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백 재 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추어지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존재했었기에 지나간 시간의 그릇된 사고(思考)에 발목 잡힌 ‘교방’이 이제서야 가치가 되살아난 인식의 대접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
한 춤꾼의 무던하면서도 끈기있는 노력에 의해 영남교방청춤은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해 온 전통춤의 인식 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영남교방청춤을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둘째, 영남교방청춤을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연구한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 및 선행연구 검토, 예능보유자선생님들의 인터뷰 및 증언을 토대로 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바라본 영남교방청춤은 여느 전통춤에서 접하기 쉽지 않은 점이 존재했다.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유지한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역사의 춤이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접근해 본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르는 춤이다. 운파 박경랑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지금도 성장하고 있었다.
셋째,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 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1.1.1.
목 차 | |
Ⅰ. 서론 |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
1. 영남교방청춤의 맥 |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
3. 연구의 제한점 |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
Ⅳ. 결론 |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
|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
참고문헌 |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
Abstract |
1.1.
1.2. Ⅰ. 서론
1.2.1.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과거로부터 계승된 온갖 표현방식, 약속(conventions), 기교(technique), 어법(dictions)에 관계하여 일정한 지속적 특성을 지니면서 민족적, 지역적 예술정신으로 일관되어 민족의 고유양식을 바탕 지우는 형식 또는 정신상의 규제력이나 실천성을 전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전통은 사회, 민족 또는 여러 문화영역에 있어 과거에 형성되어 역사적 생명을 가지고 미래에 적극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행동, 관습, 의식, 사상, 양식, 태도 등의 가치 체계로서 수 많은 시대를 통하여 전승되는 하나의 규범적인 힘이 되며 인간을 역사적 존재답게 만들어 후세의 문화창조를 근본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뿌리’(根, foundation)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꺼내는 것은 흔한접근방식으로 메뉴얼화 된 사고이며 수순이다. 보편에서 진리가 나오는 법이다.
오롯이 시간만 입은 과거의 예술이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니듯 지난간 시간을 덧대인 것이 모두 역사의 조명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절대 시간의 날실과 민족의 혼이 깃든 시실의 만남이 있어야 빛을 발하는 역사와 전통이 탄생하게 된다.
본 연구는 춤의 한 카테고리를 형성하며 독보적인 색감을 지닌 ‘영남교방청춤’의 역사, 문화, 사상, 더 나아가서는 의미를 포괄하게 되는 정체성을 구명하고자 한다.
진실은 시대의 시간성에 상대적으로 더디게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역사속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되는 많은 경우가 그러했다.
관료적인 제도에서 시작된 ‘교방’이라는 문화도 진실을 강탈 당한 왜곡에 갇히고, 곱지 않는 시선 속에 밟힌채 오랜세월을 진실을 향한 시간만을 기다리던 역사의 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수 차례 함께하고 넘겨왔던 궁중과 민속의 교방문화는 일제 강점기를 기점으로 한순간에 치명적인 인식의 철퇴를 맞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산술적인 시간 35년보다 더 무서운것은 교방의 올바르지 못한 인식과 혹한의 추위와 같이 매서운 시선이다. 곱절의 시간만큼 보내고 난 지금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올바른 인식으로 향하는 사회적 물결이 일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에는 시작점과 같은 발아점이 존재한다. 교방의 인식이 새물결을 타고, 인식의 변곡점을 맞게 된것은 ‘영남교방청춤’의 전통춤판계 활약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춤의 명칭에 교방이라는 단어가 함께하기 시작하면서 인식의 변곡점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통의 역사적 인식변혁에 관심을 갖으며 본 연구의 필요성이 착안되었다. 본 연구는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여년 이상의 질량적 시간이 주도 해 온 전통춤의 인식변화 및 반향에 주목하여 영남교방청춤이 지니는 역사, 문화, 사상, 의미 등을 포괄하는 정체성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하나의 깨우침과 일깨움은 또 다른 세계로의 방향지시등이 되어주게 된다. 운파 박경랑에 의해 전승되고 전파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 연구는 나아가 우리 전통춤판 및 전통문화예술의 신선하고도 활기찬 대중적 문화관조와 함께 전통의 학문적 발전에도 크나큰 기여점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1.2.2. 2. 연구 내용 및 연구 방법
본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에 기여하는 연구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연구한다.
