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교방의 변천사

연구논문 2012. 8. 1. 13:57


교방의 변천사

김 예 진

국문초록

교방(敎坊)의 전신(前身)을 찾는데 있어서 삼국시대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에 나타난 무용수의 역할을 짐작해보면, 삼국시대이전부터 나라의 대소사(大小事)에는 직업적인 무용수가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교방이라는 명칭의 역사적 유래는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이었던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이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전통의 단절을 꿰하던 일제강점기의 매서움도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에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고려시대의 왕립음악기관에 속한 교방,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같은 음악기관에 예속된 교방사 등의 역사적 흔적 속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전통문화예술의 교육과 전승, 전파에 오랜 세월 그 소임을 다해 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어 : 교방, 권번

1)

목 차

Ⅰ. 서론

Ⅳ. 근대, 현대 교방(敎坊)의 변천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2. 연구 방법

2. 현대 교방의 흔적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Ⅴ. 결론

1. 삼국시대

 

2. 발해시대

참고문헌

 

Abstract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가. 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모든 한국춤의 근본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천해 온 교방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춤을 전공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춤의 근본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생춤이라며 천시하는 인식의 과오를 아직도 품고 있는 일부 안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기생의 기예(技藝)를 예술의 주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전면에 보여지는 남성들의 유희적 놀음으로만 기생을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의 평가와 가치는 훗날 파생되는 역사의 줄기와 뻗어나간 가지의 역할로 판가름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궤 안에서 응당한 사적(史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아픔의 역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모든 지난날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지나간 시간들의 과오의 인식이 덮혀지고 그 틀이 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전통은 그저 지나간 시간들이 아닌, 켜켜히 묵혀낸 곰삭은 절대시간을 넉넉히 품은 탄력성을 지닌 문화이다. 이러한 절대시간의 탄력성이 존재하는 ‘교방’은 그 시작점에서 오늘날까지 품고 온 전통의 낱알들이 이뤄낸 풍부한 역사 그 이상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방은 온전한 사적(史的)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시간 속에 머물러있었고, 이러한 ‘교방’을 향해 왜곡의 거플을 벗겨내고 그릇된 인식을 거둬내 간과된 사고를 바로 잡는 일이 먼저 우리 예술계에서 시작되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전통춤의 모태와 전신이며, 현재 전통춤계의 골(骨)과 근(筋)을 형성하는 역할은 수 천년 전 이 땅에 존재했던 교방(敎坊)이 이루어내었다.

교방이 존재할 당시의 예술을 장려하고 관장(管掌)한 나라의 관심도와 영향력을 추산해보면, 오늘날 현 정부가 풀어내는 예술정책에 비해 앞설 뿐 아니라, 그 비중 면에 있어서도 크다 하겠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 나오는 공자(孔子)가 전하는 말로, 옛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새것을 익힌다는 뜻처럼 교방의 역사를 온전히 인식하고,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 선조들의 뜻과 밝은 지혜를 헤아린다면, 오늘날 전통예술을 향한 과거로부터의 진귀함을 터득해낼 것이다.

본 연구는 교방의 기원부터 오늘날까지 그 맥을 이어온 과정과 시대별 변천과정을 통해 현 시점에서 취해야할 점을 연구하고자 한다.

 

2) 2. 연구 방법 및 제한점

본 연구의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고찰이 주된 연구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사적고찰이 갖는 방법으로 사료(史料)분석을 통해 연구를 진행하였다.

3)

교방의 시대적 변천을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의 시대구분은 일반적인 역사구분에 준하여 이루어졌다.

둘째, 교방의 변천과정을 다룬 선행연구 및 사료의 종합적인 해석을 참고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나. Ⅱ. 고대 교방(敎坊)의 기원

1) 1. 삼국시대

고구려시대 무용총(舞踊塚) 벽화 속에서 장삼자락처럼 긴 소매의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은 고구려시대에도 무녀, 즉 직업적인 무용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이 긴 소매의 옷차림은 중국 중원 한족의 춤 복장과도 흡사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고대 중국과 고구려의 춤 예술이 서로 교류하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의 회랑에 나타난 군주행렬도(君主行列圖)에서의 검무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며, 고분 묘실 남벽에서의 군무의 한 장면에서 고구려시대 무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 진흥왕 때 설치된 음성서(音聲署)에는 무척(舞尺), 가척(歌尺), 금척(琴尺) 등의 전문적인 예인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 무척(舞尺)은 춤 잡이를 이르는 말로 그 시대의 기녀의 존재를 짐작 할 수 있으며, 악·가·무가 어울어진 종합예술이 분야별로 세분화, 전문화되어 국가에서 관리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관제가 정비되어진 ‘국가’라는 형식이 존재하던 삼국시대에는 벌써, 예술의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서의 효용성과 유용성으로 나라의 통치자들은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전문화된 예술인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의 출현이 갖는 사적 의미만으로도 이미 삼국시대의 지배적인 예술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2) 2. 발해시대

발해시대는 교방(敎坊)이란 명칭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시기로 이시기에 국가의 악과 무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왕립음악기관인 태상사(太常寺)가 있었으며, 이때 무녀를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교방의 역할을 담당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재현, 2007).

발해와 통일신라가 공존하던 시기를 역사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칭한다.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와 백제를 흡수 한 후, 통일신라라는 명칭으로 서게 되고 고구려의 옛 영토에 발해가 세워졌다. 발해는 고구려의 시대를 따르고, 자주적인 나라가 되고자 노력한 흔적이 존재한 나라라고 평가되어진다. 그러한 자주성과 주체성이 예술을 향한 노력과 관심으로 이어져 신라와 같은 왕립음악기관을 설립하고 장려하는 정책으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한다.

 

다. Ⅲ. 중세 교방(敎坊)의 기원

1) 1.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전통적인 무교의식과 불교를 숭상함으로써 더불어 음악에서도 불교적인 행사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는데 관기들에 의해 연등회에서는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가 팔관회에서는 포구락(抛毬樂)과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가 추어 졌다고 전해진다(박지은, 2006).

관기(官妓)들의 역할은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중궁정재가 활발히 유입되어가면서 커져갔다.

이때 들어온 당악정재로는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오양선, 연화대무, 곡파로 무보가 고려사(高麗史)와 악지(樂志)에 전하며 향발무와 학무가 발생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능을 담당했던 기녀들은 천민 출신의 무당과 관청의 기녀와 관비로 당시 여악 담당기관인 교방(敎坊)에서 기예를 익혔으며 교방은 교방기(敎坊妓)와 지방기(地方妓)로 구분되는데 교방기는 각 지방의 무녀와 관기(官妓) 중 색과 예가 가장 뛰어난 자로 가무를 잘하는 사람을 뽑았으며 교방을 통하여 전문적으로 가무를 익혔다.

또한 지방기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기녀들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열릴 시에는 교방기로 뽑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전문 기녀양성기관인 교방이 설치됨에 따라 기녀들은 한층 격식 있는 가·무·악(歌·舞·樂)을 정립하였다.

고려시대 안정된 정치로 인하여 궁중연희가 활발했으며 그에 따라 기녀들은 왕의 풍류를 돕거나 외교 사신들의 접대연에서 연희를 하였다. 연희의 형태는 점차 사치스러워져 사대부의 개인 연희시에도 기녀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지방기(地方妓)나 사기(私妓)에 의해서 사대부의 집안의 행사나 서민잔치 마당에 가무악을 공연함으로서 사대부 개인의 문화적 특성과 서민의 취향에 따른 다른 형태의 가·무·악이 만들어지게 되면서 고려시대의 교방은 대중화되는 시기 였음을 알 수 있다.

 

2)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임금이나 신하 등의 남자들을 위한 잔치인 외연(外宴)과 왕대비나 중궁전 또는 내명부 등의 여자들을 위한 잔치인 내연(內宴)으로 잔치가 구분되는데 이러한 잔치의 공연활동을 담당하던 왕립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진연청(進宴廳), 진찬소(進饌所), 풍정도감(豊呈都監) 같은 임시 관청에서 궁중잔치를 위한 행정적인 임무를 담당 했다(고재현, 2007).

공연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임금의 거동과 같은 의식 절차에 의해서 연주되는 음악공연과 잔치에서 반주음악과 함께 기녀들의 춤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정재 춤을 추기위해 기녀들은 창사(唱詞)와 춤사위 또는 구호를 장악원의 악사들로부터 지도 받았다.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의 교방의 체제나 제도를 거의 이어 받았으며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아 국가의 통치이념을 예악(禮樂)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악무제도가 조선 초기부터 발달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녀들의 궁중연희가 자주 베풀어졌으며 인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지방의 기녀들이 올라와 공연을 하고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궁중에서 연행되는 정재공연을 지방의 일반인들에게 보급하는 중계자 역할에 기여했을 것으로 본다.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추어졌던 춤을 정재라고 칭하고 정재 무동과 정재 기녀로 무희를 구분 하여, 외연에서는 무동만을 내연에서는 기녀만을 구분하여 출연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생차비(妓生差備)라는 일종의 교사로부터 궁중정재 뿐 아니라 모든 가·무·악(歌·舞·樂)을 지도 받으면서 교육이 보다 구체화 되었으며 학과 과목명이 제시되었고, 춤사위별로 전공자가 나뉘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관기(官妓)를 경기(競妓)와 지방기(地方妓) 또는 외방기(外方妓)로 나누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때 경기에는 내의원이나 혜민서의 의녀와 공조와 상의원의 침선비까지 포함된다. 내외법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왕실과 양가의 부녀자들은 병이 들어도 남의(男醫)의 진찰을 꺼렸음으로 여의(女醫)의 양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똑똑한 관비를 선발하여 제생원에 소속시켜 글과 의술을 지도하였고 그 중 용모가 뛰어난 자들만 뽑아 가무를 학습시켜 궁중의 연희에도 참석 시켰다.

