 설명되어질수 있다. 왕립음악기관 소속의 공인들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렀으니, 여기(女妓)가 궁중정재를 연주할 때에는 여령(女伶) 또는 교방(敎坊)이라고 불렀고, 음악연주를 맡았던 공인들은 때에 따라서 영인(伶人)이라고도 부른 듯 하며, 영관(伶官)・악관・교방악관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의 위상과 사회적, 정치적 대우와 신분적 위치가 귀족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왕립기관으로 음성서가 존재하였다. 예술교육기관의 차원 높은 출발점이 고려시대의 교방의 전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고려는 신라와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화예술과 사회경제력 변형이 없는 왕조를 설립하여 불교를 국시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문화를 번성 시켰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교방이 우리나라의 궁궐에 설치되어 여악을 담당하였으며 기녀들에게 악, 가, 무(樂歌舞)를 교습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의 발달은 우리나라 가무역사를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기녀의 예술적인 교육은 신라시대의 음악서(淫樂書), 고려시대에서는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을 중심으로 이조시대에는 교방(敎坊)에서 가무와 악기를 익혔다고 본다.

이조시대에 와서 정책적인 변화는 소불종유(小佛從遊)의 사회적 기운에 관계되어 여악의 성격이 다소 교체되어 태종(太宗) 6년에 여악에 관한 제도의 개정으로 의녀(醫女), 침선비(針線婢)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수계층이나 귀족 계층들의 의료진료를 위하여 의녀제도(의녀제도)를 설치하였으나 의녀와 침선비는 자연 궐내에서 주연을 위한 가무(歌舞)를 겸하였기 때문에 고려이후부터 계승되어 온 관비(官婢)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기녀(妓女)가 조선왕조 더 나아가서는 한국역사상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燕山君)시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기녀(妓女)의 수를 늘려 그 수가 서울에만도 수 천명이 되었으며 기녀수의 증가는 전국의 경제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대규모적인 기녀제도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해체되었만 기녀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성리학에 물들어 있는 선비들에 의해 기녀의 폐단이 줄곧 비판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체제상 어쩔 수 없이 허용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한말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기녀제(妓女制)로 바뀌었다.

한말 교방(敎坊)조직은 일제치하에서 무산되어 버렸으며 다만 민간인 운영으로 예기(藝妓)조합인 권번(券番)을 통하여 기녀들이 소수나마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관에 의한 여악 교육이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관에서 활동하던 관기를 포함한 각 지방의 기생들이 조합을 창설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무용기관에 그 소임을 넘기게 되었다.

궁중예식(宮中禮式)에 따른 음악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면서 여악(女樂)의 교방(敎坊) 역할을 했던 장악원(掌樂院)을 통해 궁중정재(宮中呈才)는 많은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한말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고종31년)을 지나면서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하기에 이르러 그 이듬해인 고종 32년에 장악원은 장례원(掌隷院)에 통합되고 협률사로 축소되었다. 1897년(광무1년 고종34년) 교방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고종 44년(1907년, 융희원년)에는 궁내부관제가 다시 개정되면서 장악원으로 바뀐다.

표 1. 예술에 관여한 국가교육・행정기관의 변천사

신라시대 왕립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 7세기 중엽 설립

고려의 왕립음악기관 대악서(10세기말)・관현방(1076년 문종30년)・아악서(1391년 공양왕 3년)

조선시대 아악서・전악서・봉상시(1392년 태조1년), 관습도감(1393, 태조2년 : 관습도감에 교방여기가 속함)

장악서(1457년 세조3년) (우방 : 전악서, 좌방 : 아악서)

장악원(1469년 성종)

교방사(궁내부) (1897년 고종 32년)

장악과 및 아악대 (구한말 1907 – 1910)

이왕직 아악부(1910 – 1945 일제강점기)

구왕궁 아악부 (1945 – 1950)

국립국악원(1951 – 현재 :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

이렇듯, 예술에 관여한 국가기관은 신라의 음성서부터 현대의 국립국악원에 이르는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가장 주지할 사항은 삼국시대의 음성서부터 예능은 국가차원에서 설립・관리되어지면서 장려되어져 왔다는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의 명칭이 보이면서 ‘교방’이라는 역사가 민간차원보다는 나라의 관리와 장려하에 생성되어져 왔다는 점이다.

 

1.3.2.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 대악서・관현방・아악서의 음악기관에 속한 여기(女妓)가 궁중정재에 관여하는 곳을 일컫던 것으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조에 교방기(敎坊期) 교방사(敎坊司)의 명칭으로 바뀌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표. 1> 에서도 보이듯이 교방사는 고종 32년에 개칭된 후, 구한말까지 존속되어지다가 1907년 관기가 폐지된 이후 교방에 관련된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관기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관기의 역할을 하던 이들의 활동은 다시 권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게 되고 일제강점기 속에서 전통춤과 전통음악의 전승에 있어 매우 존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통춤의 교량역할을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전통문화예술에 춤의 영역이 형태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는데, 관기는 1905년 여악제도가 폐지된 후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영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된다.

 

 

표. 2 조선시대 여기의 유형 분류표

소속에 의한 분류

관기(官妓)

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家妓)

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

자유로운 여기

주거지에 의한 분류

경기(京妓)

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

지방관에 적(籍)을 둔 여기

기능에 의한 분류

예기(藝妓)

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기

색기(色妓)

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

등급에 의한 분류

일패(一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이다

이패(二牌)

일패에서 타락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

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으로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수 있다.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권번을 통해 많은 명기가 배출되었다.

권번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때 까지 존속 되어지다가 해방 이후 지방에서 서서히 그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부산의 동래권번이 그 생명력에 있어서는 권번역사의 끝자락을 장식한 곳이다. 부산의 동래감영 산하 동래교방청이 한말까지 존재하다가 1910년 이후 동래교방청이 해체되자 아전집안 자손들과 유지들 자식들 중 풍류를 즐기던 소위 한량들이 돈을 모금하여 동래예기조합을 만들었고 얼마 후 동래권번으로 바뀌었다.

1.3.3.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의 시기를 가늠하자면, 시기적으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들 수 있다. 그 시점부터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많은 문호개방과 조약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개방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자들과 쇄국정책을 옹호하는 자들간의 신, 구의 대립이 갑신정변, 동학동민운동 등의 배경이 되었다.

근대화를 향해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쁨 변혁과 그 변혁을 담아내는 의식의 전환은 전통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교방의 명칭을 갖춘 고려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던 교방은 구한말 근대화의 굴곡진 과정(문호개방, 일제강점기)을 거치면서 권번으로 핵심적 성격의 전환을 겪어야만 했다.

교방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관기들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기들의 뜻이 하나 둘씩 모여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는 변화의 시기를 갖는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고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하게 된다.

교방문화는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다음의 변화와 변혁을 갖게 되었다.

첫째, 교방은 근대화 과정에서 먼저 권번으로 모든 직제가 바뀌고 난 후, 교방이 지켜 온 문화예술의 향응, 향유 방식에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둘째, 교방의 설립역사 이후, 대부분의 향유대상이었던 일부 특정계층을 벗어났으며, 공연목적이 집단적인 형태의 일원에서 개인능력 위주로 집중되는 예술성의 개인성향충족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학습방법도 지역별 권번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르게 변화했다.

셋째, 교방문화의 권번으로의 이동은 자칫 사장(死藏)되고 단절될 뻔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원형을 고수하게끔 이끈 존재방식이라고 말할만큼 중요한 변혁이다.

 

1.4.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수년째 전통무대에서 변혁의 눈(目)이 되어온 작품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살펴본 교방이라는 국가예속기관으로부터 예술맥을 잇는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영남이라는 지역적 맥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1. 1. 영남교방청춤의 맥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慶尙道)’를 이르는 말로 호남(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말)과 함께 팔도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영남이라는 지역은 지형적 산세(山勢)가 험준하고 호남에 비해 비옥한 농지 보다는 척박한 토지가 지배적인 형질의 땅이다. 이러한 땅의 성질은 확연하게 삶에 투영되고, 민중의 생활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춘천아트페스티벌 中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닫혀있는 지형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지형적 형질이 춤의 본 바탕의 맥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남교방청춤의 춤세를 논할 때, 여는 전통춤에서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활달함의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특징은 바로 영남지역의 형세(形勢)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유구한 역사적 맥을 이으며, 춤태에서는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활달함과, 여성성을 지탱하는 하체의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외적표현의 내적특징이 존재한다.

1.4.2.

1.4.3.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영남교방청춤을 추어 오고 있는 운파 박경랑의 예술적 맥락은 스승의 스승 자리에 자리잡은 이가 故 김창후(1887∽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초대 예능보유자. 원양반 )선생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바이다. 故 김창후 선생은 박경랑의 외증조부로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1929∽1991 중요무형문화재 제 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중)에게로 이어지는 예맥(藝脈)을 짚어 볼 수 있다.

또한 박경랑은 가계도의 예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 단순 만족하기 보다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의 원형에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끊임없는 노력은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학습하는 기간을 스스로 택했다. 춘정 강옥남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구전심수의 개인학습을 통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 시켰다. 이와같은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의 예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깃든 책임감의 수행이 있어왔기에 오늘날의 영남교방청춤이 존재한다고 본다.

故 김창후선생은 교방이 권번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사대부집안의 풍류를 즐기던 양반신분으로 권번 생성과 권번의 활동영역에 근접하게 사셨던 분이다. 이는 운파 박경랑선생을 통해 듣게 된 외증조부의 삶의 패턴과 생애이야기에서 자주 확인되는 부분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1.4.4.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예맥의 전승이 형태와 기능면에서 균형있게 자리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독특한 사적 접근이 될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신 故 김창후선생의 생전에 삶과 예술을 영위하던 패턴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는 고성이라는 한정적 지역성을 벗어나, 영남지역 전체를 휘감아 도는 폭이 큰 풍류(風流) 활약상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고 한다.(196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경랑선생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주신 故 김창후선생의 모습의 기억과 윗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된 사실)

영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풍류정신과 영남이 지닌 예술의 맥을 자신의 춤에 풍요롭게 담아내셨기에 지금의 영남교방청춤이 외증조부의 고향이자 운파 박경랑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한정적 지역성과 맥락을 뛰어넘는 춤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김창후 선생의 출생연도를 보면 1887년도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대부의 풍류를 아는 자제들이나 양반들이 권번의 예술향유를 누릴 수 있던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이는 김창후 선생의 일가친척들의 증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 해주고 있다.

초대 문화재의 자리에 오르신 이유가 물론 고성오광대의 놀음과장을 전승시킨 점과 전수 능력에 있어서 누구보다 탁월하셨기도 하겠지만, 평상시의 그의 삶의 패턴이 전통문화가 배어있는 풍류를 여유롭게 즐기는 자연스러운 형태였기에 더욱 가능했던 부분이라고 본다. 쉽게 표현해서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는 식으로 영남지역에서 소리와 춤과 악기의 연주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가 흥을 나누고 멋에 취하는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박경랑 선생의 외가쪽 어르신들이 기억하시는 故 김창후 선생의 모습을 설명해주시는 증언이 자주 있었음).

영남지역의 예술상이 걸출한 외적활동을 한 중대한 역사의 단편이 된 일이 故 김창후 선생 생전에 있었다.

1901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난 황웅도는 젊은 시절 고향에 교육사업과 양잠산업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저항한 지사이다.

황웅도는 고성에서 인생의 변화를 몰고오는 김홍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홍주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무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던 예술인이었으며, 고성의 권번에서는 김홍주를 학습시키기를 원했기도 했었고,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고성 옛어르신들의 의견과 증언).

여기서 김홍주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숨어 있는데, 김녹주(1896∼1923)의 여동생이 김홍주이다. 또한 김녹주는 故 김수악의 스승이시다.