이러한 연구내용을 구명하기 위한 연구방법은 문헌고찰과 선행연구 검토, 생존해 계시는 예능보유자선생님들 및 석학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구결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였다.
1.2.3. 3. 연구의 제한점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탐구, 연구하는데 있어 다음의 제한사항을 전제로 한다.
첫째, 교방의 기원과 활동은 시대별로 괄목한만한 역사적 사건, 변혁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전승의 측면에 있어서 가계도, 예맥 가계도, 영남지역의 예술적 특색에 초점을 맞추어서 춤의 특색을 연구하였다.
1.3. Ⅱ. 예술교육기관의 원형연구와 역사
영남교방첨춤의 춤 명칭에서 도드라지는것은 단연 ‘교방’이다. 교방에서 기녀를 유추해내게 되고, 기녀를 통해 기생을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며 그로 인해 궁극에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의 색채를 가늠하게 되는 생각이 순차적으로 일게 된다. 그러기에 ‘교방’의 역사적 탐구가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구명하는 첫 연구단계라고 생각한다.
1.3.1.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사
교방의 시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연구에는 국가기관이라는 명패가 함께하게 된다. 우리나라 역사의 국가기관에서 예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은 삼국시대 신라의 음성서(音聲署)를 그 시조로 삼을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왕족중심의 귀족사회에서 연주되었던 음악문화를 관장했던 왕립음악기관은 대악서・관현방・아악서로 압축해서 설명되어질수 있다. 왕립음악기관 소속의 공인들은 경우에 따라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렀으니, 여기(女妓)가 궁중정재를 연주할 때에는 여령(女伶) 또는 교방(敎坊)이라고 불렀고, 음악연주를 맡았던 공인들은 때에 따라서 영인(伶人)이라고도 부른 듯 하며, 영관(伶官)・악관・교방악관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의 위상과 사회적, 정치적 대우와 신분적 위치가 귀족이었던 삼국시대에는 왕립기관으로 음성서가 존재하였다. 예술교육기관의 차원 높은 출발점이 고려시대의 교방의 전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난다.
고려는 신라와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문화예술과 사회경제력 변형이 없는 왕조를 설립하여 불교를 국시로 삼고 이를 기반으로 불교문화를 번성 시켰다.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교방이 우리나라의 궁궐에 설치되어 여악을 담당하였으며 기녀들에게 악, 가, 무(樂歌舞)를 교습하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의 여악(女樂)의 발달은 우리나라 가무역사를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기녀의 예술적인 교육은 신라시대의 음악서(淫樂書), 고려시대에서는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房)을 중심으로 이조시대에는 교방(敎坊)에서 가무와 악기를 익혔다고 본다.
이조시대에 와서 정책적인 변화는 소불종유(小佛從遊)의 사회적 기운에 관계되어 여악의 성격이 다소 교체되어 태종(太宗) 6년에 여악에 관한 제도의 개정으로 의녀(醫女), 침선비(針線婢)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수계층이나 귀족 계층들의 의료진료를 위하여 의녀제도(의녀제도)를 설치하였으나 의녀와 침선비는 자연 궐내에서 주연을 위한 가무(歌舞)를 겸하였기 때문에 고려이후부터 계승되어 온 관비(官婢)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기녀(妓女)가 조선왕조 더 나아가서는 한국역사상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燕山君)시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은 기녀(妓女)의 수를 늘려 그 수가 서울에만도 수 천명이 되었으며 기녀수의 증가는 전국의 경제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연산군의 대규모적인 기녀제도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의해 해체되었만 기녀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도 성리학에 물들어 있는 선비들에 의해 기녀의 폐단이 줄곧 비판이 되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사회 체제상 어쩔 수 없이 허용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말기까지 존속되었다. 하지만 한말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관기제도가 없어지면서 기녀제(妓女制)로 바뀌었다.
한말 교방(敎坊)조직은 일제치하에서 무산되어 버렸으며 다만 민간인 운영으로 예기(藝妓)조합인 권번(券番)을 통하여 기녀들이 소수나마 존속되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면서 관에 의한 여악 교육이란 사실상 사라지게 되고 관에서 활동하던 관기를 포함한 각 지방의 기생들이 조합을 창설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무용기관에 그 소임을 넘기게 되었다.