외방에서 여기가 올라오게 하면 폐단을 끼침이 많음으로 검소히 하기 위해 의녀와 침선비를 정재에 참여 하도록 한 것이다.

즉 조선시대 전기에는 장악원(掌樂院)에서 여기들이 가·무·악(歌·舞·樂)을 연마했고, 조선시대 후기에는 의녀와 침선비가 평소에는 의술과 바느질을 연마하다가 필요한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가무에 참여했다.

순조 때에는 정재가 정리되어 정재의 종류가 5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에 달하였고 순조28년(1828)에는 외연(外宴)과 내연(內宴) 모두에서 무동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또한 순조29년(1829)에는 순조 즉위 30년을 맞는 진연에서 가인전목단을 비롯하여 보상무, 춘앵전, 장생보연지무 등 김창하에 의해서 다양한 정재 안무를 창작하였고 효명세자에 의해 창사를 지어 정재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절정을 맞은 정재의 활동은 궁중의 대소 연희와 나라의 행사에서 여기들에 의해 연희 되어졌다. 효명세자 때 융성한 발전상을 극명하게 보이던 궁중정재는 훗날, 연희의 장소 및 연희 대상에 변화를 일으키며 권번의 기생들에 의해 민중들에게도 선보이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현대에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이어지게 된다.

교방에서 여령(女伶), 여기(女妓) 등의 명칭으로 불리우던 여기의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의 유형에는 소속에 의한 분류로 관기(官妓: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 (家妓: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자유로운 여기)로 구분된다.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지방관에 적 (籍)을 둔 여기)로 나뉘게 된다.

또,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 기), 색기(色妓: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가 있으며,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 牌: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 이패(二牌:일패에서 타락 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 다.)로 나뉜다(김지은, 2007).

고려시대의 ‘교방’기구의 설치 후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교방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대부분의 지역에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성기숙, 2005).

라.

마. Ⅳ. 근대와 현대의 교방(敎坊)의 변천

1) 1.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904년 신분제 철폐로 관기들은 신분이 자유로워졌지만 실질적인 관기의 해체는 1908년 장악원 관리하에 있던 관기들이 경시청 관할로 옮기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손유주, 2006).

1907년 12월 24일자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내용과 1908년 5월 28일 횡성신문의 기사내용을 보면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는 서양식 극장무대 위에서 기생들이 공연한 춤 종목인 승무와 한량무를 볼 수 있으며, 이춤은 무극(舞劇) 형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춤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 말년에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는 상관없이 자주 거행되는 진연으로 서울로 뽑혀온 기생들이 증가하게 되며, 진연을 마친 기생들이 서울에 계속 머물러 기생 수는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그들을 관리할 ‘기생 단속령’이 1908년 9월 25일에 내려지게 된다. 기생 단속령 내용으로는 “기생이 영업을 하려면 경시청에 신고를 하고 인가증을 받아야하며 그만둘 시에는 인가증을 반납해야한다”. 등의 기생의 활동을 단속, 통제하고 경시청의 명령권 안에 넣고자 만든 법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기제도가 폐지된 1908년 9월 이후에 소속이 없어진 유부기(有夫妓)들을 모아 조직된 기녀들이 개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한성기생조합’이라는 기생 조합이 생겼으며, 그들은 국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자립해야 하기 때문에 절과 고아원 등의 연주회에 공연을 하는 등 경비 조달을 위해 자체적으로 움직였다(이설희, 2009).

또한, 유부기조합(有夫妓組合)인 한성기생조합에 대항하여 다동기생조합을 정악원 학감(正樂院 學監) 하규일이 무부기조합(無夫妓組合)으로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기생조합의 춤 교육은 장악원의 전임자, 민속춤 전문인, 은퇴한 노기, 선배기생 들이 관계하였다(김윤주, 2002).

일제강점기 정치·사회적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에서의 기생의 활동은 경찰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일본 기생의 활동방식이 조선의 기생에게 스며들면서 기생들의 예술 활동도 다양하고 적극적인 외래문화의 수입으로 권번 이전의 교방의 흔적을 발판 삼아 또 하나의 변신을 이룩해 낸 시기라고도 정의할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활동발판은 바로 권번이었다. 권번이 성립된 것이 1914년 무렵이니 기생들의 전통춤 활동은 권번 이전 기생조합과도 연관이 있다. 1905년 궁내부 제도개편의 일환으로 조선조 궁중정재를 담당하던 여악제도가 폐지되자 1908년 여악에 소속됐던 관기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방황하던 기생들은 일본 경시청을 통해 하달된 기생조합 또는 예기조합이라는 조직에 묶여질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은 1909년 경시청에 의한 ‘창기 조합조건 명령건’이라는 기생 단속령의 시행과정에서 생겨났다.

기생조합, 예기조합에서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전화된 것은 1914년에 이르러서였다. 기생조합이 1914년에 권번이라는 명칭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는 데에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다. 하규일의 수제자로 당시 명기(名妓)로 알려졌던 평양출신 이난향이 서울 입성과 기생 입적 경로 미 활동 내력을 회고한 글에서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 명월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였다. 기생조합이 권번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 내 나이 14세 되던 때였다.”라고 1970년 12월 25일 중앙일보에 기재된 내용이 전해진다(성기숙, 2005).

전국적으로 분포되어있던 권번은 서울의 경우, 한성권번・대정권번・한남권번・경화권번 등이 있었고 대금・금천・동래・창원・광주・수원・평양・진남포・개성・안성・연기 등에 권번 또는 조합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지방의 권번은 조선시대 교방청이 존재했던 지역은 대부분 권번이 설치되었다. 즉 권번은 바로 조선시대 교방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써 그 기능과 역할에 있어서도 유사한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기 평양에는 전국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전통예능 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이 존재했다. 평양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권번이 성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진주지역이다. 진주는 한말 정현석이 쓴 『교방가요(敎坊歌謠)』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생들에 의한 다양한 유형의 춤이 전승되었던 곳이다. 조선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진주교방 역시 자연히 해체되었고, 그 후에 생겨난 것이 진주권번이다(성기숙, 2005).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예술계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지방문화재 등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고 활동하며 전통예술의 가치를 드높였던 분들이 대부분 동래권번 출신이거나, 마지막에 동래권번에 모여든 예인들이었다고 한다.

2)

3) 2. 현대 교방(敎坊)의 흔적

교방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 발해의 태상사를 만나게 된다. 국가의 통치이념과 운영에 있어 예술의 가치와 유용성의 통찰이 삼국시대에는 이미 존재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왕립으로 음악전문기관인 음성서(音聲署)와 태상사(太常寺)가 설립되었다고 본다.

고려시대에 처음 교방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이후,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은 음악과 춤의 전승기관으로 건재했었다. 역사의 급격한 변화와 나라의 기운이 모든 것을 뒤바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권번으로 명칭이 옮겨 가지전까지 교방은 오랜 시간 한민족의 문화예술을 전폭적으로 책임지던 기관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번으로 모든 기능과 존립이유가 변환의 시기를 겪은 후, 권번은 영롱한 전통문화예술의 단절의 기로에서 생명력을 유지 할 수 있었던 필요의 역사가 되어주었다.

일제강점기에 잃기 쉬었던 우리전통예능의 교육의 산실 역할을 권번은 잃어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주었다. 이렇게 권번은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물론 교방의 관기들이 대부분 권번으로 옮겨졌으나, 이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전통은 끊겨졌을 것이다.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연희를 목적으로 예능인을 양성하던 교방의 흔적은 단연 국립국악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에서 교방은 현대의 현재적 모습인 국립국악원으로 1951년 설립되어졌다. 국립국악원은 지금까지 전통예술의 진흥과 발전에 있어 다양한 노력과 시도로 국가의 대표적 ‘흥’을 책임지고 있는 곳이다.

교방의 역사를 짊어지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예능의 교육으로, 연희기관으로 그 소명을 다했던 권번은 장악원이 해체 된 후, 이왕직 아악부, 구왕궁 아악부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라져버린 교방을 대신하여 1951년 국립국악원의 설립에 있어서 가교적인 숨은 역할자라고 말할 수 있다. 정책적으로 사라져버린 교방의 기능을 다했던 권번이 있었기에 훗날 자리하게 된 국립국악원이 예술의 여러 장르에 걸쳐 온전한 형태미를 구축해 낼 수 있었다.

국립국악원은 조선시대 장악원의 전통음악을 중심으로 정악과 민속악을 전승하여 보존하는 중요한 국가기관이기 때문에, 해방과 함께 설립된 이 기관은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송방송, 2006).

바.

사. Ⅴ. 결론

본 연구는 한국 근대사에 춤의 비중에서 전통춤 영역에 존재하는 교방, 권번, 기생들의 역할이 빚어낸 공로가 평가절하 되어 있는 점에 착안하여 먼저 교방의 역사와 변천사를 연구하고자 하였다.

각 시대별 교방의 존재와 역사, 기능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첫째, 교방의 시작점은 한반도에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고 나라의 기운이 뿌리를 내리던 삼국시대로 볼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먼저 신라의 왕립음악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왕명으로 존재했으며 발해에는 태상사(太常寺)가 신라처럼 왕립음악기관으로 기록되어져있었다.

둘째, 정확한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표면화되기 시작하는데, 이는 대악서와 관현방의 악공과 교방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역할은 음악과 춤을 담당하며 궁중정재에 관여했다. 교방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조 말엽까지 교방, 교방사, 교방기 등 다소 명칭의 이동을 보이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 볼 때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이 수세기 동안 맥을 이어갔다.