김홍주의 짧은 고성 권번에서의 활약시도와 학습에 고성의 고착화된 예술성이 자연스럽게 입혀졌을 것이며, 또한 故 김창후선생과 같이 풍류에 통달한 선생들로부터 한마디, 한절, 한가락씩 가르침을 받아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김홍주는 연인 황웅도와 끝내는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이때 김홍주의 예술성은 일본 각지에서 조국의 예술에 목말라 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가무악의 혼을 전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김홍주는 고성권번에서의 활약으로 자신의 예술성 위에 고성의 예술성과 특성을 덧입게 되고, 연인 황웅도와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며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는 예술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故 김창후 선생과의 문화예술적 교류가 여러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예견해보는 예술의 상호적 교류가 김홍주 선생의 예술에 영향을 필경 미쳤을 것이며, 이러한 영향은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종합해보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초대 창시자이신 故 김창후 선생의 영남지역을 자유롭게 휘감아 다니시던 풍류정신에 의해 폭넓게 영남 전 지역을 아우르는 영남의 특색을 고루 입혀진 춤을 정리해 내시게 된다.

둘째, 故 김창후 선생은 고성 지역의 유지이자, 남다른 예술성으로 권번 출입이 잦은시기에 김홍주와의 문화예술적 상호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되며, 그러한 교류가 긍극엔 그녀가 뿌리 내린 일본에서의 조선 가무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1.5. Ⅳ. 결론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과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해보고자 했다.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을 구명하기 위해서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을,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을,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를 각각 연구하였다.

국가교육기관은 삼국시대의 신라로 거슬러올라 갔으며, 음성서의 설립이 ‘교방’과 같은 예능전문관장기관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교방’과 조선시대의 교방사, 장악원의 ‘교방’을 거치면서 국가예속기관으로 전문예술인을 교육, 활용하는 성격의 틀은 유지되었다. 근대화를 거치고 국가의 운명이 달라지면서 교방은 오랜세월의 역사를 뒤로 한채, 권번으로의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번의 기능과 활약이 있었기에 다행히도 현대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일제강점기의 모진 정책에도 쇠잔함 없이 원형을 보전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교방문화는 가시적으로 권번으로의 형태적 변환을 맞게 되는데, 이때 가장 주지할 점이 이전까지의 교방문화가 개인의 예술성 발휘 측면 보다는 일부 특정계층을 향한 수준높은 향략제공과 국가의 대소 내연의 집단춤에 있어 일원의 역할에 그치는 수준이였으나, 권번으로의 이동 후, 교방문화보다는 비교적으로 개인의 예술성 발휘와 무대로의 예술성 발산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궁중무용의 학습과 공연이 일부 특정계층만을 향한 춤의 성격을 벗어났으며 춤 자체의 역사성 이음새에도 권번의 기능은 너무 훌륭히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하기 위하여 1. 영남교방청춤의 맥을,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았다.

영남교방청춤의 맥은 영남지역의 지리적 특색과 지형적 기운이 녹아 들어간 춤으로, 상체는 남성의 활달한 기개가 표현되었고, 그 상체를 받치는 하체는 여성성을 지향하며 섬세와 세련미를 자아낸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외증조부 故 김창후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故 조용배선생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데, 영남지역의 예술의 혼이 두루 담길 수 있게 김창후 선생의 활약상이 두터웠었다. 고향 고성에만 머무르며 권번 출입을 한게 아니라 영남 전역의 춤, 소리를 찾아 헤매면서 영남의 풍류의 맥을 익히셨다.

영남교방청춤은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에서는 독립운동가인 황웅도의 연인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며 활동한 김홍주와의 예술인연을 살폈다.

김녹주의 여동생으로 가무에 능한 김홍주는 고성의 권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홍주의 예술성과 고성의 예술성이 상호 교류 하는 관계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 김홍주의 일본에서의 가무악 활동상에 뿌리는 고성에서의 예술활동이 그 뿌리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추측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문화예술 전승의 관점에서는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이어간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춤이다

또한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의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른다. 운파 박경랑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 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영남교방청춤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참 고 문 헌

 

김지은. 2007. 조선시대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기녀의 변화양상 고찰.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미학예술사전 예술사전 시리즈Ⅰ. 미진사. 1989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성기숙. 2005. 『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송미정.1999. 현 전통무용에 내재된 기방무 성향에 관한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송방송. 2006.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우리춤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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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2회 세계한국국악경연대회 심사참가후 뉴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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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파 박경랑이 맥을 짚어가고, 이어가는 춤! 영남교방청춤

 

백재화(kenzo71@hanmail.net)

 

1.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오늘의 이 시간, 오늘을 장식했던 사회 전반의 이슈와 사건들도 일정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차를 지나게 되면 역사의 궤 속에 들어가게 되며, 선택과 선별의 잣대에 의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는 문화, 예술이 될 것이다.

지금 광풍처럼 몰아치고, 대중세계를 압도하는 사건, 흐름, 유행이 모두 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찰나의 유행과 전통의 밑동이 되고 초석으로 자리매김할 재목은 한마디로 시간이라는 흐름이 그 유사성을 분별해 내게 된다.

오늘의 문화가, 이 시각의 춤이 전통의 옷을 자연스럽게 입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 바람의 시각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라고 생각한다.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백재화, 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 69).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우리춤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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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특집 인터뷰

정영만 선생님 인터뷰

(2011년 춘천아트 페스티벌에서의 인터뷰)

 

interview by 백 재 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춤과 음악, 소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참 좋은 질문이네. 이제까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춤과 음악과 소리는 따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동작 부분이나 눈으로 봤을 때 저건 춤이다, 소리다, 저건 음악이다 이러는 것이지. 옛날말에 우리 사설에도 나와 “노래가 나면 춤이 난다”라는 이야기가 있어. 소리 없는 춤이 어디 있고, 노래 없는 춤이 없다고, 흥이 나면 먼저 노래를 가지고 흥이 나면 몸이 움직여지잖아. 그건 자연적인 발생인거야. 사람은 자연의 순리대로 가야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해서 따로 떼어간다든지 하면은 이것은 이상하다. 그 근본을 모르고 춤을 춘다는 자체가 그것은 춤이 아니다.

춤은 무언의 극인데 무언의 극을 어떻게 동작에 아무 느낌이 춘다는건지, 그러면 그건 춤이 아니다. 그래서 춤과 소리는 같이 간다. 같이 혼합되어야만 제대로 된 예술이 된다. 혼합되어야만! 춤과 소리가 없을 수가 있나? 음악도 소리에 속하지.

소리가 나야 춤이 나거든. 춤이 나야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누군가 하는 말이 “춤을 부르는 소리”라고 하더군. 그게 맞는 말이야. 안그래요?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리 없는 춤이 어디가 있어요? 소리가 빠르면 빠른대로 춤을 출 것이고, 늦으면 늦은대로 출 것이고, 몸 동작이란 자체가 그렇잖아요. 허나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춤이란 자체가 왜 춤을 출까? “왜 춤을 춰?”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을 못 내려요. ‘좋으니까?’

 

좋은 것은 기본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들리는 소리가 몸을 움직이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까 춤을 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까 춤이 추어지는 거예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춤이어야지!

 

누구는 그러더라구요. ‘춤’이라는 글자가 사람이 마음위에 서 있는 형상을 본 따서 만든 글자라구요. 그래서 춤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또 마음을 움직이게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그건, 학자들이 해석해서하는 말이고 나는 학자 수준은 못되어서 그렇게 말은 못하고, 나는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또 우리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말하는거예요.

“나는 춤꾼이예요!” “나는 음악가예요!” 이런 말이 나는 참 못마땅해!

 

선생님께서 좀 전에 말씀해주셨듯이, 선생님처럼 오랜 세월 한 분야에 몸담으신 분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박사 논문을 선생님처럼 한평생을 예능에 몸담아 오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그분들이 생각하시는 한국춤에 대한 생각을 interview하는 연구였는데, 너무 흥미롭게도 분야는 각자 다르셔도 한국춤을 생각하시는 카테고리는 일맥상통했습니다.

 

그렇지, 그래 봐야지.

 

공부하시는 분들의 이론이나 생각이 먼저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봐요. 학자분들이 책을 통해 춤에 대해 음악에 대해 소리에 대해 많은 이론을 펼치셨지만, 그분들도 저처럼 여러 선생님들께 많이 여쭤보고 공부해서 문서화시켰기 때문에 학문적 정의가 나왔지, 실기를 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앞서서 여러 정의를 내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작업(지금의 interview)을 학자들이나 또 자기 선생을 모시는 제자들이 잘못된 것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이 세상이 잘 못되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든데...

예를 들어 자기 선생이 볼펜을 연필이라고 했어. 그건 아니잖아. 앞에서 아부한다고 볼펜을 연필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세상이 어지러워서 그 앞에서 볼펜을 연필이라고 한단 말이지.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 이거 혹시 연필 아닐까요?’라고 정중하게 다시 여쭈어봐야지. 제대로 된 선생은 ‘어 그래..연필이었구만, 연필이야.’라고 말해주겠지만 ‘아니야. 그건 볼펜이야!’라고 밀고 나가는 선생은 상당히 선생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런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

특히나 춤에 있어서는 전공한 춤꾼... 이 전공이라는 말에, 전공했다는 말에 있어서 나는 참 아이러니한 것을 느끼는데, 난 어릴 때부터 우리 선생님한테 와서 교수나 교수될 사람이나, 박사논문 쓰는 사람들이 와서 몇 시간 취재나 인터뷰하고 가요. 잠깐 몇 시간이야... 그게 전체인 것처럼 다 퍼져서 그게 획일화가 되어서 정론화가 되어 있단 말이예요.

그러면, 물론 그 말은 맞겠지만, 그게 정말 속 맛을 알겠는가? 아니다 이거지. 그래서 춤은 춤대로 장단은 장단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가는 거지. 이건 아니라 이거지! 같이 간다. 왜 같이 가느냐? 우리는 권번에서 배울 때 춤이라고 해서 따로 배우고 소리라고 해서 따로 배우고 그러지 않았어요. 소리 속에서 춤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춤에 호흡이 있나?

 

선생님의 질문에 일상적으로 답을 하자면 춤에 다 호흡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응, 배웠지! 그런데 호흡이 없는 게 어디 있겠어! 그러나 춤에 따르는 호흡은 아니란 말이지.

 

소리에 따르는, 소리와 함께 가는 소리와 같이 가는 호흡이 춤의 호흡이라는 말씀이신거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잘 봤네. 그러니까 춤에 따로 되어 있는 호흡은 없어! 난 그것은 결론은 내린다.

소리하는 사람들이 “얼씨구나~ 어~ 어~~~으...” 소리에서 거기서 춤이 나오는 거야. 발림에서 춤이 나오는 거야! 발림이 춤이 되는거지. 그 시대에서 어느 한 사람이 “어 여기가 춤이 좋겠구나..이 사위가 좋겠구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어진거야! 음악도 마찬가지야. 거기에 맞춰서 그때 그때 좋아서 지어진거야. 그걸 정리를 하는 가운데 또 교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까 어디에서 몇 장단에서는 호흡을 쉬고 끌어올릴 때는 호흡을 내 뱉고 뭐 이렇게 정론화 시킨 것은 잘못 된 것이지. 이건 교과서적이다. 다만 배울 때는 이래 배웠지만 다음에 할 때는 이래 하지 말아라. 이건 기본적으로만 하는 것이지 이게 다는 아니라는 것을 꼭 단서를 달아서 가르쳐주어야해!