궁중예식(宮中禮式)에 따른 음악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면서 여악(女樂)의 교방(敎坊) 역할을 했던 장악원(掌樂院)을 통해 궁중정재(宮中呈才)는 많은 발전을 이룬다. 하지만 한말 갑오경장(甲午更張) 1894년(고종31년)을 지나면서 관제개혁(官制改革)을 하기에 이르러 그 이듬해인 고종 32년에 장악원은 장례원(掌隷院)에 통합되고 협률사로 축소되었다. 1897년(광무1년 고종34년) 교방사로 그 명칭이 바뀌었고, 고종 44년(1907년, 융희원년)에는 궁내부관제가 다시 개정되면서 장악원으로 바뀐다.
표 1. 예술에 관여한 국가교육・행정기관의 변천사
신라시대 왕립음악기관 음성서(音聲署) 7세기 중엽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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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왕립음악기관 대악서(10세기말)・관현방(1076년 문종30년)・아악서(1391년 공양왕 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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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아악서・전악서・봉상시(1392년 태조1년), 관습도감(1393, 태조2년 : 관습도감에 교방여기가 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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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서(1457년 세조3년) (우방 : 전악서, 좌방 : 아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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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1469년 성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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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방사(궁내부) (1897년 고종 3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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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과 및 아악대 (구한말 1907 – 1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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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직 아악부(1910 – 1945 일제강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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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왕궁 아악부 (1945 – 19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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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1951 – 현재 :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영속성의 관점) |
이렇듯, 예술에 관여한 국가기관은 신라의 음성서부터 현대의 국립국악원에 이르는 변천사를 보이고 있다. 가장 주지할 사항은 삼국시대의 음성서부터 예능은 국가차원에서 설립・관리되어지면서 장려되어져 왔다는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교방의 명칭이 보이면서 ‘교방’이라는 역사가 민간차원보다는 나라의 관리와 장려하에 생성되어져 왔다는 점이다.
1.3.2.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
교방의 명칭은 고려시대 대악서・관현방・아악서의 음악기관에 속한 여기(女妓)가 궁중정재에 관여하는 곳을 일컫던 것으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다. 이때부터 조선조에 교방기(敎坊期) 교방사(敎坊司)의 명칭으로 바뀌면서 명맥을 유지해왔다.
<표. 1> 에서도 보이듯이 교방사는 고종 32년에 개칭된 후, 구한말까지 존속되어지다가 1907년 관기가 폐지된 이후 교방에 관련된 명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관기제도는 폐지되었지만, 관기의 역할을 하던 이들의 활동은 다시 권번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게 되고 일제강점기 속에서 전통춤과 전통음악의 전승에 있어 매우 존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통춤의 교량역할을 함으로써 현재의 우리전통문화예술에 춤의 영역이 형태적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권번의 효시는 1900년대 초기에 생겨난 기생조합에서 찾을 수 있는데, 가장 먼저 생긴 기생조합은 한성기생조합이다. 한성기생조합은 관에 속해 있었던 조선시대의 관기(官妓)가 해체되던 즈음에 이루어졌는데, 관기는 1905년 여악제도가 폐지된 후 1907년부터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1908년 9월에는 장례원에서 관리하던 기생들을 경시청에서 관리하고 기생들에게 자유영업을 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폐지된다.
표. 2 조선시대 여기의 유형 분류표
여 기 의 유 형 |
소속에 의한 분류 |
관기(官妓) |
관(官)에 적(籍)을 둔 여기 |
가기(家妓) |
사가에 거주하는 여기 | ||
사기(私妓) |
자유로운 여기 | ||
주거지에 의한 분류 |
경기(京妓) |
경성에 사는 여기 | |
지방기(地方妓) |
지방관에 적(籍)을 둔 여기 | ||
기능에 의한 분류 |
예기(藝妓) |
관에 적을 두고 여악과 궁중연희에 참여하는 여기 | |
색기(色妓) |
위안부의 역할을 하는 여기 | ||
등급에 의한 분류 |
일패(一牌) |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글과 그림 및 예정을 배운 기생이다 | |
이패(二牌) |
일패에서 타락한자, 은밀한 매춘을 한다 | ||
삼패(三牌) |
가무서화를 못하고 잡가정도만 부르며 유객한다 |
권번은 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으로 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이라 할수 있다. 검번(檢番) 또는 권반(券班)이라고도 불렀다. 권번에서는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를 받아주는 역할도 하였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바치게 하였다.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권번을 통해 많은 명기가 배출되었다.