셋째, 조선시대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궁중정재의 활동상을 다 소화해낸 교방은 교육과 연희라는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해낸 곳이다. 궁내의 모든 대소연희에 활약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교육이 필요하였고, 그러한 교육이 결국엔 예술성의 발전을 이끌었다.

조선말, 열강들의 어지러운 문호개방과 정치적 혼탁 속에 예술의 목적과 가치가 국가차원에서는 희석되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1907년 관기제도의 폐지 후 관기들이 흩어져 다시 모여 형성된 것이 권번이었다.

권번은 특히나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적인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집단으로 역사에서 평가절상 되어야 할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예술성의 애환은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이 전국적으로 포진해 있었기에 순화될 수 있었으며, 또한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교방은 국가예속기관으로 음악, 춤, 노래 등을 관장하며 소속된 이들의 명칭은 여기, 예기, 여악, 여령으로 조선조 말엽까지 존속해왔었다. 소속 분류로는 관기(官妓), 사기(私妓), 가기(家妓)로, 주거지에 의한 분류로는 경기(京妓), 지방기(地方妓)로, 기능에 의한 분류로는 예기(藝妓), 색기(色妓)로, 등급에 의한 분류로는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분류 할 수 있다.

넷째, 권번은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었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이름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었다. 이때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 등의 권번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했으며 가장 최근까지는 동래권번이 그 명맥을 유지하며 많은 예술인들을 양성해내는 역할을 해왔다.

결론적으로 교방은 현재 우리가 향유하는 전통을 면면히 유지해오던 국가예능기관으로 조선말엽 관기제도가 폐지 된 이후, 자연스럽게 예전의 관기들에 의해 생성된 권번의 기능과 역할에 든든한 뿌리가 되어준 기능을 몇 세기동안 수행한 관(官)이였다.

 

 

 

 

참고문헌

 

고재현. 2007.「근대 제도개편에 따른 교방 및 기방무용의 변화양상과 특징고찰」, 용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지은. 2007.「조선전기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여기의 변화양상 고찰」,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박지은. 2006. “官妓制度를 중심으로 한 기생(춤)의 기원 및 변천에 관한 고찰”. 『한국무용사학』제5호, 한국무용사학회.

성기숙. 2005.『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민속원.

성무경 역주. 2002.『敎坊歌謠』, 보고사.

송방송. 2006.『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안성희. 2005.「권번 여기 교육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이설희. 2009.「‘조선미인보감’에 나타난 기생조합과 권번에 관한고찰」, 한국예술종합 학교예술전문사과정.

임수정. 2008. “한국 여기검무(女妓劍舞)의 예술적 형식”,『공연문화연구』제17집,

한국공연문화학회.

임신화. 2007.「권번과 개인학습의 교육과정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한하영. 2009.「권번여기에 관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The Evolutions of Gyobang

 

Ye-jin Kim (completed Ph.D. course work at Dongduk Women's University)

 

In searching the predecessor of Gyobang, the Muyongchong murals of Goguryeo from the Three Kingdoms era suggest that dancers were involved with the various affairs of the state even before the Three Kingdoms era. The historic origin of the name Gyobang can be traced to Daeahkseo, which was the royal conservatory of the Goryea era, and the musicians of Kwanhyeonbang. They were primarily responsible for music and dance while involving with the court dance. The name of Gyonbang changed from Gyogang to Gyobangsa, Gyobangi and some other name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era. Meanwhile, however, there was no material change in the overall substance and function of Gyobang over the centuries.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or geisha system in 1907, scattered gisaeng constituents got together and formed 'Kweonbeon'. Kweonbeon played an instrumental role in preserving the traditional culture of Korea especially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era, as such, its historical significance needs to be assessed in a new light.

 

As the state-wide unions of gisaeng, Kweonbeon played a big part in withstanding the Japanese attempts at decimating traditional cultural norms and practices, and contributed significantly in laying out the foundation of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as we know and relish today.

 

Gyobang was a public entity in charge of music, dance, and songs, among others, until the end of the Chosun dynasty. Those who belonged to Gyobang were named Yeogi, Yegi, Yeoahk, and Yeoryong. In terms of affiliation, Gyobang can be classified into Kwangi, Sagi, and Gagi; in terms of region, Kyeonggi, and Jibanggi; in terms of function, Yegi and Sekgi; and, finally in terms of hierarchical level or class, Il-pae, E-pae, and Sam-pae.

 

Following the abolition of the state gisaeng system, Kweonbeon first started off as Joyang-gurakbu in 1909 and again as Chosun Jeongahkjeonsupso in 1911. Afterwards, Kweonbeon was operated as Dadong-johap in 1913 as a spin-off division of the Chosun Jeongahkjeonsupso. Kweonbeon continued to grow as Kwangyo-johap, and, in 1914, the era of Kweonbeon took off through Chosun Kweonbeon, Hanseong Kweonbeon and other entities. Numberous Kweonbeon existed in Seoul and other provinces, and, until recently, Dongrae Kweonbeon had produced sizable traditional artists.

 

In conclusion, Gyobang served as a public purveyor of traditional cultural practices and values for centuries, and then laid out the foundational roots for the function and roles of Kweonbeon following the end of the state gisaeng system.

 

As can be seen from pertinent historical traces, Gyobang is an institution par excellence for training, disseminating, and passing o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arts of Korea for ages long.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백 재 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존재했었기에 지나간 시간의 그릇된 사고(思考)에 발목 잡힌 ‘교방’이 이제서야 가치가 되살아난 인식의 대접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춤꾼의 무던하면서도 끈기있는 노력에 의해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해 온 전통춤의 인식 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교방청춤을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둘째, 영남교방청춤을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및 선행연구 검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의 인터뷰 및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남교방청춤은 여느 전통춤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점이 존재했다.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유지한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역사의 춤이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르는 춤이다. 운파 박경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 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1.1.1.

목 차

Ⅰ. 서론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 영남교방청춤의 맥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연구의 제한점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Ⅳ. 결론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참고문헌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Abstract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과거로부터 계승된 온갖 표현방식, 약속(conventions), 기교(technique), 어법(dictions)에 관계하여 일정한 지속적 특성을 지니면서 민족적, 지역적 예술정신으로 일관되어 민족의 고유양식을 바탕 지우는 형식 또는 정신상의 규제력이나 실천성을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전통은 사회, 민족 또는 여러 문화영역에 있어 과거에 형성되어 역사적 생명을 가지고 미래에 적극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행동, 관습, 의식, 사상, 양식, 태도 등의 가치 체계로서 수 많은 시대를 통하여 전승되는 하나의 규범적인 힘이 되며 인간을 역사적 존재답게 만들어 후세의 문화창조를 근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뿌리’(根, foundation)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꺼내는 것은 흔한접근방식으로 메뉴얼화 된 사고이며 수순이다. 보편에서 진리가 나오는 법이다.

오롯이 시간만 입은 과거의 예술이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니듯 지난간 시간을 덧대인 것이 모두 역사의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절대 시간의 날실과 민족의 혼이 깃든 시실의 만남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역사와 전통이 탄생하게 된다.

본 연구는 춤의 한 카테고리를 형성하며 독보적인 색감을 지닌 ‘영남교방청춤’의 역사, 문화, 사상, 더 나아가서는 의미를 포괄하게 되는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진실은 시대의 시간성에 상대적으로 더디게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다.

관료적인 제도에서 시작된 ‘교방’이라는 문화도 진실을 강탈 당한 왜곡에 갇히고, 곱지 않는 시선 속에 밟힌채 오랜세월을 진실을 향한 시간만을 기다리던 역사의 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수 차례 함께하고 넘겨왔던 궁중과 민속의 교방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한순간에 치명적인 인식의 철퇴를 맞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산술적인 시간 35년보다 더 무서운것은 교방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혹한의 추위와 같이 매서운 시선이다. 곱절의 시간만큼 보내고 난 지금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올바른 인식으로 향하는 사회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는 시작점과 같은 발아점이 존재한다. 교방의 인식이 새물결을 타고, 인식의 변곡점을 맞게 된것은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춤의 명칭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의 변곡점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관심을 갖으며 본 연구의 필요성이 착안되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 해 온 전통춤의 인식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하나의 깨우침과 일깨움은 또 다른 세계로의 방향지시등이 되어주게 된다. 운파 박경랑에 의해 전승되고 전파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연구는 나아가 우리 전통춤판 및 전통문화예술의 신선하고도 활기찬 대중적 문화관조와 함께 전통의 학문적 발전에도 크나큰 기여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1.2.2.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본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내용을 구명하기 위한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검토, 생존해 계시는 예능보유자선생님들 및 석학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구결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1.2.3. 3. 연구의 제한점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은 시대별로 괄목한만한 역사적 사건, 변혁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승의 측면에 있어서 가계도, 예맥 가계도, 영남지역의 예술적 특색에 초점을 맞추어서 춤의 특색을 연구하였다.

 

1.3.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영남교방첨춤의 춤 명칭에서 도드라지는것은 단연 ‘교방’이다. 교방에서 기녀를 유추해내게 되고, 기녀를 통해 기생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며 그로 인해 궁극에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색채를 가늠하게 되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일게 된다. 그러기에 ‘교방’의 역사적 탐구가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구명하는 첫 연구단계라고 생각한다.