그래서 지금 춤꾼들이 거의 중급정도 올라가서 다, 거의 다 뭐.. 이런 춤꾼들이 누굴 가르치는데 있어서 어디에서 몇 장단 올라가서 내뱉어주고 어느 동작에서는 호흡을 팍 쉬어주고.. 이런건 말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왜 아니냐 하면은 하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춤을 왜 그렇게 지금 새로 정리한다는 명분하에 그 춤을 로봇식으로 만들었냐 그거지!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이거지. 예술은 자유분방하고 그 다음에 제약을 받지 말아야하고, 왜 제약된 예술을 하려고 하느냐, 다만 예(禮)는 꼭 지켜주고 도리는 지켜주어야지!

 

학교에서 오래 배우고, 교수님께 배우고 여러 강사선생님들께 배우고 했단 말이예요. 너무 오랜 시간 학교에서 공연문화를 접할 때, 순서를 정확히 배워서 옷 입듯이 정확히 배워서 MR에 맞춰서 하는 공연 문화가 너무 오랜 세월 몸에 익은거예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공연할 때 MR을 가장 많이 썼어요. 여러 큰 선생님께도 많은 배움이 있었지만 박경랑선생님께 배움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라고 할까, 인식의 변화라고 할까.. 그런 것을 꼽으라고 하면 소리를 춤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음악을 탄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춤이 MR을 떠난 음악이 소리가 춤과 연결되는지... 물론 지금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일테고..필요성과 그렇게 한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리에 따라서 여기서는 이렇게 타주고, 이 소리에서는 이렇게 추어지고 저 소리가 날 때는 이렇게 추어지고 그런 굵직굵직한 것을 가르쳐주어야지. 애들에게 생각할 수 있게, 창의력을 끌어 낼 수 있게 끌고 나가야지. 원래 이런 것이 우리나라 교육인데, 옛날부터 있어왔던.. “아가 니가 한번 지어바라 .” 이렇게 가르쳐줘요. 기본만 가르쳐주고. “자~ 소삼대삼은 요렇게 요렇게 소삼이 들어가고 이럴 때는 대삼이 들어가고 얼르는 춤은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이런 삼요소를 어느 학자님들은, 돌아가신 정병호 선생님께서는 그걸 정중동(靜中動)이렇게 만들어 가지고...설명하셨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잖아요. ‘소리는 호남이요, 춤은 영남이다.’ 제가 워낙 모르니까 책을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꺼리나, 옛 어르신들의 말씀 말씀에 귀를 기울여봤는데, 이 말을 보면서 정말 영남과 호남의 특성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나라는 지역별 특성이 다 각기 다르잖아요. 호남, 영남, 충청, 경기별로 다르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영남지역의 특징, 그러니까 다른 지역과 구분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특징을 말하자면, 그 지방의 문화적 관습이, 문화적 관습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그 지역의 특징을 말해야 해요.

네 맞아요. 문화와 역사와 관습은 항시 같이 가는 거니까요.

 

그렇지, 문화와 역사와 관습은 항상 같이 가지. 그 걸 보고나서야 왜 특징이 그렇게 생겼는가의 이유가 나오는 것이지! 이유 없는 결과는 없거든. 그래서 근본적으로 영남쪽에는 현시대로 근접해서 말하자면 서구문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지리적 조건을 갖은 곳이 영남이야. 일본도 가까워. 인천도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기에 좋았지만 아무래도 영남쪽에는 부산이 있어서 더 쉽지 않았나. 영남쪽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어디 보다도 더 빨랐기에 소리나 전통 문화쪽이 더 빨리 없어져. 선호를 하지 않아. 예술이라는 자체가 얼마만큼 발전되는가는 일반사람들이 얼마만큼 선호하느냐에 따라 달렸는데, 선호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니까. 전통문화가 그 선호도가 전라도는 많아. 높아! 그런데 우리 경상도는 선호도보다는 경시풍조가 있어. 경시풍조가 만연해서... 시대적으로 정치적으로 그 경시풍조의 이유를 캐보면 더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곳 경상도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약해. 영남지역은 일반인들의 전통문화예술 선호도가 떨어져. 춤이든 소리든 이런게 많이 미천한 쪽으로 돌변하다보니까 더딘 발전을 보이고 왕성한 발전을 못했지. 반면 전라도는 많이 발전되었는데, 유독 춤만 그렇게 경상도가 발전되었느냐? 그게 아니고 고급문화는 고급문화대로, 마당문화는 마당문화대로 발전되어왔지만, 경상도에는 거의 통제부, 삼도통제사령부가 발전되어 온데에는 거기가 조선시대에 백제권이기 때문에 그 문화가 통영으로 해서 고성으로 거제, 부산 자갈치까지 그리 봐주면 되지. 그렇게 해서 소리, 춤 문화가 발전되어 올수가 있었지. 그래서 박녹주( 朴綠珠, 1906.2.15.~1979.5.26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 출생.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유성준(劉成俊)·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선생이 한 이야기가 있어. “통영에 가서 별신굿 소리를 듣다보니까 그 학습이 보통 공력이 아니더라. ”그 만큼 예술의 공력이 범상치 않게 발전되어 왔지만 일반인들의 선호도 측면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맥이 끊길 뻔 했어. 자칫하면.. 그래서 춤만 겨우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었지. 그러다가 탈춤이 먼저 문화재로 발굴이 돼. 탈춤이 발굴이 되다보니까 영남은 춤이요 호남은 소리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애. 나는 거기에 상당히 거부반응을 많이 일으켜.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은 전라도에 가보면 선호가 부러울 만큼 했을 뿐이라. 물론 소리 같은 것은 전라도에 유명한 사람 많지. 그러나 우리 경상도에도 소리를 유명하신 분 많아요. 안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이화중선(1898년∼1943년. 여류명창 중의 한 사람. 부산 출생. 김초향(金楚香)과 더불어 당시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17세 때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살던 중,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집을 나가 장득주(張得周)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로 몇년 만에 〈춘향가〉‧〈수궁가〉‧〈흥보가〉를 공부하였고, 서울로 와서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지도를 받아 당시 여류명창으로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불러 청중을 매혹시켰으나, 오히려 거침없이 쉽게 부르는 것이 감동을 덜 주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때에 임방울(林芳蔚)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하였고, 일본 공연도 많이 하였다.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차 일본을 순회하던 중에 죽었다. 그녀의 장기는 〈심청가〉 중에서 ‘추월만정(秋月滿庭)’,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였다. 출처, 참고문헌 :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씨 집이 김해야.

 

역사를 보면 유명한 권번들은 다 이쪽 경상도지역에 있었잖아요.

 

다 이쪽에 있었지.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까 든 생각인데, 어느 한쪽만 치우쳐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소리도 보면 서편제, 동편제 나뉘어서 말들 하는데, 뭐 워낙 분류를 해서 그렇지 그건 아니지! 지금, 이매방류 뭐 이렇게들 분류해서 말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지. 세상이 자꾸 이렇게 변해져 버리는데.. 뭐 그렇게 분류해서 좋은 점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볼 때는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편에 서게 되면, 편견 된 입장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어 전라도 지방에 가면 당연히 소리가 잘할 것이고, 잘해! 경상도 지역에 가면 당연히 춤이 좋아. 춤을 잘춰!’ 그건 아니지! 그런 걸 배우는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입장에서나 이런 걸 바로 짚고 넘어가 주어야 해요.

우리는 기성세대잖아. 기성세대는 무언가? 기성세대는 자기입장을 구축하는 자기를 위한 욕심이 아무래도 많은 집단인데, 그 아래에서 이렇게 구분되는 분류가 나오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정론화 시키는 이론화 시키는 입장에서만 바라보다보니까, 손쉽게 ‘호남은 소리요, 영남은 춤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영남쪽에 춤이 발달했다..춤이 발달했다. 발달이라는 용어 자체가 나는 거부반응이 일어나요.

‘소리문화는 영남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 선호가 되고 호남은 발달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영남지역의 특징, 그러니까 호남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영남지역만의 예술적 특징, 영남만이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장점은 영남지역의 예술의 장점은... 문화는 마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문화적 관습 이런 것들이 다 영향을 받거든. 말, 행동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영향을 끼친단 말이예요. 경상도 말씨가 어때요? 굉장히 우직스럽지?

 

네.

 

그러니까 경상도는 말씨 자체가 우조.

 

우조? 우조가 뭐예요?

 

우조가 굵직한 소리를 우조라고 하거든. 그러니까 우조의 소리 형태가 잔잔할 때는 잔잔하지만은 그러니까 춤도 아주 영향을 많이 받지. 아주 섬세한 부분도 있지만 아주 우직스럽게 추어 나가는 부분도 있지. 이건 말씨와 같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말하자면 음악이, 소리가...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 “음악~!” 이렇게 턱 단박에 자르지? 춤도 턱 맺지? 그렇지? 덧배기, 배김사위 있지? 이런 게 특징이라!

예를 들어, 똑같은 선생 밑에서 춤을 배우더라도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만의 특징이 나와. 부드러워~ 나긋나긋하고, 물론 경상도에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면도 있지만 아주 우직스럽게 확 차고 나가는 것도 있어. 그런게 지방색에 따라 다 틀리지. 소리도 마찬가지야. 어떤 예술적 요소가 자기 지방색을 낸다는 것이지. 그게 특징이야. 다른 것은 없어!

함경도 사람을 데려다가 경상도 소리를 가르치면 경상도 소리를 다할 것 같나?

함경도 소리가 보태져.

  

   

선생님 권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권번 이야기전에 교방이야기를 해줄께.

 

그럼 권번하고 교방의 차이점을 말씀해주세요.

 

쉽게 이야기해서 권번은 보수적이야. 국가의 녹을 먹고 나라에서 기생을 키운 자리거든. 거기에 교육하고..딱딱해. 정악처럼... 교방에서 굿거리춤이 있었는가? 없어. 권번은 음악은 정악이야. 딱딱해. 제도화된 춤이 없어. 굿거리라는 자체가 무속에서 나온거거든. 굿거리라는 자체가 굿의 거리라는 말이거든. 굿에 많이 쓰이는 장단이름이 굿거리장단이 된거야. 모든게 세습문화에서 전부 전파되었다고 보면 돼. 모든 춤, 소리, 장단이 모두 전파되었다고 보면 돼. 굿거리는 무엇이냐? 굿은 있는 그래도 판을 벌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거리라는 자체는 한 과장을 말해. 일장, 이장, 삼장.. 한거리, 두거리.. 이게 장단 이름이 되었지.

그래서 음악과 춤을 같이 알아야 한다는거야. 춤꾼이 음악을 모르다는게 말이 안돼.

 

제 경우만 돌아보아도 음악을 알아야 춤을 제대로 알 수 있는게, 그 교육이 처음부터 제대로 되지를 못했습니다. 음악과 함께 춤을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데, 음악보다는 춤이 위에 있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지냈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춤을 더 잘 알아갈수 있는데....물론 몰라서 못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이 태반이예요. 지금의 대학교육을 담당하시는 여러선생님들이... 소위 말해서 장단하나 제대로 못쳐요.

 

우리나라 제도가 잘못된게, 우리나라 국악원도 생기고 좋아... 그런데 무용과 선생이 관현악과 가서 춤을 가르치고 관현악과 선생이 무용과가서 음악을 가르쳐야돼. 우리는 그렇게 배웠거든. 종합적으로...

 

물론 국악원이 그런 시스템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국악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의 무용과도 마찬가지야. 국악과에서 해금하는 놈이 해금만 하는거..이건 아니거든. 이건 서양방식이라...

 

그렇게 배움을 끌어간다면 음악의 이해도, 춤을 향한 이해도가 함께 발전해서 좋을텐데요..

 

그러니까 이해도도 떨어질뿐더러, 집약된 예술문화가 안돼. 나는 권번에서 배웠던거하고 사회 나와서 보는게 이해가 안됐어. 춤을 추는 아이가 구음하나 제대로 못하고, 장단치는 놈이 춤도 제대로 못춰.