권번의 역사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때 까지 존속 되어지다가 해방 이후 지방에서 서서히 그 자취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다.
부산의 동래권번이 그 생명력에 있어서는 권번역사의 끝자락을 장식한 곳이다. 부산의 동래감영 산하 동래교방청이 한말까지 존재하다가 1910년 이후 동래교방청이 해체되자 아전집안 자손들과 유지들 자식들 중 풍류를 즐기던 소위 한량들이 돈을 모금하여 동래예기조합을 만들었고 얼마 후 동래권번으로 바뀌었다.
1.3.3.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
우리 역사에서 근대화의 시기를 가늠하자면, 시기적으로 1876년의 강화도 조약을 기점으로 들 수 있다. 그 시점부터 세계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많은 문호개방과 조약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안으로는 개방적인 발전을 주장하는 자들과 쇄국정책을 옹호하는 자들간의 신, 구의 대립이 갑신정변, 동학동민운동 등의 배경이 되었다.
근대화를 향해 그 어느때보다도 숨가쁨 변혁과 그 변혁을 담아내는 의식의 전환은 전통예술분야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교방의 명칭을 갖춘 고려시대부터 조선조를 거치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던 교방은 구한말 근대화의 굴곡진 과정(문호개방, 일제강점기)을 거치면서 권번으로 핵심적 성격의 전환을 겪어야만 했다.
교방의 관기제도가 폐지된 후, 관기들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기들의 뜻이 하나 둘씩 모여 조양구락부가 1909년 설립되고 다시 조선정악전습소가 1911년 설립되는 변화의 시기를 갖는다. 이후 다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의 분교실로 운영되고 다시 광교조합으로 분화 발전되다가 1914년 조선권번, 한성권번등이 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과 지방에 많은 권번이 존재하게 된다.
교방문화는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다음의 변화와 변혁을 갖게 되었다.
첫째, 교방은 근대화 과정에서 먼저 권번으로 모든 직제가 바뀌고 난 후, 교방이 지켜 온 문화예술의 향응, 향유 방식에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둘째, 교방의 설립역사 이후, 대부분의 향유대상이었던 일부 특정계층을 벗어났으며, 공연목적이 집단적인 형태의 일원에서 개인능력 위주로 집중되는 예술성의 개인성향충족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학습방법도 지역별 권번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르게 변화했다.
셋째, 교방문화의 권번으로의 이동은 자칫 사장(死藏)되고 단절될 뻔한 우리의 전통문화가 원형을 고수하게끔 이끈 존재방식이라고 말할만큼 중요한 변혁이다.
1.4. Ⅲ. 영남교방청춤의 다원적 역사연구
운파 박경랑에 의해 십수년째 전통무대에서 변혁의 눈(目)이 되어온 작품이 “영남교방청춤”이다. 이 작품은 이제까지 살펴본 교방이라는 국가예속기관으로부터 예술맥을 잇는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영남이라는 지역적 맥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영남교방청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1. 1. 영남교방청춤의 맥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경상도(慶尙道)’를 이르는 말로 호남(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말)과 함께 팔도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또 다른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영남이라는 지역은 지형적 산세(山勢)가 험준하고 호남에 비해 비옥한 농지 보다는 척박한 토지가 지배적인 형질의 땅이다. 이러한 땅의 성질은 확연하게 삶에 투영되고, 민중의 생활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경상도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으며 내륙은 해안선과 일직선으로 뻗어 내린 태백산맥과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에 의하여 한반도의 중서부지역과 나누어지므로 영남지역이라고 불린다. 산세가 험준한 소백산맥은 강원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와의 경계를 이룬다. 또한 조령의 남쪽 대덕산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야산맥은 경북과 경남을 가르는 역할을 한다. 태백, 소백산맥과 그리고 낙동과 그 지류들에 의해 영남지역은 크고 작은 분지와 평야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비교적 좋은 환경이 되었으나 외부와의 교통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외래문화와의 유입은 반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는 늦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영남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특징으로 선사시대부터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특성과 전통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간주된다.