 

1.3.1.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교방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연구에는 국가기관이라는 명패가 함께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의 국가기관에서 예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은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音聲署)를 그 시조로 삼을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족중심의 귀족사회에서 연주되었던 음악문화를 관장했던 왕립음악기관은 대악서・관현방・아악서로 압축해서 설명되어질수 있다. 왕립음악기관 소속의 공인들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렀으니, 여기(女妓)가 궁중정재를 연주할 때에는 여령(女伶) 또는 교방(敎坊)이라고 불렀고, 음악연주를 맡았던 공인들은 때에 따라서 영인(伶人)이라고도 부른 듯 하며, 영관(伶官)・악관・교방악관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의 위상과 사회적, 정치적 대우와 신분적 위치가 귀족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왕립기관으로 음성서가 존재하였다. 예술교육기관의 차원 높은 출발점이 고려시대의 교방의 전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고려는 신라와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화예술과 사회경제력 변형이 없는 왕조를 설립하여 불교를 국시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문화를 번성 시켰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교방이 우리나라의 궁궐에 설치되어 여악을 담당하였으며 기녀들에게 악, 가, 무(樂歌舞)를 교습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의 발달은 우리나라 가무역사를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기녀의 예술적인 교육은 신라시대의 음악서(淫樂書), 고려시대에서는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을 중심으로 이조시대에는 교방(敎坊)에서 가무와 악기를 익혔다고 본다.

이조시대에 와서 정책적인 변화는 소불종유(小佛從遊)의 사회적 기운에 관계되어 여악의 성격이 다소 교체되어 태종(太宗) 6년에 여악에 관한 제도의 개정으로 의녀(醫女), 침선비(針線婢)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수계층이나 귀족 계층들의 의료진료를 위하여 의녀제도(의녀제도)를 설치하였으나 의녀와 침선비는 자연 궐내에서 주연을 위한 가무(歌舞)를 겸하였기 때문에 고려이후부터 계승되어 온 관비(官婢)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기녀(妓女)가 조선왕조 더 나아가서는 한국역사상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燕山君)시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기녀(妓女)의 수를 늘려 그 수가 서울에만도 수 천명이 되었으며 기녀수의 증가는 전국의 경제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대규모적인 기녀제도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해체되었만 기녀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성리학에 물들어 있는 선비들에 의해 기녀의 폐단이 줄곧 비판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체제상 어쩔 수 없이 허용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한말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기녀제(妓女制)로 바뀌었다.

한말 교방(敎坊)조직은 일제치하에서 무산되어 버렸으며 다만 민간인 운영으로 예기(藝妓)조합인 권번(券番)을 통하여 기녀들이 소수나마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관에 의한 여악 교육이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관에서 활동하던 관기를 포함한 각 지방의 기생들이 조합을 창설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무용기관에 그 소임을 넘기게 되었다.

궁중예식(宮中禮式)에 따른 음악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면서 여악(女樂)의 교방(敎坊) 역할을 했던 장악원(掌樂院)을 통해 궁중정재(宮中呈才)는 많은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한말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고종31년)을 지나면서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하기에 이르러 그 이듬해인 고종 32년에 장악원은 장례원(掌隷院)에 통합되고 협률사로 축소되었다. 1897년(광무1년 고종34년) 교방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고종 44년(1907년, 융희원년)에는 궁내부관제가 다시 개정되면서 장악원으로 바뀐다.

표 1. 예술에 관여한 국가교육・행정기관의 변천사

신라시대 왕립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 7세기 중엽 설립

고려의 왕립음악기관 대악서(10세기말)・관현방(1076년 문종30년)・아악서(1391년 공양왕 3년)

조선시대 아악서・전악서・봉상시(1392년 태조1년), 관습도감(1393, 태조2년 : 관습도감에 교방여기가 속함)

장악서(1457년 세조3년) (우방 : 전악서, 좌방 : 아악서)

장악원(1469년 성종)

교방사(궁내부) (1897년 고종 32년)

장악과 및 아악대 (구한말 1907 – 1910)

이왕직 아악부(1910 – 1945 일제강점기)

구왕궁 아악부 (1945 – 1950)

국립국악원(1951 – 현재 :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

이렇듯, 예술에 관여한 국가기관은 신라의 음성서부터 현대의 국립국악원에 이르는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가장 주지할 사항은 삼국시대의 음성서부터 예능은 국가차원에서 설립・관리되어지면서 장려되어져 왔다는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의 명칭이 보이면서 ‘교방’이라는 역사가 민간차원보다는 나라의 관리와 장려하에 생성되어져 왔다는 점이다.

 

1.3.2.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 대악서・관현방・아악서의 음악기관에 속한 여기(女妓)가 궁중정재에 관여하는 곳을 일컫던 것으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조에 교방기(敎坊期) 교방사(敎坊司)의 명칭으로 바뀌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표. 1> 에서도 보이듯이 교방사는 고종 32년에 개칭된 후, 구한말까지 존속되어지다가 1907년 관기가 폐지된 이후 교방에 관련된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관기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관기의 역할을 하던 이들의 활동은 다시 권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게 되고 일제강점기 속에서 전통춤과 전통음악의 전승에 있어 매우 존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통춤의 교량역할을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전통문화예술에 춤의 영역이 형태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는데, 관기는 1905년 여악제도가 폐지된 후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영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된다.

 

 

표. 2 조선시대 여기의 유형 분류표

소속에 의한 분류

관기(官妓)

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가기(家妓)

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사기(私妓)

자유로운 여기

주거지에 의한 분류

경기(京妓)

경성에 사는 여기

지방기(地方妓)

지방관에 적(籍)을 둔 여기

기능에 의한 분류

예기(藝妓)

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기

색기(色妓)

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

등급에 의한 분류

일패(一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이다

이패(二牌)

일패에서 타락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삼패(三牌)

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다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으로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수 있다.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권번을 통해 많은 명기가 배출되었다.

권번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때 까지 존속 되어지다가 해방 이후 지방에서 서서히 그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부산의 동래권번이 그 생명력에 있어서는 권번역사의 끝자락을 장식한 곳이다. 부산의 동래감영 산하 동래교방청이 한말까지 존재하다가 1910년 이후 동래교방청이 해체되자 아전집안 자손들과 유지들 자식들 중 풍류를 즐기던 소위 한량들이 돈을 모금하여 동래예기조합을 만들었고 얼마 후 동래권번으로 바뀌었다.

1.3.3.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의 시기를 가늠하자면, 시기적으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들 수 있다. 그 시점부터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많은 문호개방과 조약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개방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자들과 쇄국정책을 옹호하는 자들간의 신, 구의 대립이 갑신정변, 동학동민운동 등의 배경이 되었다.

근대화를 향해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쁨 변혁과 그 변혁을 담아내는 의식의 전환은 전통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교방의 명칭을 갖춘 고려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던 교방은 구한말 근대화의 굴곡진 과정(문호개방, 일제강점기)을 거치면서 권번으로 핵심적 성격의 전환을 겪어야만 했다.

교방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관기들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기들의 뜻이 하나 둘씩 모여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는 변화의 시기를 갖는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고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하게 된다.

교방문화는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다음의 변화와 변혁을 갖게 되었다.

첫째, 교방은 근대화 과정에서 먼저 권번으로 모든 직제가 바뀌고 난 후, 교방이 지켜 온 문화예술의 향응, 향유 방식에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둘째, 교방의 설립역사 이후, 대부분의 향유대상이었던 일부 특정계층을 벗어났으며, 공연목적이 집단적인 형태의 일원에서 개인능력 위주로 집중되는 예술성의 개인성향충족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학습방법도 지역별 권번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르게 변화했다.

셋째, 교방문화의 권번으로의 이동은 자칫 사장(死藏)되고 단절될 뻔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원형을 고수하게끔 이끈 존재방식이라고 말할만큼 중요한 변혁이다.

 

1.4.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수년째 전통무대에서 변혁의 눈(目)이 되어온 작품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살펴본 교방이라는 국가예속기관으로부터 예술맥을 잇는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영남이라는 지역적 맥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1. 1. 영남교방청춤의 맥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慶尙道)’를 이르는 말로 호남(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말)과 함께 팔도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영남이라는 지역은 지형적 산세(山勢)가 험준하고 호남에 비해 비옥한 농지 보다는 척박한 토지가 지배적인 형질의 땅이다. 이러한 땅의 성질은 확연하게 삶에 투영되고, 민중의 생활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춘천아트페스티벌 中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닫혀있는 지형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지형적 형질이 춤의 본 바탕의 맥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남교방청춤의 춤세를 논할 때, 여는 전통춤에서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활달함의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특징은 바로 영남지역의 형세(形勢)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유구한 역사적 맥을 이으며, 춤태에서는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활달함과, 여성성을 지탱하는 하체의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외적표현의 내적특징이 존재한다.

1.4.2.

1.4.3.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영남교방청춤을 추어 오고 있는 운파 박경랑의 예술적 맥락은 스승의 스승 자리에 자리잡은 이가 故 김창후(1887∽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초대 예능보유자. 원양반 )선생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바이다. 故 김창후 선생은 박경랑의 외증조부로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1929∽1991 중요무형문화재 제 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중)에게로 이어지는 예맥(藝脈)을 짚어 볼 수 있다.

또한 박경랑은 가계도의 예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 단순 만족하기 보다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의 원형에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끊임없는 노력은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학습하는 기간을 스스로 택했다. 춘정 강옥남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구전심수의 개인학습을 통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 시켰다. 이와같은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의 예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깃든 책임감의 수행이 있어왔기에 오늘날의 영남교방청춤이 존재한다고 본다.