 

일례로 모대학은 한국무용전공자가 4년 내내 졸업할때까지 장구채 한번 못잡아보고 장구한번 못 쳐보고 졸업한대요. 장구장단, 북장단을 왜 배워야하냐고 교수가 말했대요.

 

그게 무슨 대학이고, 장단치다가 흥이 돋우면 뛰어나와야지, 춤도 추는 그러는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춤도 못춰. 환경에 지배를 받거든. 피리, 대금도 주변환경에 지배를 받거든. 소리로서 춤을 춰야하고, 몸으로서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거든. 이런건 지금 꼬맹이들한테 어찌 해야할거고, 이해를 못해. 손자 같은 아이들은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꺼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의 자기교수들을 욕하는 꼴 밖에 안되는데...

 

선생님, 저도 지금보다 어릴적에 지금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해를 못했을꺼에요. 대학의 교수가 되면, 어찌보면 항해사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배를 좋은곳으로 안전하게 운행을 잘하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라는 자리는 너무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좋은 교육을 학생들이 받을 수 있도록 조정하는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교수들이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교육하는걸 꺼려해요. 자신의 실력과 비교되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걸 보여주게 될까바...그런 하찮은 이유때문에 아이들은 4년 내내, 너무 좋은 선생님들을 뒤꼭지도 못쳐다보고 또한 좋은 교수법을 지닌 선생님들을 못 만나보고 졸업하는거 같아요.

 

나는 대학교수는 교수다워야해. 가르치는 방법을, 잘 가르쳐주는 방법을, 한마디로 전달자가 되어야해. 좋은 선생님을 모셔다가 가르침을 베풀때 자신의 실력이 들통난다는 생각을 버리고 같이 배우는 입장으로 ‘애들아,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단다. 이렇게 좋은걸 잘 배워라’라고 말해주어야해.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선생님을 평생에 한번 만나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게 너무 가슴 아파요.

 

내가 이런말하면 아주 모나게 내려깐다..하겠지만, 양심적으로 말하는거야. 물론 나도 말한걸 다 실행하지는 못하지만, 실행할려고 노력한 사람이야. 우리나라에 교육에 적극적으로 실행해야한다고 생각해.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물은 흘러가는대로 놔두어야 한다’ 그러는데 이런 생각이 일제강점기때 나온거야. 일본놈들의 근성을 본받아서 그리해. 그때의 아주 몹쓸 배경이 있어서 그래. 못된 관습이 고대로 남아 있어. 그래서 시대적 배경은 환경의 지배한다는 말이 맞아.

 

그럼 선생님, 권번과 교방은 차이점이 뭐예요?

 

권번은 민간에서 쉽게 이야기해서 기생조합이라고 하지. 나중에는 예기조합이라고 하거든. 쉽게 말하면 요즘 춤패, 마루니..그런 형태가 각 고을마다 있었어.

꼭 예를 들자면 교방은 지금의 국악원처럼 나라에서 운영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고, 권번은 뜻 맞는 예인들이 모여서 지역별 예술연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서로 전달하고 배우고, 사실은 교방에 있던 사람이 권번에 있던 사람이고 쉽게 말하면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개인단체에도 속해 있고 그런거야. 교방에서는 딱딱한 획인한 문화행사가 많았지만, 권번은 그것보다는 자유로운면이 있었으니까.

교육은 혹독하다.

 

예술은 그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거쳐야하는것 같아요. 필수적인것 같아요. 그래야지 예술은 입을수 있고, 그 다음에 자기색을 낼 수 있으니까요.

 

나이먹은 사람들은 퇴기라해서 활동을 안해. 그리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젊은 사람들을 위해 물러나. ‘그래 네가 노름을 좀 할 줄 아네.. 이제부터 네가 해라~’그러면서 물러나. 지금처럼 늙었는데도 죽도록 물고 늘어지지는 않아.

 

선생님 ‘신청’이라는 권번같은 곳이 있었어요?

 

신청이라는 자체가 무당도 키우고, 채선무도 키우고, 기생도 키우고... 매나 소리나고 하던 곳이니까, 통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권번, 뭐 그런 이름이 ‘신청’이지.

 

선생님, 여기서 공부하셨어요?

 

공부한게 아니고.... 여기서 그냥 살았지.. 허허

 

아...강아지도 과일 안물어 가는 곳이요?(평소에 우스개소리로 정영만 선생님께서는 어릴적 굿판에서 살다시피해서 집에 과일과 떡이 너무 흔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은 귀하게 보는 과일과 떡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별만 귀하게 안쳐다보았다는 농담을 잘 하셨다.)

 

허허...... 그렇지.

 

저는 책에서 봤을때 동래권번, 이런걸 봤는데 신청은 처음 봤어요.

 

통영권번이나 부산에 동래권번이나 룰은 그게 다 비슷비슷해요. 동래권번이 70년때 중반까지 있었지. 가장 늦게까지 있었지. 신청권번 그 비슷하게 없어졌지. 동래권번이 없어지기전에 신청이 없어졌으니까...

 

신청권번에 대한 자료가 어디 있을까요?

 

자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사진 몇장 남아있고.., 사람들 명단이라든지, 회원들 명단이 다 있었는데 다 사라져 버렸다. 불에 사라져버렸다.

 

왜 사라져버렸어요?

 

글쎄, 다 불에 사라져서 없어졌다. 불에 타 버렸다고...

 

너무 중요한 자료인데, 왜 불에 타 버렸을까요?

 

뭐, 중요한 거라고....불에 타버렸지.

 

지금은 너무 중요한 자료이잖아요. 그때 당시에 활동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래도 그 자리며 그런거 내가 다 알고 있지.

옛날에 권번출신이나 권번에서 배운 사람들은, 우리끼리 쓰는 ‘변’을 써. ‘변’을 모르면 우리끼리는 치지를 않아. 인정을 안해. 기생은 생자라고 하고, 여자를 아줌라고 해주고 시집안간 여자는 자동이라고 해주고, 디딤이라는 말도 우리 ‘변어’에서 나온말이야.

‘참, 육갑사람 좋다’, ‘손짓 잘한다...’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권번출신하고 아닌사람하고는 구별이 돼.

옥섭이가 나한테 ‘저 사람 권번 출신 맞아? 나랑 한번 같이 가보자~’해서 가서 몇마디 나눠보면 대번에 알아. 진짜인지 가짜인지...

 

권번에서 쓰는 용어가 뭐가 있을까요?

 

권번에서 쓰는 용어? 다 똑같다. 전국적으로 통일이 되어있다. 무당, 기생 이런 사람들이 쓰는 거하고 똑같아. 강신무는 엉터리다. 무당 아니라고 봐.

 

예전에는 이북은 강신무고 남한은 세습무잖아요.

난 강신쪽은 인정안한다. 제대로 배운 사람은 괜찮은데, 대부분이 엉터리다. 왜 이 굿을 하는지 그 자체를 몰라. 신이 시켜서 한대...

 

아, 맞다. 위쪽이 강신이고 아랫쪽이 세습이였는데, 지금은 다 아래지방도 강신이 많아졌죠? 내림굿 받고 하는게 강신이죠? 선생님 말씀대로 어릴적부터 알든 모른든 보면서 자라면서 배운게 참 많은 영향을 미칠텐데...하루아침에 되는게 아니라서~

 

우리쪽은 정치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지. 물론 나도 정치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 보니까 주눅도 많이 들고, 욕하는것도 많이 잃어버렸지....

여자 성기를 보성이라고 하고 남자 성기를 장식기라고 하고...

 

보통은 국어국문학과, 민속학과 이쪽 선생님들이 그런 연구를 많이 하시잖아요.

 

많이들 할려고 하지, 와서 물어보면 대답을 많이 해주지...굳이 찾아다니면서 해줄 필요는 없고..

 

그 분들이 오셔서 많이 연구하고, 정립을 해주셔야죠. 선생님대가 지나면 묻힐 이야기들이잖아요.

 

내대(代가) 지나면 없어져버리고 말지. 이제 되었나?

 

네에, 하루아침에 다 여쭈어볼수가 없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너무 많은걸 지니고 계신 선생님이라서 하루, 하루 찾아뵈면서 여쭙고 알아갈게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소중한 이야기 너무 감사했습니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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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호 특집 인터뷰

박경랑선생님께 듣는 춤이 풀어내는, 춤으로 감아드는 인생이야기

 

2010년 2월 5일 합정동 연습실에서

interview by 백 재 화

 

선생님, 몇 살 때부터 춤에 입문하셨어요?

춤은 네 살 때부터 시작했지.

그때만 해도 상당히 이른 시기인데, 춤의 길에 들어선 동기 같은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어릴 때 꼭 전통을 꼭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발레가 막 일본에서 건너와서 많이 성행했기 때문에 나도 발레를 배우게 된 것 같애. 전공이라기보다 어릴 때부터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쭉 했으니까.. 발레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다시 전통춤을 집중적으로 시작한건 필요성을 느끼고 이제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이 들어서지. 또 무엇보다도 우리 할아버지의 맥도 내가 이어야하니까!

 

어쨌든 우리춤의 정기와 맥은 항상 내 마음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 같고, 우리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많이 들었고 그리고 우리 것을 해야만 내가 춤을 출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오래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 아무래도 발레는 전통춤보다는 생명이 짧으니까 보통 40넘어가면 발레는 아무래도 힘으로써도 딸리게 되잖아. 춤의 테크닉 특성상...

학교 졸업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졸업하고 무용단 생활 시작하면서부터 창작춤 추다가 사실 결혼을 하고나서 전통춤으로 몰입했지.

내가 아무래도 아래쪽 출신이다 보니까, 영남, 호남이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 예술의 혼과 맥이 강해.

음... 도립무용단이 처음으로 창단 되고, 경상남도 도립무용단 창단멤버로 들어 가게 되었고 그러다가 도의 재정문제로 창원시립무용단으로 이관되었고, 88년까지 활동하다가 89년 부산으로 오면서 개인연구실 운영하면서 결혼하고 그러면서 전통춤에 혼신을 다해 몰입하게 되었지.

선생님과 관련된 글을 읽어보면, 할아버지 이야기가 늘 나오는데, 가족 중에 같은 길을 가신 분이 계셨어요?

부모님 대에는 없고 그 전 세대 외삼촌도 조금 기여를 하셨구, 외할아버지 때 그때는 내가 어렸을 때니까 잘 모르지만...

고성오광대 초대 문화재셨고 할아버님 무릎팍에서 그냥 응얼거려주셨던 그 느낌은 아직도 가지고 있지.

할아버님 존함이 어찌 되세요?

김(자) 창(자) 후(자) 김창후 선생님!

박경랑 선생님의 춤 선생님은 어느, 어느 분이 계신지 다 말씀해주세요.

사사받은 선생님... 춤 공부한 선생님 존함을 다 말하려면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한데...

첫 스승님은 내가 고성에서 네 살 춤에 입문하게 되었을 때, 그냥 고성에서 나름대로 활동하셨던 선생님이신 이이자 선생님!

조용배 선생님께는 초등학교 4, 5, 6학년 때까지 전통춤을 배웠고,

정식적으로 배우게 된 것은 지금 마산에 계시는 박성희 선생님께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학원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지. 또, 박성희 선생님의 남편이신 설수석 선생님께 발레를 배웠었지.

타계하신 황무봉 선생님이 아버님 친구 분이셨기 때문에 초, 중, 고등학교 때 부산으로 주말마다, 방학 때마다 찾아가서 공부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선생님 집에서 합숙하면서 춤 공부를 했었지.

80년대는 학교생활하고, 졸업 후에 무용단 생활을 좀 했지.

84년, 85년에는 마산에 사셨던 고 김애정 선생님께 춤 공부를 했었고, 졸업 후 88년 창원으로 옮겨오면서 김진홍 선생님을 찾아가서 다시 전통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지. 그 다음에는 실제 동래권번의 춤 선생이셨던 강옥남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지. 또 작년에 타계하신 김수악 선생님께도 사사 받았고... 이외에도 많은 선생님께 공부를 했지.