선사시대를 지나, 한반도에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줄곧 이 영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도 근접국인 일본과의 교류 및 서구의 침범에 첫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지리적 요건에 합당한 곳이었다. 이 말은 유리함이 곧 불리함의 첫 조건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다른 지역보다 소통과 교통의 취약점이 많았고, 또 외세의 침략이 제 일순위였던 지리적 조건은 자연스럽게 지역적 특성이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폐쇄적인 성향을 길러내기에 충분하였으리라 본다(2011, 8, 4, 춘천아트페스티벌 中 중요무형문화재 제82-4호 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 정영만 선생님과의 인터뷰 중에서 발췌).
폐쇄적인 성향의 도드라짐은 먼저 지역적 특성에서 이끌어낸 주요원인일 것이며, 이로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관습들은 순차적으로 지역의 독특함을 여러 방면에서 자아냈을 것이다.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대적으로 호남지역의 성향과 사뭇 다르다.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편리했고 비옥한 토지에서 넉넉함을 지녔던 호남에 비해 영남은 닫혀있는 지형과 원치 않는 외세의 끊임없는 도전과 도발로 지역성과 민족성을 단단히 폐쇄성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문화예술의 향유와 수용은 일반 민중에게 빠른 보급과 유행보다는 다소 더딘면이 있었으며, 예술성격 자체도 보드랍고 섬세한 여성성 보다는 반대급부의 남성성이 특징의 상부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지형적 형질이 춤의 본 바탕의 맥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남교방청춤의 춤세를 논할 때, 여는 전통춤에서 쉽사리 접하기 어려운 활달함의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특징은 바로 영남지역의 형세(形勢)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남교방청춤은 교방이라는 예능관장전문기관에서 유구한 역사적 맥을 이으며, 춤태에서는 영남의 우직스럽고 기개가 넘치는 상체의 활달함과, 여성성을 지탱하는 하체의 섬세함이 잦아들어 있는 외적표현의 내적특징이 존재한다.
1.4.2.
1.4.3.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영남교방청춤을 추어 오고 있는 운파 박경랑의 예술적 맥락은 스승의 스승 자리에 자리잡은 이가 故 김창후(1887∽1965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초대 예능보유자. 원양반 )선생이라는 점이 가장 주목할 바이다. 故 김창후 선생은 박경랑의 외증조부로 그의 제자 故 금산 조용배(1929∽1991 중요무형문화재 제 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중)에게로 이어지는 예맥(藝脈)을 짚어 볼 수 있다.
또한 박경랑은 가계도의 예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점에 단순 만족하기 보다는 영남교방청춤의 춤사위가 여느 춤보다 어렵다는 점과 옛 멋의 원형에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갖은 노력을 했다. 끊임없는 노력은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을 모셔 학습하는 기간을 스스로 택했다. 춘정 강옥남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구전심수의 개인학습을 통해 춤을 다듬고 정리하여 무대화 시켰다. 이와같은 각별한 열정과 가계도의 예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이 깃든 책임감의 수행이 있어왔기에 오늘날의 영남교방청춤이 존재한다고 본다.
故 김창후선생은 교방이 권번으로 탈바꿈하던 시기에 사대부집안의 풍류를 즐기던 양반신분으로 권번 생성과 권번의 활동영역에 근접하게 사셨던 분이다. 이는 운파 박경랑선생을 통해 듣게 된 외증조부의 삶의 패턴과 생애이야기에서 자주 확인되는 부분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1.4.4.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
예맥의 전승이 형태와 기능면에서 균형있게 자리하고 있는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독특한 사적 접근이 될것이다.
영남교방청춤은 운파 박경랑의 외증조부이신 故 김창후선생의 생전에 삶과 예술을 영위하던 패턴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는 고성이라는 한정적 지역성을 벗어나, 영남지역 전체를 휘감아 도는 폭이 큰 풍류(風流) 활약상으로 평생을 사신 분이셨다고 한다.(1965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박경랑선생의 유년시절을 함께 해주신 故 김창후선생의 모습의 기억과 윗어르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된 사실)
영남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풍류정신과 영남이 지닌 예술의 맥을 자신의 춤에 풍요롭게 담아내셨기에 지금의 영남교방청춤이 외증조부의 고향이자 운파 박경랑의 고향인 경남 고성의 한정적 지역성과 맥락을 뛰어넘는 춤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김창후 선생의 출생연도를 보면 1887년도로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는 사대부의 풍류를 아는 자제들이나 양반들이 권번의 예술향유를 누릴 수 있던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이는 김창후 선생의 일가친척들의 증언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 해주고 있다.