故 김창후선생은 교방이 권번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사대부집안의 풍류를 즐기던 양반신분으로 권번 생성과 권번의 활동영역에 근접하게 사셨던 분이다. 이는 운파 박경랑선생을 통해 듣게 된 외증조부의 삶의 패턴과 생애이야기에서 자주 확인되는 부분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1.4.4.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예맥의 전승이 형태와 기능면에서 균형있게 자리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독특한 사적 접근이 될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신 故 김창후선생의 생전에 삶과 예술을 영위하던 패턴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는 고성이라는 한정적 지역성을 벗어나, 영남지역 전체를 휘감아 도는 폭이 큰 풍류(風流) 활약상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고 한다.(196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경랑선생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주신 故 김창후선생의 모습의 기억과 윗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된 사실)

영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풍류정신과 영남이 지닌 예술의 맥을 자신의 춤에 풍요롭게 담아내셨기에 지금의 영남교방청춤이 외증조부의 고향이자 운파 박경랑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한정적 지역성과 맥락을 뛰어넘는 춤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김창후 선생의 출생연도를 보면 1887년도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대부의 풍류를 아는 자제들이나 양반들이 권번의 예술향유를 누릴 수 있던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이는 김창후 선생의 일가친척들의 증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 해주고 있다.

초대 문화재의 자리에 오르신 이유가 물론 고성오광대의 놀음과장을 전승시킨 점과 전수 능력에 있어서 누구보다 탁월하셨기도 하겠지만, 평상시의 그의 삶의 패턴이 전통문화가 배어있는 풍류를 여유롭게 즐기는 자연스러운 형태였기에 더욱 가능했던 부분이라고 본다. 쉽게 표현해서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는 식으로 영남지역에서 소리와 춤과 악기의 연주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가 흥을 나누고 멋에 취하는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박경랑 선생의 외가쪽 어르신들이 기억하시는 故 김창후 선생의 모습을 설명해주시는 증언이 자주 있었음).

영남지역의 예술상이 걸출한 외적활동을 한 중대한 역사의 단편이 된 일이 故 김창후 선생 생전에 있었다.

1901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난 황웅도는 젊은 시절 고향에 교육사업과 양잠산업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저항한 지사이다.

황웅도는 고성에서 인생의 변화를 몰고오는 김홍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홍주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무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던 예술인이었으며, 고성의 권번에서는 김홍주를 학습시키기를 원했기도 했었고,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고성 옛어르신들의 의견과 증언).

여기서 김홍주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숨어 있는데, 김녹주(1896∼1923)의 여동생이 김홍주이다. 또한 김녹주는 故 김수악의 스승이시다.

김홍주의 짧은 고성 권번에서의 활약시도와 학습에 고성의 고착화된 예술성이 자연스럽게 입혀졌을 것이며, 또한 故 김창후선생과 같이 풍류에 통달한 선생들로부터 한마디, 한절, 한가락씩 가르침을 받아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김홍주는 연인 황웅도와 끝내는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이때 김홍주의 예술성은 일본 각지에서 조국의 예술에 목말라 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가무악의 혼을 전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김홍주는 고성권번에서의 활약으로 자신의 예술성 위에 고성의 예술성과 특성을 덧입게 되고, 연인 황웅도와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며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는 예술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故 김창후 선생과의 문화예술적 교류가 여러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예견해보는 예술의 상호적 교류가 김홍주 선생의 예술에 영향을 필경 미쳤을 것이며, 이러한 영향은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종합해보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초대 창시자이신 故 김창후 선생의 영남지역을 자유롭게 휘감아 다니시던 풍류정신에 의해 폭넓게 영남 전 지역을 아우르는 영남의 특색을 고루 입혀진 춤을 정리해 내시게 된다.

둘째, 故 김창후 선생은 고성 지역의 유지이자, 남다른 예술성으로 권번 출입이 잦은시기에 김홍주와의 문화예술적 상호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되며, 그러한 교류가 긍극엔 그녀가 뿌리 내린 일본에서의 조선 가무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1.5. Ⅳ. 결론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과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해보고자 했다.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을 구명하기 위해서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을,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을,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를 각각 연구하였다.

국가교육기관은 삼국시대의 신라로 거슬러올라 갔으며, 음성서의 설립이 ‘교방’과 같은 예능전문관장기관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교방’과 조선시대의 교방사, 장악원의 ‘교방’을 거치면서 국가예속기관으로 전문예술인을 교육, 활용하는 성격의 틀은 유지되었다. 근대화를 거치고 국가의 운명이 달라지면서 교방은 오랜세월의 역사를 뒤로 한채, 권번으로의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번의 기능과 활약이 있었기에 다행히도 현대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일제강점기의 모진 정책에도 쇠잔함 없이 원형을 보전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교방문화는 가시적으로 권번으로의 형태적 변환을 맞게 되는데, 이때 가장 주지할 점이 이전까지의 교방문화가 개인의 예술성 발휘 측면 보다는 일부 특정계층을 향한 수준높은 향략제공과 국가의 대소 내연의 집단춤에 있어 일원의 역할에 그치는 수준이였으나, 권번으로의 이동 후, 교방문화보다는 비교적으로 개인의 예술성 발휘와 무대로의 예술성 발산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궁중무용의 학습과 공연이 일부 특정계층만을 향한 춤의 성격을 벗어났으며 춤 자체의 역사성 이음새에도 권번의 기능은 너무 훌륭히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하기 위하여 1. 영남교방청춤의 맥을,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았다.

영남교방청춤의 맥은 영남지역의 지리적 특색과 지형적 기운이 녹아 들어간 춤으로, 상체는 남성의 활달한 기개가 표현되었고, 그 상체를 받치는 하체는 여성성을 지향하며 섬세와 세련미를 자아낸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외증조부 故 김창후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故 조용배선생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데, 영남지역의 예술의 혼이 두루 담길 수 있게 김창후 선생의 활약상이 두터웠었다. 고향 고성에만 머무르며 권번 출입을 한게 아니라 영남 전역의 춤, 소리를 찾아 헤매면서 영남의 풍류의 맥을 익히셨다.

영남교방청춤은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에서는 독립운동가인 황웅도의 연인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며 활동한 김홍주와의 예술인연을 살폈다.

김녹주의 여동생으로 가무에 능한 김홍주는 고성의 권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홍주의 예술성과 고성의 예술성이 상호 교류 하는 관계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 김홍주의 일본에서의 가무악 활동상에 뿌리는 고성에서의 예술활동이 그 뿌리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추측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문화예술 전승의 관점에서는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이어간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춤이다

또한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의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른다. 운파 박경랑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 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영남교방청춤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참 고 문 헌

 

김지은. 2007. 조선시대 악무정책에 따른 무동과 기녀의 변화양상 고찰.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미학예술사전 예술사전 시리즈Ⅰ. 미진사. 1989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성기숙. 2005. 『한국춤의 역사와 문화재』.

송미정.1999. 현 전통무용에 내재된 기방무 성향에 관한 연구. 세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송방송. 2006. 『한국음악통사』. 일조각.

우리춤 연구소. 2007.

'연구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방의 변천사  (0) 2012.08.01
영남교방청춤의 미학적 특징  (0) 2012.07.10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0) 2012.07.07
경국지무(傾國之舞) 운파 박경랑  (0) 2012.03.09
"Young-nam Gyobangchung-chum" by Park, Kyung-Rang style  (0) 2012.03.02
彼女の座標  (0) 2012.02.29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8.4.29

아라재 콜렉션 (조선서화「보묵(寶墨」)전

예술의전당-서예박물관.

중략

여러 인상깊은 공연이 많았지만,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은 영남춤의

명인인 박경랑의 "교방춤" 이었습니다. 교방은 고려이후로 관아에서 예기에게

가무악을 전습하던 교육기관이었는데, 교방춤은 이곳에서 추어지던 춤을 말합니다.

맨손으로 추다가 중반에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데, 처음에는 느린 살풀이장단으로

춤을 시작하고 중간에는 빠른 자진모리장단, 그리고 다시 느린 살풀이장단으로 끝을

맺는 이 춤을 눈앞에서 보니, 그 형용할 수 없는 정중동(靜中動)의 아름다움은 가히

사람의 혼을 뺏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http://cafe.daum.net/csac/Mc0/397

 

 

 

기러기 60마리가 혹은 호방하게 날아오르고 혹은 한가롭게 물가를 노니는

장면을 화폭 하나에 담아낸 장승업의〈노안도(蘆雁圖) 십폭병〉. 종이에 담채.

144×41.3cm×10폭. 1886년작. 아라재(亞羅齋) 소장.

 

퇴계 이황(1501~1570)이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이라는

연작시 중 유거(幽居)를 행서로 썼다.

지본묵서(紙本墨書), 52×66.9cm. 아라재(亞羅齋) 소장.

                                                                                           출처: 청실산여회 여명님글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운파 박경랑이 맥을 짚어가고, 이어가는 춤! 영남교방청춤

 

백재화(kenzo71@hanmail.net)

 

1.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오늘의 이 시간, 오늘을 장식했던 사회 전반의 이슈와 사건들도 일정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차를 지나게 되면 역사의 궤 속에 들어가게 되며, 선택과 선별의 잣대에 의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는 문화, 예술이 될 것이다.

지금 광풍처럼 몰아치고, 대중세계를 압도하는 사건, 흐름, 유행이 모두 다 역사와 전통이라는 명패를 달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찰나의 유행과 전통의 밑동이 되고 초석으로 자리매김할 재목은 한마디로 시간이라는 흐름이 그 유사성을 분별해 내게 된다.

오늘의 문화가, 이 시각의 춤이 전통의 옷을 자연스럽게 입게 되기를 바래본다. 그 바람의 시각에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춤이 ‘영남교방청춤’이라고 생각한다.

‘영남교방청춤’은 춤 명칭에서 보이듯이 ‘영남’이라는 지역성과 ‘교방청춤’이라는 계층성이 도드라진 춤이 만나서 형성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지역성이 확연히 구별되어 제 각기 발전하고 발달한 문화와 역사를 지녀왔다. 그 지역성은 땅의 기질과 사람의 기질이 시간성 위에서 변화와 대처를 탄력적으로 이끌어냄으로 생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한국춤의 특징가운데 지역적, 시대적 특징이라고 좀 더 면밀히 말할 수 있다(백재화, 2004, “한국춤에 대한 예능보유자들의 형이상학적 인식”, p. 69).