선생님 호 가 ‘운파’ 잖아요. ‘운파’라고 호를 정한 이유나 사연이 있나요?

운파 호는 구름 雲 / 파괴할 破 구름을 파괴할 정도로 춤을 잘 추라는 뜻으로, 아는 분께서 지어주셨지. 호가 남다르게 좀 강한 느낌인데, 나한테는 강한 호가 맞는다고 하시면서 지어주신 호!

저도 박경랑 선생님의 춤의 명성은 '영남교방춤'으로 처음 접하게 되었어요. 영남 교방춤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세요.

영남지역 교방에서 췄던 입춤이지. 사실 입춤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가장 기본적인 춤이라고 하는데, 근데 어떻게 보면 가장 기본적인 춤이 어렵지! 가장 중요하다는 건 기본춤을 잘 춰야만 다른 여러 가지를 잘 출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보통 춤추시는 분들이 입춤이라면 기본무로 생각하고 예사롭게 생각하는데 내가 춤을 추면서 느껴 오고 지금 이 시간까지 느끼고 있는 거지.

물론 우리나라 춤의 백미가 승무지만 기본이 없으면 안 되잖아. 그래서 입춤을 완전히 소화해야만 살풀이 승무도 똑같이 소화해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돼. 여하튼 난 그리 생각하구, 다른 사람들과 상반된 생각일지도 모르고...

 

내가 교방춤을 쭉 추면서 춤의 기본법 이라 던지 중요성도 많이 느끼는 것 같아. 이 춤을 감상할 때 어떤 기능 위주보다는 자유자제로 어떤 동작이던 어떤 음악에 맞추든지 나름대로 감정을 자유자재로 표출해서 출 수 있다는 것, 또한 관객들도 그런 감정으로 느끼면서 봐준다면 최고의 춤이 아닐까 생각하지.

 

교방은 기녀들을 중심으로 노래와 춤을 관장하는 기관이지. 조선시대에는 장악원 소속의 좌방, 우방을 교방이라 불렀었고, 교방에 소속된 사람들은 노래, 악기, 춤 등 모든 예기를 두루 익혀서 각종 공적인 연희에 참여했었지.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교방춤은 교방청이 폐지된 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이어받기도 했고, 지방의 무악과 같은 민속악에 맞추어 추는 민속춤이 가미되기도 했었고..

여하튼 이 춤의 특징은 음, 양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춤이지. 남성적인 활달한 상체의 동작과 밀도라고 표현하면 이해가 잘 될까? 밀도가 높은 여성적인 섬세함을 지닌 하체 중심과 발 놀음 즉 디딤 사위가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영남지역 교방춤의 기교가 잘 나타난 춤이지.

 

교방춤의 매력을 설명해주세요.

어..매력적인 동작이 몇 군데가 있긴 한데 사실 부채를 펴는 장면이 그냥 보면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쉽게 얘기해서 교방춤을 보통 분들이 기생의 이미지만 살리다보니까 아주 섹시한 춤.. 이성적인 것 관련해서 표현하시는데요

 

근데 교방춤이란 의미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론 많은 동작들에서 여러 가지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가장 다소곳하고 정적이고 가장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부채를 살짝 집어 들어서 펴는 장면.. 그 부채를 펴면서 수 만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거든.

괜찮은 동작이 많지만 부채를 살짝 집어 들어서 펴는 장면에서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아. 보는 분들도 또 그 장면을 보시고 나름대로 상상하시고 재미있는 표현을 하곤 하시더라구..

교방춤의 장단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음악은 상황에 따라 좀 바뀌기는 하는데, 주로 남도굿거리 자진모리 다시 굿거리로 가긴 하지만 느낌에 따라서 조금씩 중중모리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하구, 음악의 변화는 그때마다 즉흥적인 게 강하지 .정해져서 틀에 박혀져 있는 것이 아니고 교방춤이 즐거운 춤이기도 하면서 어떤 분들은 또 아주 슬프게 느끼시는 분들도 계셔그건 내가 공연하면서 공연평을 듣고, 왜 그렇게 느낄까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 기생들의 애환이라고 할까?? 남들에게 들어내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삭혀야하고 사랑하는 님이 있어도 한번 머리 올리고나면 오로지 기다려야 되고 어쩌면 살풀이춤보다 더 슬픈 게 교방춤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언젠가는 한번 해봤어. 어떤 분들은 흥겹게 느끼고 아주 슬프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개인적인 반응이 상반된 게 또 교방춤인 것 같애.

박경랑 선생님, 끝으로 춤을 어찌 추는 게 잘 추는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되는지 선생님의 경험에 비추어 말씀 해 주세요.

춤...

출려고 들지 말고, 출려고 하지 말고, 춤을 추려고 들어야지. 그게 춤이지.

이게 무슨 말인지 느낌이 오면서도 잘 모르겠지??

한마디로 가식적으로, 가증스럽게, 억지로 만들어서 춤을 만들려고 하지 말고, 춤이 저절로 추어지게, 흥이 나게 추어야 춤이지.

또, 내가 경험에서 우러나서 말하는 건데, 작년에 타계하신 김수악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춤은 자연의 이치에서 찾아야해. 산과 들의 펼침처럼 강, 약이 있고 기복이 있게 추어야해. 또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넘치치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추어야한다고 언젠가 내 차안에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었지.

매번 무대에서 춤 추시는 박경랑 선생님을 바라 보면서 강하게 느낀 게 춤에서 힘을 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요즘 느껴요.

최고의 아름다운 동작은 최소한의 에너지로 표현 된다는 말을 선생님의 춤을 보면서 진하게 느낄 수가 있어요. 말은 쉬운데, 동작에서 힘을 빼고 주고가 너무 어려워요.

그러니까 지속적으로 연습해야지!

가장 쉬운 게 가장 어려운거니까...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국 춤의 최고의 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한국 춤의 미... 최고의 미....

마음이지!

서울 굿의 김금화 선생님께서 언젠가 내게 건네신 말씀이, ‘만인의 꽃이 되어라’ 고 말씀 하셨어. 이 말씀이 그 순간에 가슴에 와 닿았는데...

춤은 마음에 있는 거야.

활짝 흐드러진 꽃처럼 춤을 찬란하게, 춤을 마음으로 표현해야해.

물론, 실력이 출중하시니까 그렇겠지만 선생님은 무대에서의 자신의 춤을 즐기시는 것 같아요.

무대....

무대는 정말 무서운 곳이야. 너무나 정직하고 무서운 곳이야.

하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곳이야. 그러기에 죽을 힘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야해. 그리고 요즘, 정형화된 무대에서의 춤만 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을 버려야해.

내가 춤 출 수 있는 곳은 모두 춤 무대가 되어야해.

모래 위에서, 진흙 위에서, 비탈길 위에서, 자갈밭 위에서.... 다 춤을 자유롭게 출 수 있는 무대가 되어야해.

이래서 못 추겠고, 저래서 못 추겠고... 이러해서 오늘 실수를 했고, 이러해서 춤이 잘 안되었고.... 그건 다 자신의 춤 실력이 모자람의 변명이야.

완벽을 향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해.

그게 무대 위에서 춤꾼의 자세야.

 

한국 춤에 대해서 그냥 하고 싶으신 말씀... 묻고 싶은 게 많은데, 그냥 문득 떠오른 질문 이예요.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자꾸 동하게 되고, 또 질문도 새록새록 생각나고 그래요... 말씀 중에 또 묻고 픈 게 생각날 것 같아요.

한국 춤, 우리춤은 자연스럽게 추어야해. 또 자기만의 춤을 추어야해.

이 말이 참 어렵고, 오해하고 잘못 이해하기 쉬운 말인데,

춤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 부러지게 정형화된 순서가 있는 게 아니지! 요즘 문화재로 전승되는 제도와 서양식 무대의 정형화, 일정시간의 공연 시간이라는 공연문화의 흐름 때문에 순서가 정형화 되는거지.

 

작품마다 순서가 백 만명이 똑같이 취는 순서가 있는 춤은 아니지.. 우리춤이라는게...

자기만의 춤이라는 것은

물론, 춤마다의 색깔, 특색에 맞는 규격화되고 정형화된 기본이 있지. 그 기본을 다 배운 후에, 한마디로 다 터득한 후에는 그 기본위에, 기법위에서 자연스럽게 춤을 추라는 거야. 자기 맘대로 마음대로, 만들어서 추라는 뜻이 아니고.

 

잘못 이해하면 자기춤을 추라는 말이 지 맘대로 추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단 말이야.

무엇보다 중요한 게 기본 틀을 깨우치고 나서 자기만의 춤을 추어야 하지.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기본적인 것을 토대로 하는 춤 말이야.

자유자재로 출 수 있어야 해.

쉽게 말해서 자기가 다 섭렵한 후에 자유자재로 출 수 있는 게 자기만의 춤이라는 거야!

자유롭게 추라는 말.... 그러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기 까지는 힘겨운 길을 걸어야하고 많은 노력을 해야지. 너무 당연한거지?

 

자연스럽게 추라는 말!

그건 일단 일정 시간을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보내야 만이 자연스럽게 터득하면서 나오게 돼.

억지로 터득하면 자연스러운 춤이 절대 안나와.

있는 그대로 추어야지. 그게 또 자연스럽게 추라는 선생님들의 말씀의 참 뜻이기도 해!

김수악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자연의 이치.. 이 모든 것이 춤의 핵심이야.

자연은 억지스러움이 없잖아. 춤이 그래야 한다는 거야!

선생님! 제가 언제부터인가 느낀 점 중에, 선생님의 춤의 정신세계나, 춤의 세계관.. 가치관.. 또 제자들을 향한 마음, 제자들을 챙기시는 마음... 이런 모든 것들은 60세 이상 70대의 선생님들과 거의 비슷해요. 제가 박사과정 때 논문주제 정하고 한참 논문 쓸 때 춤 분야의 인간문화재 선생님들과의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때 춤 인생 60년이 넘으신 분들이 대부분 이었는데, 그 분들의 춤을 통한 경험, 춤에 대한 모든 인생관... 말씀과 거의 흡사해요.

깜짝 깜짝 놀랄 때가 많았어요.

선생님께서 연배의 다른 선생님들보다 큰 선생님들을 많이 모시고 춤 공부를 해서 그런가바요.. 이건 제 생각 이예요.

그럴 수도 있고, 그런 걸 배제 시키지 못하지.

큰 선생님들은 또 그 선생님들의 선생님께 배웠고...

우리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전해지니까... 그래서 예전에 다 선생님 댁에 기거하면서 공부했던거야. 선생님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춤 한자락, 노래 한자락 차근 차근 배웠어.

지금처럼 순서를 쭈~욱 나가고... 그렇게 배우지 않았어.

머리로 배우려 들지 말고, 마음으로 배워야해. 마음으로 느껴야 하고!!

내가 대통령상 받을 때 있었던 이야기 해줬었나??

97년도에 대통령상 받을 때 였어.

대회가 있기 전, 내가 태어난 고성에 들렸었어. 그때 모셨던 강옥남 선생님과 엄마랑 이렇게 셋이서..

고성 전체를 한 바퀴 돌면서 고성의 정기를 받아서 대회에 나가려는 생각에..

그러다가 어느 향교 앞에 다다랐는데, 그냥 거기 들어가 보고 싶더라구

그래서 다 들어갔지...

그 때 마침, 향교를 관리하시는 분이셨는데, 딱 마주쳤어.