초대 문화재의 자리에 오르신 이유가 물론 고성오광대의 놀음과장을 전승시킨 점과 전수 능력에 있어서 누구보다 탁월하셨기도 하겠지만, 평상시의 그의 삶의 패턴이 전통문화가 배어있는 풍류를 여유롭게 즐기는 자연스러운 형태였기에 더욱 가능했던 부분이라고 본다. 쉽게 표현해서 동가식 서가숙(東家食 西家宿)하는 식으로 영남지역에서 소리와 춤과 악기의 연주가 좋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마다하지 않고 단걸음에 달려가 흥을 나누고 멋에 취하는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박경랑 선생의 외가쪽 어르신들이 기억하시는 故 김창후 선생의 모습을 설명해주시는 증언이 자주 있었음).
영남지역의 예술상이 걸출한 외적활동을 한 중대한 역사의 단편이 된 일이 故 김창후 선생 생전에 있었다.
1901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난 황웅도는 젊은 시절 고향에 교육사업과 양잠산업을 최초로 도입한 인물인 동시에 독립운동가로서 일제에 저항한 지사이다.
황웅도는 고성에서 인생의 변화를 몰고오는 김홍주와 인연을 맺게 된다. 김홍주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가무의 명인으로 명성이 높던 예술인이었으며, 고성의 권번에서는 김홍주를 학습시키기를 원했기도 했었고, 그녀의 활약을 기대하기도 했었다고 한다(고성 옛어르신들의 의견과 증언).
여기서 김홍주의 등장이 중요한 이유가 또 하나 숨어 있는데, 김녹주(1896∼1923)의 여동생이 김홍주이다. 또한 김녹주는 故 김수악의 스승이시다.
김홍주의 짧은 고성 권번에서의 활약시도와 학습에 고성의 고착화된 예술성이 자연스럽게 입혀졌을 것이며, 또한 故 김창후선생과 같이 풍류에 통달한 선생들로부터 한마디, 한절, 한가락씩 가르침을 받아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자연스러워진다.
김홍주는 연인 황웅도와 끝내는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이때 김홍주의 예술성은 일본 각지에서 조국의 예술에 목말라 있던 재일조선인들에게 조선가무악의 혼을 전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김홍주는 고성권번에서의 활약으로 자신의 예술성 위에 고성의 예술성과 특성을 덧입게 되고, 연인 황웅도와 일본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며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는 예술정신을 발휘하게 된다.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故 김창후 선생과의 문화예술적 교류가 여러 관점에서 조망해 볼 때, 충분히 가능성이 농후한 일이다. 예견해보는 예술의 상호적 교류가 김홍주 선생의 예술에 영향을 필경 미쳤을 것이며, 이러한 영향은 일본으로까지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으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종합해보면 첫째, 영남교방청춤은 초대 창시자이신 故 김창후 선생의 영남지역을 자유롭게 휘감아 다니시던 풍류정신에 의해 폭넓게 영남 전 지역을 아우르는 영남의 특색을 고루 입혀진 춤을 정리해 내시게 된다.
둘째, 故 김창후 선생은 고성 지역의 유지이자, 남다른 예술성으로 권번 출입이 잦은시기에 김홍주와의 문화예술적 상호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 되며, 그러한 교류가 긍극엔 그녀가 뿌리 내린 일본에서의 조선 가무악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1.5. Ⅳ. 결론
본 연구는 영남교방청춤의 정체성을 첫째, 문화예술전승의 관점과 둘째,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해보고자 했다.
문화예술전승의 관점을 구명하기 위해서 1. 국가교육기관의 역사적 변천을, 2. 교방・권번의 명맥과 시간성을, 3. 근대화를 거친 교방문화를 각각 연구하였다.
