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TAG 검무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第七届全国舞蹈比赛女子群舞 《剑兰》 海政文工团

제7회 국립 무용 경연 대회 여성 그룹 댄스 '글라디올러스'HAIZHENG 예술 공연단 코어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교방의 춤, 검무

검무는 여러 춤꾼들이 군복인 전복을 입고 군모인 전립을 쓴 채 서로 마주보고 양손에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으로 문헌에는 ‘검기무’로 나오고 속칭 ‘칼춤’이라고 하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면을 쓰고 추던 칼춤으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교방의 기녀들이 가면을 벗고 추는 검무로 전승돼 왔다. 조선 시대에 각 지방에 설치된 교방청에서 전승되어오던 검무는 각지역의 특색에 따라 여러 종류의 검무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검무로는 진주검무·통영검무 평양검무·해주검무·함흥검무·밀양검무·호남검무 등이 있다.
이중 누가 뭐래도 백미는 ‘진주 검무’이다. 우리나라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이 1780년 진주를 찾았다. 당시 장인인 홍화보가 경상우병사로 진주에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들른 것이다. 그때 장인은 젊은 사위를 위해 진주 촉석루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었는데, 다산은 당시 진주 교방 기녀들이 추는 검무를 보고 장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작은북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 넓디 넓은 좌중이 가을 물처럼 고요한데 /진주성 성안 여인 꽃같은 그 얼굴에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 /보랏빛 쾌자에다 청전모 눌러 쓰고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칼춤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라는 시 첫부분이다.
200여년전 다산 정약용이 직접 보고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던 진주 검무는 1967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12호로 지정돼 진주의 대표적인 교방춤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진주 검무는 8명의 춤꾼이 남색 무사복, 전복, 홍색 전대, 검은 전립에 색동 한삼을 끼고 춤을 춘다. 처음에는 느린 염불의 도드리 장단에 일렬로 입장하여 중앙에 종대로 마주선 다음 느리고 장중하게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땅에 놓았던 칼을 양손에 갈라 쥐고 빠른 타령장단에 칼을 좌우사위로 휘두르며 장쾌하게 칼춤을 춘다. 이 진주검무는 진주 교방청의 무원으로 있던 최순이(崔順伊·1884~1969)의 고증으로 복원된 것인데, 현재는 성계옥, 김순녀 등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다.
고종 때 교방청 춤꾼 최순이는 13세 때 진연도감청(進宴都監廳)에 뽑혀 올라가 고종 41년(1904)부터 순종때까지 궁중무희로 있다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낙향하여 진주로 돌아왔으나 곧 이어 교방청도 해산되었다. 얼마후 교방청이 기생조합형태로 유지 되었는데 여기서 최순이는 1918년부터 후배 양성을 하였다. 그 제자들이 진주검무의 맥을 이어 지금껏 전승되어 오고 있다.
정현석 목사의 ‘교방가요’에 검무를 어떻게 추는가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실려있다. 150년전 진주에서 추었던 검무의 형태를 알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네 명의 기녀가 나란히 절하고 일어서면 음악이 시작된다. 북을 두 번 치면 한 손을 들고, 북을 다섯 번 치면 두 손을 들거나 혹은 한 손은 들고 한 손은 내린다. 쌍쌍이 마주보고 춤을 추다가 마주 앉아 칼을 가지고 노는데 먼저 칼 하나를 집어들고 다음에 또 하나를 집어들고 춤추면서 일어나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춤추기를 몇차례 행한다. 서로 쫓고 서로 칼을 치다가 마침내 연풍대(宴豊臺)(즉 칼을 휘두르며 몸을 돌리면서 주행하는 것인데 일명 연풍대이다)를 하는데 칼을 옆에 끼고 도는 동작을 1회 하고 칼 하나를 한번씩 휘두르기를 1회 하고 쌍칼 휘두르기를 1회 하고 칼 찌르기를 1회 하고는(한 기녀가 춤출 때 세 기녀는 쉰다) 칼을 던져 버리고 절하고 나온다.”
교방가요에 진주검무를 추는 모습이 그림으로 나와있는데, 융복(戎服)차림의 젊은 기녀인 소기(少妓) 2명과 황삼(黃衫)차림의 어린 기녀인 동기(童妓) 2명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을 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 6명의 악사도 함께 그려져 있다. 즉 4명의 기녀와 6명의 악사에 의해 진주검무는 추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8명이 추는 팔검무로 정착이 되었다.
이에 대해 진주검무 예능보유자인 성계옥씨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현재까지는 진주검무의 숫자가 8명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었으나 내 기억에도 그 이전에는 4검무를 때에 따라 추었다. 아니면 궁중의 검무와 구분짓기 위해 진주의 기생들이 8명으로 추는 팔검무의 전통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며 여덟명이라는 숫자는 팔선녀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진주 팔검무’의 유래를 말했다.
검무는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유서깊은 춤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 ‘풍속조(風俗條)’에 의하면, 황창랑(黃倡郞)이라는 신라 소년이 7세의 어린 나이로 나라를 위해 적국인 백제에 들어가 칼춤으로 이름을 날려 백제왕이 그 소문을 전해 듣고 그를 불러 검무를 보았는데, 황창랑이 기회가 왔다 하고 검무를 추다가 마침내 백제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 황창랑 또한 잡혀 죽었다. 이에 신라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의 용모와 닮은 가면(假面)을 만들어 쓰고 그의 춤을 모방하여 추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화랑 관창(官昌)이 660년(태종 무열왕 7) 백제군과 싸울 때에 적에게 생포되었는데 적장 계백(階伯)은 어린나이에 용맹이 있음을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보냈으나,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분전(奮戰)하다가 또 다시 생포되자 이번에는 계백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다.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에 크게 자극되어서 백제군을 대패시켰고 계백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동경잡기’ ‘관창조(官昌條)’에서 이첨(李詹)은 “황창랑은 필시 관창일 것이다. 옮기는 이의 잘못일 것이다”고 하였으며, 이유원(李裕元)의 시문에도 “관창와오황창랑(官昌訛誤黃倡郞;황창랑은 관창의 사적이 후세에 와전된 때문이다)”이라고 한 것으로 황창랑을 관창으로 보고 여기서 검무의 연원을 찾기도 한다.
이처럼 검무는 황창랑이라는 신라의 나이 어린 소년이 나라를 위하여 백제 왕궁에 들어가 왕 앞에서 칼춤을 추다 백제왕을 죽이고 자신도 잡혀서 죽은 충절을 추모하여, 신라 사람들이 창랑의 용모와 비슷한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가 추던 춤을 모방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진주목사 정현석은 ‘진주검무’를 보고 교방가요에 한 편의 시를 남겼다.