그 분은 장에 나가려고 나서다가 우리랑 마주쳤던 거지. 그날 책거리를 해야 해서 장에 나가시는 길이었다고 하시더라고,

당연히 어찌 왔냐고 물으셨지. 그래서 이차저차 사연을 말했더니

그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

자기도 여기에서 공부하면서 느끼는 게 많아져서 춤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냥 하는 말이라고, 처음 보았을 때 그냥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고...

여기 향교에 들린 이유가 그러하다기에 해주는 자신만의 생각의 말이라고 하면서...

나한테 향교 앞에 펼쳐진 산을 가르치면서 해주셨던 말인데, 아직까지 기억에 많이 남아. 춤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고

 

‘앞에 펼쳐진 자연을 보세요. 저 산을 보세요. 산 등성이가 움푹 패인 곳은 사람의 목이라고 생각하고, 산이 평평하게 시원하게 펼쳐진 곳은 사람이 두 팔을 쭉 펼친 거라고 생각해 보세요. 춤을 저렇게 추세요. 시원하게 쭉 쭉 펼치면서 그렇게 춰 보세요. 그럼 좋은 춤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말이 참 가슴에 폭~ 와 닿으면서 춤을 시원시원하게.. 자연의 형상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또 시원하게 추어야겠다란 깨달음이 있었지.

그렇게 추었는지, 그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어.

 

선생님, 하루에 단번에 들을 분량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요. 매번 선생님과 이런 지난 이야기 나눌 때는 필히 녹음하고 기록해야겠어요.

선생님의 춤만 무보를 만들게 아니라, 이런 이야기도 또 하나의 무보가 되는 것 같아요.

춤 배우랴, 기록하랴... 채록하랴... 할 게 너무 많아요.

요즘 특히 춤 공부하면서 할 게 얼마나 많고, 많은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되고, 그래서 마음이 더 다급해지곤 해요.

이제까지 학위에 많은 시간을 할애 하면서 지냈었는데, 이젠 그 공부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이 엄청난 춤 공부에 매진하고 싶어져요. 더욱더 강렬하게요.

지금처럼, 그렇게 강인하게 저희를 이끌어 주시고, 춤꾼 박경랑, 도전하는 박경랑, 언제나 무대를 신선하게 채우는 춤꾼 박경랑으로 계셔주세요.

보통은 춤 공연에 가보면 일명 가족잔치라고 명명할 수 있게 친구, 제자, 친지, 지인으로 형성된 객석 형태인데, 선생님의 무대는 항상 객석에 남다른 객석점유가 전 좋아요.

일반인들이 더 환호하고, 더 알아주는 춤꾼이 진정한 춤꾼이라고 생각해요.

아... 그래서 서울 굿 김금화 선생님께서 ‘만인의 꽃이 되어라’라고 말씀 하셨나바요??

방금 생각난 거예요.

 

2011년 1월 5일 효창동 연습실에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춤은 무엇이세요?

 

내가 생각하는 춤?

 

선생님의 인생을 통틀어서, 지금 연세가 50인데 인생의 4/5 이상을 춤만 추셨잖아요. 선생님은 춤으로 세상을 공부하셨고, 춤으로 세상을 수 놓으셨고...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춤, 철학적인 답변을 떠나서 가장 쉽게 떠오르는 생각, 춤,,하면 생각나는 말?

 

춤은 내 생활이지.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되는 생활로 변해버린거지.

 

춤이 선생님이고 선생님이고 춤이 되고!

 

그렇지... 내가 추고 내가 깨달은것을 너희들에게 전해주는것이고, 그게 전부이지.

춤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포인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떤데에 있어서?

 

마음가짐도 있을수 있겠고... 기능적인 부분에서도 말할수 있겠고...정신적인 부분..

 

기능적인 부분이야 단숨에 안되는것이니까 무조건 반복적인 연습을 해야하는 것이고, 시간과 내공이 쌓여야 하는 것이지. 정신적인것은, 내가 갖고 있는 춤의 정신적인 것은 그냥 자만심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항상 자만심을 버리는것... 그러니까 기능이 좋아졌다고해서 자만하지 말고 계속 나 자신을 낮추면서 춤추는 것. 자꾸 자꾸 추는것 밖에는

 

다른분들이 박경랑 선생님의 좋은점을 말씀하실때 보면, 물론 모든 중견춤꾼부터 큰 선생님들까지 헤아릴수 없을 만큼 좋은점, 배울점을 갖고 계시지만, 유독 박경랑선생님을 향한 좋은점, 본받을점을 말하는 부분에서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들이 있어요. ‘개인 연습이 무지 많은 사람’, ‘독하게 연습하는 사람’..등 연습량에 있어서는 정말 숨쉴겨를도 없이 연습에 연습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들하세요. 근데 큰 어르신들은 연습 안하시잖아요. 물론 절대적인 경지에 다다르신분들이여서 그렇겠지만... 제가 가끔 매체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연습시간에 관련된 인터뷰를 볼때면 장한나도 그렇고 강수진도 그렇고 하루에 6~8시간 넘게 연습하더라구요. 강수진 같은 경우엔 아침에 2시간 스트레칭하고 눈 떠있는 시간은 춤으로 채우더라구요.

 

연습을 안할수는 없지. 선생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미 몸에 배여서 내 스스로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은 특별히 연습이 필요없다는 말씀이지. 그래도 나온다는 거지. 그게 연습이 안된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새로운것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습을 해야하는거지. 다만 예를 들어서 그 누구도 흉내 낼수 없는 그 사람만의 특유의 동작이 있다고하면 그건 그 사람만의 특징이란 말이야. 그 특징이 남들이 봐서 어설프면 안되지만 이미 자기것으로 소화해내서 누구도 쉽사리 흉내낼수 없는 것으로 기능적인 부분에서 자신의 몸에 배여있다면 그것은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지. 내가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그 선생님들의 말씀이(연습을 안하신다는 말씀) 그렇다고 봐.

나도 공연을 계속하고 그러면, 내가 평소에 연습할때 안되던 것들이 공연하는 순간 음악과 춤과 한순간 딱 맞아 들어가는 느낌이 올때가 있어. 백일을 연습한다고 해서 백일동안 내내 같은 동작이 똑같이 되는것은 아니거든. 매일 매일 느낌이 틀려. 그런데 어느순간에 똑같은 동작을 하면서도 ‘아, 이거다...’라고 느낌이 올때가 있어. 그러면 그때는 그 동작이 완전히 내동작이 되는거야. 그때부터는 그게 자연스럽게 내안에서 나와. 연습의 유무를 떠나서 그 다음부터는 안바뀌더라구.

내가 공연을 하면서 한동작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하고, 공연하고 그래. 공연을 하면서 몇가지 동작밖에 내것으로 만들지 못해. 백번을 공연을 올린다고하면 99가지, 98가지 또는 101가지... 그 정도만 내 동작으로 만들수 있어. 그렇게 내 몸속에 저절로 저장되는, 인위적으로 저장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저장되는 것은 절대로 몸이 잃어버리지 않다는것이지.

다시 말해서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동안 연습하는 동안 잠재적으로 연마되던 부분이 어느 한순간 확 발휘되어 나온다는 것이지.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게 일치가 된다고 보면 돼. 음악에 대한 감정이나, 내 춤에 대한 동작이나...

어느 순간 되는 느낌이 오고 나서, ‘어떻게 이게 되었지...’하고 공연 다음날 다시한번 추어보면 그때의 그느낌대로 동작이 나와. 그때가 바로 완벽한 자기자신의 동작이 되는 것이라고 봐. 내가 늘 제자들에게 하는 말중에 ‘공연을 올려야한다.’ ‘공연을 해봐야 한다’라고 말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공연을 하면 느는 이유가 이런거야. 이런데서 공연을 하면서 실력적으로 기술적으로 한발짝씩 늘어가는 이유가 있어.

몇백씩 아니 몇천씩 되는 돈을 투자하면서 공연을 올려도 전혀 금액적으로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꼭 하나씩은 얻는게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백번의 공연을 올린다면 많아야 백여가지 동작을 내것으로 만들겠지. 그런데 춤사위는 200여가지가 넘는 춤사위로 구성되어 있잖아. 그러니까 어찌보면 자신의 춤사위는 다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못만들고 죽는다고 보면 되는거야. 남이 흉내낼수 없는 자신만의 동작으로 되고나면 죽어도 남들이 흉내내지 못하지. 백번 천번을 해도 못 따라하니까...

이미 자신의 것으로 된 동작은 엄청난 연습이나 연마가 따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차원하는 큰 선생님들이 연습을 안해도 동작이 나온다, 된다..그리 말씀하시는 거라고 난 생각해요. 몸만 풀면 그 동작이 나와!. 완벽하게 내 동작으로만 되어 있다면 몸만 풀면 얼마든지 내동작으로 나오지만, 그렇지 않을때는 될때, 안될때가 오락가락 하겠지. 그 완벽함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습을 하는 거지.

그리고 내가 계속 연습을 쉬지 않는 이유가 또 있어. 예를 들어 제자가 연습을 해. 내 동작을 흉내내는거지. 그런데 그 제자가 언제까지 흉내만 내겠어. 계속 연습하다보면 언젠가는 나를 뛰어넘지 않겠어. 그래서 난 힘들지만 또 연습을 해. 스승이 제자보다 뒤쳐질수는 없잖아. 나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힘겨움을 느끼지...그래도 연습을 할 수 있을때 까지는 계속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게으름 피지 않고 계속 연습을 하는 거야. 또 안하면 몸이 처질수 밖에 없기에 난 계속 연습을 하고, 연습의 중요성을 잊지 않으려고 해. 계속 해주어야 발전하는것도 있고, 또 적어도 현재이 춤실력이 줄지는 않으니까..어느 부분에서는 체력단력적인 이유도 있고 그래.

사실, 요즘 가르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내가 제자들에게 내가 연습하는 시간을 따로 안보여주는것 같애. 요즘 들어서 한 생각인데, 내가 연습하는 시간을 제자들에게 안보여주어서 제자들이 연습을 게을리하나...라는 생각에 이제는 가시적으로라도 나의 개인연습을 보여주어야 하나..라고 생각해. 내가 연습하는 모습을 많이들 봐야지 제자들이 ‘아 나도 선생님처럼 연습해야지...’라는 생각을 갖을건데... 혹시 선생이 매일 노는것처럼 보이는것 아닐까라고 생각해.

 

사실, 저 처음 선생님 뵈었을때, 너무 바쁘시고 수업 많으시고, 서울 부산 오가시고... 그런데 공연스케줄은 너무 촘촘하고... 도대체 저 선생님은 언제 개인연습을 하시고 공연준비를 하실까?? 라는 의문이 너무 컸습니다. 감히 선생님께 여쭙지도 못하겠고 혼자서 내내 궁금해하면서 일정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면서 선생님의 수업을 지켜보고, 선생님의 생활을 들여다보면서 그 의문점이 서서히 풀려갔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공연을 목전에 두고서는 일상생활을 전폐하신단 말이예요. 자신의 맡은 수업도 제자들이 가서 해내고, 모든게 공연을 위한 시간으로 바뀌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경우에는 내 공연연습시간, 내 공연준비시간... 이런게 존재하는게 아니라, 그냥 선생님의 생활에서, 너무 평이하게 선생님이 맡으신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열심히 춤추시고, 가장 열심히 공연준비를 하신다는 것을 선생님의 일상생활을 관찰하면서 느끼면서 해답을 얻게 된 부분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냥 생활이 춤이고, 춤이 생활이 된 사람처럼 그렇게 누구보다도 가장 철저하게 열심히 공연준비, 공연연습을 하신다는 것을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이런식으로 궁금한걸 묻지 않고 일정시간 선생님을 보면서 깨달은게 좀 많아요. 선생님의 경우에는요...