영남이라는 지역의 명칭은 경상도 지역을 뜻하는데,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을 간주된다(우리춤 연구소, 2007,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창간호 특집 인터뷰

정영만 선생님 인터뷰

(2011년 춘천아트 페스티벌에서의 인터뷰)

 

interview by 백 재 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춤과 음악, 소리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참 좋은 질문이네. 이제까지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춤과 음악과 소리는 따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동작 부분이나 눈으로 봤을 때 저건 춤이다, 소리다, 저건 음악이다 이러는 것이지. 옛날말에 우리 사설에도 나와 “노래가 나면 춤이 난다”라는 이야기가 있어. 소리 없는 춤이 어디 있고, 노래 없는 춤이 없다고, 흥이 나면 먼저 노래를 가지고 흥이 나면 몸이 움직여지잖아. 그건 자연적인 발생인거야. 사람은 자연의 순리대로 가야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해서 따로 떼어간다든지 하면은 이것은 이상하다. 그 근본을 모르고 춤을 춘다는 자체가 그것은 춤이 아니다.

춤은 무언의 극인데 무언의 극을 어떻게 동작에 아무 느낌이 춘다는건지, 그러면 그건 춤이 아니다. 그래서 춤과 소리는 같이 간다. 같이 혼합되어야만 제대로 된 예술이 된다. 혼합되어야만! 춤과 소리가 없을 수가 있나? 음악도 소리에 속하지.

소리가 나야 춤이 나거든. 춤이 나야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니까 누군가 하는 말이 “춤을 부르는 소리”라고 하더군. 그게 맞는 말이야. 안그래요?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리 없는 춤이 어디가 있어요? 소리가 빠르면 빠른대로 춤을 출 것이고, 늦으면 늦은대로 출 것이고, 몸 동작이란 자체가 그렇잖아요. 허나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춤이란 자체가 왜 춤을 출까? “왜 춤을 춰?” 이런 질문을 하면 답을 못 내려요. ‘좋으니까?’

 

좋은 것은 기본이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들리는 소리가 몸을 움직이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까 춤을 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마음을 움직이게 하니까 춤이 추어지는 거예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춤이어야지!

 

누구는 그러더라구요. ‘춤’이라는 글자가 사람이 마음위에 서 있는 형상을 본 따서 만든 글자라구요. 그래서 춤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고, 또 마음을 움직이게 춤을 추어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그건, 학자들이 해석해서하는 말이고 나는 학자 수준은 못되어서 그렇게 말은 못하고, 나는 있는 그대로 느낀 그대로 또 우리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신 그대로 말하는거예요.

“나는 춤꾼이예요!” “나는 음악가예요!” 이런 말이 나는 참 못마땅해!

 

선생님께서 좀 전에 말씀해주셨듯이, 선생님처럼 오랜 세월 한 분야에 몸담으신 분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박사 논문을 선생님처럼 한평생을 예능에 몸담아 오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그분들이 생각하시는 한국춤에 대한 생각을 interview하는 연구였는데, 너무 흥미롭게도 분야는 각자 다르셔도 한국춤을 생각하시는 카테고리는 일맥상통했습니다.

 

그렇지, 그래 봐야지.

 

공부하시는 분들의 이론이나 생각이 먼저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봐요. 학자분들이 책을 통해 춤에 대해 음악에 대해 소리에 대해 많은 이론을 펼치셨지만, 그분들도 저처럼 여러 선생님들께 많이 여쭤보고 공부해서 문서화시켰기 때문에 학문적 정의가 나왔지, 실기를 하시는 선생님들보다 앞서서 여러 정의를 내놓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작업(지금의 interview)을 학자들이나 또 자기 선생을 모시는 제자들이 잘못된 것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이 세상이 잘 못되어서 그렇게 하기가 힘든데...

예를 들어 자기 선생이 볼펜을 연필이라고 했어. 그건 아니잖아. 앞에서 아부한다고 볼펜을 연필이라고 하지 말아야지. 세상이 어지러워서 그 앞에서 볼펜을 연필이라고 한단 말이지. 선생님 앞에서 ‘선생님, 이거 혹시 연필 아닐까요?’라고 정중하게 다시 여쭈어봐야지. 제대로 된 선생은 ‘어 그래..연필이었구만, 연필이야.’라고 말해주겠지만 ‘아니야. 그건 볼펜이야!’라고 밀고 나가는 선생은 상당히 선생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거지. 그런 세상이 되어서는 안되겠지.

특히나 춤에 있어서는 전공한 춤꾼... 이 전공이라는 말에, 전공했다는 말에 있어서 나는 참 아이러니한 것을 느끼는데, 난 어릴 때부터 우리 선생님한테 와서 교수나 교수될 사람이나, 박사논문 쓰는 사람들이 와서 몇 시간 취재나 인터뷰하고 가요. 잠깐 몇 시간이야... 그게 전체인 것처럼 다 퍼져서 그게 획일화가 되어서 정론화가 되어 있단 말이예요.

그러면, 물론 그 말은 맞겠지만, 그게 정말 속 맛을 알겠는가? 아니다 이거지. 그래서 춤은 춤대로 장단은 장단대로 음악은 음악대로 가는 거지. 이건 아니라 이거지! 같이 간다. 왜 같이 가느냐? 우리는 권번에서 배울 때 춤이라고 해서 따로 배우고 소리라고 해서 따로 배우고 그러지 않았어요. 소리 속에서 춤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하나만 물어보자! 춤에 호흡이 있나?

 

선생님의 질문에 일상적으로 답을 하자면 춤에 다 호흡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응, 배웠지! 그런데 호흡이 없는 게 어디 있겠어! 그러나 춤에 따르는 호흡은 아니란 말이지.

 

소리에 따르는, 소리와 함께 가는 소리와 같이 가는 호흡이 춤의 호흡이라는 말씀이신거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잘 봤네. 그러니까 춤에 따로 되어 있는 호흡은 없어! 난 그것은 결론은 내린다.

소리하는 사람들이 “얼씨구나~ 어~ 어~~~으...” 소리에서 거기서 춤이 나오는 거야. 발림에서 춤이 나오는 거야! 발림이 춤이 되는거지. 그 시대에서 어느 한 사람이 “어 여기가 춤이 좋겠구나..이 사위가 좋겠구나..”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어진거야! 음악도 마찬가지야. 거기에 맞춰서 그때 그때 좋아서 지어진거야. 그걸 정리를 하는 가운데 또 교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까 어디에서 몇 장단에서는 호흡을 쉬고 끌어올릴 때는 호흡을 내 뱉고 뭐 이렇게 정론화 시킨 것은 잘못 된 것이지. 이건 교과서적이다. 다만 배울 때는 이래 배웠지만 다음에 할 때는 이래 하지 말아라. 이건 기본적으로만 하는 것이지 이게 다는 아니라는 것을 꼭 단서를 달아서 가르쳐주어야해!

그래서 지금 춤꾼들이 거의 중급정도 올라가서 다, 거의 다 뭐.. 이런 춤꾼들이 누굴 가르치는데 있어서 어디에서 몇 장단 올라가서 내뱉어주고 어느 동작에서는 호흡을 팍 쉬어주고.. 이런건 말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왜 아니냐 하면은 하다보니까 그렇게 하면 더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만들어지는 춤을 왜 그렇게 지금 새로 정리한다는 명분하에 그 춤을 로봇식으로 만들었냐 그거지!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이거지. 예술은 자유분방하고 그 다음에 제약을 받지 말아야하고, 왜 제약된 예술을 하려고 하느냐, 다만 예(禮)는 꼭 지켜주고 도리는 지켜주어야지!

 

학교에서 오래 배우고, 교수님께 배우고 여러 강사선생님들께 배우고 했단 말이예요. 너무 오랜 시간 학교에서 공연문화를 접할 때, 순서를 정확히 배워서 옷 입듯이 정확히 배워서 MR에 맞춰서 하는 공연 문화가 너무 오랜 세월 몸에 익은거예요. 물론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공연할 때 MR을 가장 많이 썼어요. 여러 큰 선생님께도 많은 배움이 있었지만 박경랑선생님께 배움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라고 할까, 인식의 변화라고 할까.. 그런 것을 꼽으라고 하면 소리를 춤과 연결시켜서 생각할 수 있었던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음악을 탄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춤이 MR을 떠난 음악이 소리가 춤과 연결되는지... 물론 지금 다 안다는 것은 거짓말일테고..필요성과 그렇게 한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소리에 따라서 여기서는 이렇게 타주고, 이 소리에서는 이렇게 추어지고 저 소리가 날 때는 이렇게 추어지고 그런 굵직굵직한 것을 가르쳐주어야지. 애들에게 생각할 수 있게, 창의력을 끌어 낼 수 있게 끌고 나가야지. 원래 이런 것이 우리나라 교육인데, 옛날부터 있어왔던.. “아가 니가 한번 지어바라 .” 이렇게 가르쳐줘요. 기본만 가르쳐주고. “자~ 소삼대삼은 요렇게 요렇게 소삼이 들어가고 이럴 때는 대삼이 들어가고 얼르는 춤은 이렇게 들어가는 거다.” 이런 삼요소를 어느 학자님들은, 돌아가신 정병호 선생님께서는 그걸 정중동(靜中動)이렇게 만들어 가지고...설명하셨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잖아요. ‘소리는 호남이요, 춤은 영남이다.’ 제가 워낙 모르니까 책을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꺼리나, 옛 어르신들의 말씀 말씀에 귀를 기울여봤는데, 이 말을 보면서 정말 영남과 호남의 특성이 다른가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우리나라는 지역별 특성이 다 각기 다르잖아요. 호남, 영남, 충청, 경기별로 다르잖아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영남지역의 특징, 그러니까 다른 지역과 구분지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특징은 어떤 것들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특징을 말하자면, 그 지방의 문화적 관습이, 문화적 관습을 먼저 이야기하고 나서 그 지역의 특징을 말해야 해요.