섬섬옥수 칼 빛은 매섭구나 雙雙纖手劍光寒
왔다 갔다 나비떼 같네 鬪去鬪來蝴蝶團
곡 끝나자 연풍대 시작되니 曲終更奏軟風隊
비처럼 가벼운 몸 구르는 구슬 같네 飛燕身輕如轉丸

'한국무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청만 '반백년예술' 10 - 故임이조선생의 한량무  (0) 2012.11.05
이매방선생의 춤인생 인터뷰  (0) 2012.09.25
교방의 춤, 검무  (0) 2012.09.09
춤의 움직임과 표현  (0) 2012.09.01
진주교방굿거리  (0) 2012.06.20
교방무  (0) 2012.06.18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박경랑의 춤살이 '폐인'들 거느린 '꾼'

국제신문 2006-06-28 20:29

박경랑은 1961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고성오광대 초대 인간문화재인 고 김창후 선생이 그의 외조부. 그래서 그는 네 살 때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춤추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박 씨는 어릴 적 고성과 부산을 오가며 초 중 고교를 다니다 세종대 무용학과에 들어가 본격적인 춤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박 씨는 외조부가 돌아가신 뒤 할아버지의 수제자인 조용배(작고) 선생에게 고성오광대 문동북춤과 허튼덧뵈기춤·승무·영남교방춤 등을 사사했다. 그리고 황무봉(작고) 선생께 살풀이·검무·화관무·춘앵무·부채춤·오고무를 배웠다. 이어 김진홍 선생에게서 이매방류의 전통춤인 승무·살풀이·입춤을, 강옥남 선생으로부터도 승무·살풀이와 허튼춤을, 김수악 선생에게서 진주굿거리춤을 사사하는 등 거의 모든 영남춤 대가들의 춤을 섭렵했다.

개천무용제·전주대사습 등 많은 경연대회에서 대상이나 장원을 휩쓴 그는 1997년 서울전통공연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것을 끝으로 경연대회 참가를 접었다. 명실공이 '춤'을 인가 받았기 때문.

박 씨는 1993년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처음으로 '박경랑의 춤'을 선보인 뒤 지금까지 100회가 넘는 공연을 가졌다. 이스라엘 세계민속춤 페스티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는 등 해외 순회공연도 수없이 많이 가졌다.

그는 전통을 기본으로, 늘 연구하고 개척하는 춤살이를 하고 있다. 올들어 서울 김해 창원에 이어 지난 26일 부산무대까지 순회공연한 '박경랑과 광대들의 놀음'은 그가 고안한 퓨전작품. 살풀이춤도 지난 3월(서울)엔 '황진이의 넋'을 주제로 했고, 5월(김해)엔 음력 4월 초파일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는 뜻에서 '그리움, 하늘 가는 길'로, 이번엔 보훈의 달을 맞아 '호국영령을 기리며'로 주제를 잡았다. 이 때문에 마니아와 팬들을 몰고 다닐 정도로 인기를 끌며 팬 후원회까지 두고 있다. 전통문화예술학교, 경남정보대·동서대 사회교육원 전통민속예술학과 지도교수이기도 하다.

Posted by 경헌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