국가교육기관은 삼국시대의 신라로 거슬러올라 갔으며, 음성서의 설립이 ‘교방’과 같은 예능전문관장기관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교방’과 조선시대의 교방사, 장악원의 ‘교방’을 거치면서 국가예속기관으로 전문예술인을 교육, 활용하는 성격의 틀은 유지되었다. 근대화를 거치고 국가의 운명이 달라지면서 교방은 오랜세월의 역사를 뒤로 한채, 권번으로의 그 기능과 성격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번의 기능과 활약이 있었기에 다행히도 현대가 향유하는 전통문화예술이 일제강점기의 모진 정책에도 쇠잔함 없이 원형을 보전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근대화의 시기를 거치면서 교방문화는 가시적으로 권번으로의 형태적 변환을 맞게 되는데, 이때 가장 주지할 점이 이전까지의 교방문화가 개인의 예술성 발휘 측면 보다는 일부 특정계층을 향한 수준높은 향략제공과 국가의 대소 내연의 집단춤에 있어 일원의 역할에 그치는 수준이였으나, 권번으로의 이동 후, 교방문화보다는 비교적으로 개인의 예술성 발휘와 무대로의 예술성 발산 기회가 많아지게 된다.
또한 궁중무용의 학습과 공연이 일부 특정계층만을 향한 춤의 성격을 벗어났으며 춤 자체의 역사성 이음새에도 권번의 기능은 너무 훌륭히 이루어졌다고 보겠다.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 구명하기 위하여 1. 영남교방청춤의 맥을, 2.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전승도, 3.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을 살펴보았다.
영남교방청춤의 맥은 영남지역의 지리적 특색과 지형적 기운이 녹아 들어간 춤으로, 상체는 남성의 활달한 기개가 표현되었고, 그 상체를 받치는 하체는 여성성을 지향하며 섬세와 세련미를 자아낸다. 운파 박경랑의 영남교방청춤은 외증조부 故 김창후선생으로부터 시작되어 故 조용배선생에게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데, 영남지역의 예술의 혼이 두루 담길 수 있게 김창후 선생의 활약상이 두터웠었다. 고향 고성에만 머무르며 권번 출입을 한게 아니라 영남 전역의 춤, 소리를 찾아 헤매면서 영남의 풍류의 맥을 익히셨다.
영남교방청춤은 첫째, 영남의 예술적 풍류로 평생을 유영하신 외증조로부터 탄탄하게 이어받게 된 영남의 외적표현의 내적특성의 존재와 둘째, 동래권번의 춤선생이셨던 춘정 강옥남선생과의 개인학습과정을 통해 핵심적인 원형을 고수하는 과정과 시기가 적절히 잘 배합되어 영남교방청춤의 예맥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어느 하나 치우짐 없는 예술적 맥락을 영남교방청춤은 안팍으로 지녔다.
영남교방청춤의 대내외적 활동양상에서는 독립운동가인 황웅도의 연인으로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의 가무악을 널리 알리며 활동한 김홍주와의 예술인연을 살폈다.
김녹주의 여동생으로 가무에 능한 김홍주는 고성의 권번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김홍주의 예술성과 고성의 예술성이 상호 교류 하는 관계하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후 김홍주의 일본에서의 가무악 활동상에 뿌리는 고성에서의 예술활동이 그 뿌리를 이루었을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추측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영남교방청춤은 문화예술 전승의 관점에서는 예능전문관장기관인 ‘교방’에서부터 굴곡진 역사변혁이 관통한 ‘권번’으로까지 예능의 전통성을 이어간 기관의 맥과 혼이 담긴 춤이다
또한 지역적・지리적 특색 함양의 관점에서의 영남교방청춤은 집안의 예맥 정통성과 영남권을 아우르는 예술성이 면면히 흐른다. 운파 박경랑에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선생을 모셔 개인학습의 혹독한 숙련과정을 거치면서 사라지기 쉬웠던 권번의 실체적 면모와 살아 있는 교방의 숨결까지 담아낸 춤으로 영남교방청춤을 이끌었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예능인 김홍주의 예술성에 영남교방청춤의 창시자인 故 김창후 선생과 고성땅에서의 예술적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 과정에서 상호간의 예술성의 호환적 교류가 필경 존재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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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춤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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