네 맞아요. 문화와 역사와 관습은 항시 같이 가는 거니까요.

 

그렇지, 문화와 역사와 관습은 항상 같이 가지. 그 걸 보고나서야 왜 특징이 그렇게 생겼는가의 이유가 나오는 것이지! 이유 없는 결과는 없거든. 그래서 근본적으로 영남쪽에는 현시대로 근접해서 말하자면 서구문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는 지리적 조건을 갖은 곳이 영남이야. 일본도 가까워. 인천도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기에 좋았지만 아무래도 영남쪽에는 부산이 있어서 더 쉽지 않았나. 영남쪽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어디 보다도 더 빨랐기에 소리나 전통 문화쪽이 더 빨리 없어져. 선호를 하지 않아. 예술이라는 자체가 얼마만큼 발전되는가는 일반사람들이 얼마만큼 선호하느냐에 따라 달렸는데, 선호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니까. 전통문화가 그 선호도가 전라도는 많아. 높아! 그런데 우리 경상도는 선호도보다는 경시풍조가 있어. 경시풍조가 만연해서... 시대적으로 정치적으로 그 경시풍조의 이유를 캐보면 더 알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곳 경상도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선호도가 약해. 영남지역은 일반인들의 전통문화예술 선호도가 떨어져. 춤이든 소리든 이런게 많이 미천한 쪽으로 돌변하다보니까 더딘 발전을 보이고 왕성한 발전을 못했지. 반면 전라도는 많이 발전되었는데, 유독 춤만 그렇게 경상도가 발전되었느냐? 그게 아니고 고급문화는 고급문화대로, 마당문화는 마당문화대로 발전되어왔지만, 경상도에는 거의 통제부, 삼도통제사령부가 발전되어 온데에는 거기가 조선시대에 백제권이기 때문에 그 문화가 통영으로 해서 고성으로 거제, 부산 자갈치까지 그리 봐주면 되지. 그렇게 해서 소리, 춤 문화가 발전되어 올수가 있었지. 그래서 박녹주( 朴綠珠, 1906.2.15.~1979.5.26 본명 명이(命伊). 경북 선산(善山) 출생. 12세 때 박기홍(朴基洪)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고 뒤에 송만갑(宋萬甲)·정정렬(丁貞烈)·유성준(劉成俊)·김정문(金正文) 등에게 배웠다. 1937년 창극좌(唱劇座)에 입단하였으며, 1945년에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가,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선생이 한 이야기가 있어. “통영에 가서 별신굿 소리를 듣다보니까 그 학습이 보통 공력이 아니더라. ”그 만큼 예술의 공력이 범상치 않게 발전되어 왔지만 일반인들의 선호도 측면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맥이 끊길 뻔 했어. 자칫하면.. 그래서 춤만 겨우 남아서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였었지. 그러다가 탈춤이 먼저 문화재로 발굴이 돼. 탈춤이 발굴이 되다보니까 영남은 춤이요 호남은 소리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애. 나는 거기에 상당히 거부반응을 많이 일으켜.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은 전라도에 가보면 선호가 부러울 만큼 했을 뿐이라. 물론 소리 같은 것은 전라도에 유명한 사람 많지. 그러나 우리 경상도에도 소리를 유명하신 분 많아요. 안알려져 있어서 그렇지. 이화중선(1898년∼1943년. 여류명창 중의 한 사람. 부산 출생. 김초향(金楚香)과 더불어 당시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17세 때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홈실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여 살던 중,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보고 감동하여 집을 나가 장득주(張得周)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로 몇년 만에 〈춘향가〉‧〈수궁가〉‧〈흥보가〉를 공부하였고, 서울로 와서 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의 지도를 받아 당시 여류명창으로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

아무리 어려운 대목도 거침없이 시원스럽게 불러 청중을 매혹시켰으나, 오히려 거침없이 쉽게 부르는 것이 감동을 덜 주는 단점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 때에 임방울(林芳蔚)과 함께 음반을 가장 많이 녹음한 명창으로 꼽히고 있다. 대동가극단을 조직하여 지방순회공연을 많이 하였고, 일본 공연도 많이 하였다.

1943년 재일교포 위문공연차 일본을 순회하던 중에 죽었다. 그녀의 장기는 〈심청가〉 중에서 ‘추월만정(秋月滿庭)’,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였다. 출처, 참고문헌 : 朝鮮唱劇史(鄭魯湜, 朝鮮日報社, 1940) 판소리小史(朴晃, 新丘文化社, 1974),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씨 집이 김해야.

 

역사를 보면 유명한 권번들은 다 이쪽 경상도지역에 있었잖아요.

 

다 이쪽에 있었지.

 

선생님 말씀을 듣다보니까 든 생각인데, 어느 한쪽만 치우쳐서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 같네요.

 

소리도 보면 서편제, 동편제 나뉘어서 말들 하는데, 뭐 워낙 분류를 해서 그렇지 그건 아니지! 지금, 이매방류 뭐 이렇게들 분류해서 말들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되지. 세상이 자꾸 이렇게 변해져 버리는데.. 뭐 그렇게 분류해서 좋은 점도 있겠지. 그러나 내가 볼 때는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느 편에 서게 되면, 편견 된 입장으로 볼 수 있다는 거지. ‘어 전라도 지방에 가면 당연히 소리가 잘할 것이고, 잘해! 경상도 지역에 가면 당연히 춤이 좋아. 춤을 잘춰!’ 그건 아니지! 그런 걸 배우는 입장에서나, 가르치는 입장에서나 이런 걸 바로 짚고 넘어가 주어야 해요.

우리는 기성세대잖아. 기성세대는 무언가? 기성세대는 자기입장을 구축하는 자기를 위한 욕심이 아무래도 많은 집단인데, 그 아래에서 이렇게 구분되는 분류가 나오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정론화 시키는 이론화 시키는 입장에서만 바라보다보니까, 손쉽게 ‘호남은 소리요, 영남은 춤이다.’라는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영남쪽에 춤이 발달했다..춤이 발달했다. 발달이라는 용어 자체가 나는 거부반응이 일어나요.

‘소리문화는 영남도 있었지만 오히려 더 선호가 되고 호남은 발달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고 생각해요.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영남지역의 특징, 그러니까 호남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영남지역만의 예술적 특징, 영남만이 갖고 있는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장점은 영남지역의 예술의 장점은... 문화는 마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문화적 관습 이런 것들이 다 영향을 받거든. 말, 행동 같은 문화적 요소들이 영향을 끼친단 말이예요. 경상도 말씨가 어때요? 굉장히 우직스럽지?

 

네.

 

그러니까 경상도는 말씨 자체가 우조.

 

우조? 우조가 뭐예요?

 

우조가 굵직한 소리를 우조라고 하거든. 그러니까 우조의 소리 형태가 잔잔할 때는 잔잔하지만은 그러니까 춤도 아주 영향을 많이 받지. 아주 섬세한 부분도 있지만 아주 우직스럽게 추어 나가는 부분도 있지. 이건 말씨와 같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말하자면 음악이, 소리가... 우리는 “밥 먹으러 가자~!!” “음악~!” 이렇게 턱 단박에 자르지? 춤도 턱 맺지? 그렇지? 덧배기, 배김사위 있지? 이런 게 특징이라!

예를 들어, 똑같은 선생 밑에서 춤을 배우더라도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사람만의 특징이 나와. 부드러워~ 나긋나긋하고, 물론 경상도에는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면도 있지만 아주 우직스럽게 확 차고 나가는 것도 있어. 그런게 지방색에 따라 다 틀리지. 소리도 마찬가지야. 어떤 예술적 요소가 자기 지방색을 낸다는 것이지. 그게 특징이야. 다른 것은 없어!

함경도 사람을 데려다가 경상도 소리를 가르치면 경상도 소리를 다할 것 같나?

함경도 소리가 보태져.

  

   

선생님 권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권번 이야기전에 교방이야기를 해줄께.

 

그럼 권번하고 교방의 차이점을 말씀해주세요.

 

쉽게 이야기해서 권번은 보수적이야. 국가의 녹을 먹고 나라에서 기생을 키운 자리거든. 거기에 교육하고..딱딱해. 정악처럼... 교방에서 굿거리춤이 있었는가? 없어. 권번은 음악은 정악이야. 딱딱해. 제도화된 춤이 없어. 굿거리라는 자체가 무속에서 나온거거든. 굿거리라는 자체가 굿의 거리라는 말이거든. 굿에 많이 쓰이는 장단이름이 굿거리장단이 된거야. 모든게 세습문화에서 전부 전파되었다고 보면 돼. 모든 춤, 소리, 장단이 모두 전파되었다고 보면 돼. 굿거리는 무엇이냐? 굿은 있는 그래도 판을 벌리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거리라는 자체는 한 과장을 말해. 일장, 이장, 삼장.. 한거리, 두거리.. 이게 장단 이름이 되었지.

그래서 음악과 춤을 같이 알아야 한다는거야. 춤꾼이 음악을 모르다는게 말이 안돼.

 

제 경우만 돌아보아도 음악을 알아야 춤을 제대로 알 수 있는게, 그 교육이 처음부터 제대로 되지를 못했습니다. 음악과 함께 춤을 이해하고 배워야 하는데, 음악보다는 춤이 위에 있다고 잘못 인식하면서 지냈습니다. 음악을 알아야 춤을 더 잘 알아갈수 있는데....물론 몰라서 못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이 태반이예요. 지금의 대학교육을 담당하시는 여러선생님들이... 소위 말해서 장단하나 제대로 못쳐요.