 

수업시간에 구령을 붙여주고, 시범을 보이는거...그게 실질적으로는 내것을 다지는것이고 내 춤의, 내동작의 정확성을 다시한번 다지는 것이라고 난 생각해.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내 연습을 못봐서 제자들이 게을러지나...그러면 내가 연습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제자들과 함께 하는 연습을 올해부터는 다시 잡아야겠다..라고 생각해. 사실 나는 스승이 연습하는걸 많이 보면서 커왔어.

나는 수업시간에 또 다른 나 스스의 연습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는데, 제자들은 그걸 그냥 수업이라고만 생각하는것 같애. 백선생처럼 연습시간에 또 하나의 내 연습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깨달으면 다행인데. 그냥 수업하시는 선생님, 수업이라고만 생각들 하니까, 일반적인 제자들은...

백선생이 처음에 날 보면서 관찰하면서 생각한것처럼 저게 우리 선생님 연습이고,국악원가서 수업하는게 선생님 연습하는 시간이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수업은 수업이고 연습은 연습이다라고 따로 따로 꼭 분리해서 생각한다니까. 그러니까 이런점에서는 너희들은 아직 숙련도가 덜 되었기 때문에 수업을 받고, 또 수업을 하고 나서 힘들어도 따로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개인연습시간을 갖어야만 거지. 꼭 따로 시간을 내고, 어느시간을 정해서 연습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이 춤이 되고, 춤이 일상생활이 녹아들게 연습하는 것도 어찌보면 더 완벽한 공연준비 자세이고, 춤을 향한 마음 가짐이라고 생각해.

굳이 내가 연습시간을 따로 안갖어도 수업을 하면서 계속 몸을 쓰고, 몸을 풀고, 그 동작을 반복적으로 행하다보면 그게 최고의 연습이라고 생각해.

 

그 예전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중에, ‘자연처럼 춤을 추어라’라는 말씀처럼, 연습시간, 공연준비시간 이렇게 인위적으로 일상생활속에서 행하는게 아니라, 연습이 생활이고, 춤이 생활이게 일생생활에 녹아드는 그런 연습을 갖어야 할것 같아요. ‘지금부터 딱 공부하는 시간!’, ‘공부는 몇시부터 몇시까지..’이런 인위적인 스케줄에 의한 한정적인 연습이나 공부가 아니고, 생각하는것도 공부고, 흘러가면서 듣고 보는것도 공부고 선생님의 동작을 보면서 느끼는것도 공부고... 일상생활속에 어디나 연습과 공부는 존재하는것 같아요. 어디서나 몸을 움직움직이는 곳이면 자연스럽게 연습이 되고, 가르치면서 또 배우면서 모든걸 연마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품어야 할것 같아요. 그때 선생님이 해주신 ‘대자연처럼 춤추어라’는 말씀이 아직도 제게는 배우고 느낄것이 많은 세계의 조언으로 자리잡고 있어요.

 

어제 권오춘회장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 예전에 나한테 ‘왜 부산을 차를 몰고 가세요? ktx있는데, 쉽고 편하게 다니세요. 굳이 손수 운전해서 다니지마시고..’라는 말씀을 내게 하신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이렇게 답했거든. ‘저는 운전하면서 음악듣고, 공연아이템 생각하고, 동작도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제게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운전하는 시간은 절대적인 생각의 시간이예요. 그 순간에 정말 많은 것을 얻어내고 정말 많은것을 깨닫고 그래요.’라고 말씀 드렸었어.

요즘 회장님이 내가 한말이 뭔지, 그 말의 뜻이 어떤것인지 아시겠대. 회장님도 운전하시면서 음악을 들으시면서 다니시게 되었대. 내말을 듣고, 그러다보니까 춤추는 절대적인 시간이 없으면서도 요 박자에 이런 동작이 들어가면 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음악을 이해하는 면이 점점 커지더라는거야. 어제 이런 말씀을 잠깐 하시고 가시더라구.

 

그러니까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도, 몸이 쉬는 시간에도 생각은 춤을 향해, 춤과 관련된 생각으로 머리는 바쁘신것 같아요. 몸이 움직일수 없는 고정된 상황에서는 머리는 이미지트레이닝을 계속 하시는것 같애요. 그러니까 의식이 있는 시간에는 계속 춤을 추시는것 같아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이미지트레이닝의 중요성이랄까? 물론 이미지트레이닝이 너무 중요하지만... 이미지트레이닝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글쎄... 예를 들어서 ‘저런 동작을 이럴때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 등을 오고가면서(서울과 부산) 다 하지. 이번 공연에는 어떤컨셉으로 가야겠다라든지, ‘아 저거랑 이거랑(아이템) 함께 해주면 좋겠네’ 라든지 모든걸 생각해내지. 사실, 앉아서 생각해내는것보다 오고가며 생활속에서 문득 문득 꺼내게 되는 생각이 많고, 아이템이 거의 대부분이지. 글도 쓸려고 앉아서 쓰는것보다 아이템이 평상시의 생각에서 느낌에서 많이 오는거잖아. 내가 앉아서 무대도면을 어찌 그리지, 어찌 가면 좋지~ 이렇게 하다보면 이게 더 좋은것 같고 아니 저게 더 좋은것 같고 헷갈리기만 하고 결론이 안나. 그런데 운전하면서 자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면서 거기서 색감의 조화도 깨닫고, 또 의상의 색감 아이템도 덩달아 얻게 되고, 그때 그때 생각이 나는걸 놓치지 않고 바로 바로 접목시켜서 공연아이템이나 공연연출 그런거 얻게 돼. 그런 공연의 성공과 실패의 여부는 관객이 해주는거지. 나도 내 입장에서 이번 공연은 관객이 이렇게 느끼는것 같으니까 다음번 공연에는 이렇게 참고해야지라고 생각이 또 들고... 그런데 이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올린 공연이 거의 다 성공이란걸 했지. 내 생각에서 빗나가서 된 공연은 없었어.

그러니까 앉아서 아이템 짜려고 해낸 생각보다는 자연스럽게 일생생활속에서 터저나오는 발상, 자연스러운 생각에서 더 효과가 컸지.

예를 들어서 지나가면서 단풍이 든 나뭇잎의 색을 보면서 밑에서부터 든 단풍잎도 있을테고,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단풍잎도 있을테고... 그러면 위에서부터 든 단풍잎의 주황색, 아직 덜든 잎의 연두색과의 조화와 농도, 아니면 거꾸로 든 잎을 보면서 아 저색의 무게감이 더 좋겠다..뭐 이런 비교도 자연스럽게 들면서 내 신체와 접목해서 생각을 하게 되는거야. ‘나는 아무래도 하체보다 상체의 어깨선이 약하니까 약한 부하게 보이는 색상을 선택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에 이번에는 이렇게 가볼까~ 끝동 색깔을 이렇게 해볼까..이러면서 가는거지.

난 아직도 운전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할께 또 많고, 그러니까 나한테서도 운전대를 뺏지 말아주세요. 내가 집중할수 있는 시간이야. 내가 아직도 기력은 있으니까...(웃음)

 

선생님의 공연문화를 쭈욱 살펴보면서 든 생각인데, 선생님은 연출력도 남다르세요. 한마디로 공연문화의 새장을 여시고 공연문화를 새롭게 선도하시는 분이시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해설이 있는 해설자 문화도 선도하셨다고 생각해요.

또 며칠전에 해주셨던 말씀중에, ‘풍류’판에 비전공자를 세우시는 이유가, 그 옛날의 풍류판에서 흥을 즐기던 사람이 다 완벽한 예인이 아니고 그냥 일반이이었다는 발상에서 기술적으로 완벽을 기하는 전공인보다는 기술적으로 미흡해도 일반인을 세우는게 ‘풍류’의 진정한 의미라는 말씀이 참으로 충격과도 같은 신선함이였습니다. 저는 계속 공연은 전공자의 완벽함을 추구하는 곳, 이런식의 생각에만 빠져있었는데, 사실 그때 선생님의 말씀에 다시한번 놀랬고, 다시한번 생각의 전환이라는걸 갖었어요.

그래서 말씀인데, 사실 저 같은 생각을 관객에 입장에서 대부분이 할거라고 생각해요. 저처럼... 그래서 공연에서 해설자분이 부연 설명을 해주신다거나, 팜프렛이나 그와 비슷한 공연에 관련된 글에서 부차적으로 설명을 해주어야, 선생님의 깊고 디테일한 공연의도가 제대로 살아날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공연에서는 여러 큰 선생님들과의 인터뷰형식으로 가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옛날 우리선조들이 즐겼던 ‘풍류’판의 의미가 다시한번 제대로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거야.

이윤석, 정영만 선생님들처럼 진짜 풍류판을 즐기셨던 선생님의 진솔한 이야기와 또 ‘우리 풍류나 한번 즐겨봅시다~’라는 멘트와 함께 하는 선생님의 춤을 보면서 관객들은 기량적인 춤을 떠난 진정한 ‘흥’을 즐기게 되는거야. 사실 우리는 춤공연이라고 하면 객석에 앉아서 다들 심사위원이 되잖아. 기량적으로 어디가 어떤지, 연출력은 어떤지, 연기력은 어떤지... 다들 심사위원의 눈으로 춤을 대할려고 하거든. 그게 아니라 흥을 느끼는 무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이번 공연을 통해서 또 내가 춤추는 영남교방청춤의 재조명으로 ‘교방’, ‘권번’의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또 어찌보면 올바르게 대중에게 전달하는게 이번 공연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해.

 

선생님, 요즘 들어서 ‘우리것, 우리의 것’하면서 이제까지 전통을 대했던 시선이나 생각보다는 좀 한결 푸근해진 생각으로 우리의 전통을 바라보는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전통의 한가운데 서 있어서 아직도 너무나 차가운 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많이 진일보하고 또 앞으로 더 많이 개선되는 전통을 향한 시선과 사고라고 생각해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전통을 향한 정책, 전통을 대하는 시선들이 이렇게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보시는 것들이 무엇인지 여쭙고 싶어요.

 

이번 공연이 또 내게는 중요한 의미이자, 어찌보면 다시한번 공연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키게 되는 공연이 되지 않을까 싶어.

어제 강소영회장님과, 신동숙이사님께 이번 공연의 연출이나 취지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드렸어. 그랬더니 신동숙이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번공연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공연형태인 학술적인 성격과 함께하는 첫 공연이 될거라고, 색다른 공연이 될거라고 말씀하시더라구.

이번에 내가 하는 공연이(2월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공연 ‘2012 박경랑의 춤- 영남교방청춤 /부제 : 온고지신) 자주 이루어져야해. 이렇게 학술적인 접근을 이루는 전통공연이 더욱더 활성화될때 첫째, 우리가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재미가 없단 말이야. 새로운 대본 쓰고, 새로운 레퍼토리짜서 하는것도 좋지만, 이제까지의 공연문화를 돌이켜보면, 황진이, 심청이를 소재로 하는 공연이 왜 그토록 인기일까를 한번 생각해봐야해. 다른 이야기도 많은데 왜 심청이일까? 다른 기생들도 무수히 많았는데 왜 황진이일까? 이유는 간단해. 누구나 아는 내용이고, 스토리이기때문에 관객이 입장에서 이해도가 높고 빨리 받아들여서 함께 할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우리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할때는 관객입장에서 이해도를 높일수 있는 어떤것이 함께 수반되는 공연을 해줘야해. 쉽게 받아들이고 ‘아~ 저래서 그랬구나.’ 하고 얻어갈수 있는 공연이여야지. 그냥 한순간 보고 즐기는 공연은 일회성의 공연에서 끝나는 거라고 봐.