 

우리나라 제도가 잘못된게, 우리나라 국악원도 생기고 좋아... 그런데 무용과 선생이 관현악과 가서 춤을 가르치고 관현악과 선생이 무용과가서 음악을 가르쳐야돼. 우리는 그렇게 배웠거든. 종합적으로...

 

물론 국악원이 그런 시스템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국악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의 무용과도 마찬가지야. 국악과에서 해금하는 놈이 해금만 하는거..이건 아니거든. 이건 서양방식이라...

 

그렇게 배움을 끌어간다면 음악의 이해도, 춤을 향한 이해도가 함께 발전해서 좋을텐데요..

 

그러니까 이해도도 떨어질뿐더러, 집약된 예술문화가 안돼. 나는 권번에서 배웠던거하고 사회 나와서 보는게 이해가 안됐어. 춤을 추는 아이가 구음하나 제대로 못하고, 장단치는 놈이 춤도 제대로 못춰.

 

일례로 모대학은 한국무용전공자가 4년 내내 졸업할때까지 장구채 한번 못잡아보고 장구한번 못 쳐보고 졸업한대요. 장구장단, 북장단을 왜 배워야하냐고 교수가 말했대요.

 

그게 무슨 대학이고, 장단치다가 흥이 돋우면 뛰어나와야지, 춤도 추는 그러는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춤도 못춰. 환경에 지배를 받거든. 피리, 대금도 주변환경에 지배를 받거든. 소리로서 춤을 춰야하고, 몸으로서 음악을 할 줄 알아야 하거든. 이런건 지금 꼬맹이들한테 어찌 해야할거고, 이해를 못해. 손자 같은 아이들은 놓고 무슨 이야기를 할꺼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지금의 자기교수들을 욕하는 꼴 밖에 안되는데...

 

선생님, 저도 지금보다 어릴적에 지금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해를 못했을꺼에요. 대학의 교수가 되면, 어찌보면 항해사와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배를 좋은곳으로 안전하게 운행을 잘하면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라는 자리는 너무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좋은 교육을 학생들이 받을 수 있도록 조정하는 자리에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교수들이 좋은 선생님들을 모셔다가 교육하는걸 꺼려해요. 자신의 실력과 비교되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걸 보여주게 될까바...그런 하찮은 이유때문에 아이들은 4년 내내, 너무 좋은 선생님들을 뒤꼭지도 못쳐다보고 또한 좋은 교수법을 지닌 선생님들을 못 만나보고 졸업하는거 같아요.

 

나는 대학교수는 교수다워야해. 가르치는 방법을, 잘 가르쳐주는 방법을, 한마디로 전달자가 되어야해. 좋은 선생님을 모셔다가 가르침을 베풀때 자신의 실력이 들통난다는 생각을 버리고 같이 배우는 입장으로 ‘애들아,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이 계시단다. 이렇게 좋은걸 잘 배워라’라고 말해주어야해.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선생님을 평생에 한번 만나볼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게 너무 가슴 아파요.

 

내가 이런말하면 아주 모나게 내려깐다..하겠지만, 양심적으로 말하는거야. 물론 나도 말한걸 다 실행하지는 못하지만, 실행할려고 노력한 사람이야. 우리나라에 교육에 적극적으로 실행해야한다고 생각해. 안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물은 흘러가는대로 놔두어야 한다’ 그러는데 이런 생각이 일제강점기때 나온거야. 일본놈들의 근성을 본받아서 그리해. 그때의 아주 몹쓸 배경이 있어서 그래. 못된 관습이 고대로 남아 있어. 그래서 시대적 배경은 환경의 지배한다는 말이 맞아.

 

그럼 선생님, 권번과 교방은 차이점이 뭐예요?

 

권번은 민간에서 쉽게 이야기해서 기생조합이라고 하지. 나중에는 예기조합이라고 하거든. 쉽게 말하면 요즘 춤패, 마루니..그런 형태가 각 고을마다 있었어.

꼭 예를 들자면 교방은 지금의 국악원처럼 나라에서 운영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고, 권번은 뜻 맞는 예인들이 모여서 지역별 예술연합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네요.

 

서로 전달하고 배우고, 사실은 교방에 있던 사람이 권번에 있던 사람이고 쉽게 말하면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개인단체에도 속해 있고 그런거야. 교방에서는 딱딱한 획인한 문화행사가 많았지만, 권번은 그것보다는 자유로운면이 있었으니까.

교육은 혹독하다.

 

예술은 그 혹독한 훈련의 시간을 거쳐야하는것 같아요. 필수적인것 같아요. 그래야지 예술은 입을수 있고, 그 다음에 자기색을 낼 수 있으니까요.

 

나이먹은 사람들은 퇴기라해서 활동을 안해. 그리고 일정한 나이가 되면 젊은 사람들을 위해 물러나. ‘그래 네가 노름을 좀 할 줄 아네.. 이제부터 네가 해라~’그러면서 물러나. 지금처럼 늙었는데도 죽도록 물고 늘어지지는 않아.

 

선생님 ‘신청’이라는 권번같은 곳이 있었어요?

 

신청이라는 자체가 무당도 키우고, 채선무도 키우고, 기생도 키우고... 매나 소리나고 하던 곳이니까, 통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권번, 뭐 그런 이름이 ‘신청’이지.

 

선생님, 여기서 공부하셨어요?

 

공부한게 아니고.... 여기서 그냥 살았지.. 허허

 

아...강아지도 과일 안물어 가는 곳이요?(평소에 우스개소리로 정영만 선생님께서는 어릴적 굿판에서 살다시피해서 집에 과일과 떡이 너무 흔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들은 귀하게 보는 과일과 떡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별만 귀하게 안쳐다보았다는 농담을 잘 하셨다.)

 

허허...... 그렇지.

 

저는 책에서 봤을때 동래권번, 이런걸 봤는데 신청은 처음 봤어요.

 

통영권번이나 부산에 동래권번이나 룰은 그게 다 비슷비슷해요. 동래권번이 70년때 중반까지 있었지. 가장 늦게까지 있었지. 신청권번 그 비슷하게 없어졌지. 동래권번이 없어지기전에 신청이 없어졌으니까...

 

신청권번에 대한 자료가 어디 있을까요?

 

자료가 거의 전무한 상태다. 사진 몇장 남아있고.., 사람들 명단이라든지, 회원들 명단이 다 있었는데 다 사라져 버렸다. 불에 사라져버렸다.

 

왜 사라져버렸어요?

 

글쎄, 다 불에 사라져서 없어졌다. 불에 타 버렸다고...

 

너무 중요한 자료인데, 왜 불에 타 버렸을까요?

 

뭐, 중요한 거라고....불에 타버렸지.

 

지금은 너무 중요한 자료이잖아요. 그때 당시에 활동하셨던 분들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래도 그 자리며 그런거 내가 다 알고 있지.

옛날에 권번출신이나 권번에서 배운 사람들은, 우리끼리 쓰는 ‘변’을 써. ‘변’을 모르면 우리끼리는 치지를 않아. 인정을 안해. 기생은 생자라고 하고, 여자를 아줌라고 해주고 시집안간 여자는 자동이라고 해주고, 디딤이라는 말도 우리 ‘변어’에서 나온말이야.

‘참, 육갑사람 좋다’, ‘손짓 잘한다...’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이 별로 없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권번출신하고 아닌사람하고는 구별이 돼.

옥섭이가 나한테 ‘저 사람 권번 출신 맞아? 나랑 한번 같이 가보자~’해서 가서 몇마디 나눠보면 대번에 알아. 진짜인지 가짜인지...

 

권번에서 쓰는 용어가 뭐가 있을까요?

 

권번에서 쓰는 용어? 다 똑같다. 전국적으로 통일이 되어있다. 무당, 기생 이런 사람들이 쓰는 거하고 똑같아. 강신무는 엉터리다. 무당 아니라고 봐.

 

예전에는 이북은 강신무고 남한은 세습무잖아요.

난 강신쪽은 인정안한다. 제대로 배운 사람은 괜찮은데, 대부분이 엉터리다. 왜 이 굿을 하는지 그 자체를 몰라. 신이 시켜서 한대...

 

아, 맞다. 위쪽이 강신이고 아랫쪽이 세습이였는데, 지금은 다 아래지방도 강신이 많아졌죠? 내림굿 받고 하는게 강신이죠? 선생님 말씀대로 어릴적부터 알든 모른든 보면서 자라면서 배운게 참 많은 영향을 미칠텐데...하루아침에 되는게 아니라서~

 

우리쪽은 정치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지. 물론 나도 정치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러다 보니까 주눅도 많이 들고, 욕하는것도 많이 잃어버렸지....

여자 성기를 보성이라고 하고 남자 성기를 장식기라고 하고...

 

보통은 국어국문학과, 민속학과 이쪽 선생님들이 그런 연구를 많이 하시잖아요.

 

많이들 할려고 하지, 와서 물어보면 대답을 많이 해주지...굳이 찾아다니면서 해줄 필요는 없고..

 

그 분들이 오셔서 많이 연구하고, 정립을 해주셔야죠. 선생님대가 지나면 묻힐 이야기들이잖아요.

 

내대(代가) 지나면 없어져버리고 말지. 이제 되었나?

 

네에, 하루아침에 다 여쭈어볼수가 없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너무 많은걸 지니고 계신 선생님이라서 하루, 하루 찾아뵈면서 여쭙고 알아갈게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소중한 이야기 너무 감사했습니다.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