‘잘추네, 재미있었네’ ‘아 맞네, 저기서 저래서 그런 춤이 나왔구나~’ ‘그래 저래 가지고 옛날에는 저렇게 놀았구나~’하고 시각적으로 보면 이해도가 더 높아지겠지. 이런쪽으로 해서 이해도가 높은 공연을 자꾸 해줘야 많은 사람들이 전통공연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지.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전통을 접하고, 그러다보면 전통을 향한 정책들이 좀 더 따스한 현실적인 정책으로 갈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누구나가 다가설수 있고 관심을 갖게 되는 전통, 특정인이 향유하는 전통이 아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즐길수 있는 전통이여야지.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한것이지만은 전문가들만으로도 다 해결되는 문제는 또 아니야.

대중가요가 왜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을까?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고, 또 쉽게 즐길수 있으니까 인기가 있다고 봐.

춤보다는 노래는 쉽게 흥얼거릴수 있지만, 춤은 몸으로 하는것이기 때문에 잘못 따라하게 되면 바로 눈에 거슬려 보이기 때문에 더 무서운거란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춤은 전문적인 분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애. 그런데 그 옛날 우리의 춤과 문화는 전문적인 집단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일반인들에 의한 문화였었다고 봐. 다만 끝까지하고 있는 사람이 전문성을 갖고 남게되었다는것이지.

그러니까 아마추어들도 몇십년씩하면 전문성을 갖을수 있다고 봐. 다만 우리가 학부제도가 나오면서부터 전공인, 비전공인의 잣대가 생겨났지만, 난 오래전부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해왔어.

옛날의 큰 선생님들을 보아도 그래, 김수악선생님 등 선생님들 소위 말해서 가방끈 긴게 아니잖아. 김수악선생님 같은 경우에도 8살때부터 기생수업을 받으면서 계속 해왔기 때문에 선생님의 소리가 알려지고 춤이 알려진거지. 만약, 선생님이 일개 기생으로만 살고 말았다면 선생님의 소리, 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겠지. 끝까지 계속 하셨기때문에 알려지고 또 인정받는 분이 되실수 있었지.

그래서 그런 문화를 자주 봐주고, 접해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번공연의 컨셉이랄까, 공연아이템을 잡은거야.

 

이번 2월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 올려지는 공연이 무엇보다도 중요한점이 선생님을 스타로 만들었고, 선생님을 세상에 내놓게 했던 영남교방청춤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모인, 창단된 ‘영남교방청춤 연구, 보존, 계승학회’가 함께 하기 때문에 공연의 의미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지는것 같아요.

또 요즘, 한동안 멸시되어지고, 그 존재가치가 홀대 받아왔던 ‘교방’문화가 각광받기 시작한것 같아요. 이 교방이라는 것이 선생님의 춤을 떠나서 교방이라는 것에 대한 인식, 더 깊이 들어가면 우리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학회라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 말씀하신대로 해설이 있는 공연이 관객에게 한발짝 더 다가섰듯이, 우리 ‘영남교방청춤 연구, 보존, 계승학회’의 활동으로 인해서, 이 학회가 함께 하는 공연이 해설이 있는 공연이 이끌어냈던 결과처럼 인식의 새물결, 인식의 새바람을 촉구하는 견인차 역할을 해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것 같애. 솔직히 이 작업은 어찌보면 내가 시작했어야 하는건데, 또 다른면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시작했으면 남들로부터 고운 시선으로 안 봐주었을것이라고 봐. 제자들이 너무나 고맙게도 내가 선듯 하지 못하는 부분을 좋은 취지로 시작해 주어서 나로서는 기특하고 고맙고 그래. 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는것보다 제자들이 하는게 더 낫겠지.

내가 추는 춤이 학회를 통해 더 많이 알려지고, 또 다음, 다음 세대로도 전해지고 하는게 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어쨋든 이번의 이런 기획이 우리가 하고 나면 또 유행처럼 번져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옛날 내가 해설자가 있는 공연을 하고 난 후에, 전통공연이나 일반 춤 공연에서 해설자가 나타나는 문화가 생겨났던것처럼 말이야.

관객들은 이제 너무 똑똑해지고 객석에서의 경험, 또 다른 매체를 통한 경험이 많아져서 다 알아. 전통의 레파토리에 대해서 많이 알아. 수건들고 나오면 살풀이인줄 알고, 부채들고 나오면 부채춤인줄 알고, 다 알아. 그러니까 더욱더 서면이나 지면이 아닌 현장에서 듣고 바로 이해하는 그런 이해도가 높아지는 공연,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그 즉시 이해하고 느끼게 되는 공연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사실 해설이 있는 공연도 음악공연을 보러 갔다가 해설자가 해주는 설명에 더 이해도가 높아지길래, ‘아 춤도 해설이 있으면 좋겠구나’하고 착안해서 시작하게 된 거야.

춤공 연에서 해설은 간혹 옷갈아 입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게 다는 아니지. 물론 그런 이유도 없지 않아 존재하지만, 더 중요한것은 사람들에게 더 깊게 볼수 있고, 더 잘 느끼게 해주는 포인트를 짚어주는 시간이거든.

 

요즘 관객들은 어찌보면 너무 영악해지고, 문화적 수준도 나날이 높아져가고, 교양이 높아져서 참 무서운 존재인것 같애요. 관객의 입장에서 해설자의 용도나 해설자의 존재이유가 옷갈아 입는 시간을 벌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고, 또는 해설자의 의미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것 같애요. 천차만별의 관객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래. 그런데 또, 현실적으로 해설자가 해설자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주고 그냥 팜프렛의 내용을 쭈욱 읽어나가는 그냥 읽어주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 그건 해설자가 아니지. 그래서 더욱더 관객들은 그 해설이 있어야 하는 시간이 단순히 출연진의 작품전환시간이고 생각하게 되는것 같애. 물론 그 해설이 진행되는 동안에 출연자는 옷도 갈아 입게 되고, 다음 작품을 위해 숨도 고르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준비하는 시간이 되곤 해. 그래도 해설자의 시간은 그런 출연자를 위해 벌어주는 시간이 아닌, 공연의 포커스에 대한 설명, 공연의 의미, 춤에 대한 깊은 설명 등을 전해주는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봐.

그래서 최종민 교수님같은 분이 최고의 해설자가 되는것 같애. 말씀이 느리셔도 박식하신 분이시니까 많은것을 전달해주고, 또 간혹 본인 스스로가 흥을 돋구어서 흥얼거리는 해설자가 되니까... 진옥섭씨는 최종민 교수님과는 또 분위기가 다르지. 한쪽은 너무 무겁고, 한쪽은 너무 가볍고... 이 두분의 중간에 가는 또 다른 해설자가 나와야 한다고 봐. 아직까지는 없지만...

 

맞아요.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몇가지를 꼭 이야기해주고 싶다고 생각하시는게 무엇인지? 개인적인 생각,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무엇이신지...

 

내가 저기(족자)에 글 써놨듯이, 그냥 내가 좋아서 하는것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욕심이 있어야해. 이왕 하는것이니까 다른사람들 보다 더 좋은 위치에 갔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다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거야. 기본 베이스야. 그러나 그 기본베이스 위에 꾸준히 열심히 해 나가는 정신, 마음가짐... 그런게 있어야 한다고 봐. 남들이 할수 없는거, 남들이 하지 않은 무언가를 해보는거, 추진해 가는게 중요한거지, 남들이 이미 했던것을 흉내내서 따라하는 것은 그런것은 아니라고 봐.

그러니까 자기춤을 만들어라하는 말은, 똑같은 춤사위를 가지고 체격이 다 다르고, 성격이 다 다르기때문에 다르게 표현할수 있단 말이야. 또 그렇게 표현되어지고 있고, 그런데 그 실상이 남이 보았을때 거부 반응이 오면 안된다는 거야. 어느 누가 보아도 자연스럽게, 걸려지는 부분이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춤이 되도록 계속 연마하는 수밖에 없다고 봐. 진짜 연습밖에 없어. 이런말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다 그렇게 말할꺼야. 그러니까 계속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야.

힘이 들어도, 힘에 부쳐도 이런 이유에서 계속 해나가고 있는것 같애. 내 경우에는.. 이것밖에 할수 있는게 없기 때문에, 이것만큼 잘할수 있는게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제까지 이걸 쥐고 왔다고 봐. 분명 다른게 할수 있다고 생각했으면 그 길로 갔을지도 몰라. 그래서 꾸준히 하는것이고, 다 일등 될수는 없고 또 다 꼴지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마음가짐은 일등을 향해서 달려가고 그러면서 단계적으로 그 마음가짐에 가까이 갈수 있다고 생각해. 누구나가 중도하차 하지않고 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만약에 중도하차했다가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만큼 남들에게 뒤지게 되니까, 내가 쉬는 동안 다른사람은 계속 가고 있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지.

조금 늦추면서 가도라도 계속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하루에 열번할거 열한번 하고, 그러면서 가능성을 늘려가는 거지.

 

선생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쭈어 볼께요. 박경랑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방춤, 영남교방춤을 열명이면 여덟명이 떠올리지만, 사실 선생님이 추시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너무나 많은 주옥같은 춤을 추시고, 레파토리로 갖고 계신데 그래도 많은 분들이 선생님하면 떠올리는 춤이 바로 영남교방청춤이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학술적인 정의를 떠나서, 문득 색깔론적으로 설명할수도 있고, 인생론으로도 정의내릴수 있고, 누구보다도 본인 박경랑이 생각하는 영남교방청춤은 무엇인지, 어떤 정의를 내리시는지 궁금해요.

 

내가 느끼는 영남교방청춤...?

 

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영남교방청춤...

 

춤쪽으로?

 

춤쪽이든, 철학적이든, 선생님께 있어서 의미랄까? 영남교방청춤의 의미, 정의 이런것들이요.

 

내가 영남교방청춤이라고 추어서 각인화가 되어서 그렇겠지만, 어쨋든 내가 이 춤을 출 기회가 많아. 어느 공연에 초대 되어도 이춤을 추게 되고, 좋든 싫든..

그러다보니까 이 춤을 출수 밖에 없고, 실력이 나날이 늘 수 밖에 없어.

 

네, 선생님은 곧 영남교방청춤이라는 공식이 되어 있는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디서 공연을 해달라고 초청이 들어와도, 나는 이번 초청공연은 살풀이를 하고 싶어도, 영남교방청춤을 춰야하는 경우가 많아. 내춤이 교방춤만 있는것은 아닌데 말이야. 그러다보니까 다른춤보다 이춤이 잘 춰질수 밖에 없는것 같애. 절대적으로 많은 무대에 서게 되고, 많은 연습을 하게 되고하니까...

내가 알고 내가 느낀 교방춤은 계속 이 춤을 추면서 내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되고, 그러다보면 아, 이춤은 박경랑만의 특유의 춤사위가 있는, 박경랑만이 할수 있는 춤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데, 어찌보면 거만해질수도 있는 말인데, 거만해지기보다는 그 소리가 더 무서워지는 거지.

어떤 목표를 향해서 앞만 보고 올라갔는데, 그 목표치에 어느정도 도달하고 나니까 그게 더 무서워지는 거야. ‘어~ 왜 저것밖에 못추지?’ 이런 소리를 들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되는 거지. 이럴때 순간순간 내가 그런 생각을 어떻게 차고 나가느냐, 버티고 나가느냐... 마음다스림... 그러니까 거기서 ‘더도 덜도 말고’라는 말을 내가 딱 생각해낸게, 더 잘출려고 하면 어찌보면 더 추해지겠구나.

그냥 남들이 편하게, ‘아 저 춤’하면 박경랑이라고 봐주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계속 그 자리를 지켜주는거, 그리고 처음 배울때의 그 마음으로 계속 가주는게 좋지. 거기서 부담을 느끼고 더 잘해야지 더 잘해야지라고 생각하는것은 아니라고...

그래서 최근에 느낀것 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라는 말이 이런뜻인가보다라고 생각해요.

 

네,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좋은 말씀... 다음에도 다시한번 좋은 경험, 좋은 말씀 나눠주세요.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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