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랑 선생 특별 인터뷰-월간 무용과 오페라
우리 전통무용을 자신의 생명처럼 지켜 온 한국무용가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 관장 특별인터뷰
현재 우리나라 수많은 전통무용 중 단 3개만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있다. 살풀이, 태평무, 승무다. 그런데 무용계 일부에서는 그 ‘폐해’ 때문에 - 이들이 주장하는 ‘폐해’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첫째는 이렇게 지정된 무용들이 ‘이수증’ 등을 마치 ‘자격증’처럼 따게 만들며 우리 전통무용을 상업화시키고, 무용 판이 한 쪽으로만 쏠린다. 두 번째는, 그러면서 지정받지는 못했지만 정말 훌륭한 우리 대부분의 전통무용들이 영원히 사라져 간다는 등이다 - 이 지정도 없애버리자는 주장도 한다. 그 말도 일리가 있을 수 있지만, 평자는 우리 전통무용계 전체의 현실을 볼 때, 기존 3종목의 지정을 없앨 것이 아니라, 우리 전통무용의 무형문화재 지정 몫을 더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즉 왜 현재 우리 문화재청은 국악, 공예, 의식, 제례, 등에는 백여 개 이상의 종목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그것들보다 훨씬 미학적 예술적 의미가 높은 전통무용은 달랑 3개만 지정하고 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부분에 대해 평자가 약 2년 전인 지난 2016년 7월호 ‘무용과오페라’에 ‘전통무용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제도는 확산되면서 강화되어야 한다’라는 타이틀의 문화시론에 게재한 글의 일부를 다시 한 번 인용한다. “현재 문화재청은 우리 전통무용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수백 개의 국가무형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가장 그 예술적 표현력이 높은 전통무용 분야를 아예 고사시키는 일을 해왔다.
사실 우리 전통무용의 미학적 예술적 가치와 의미는 각종 민속놀이의 그것과는 비교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높다. 그리고 현재 우리 전통춤 중에 문화재 미 지정 종목은 수백 개가 넘는다. 이들 춤들의 전승자들은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들의 춤을 지킨다. 그렇지만 이런 열악한 조건이면 곧 소멸될 수도 있다. 이들을 국가와 사회에서 도와야 한다. 전통무용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은 일부 단세포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 그만 두어야 될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확산되고 강화되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도 평자는 문화재청이 정신을 바로 차리고 우리 전통무용 삼사십 개 정도를 새로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막상 실제로 그런 경우가 되었을 때 우리 전통무용계에서는 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무대 표현 예술로서의 춤들을 잘 안무하여 준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솔직히 준비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아무런 희망 없이, 그리고 아무런 국가 등의 재정보조가 없는 가난 속에, 개인이 우리 전통무용을 보존해 지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문화재가 되어 국가의 보조를 하나도 받지 못하는 전통예술인들에게 ‘왜 우리 소중한 전통무용을 지키지 않느냐’며 아무도 함부로 돌을 던질 수가 없다. 그런데 근래 평자는 정말 놀라운 경우를 확인했다. 산재해 있는 우리 전통무용의 아름답고 유려한 춤사위와 동작들을 자신의 독창적 안무로 개인적으로 정리해 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 고유의 춤들을 스스로 창조해 준비해 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지난한 작업을 한 이유가 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사라져 가는 우리 아름답고 유려한 전통 춤사위들이 안타까워서 자신 고유의 춤으로 만들어 보존하고 지켜온 것이다. 그것도 10여개 이상의 다양한 춤들을 말이다.
무용과오페라는 이번 9월호 표지인물로 자신 고유의 전통춤들을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박경랑류 영남교방소반춤, 박경랑류 영남소고춤 등등이다 - 지난 20여년 이상동안 자신의 생명처럼 만들고 지켜온 전통무용인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 박경랑 관장을 모셨다. 인터뷰 질문을 만들 때부터 이번 인터뷰는 그 진지해야 할 수밖에 없는 내용상 또 그 시간이 정말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 실제로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시작된 이 인터뷰는 약 5시간이 걸려 밤 11시가 조금 지난 다음에 끝났고, 인터뷰가 있었던 박경랑 영남교방청춤전수관 쪽에서 6호선을 탄 다음 약수역에서 3호선을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밤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 평자가 바로 첫 질문을 던진다.
- (사실은 이 첫 질문은 이 인터뷰가 있는 건물로 들어오면서 큰 간판을 보고 즉석에서 하게 된 것이다) 영남교방청춤 전수관이 영남에 있지 않고 서울에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인상의 박관장이 가만히 대화를 시작한다) 작년까지는 부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울에서 부산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로 옮겼고, 저도 서울에 더 오래 있게 됩니다. 일단 춤 하면 영남춤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소리는 전라도고 춤은 경상도’라고 했습니다. (이때 평자가 그런데 서울의 공연장의 상황을 보면 호남 춤이나 서울 경기도 춤에 비해서는 영남 춤의 공연 빈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경상도 춤은 전승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문화재 제도가 생기면서 지정 종목 외에는 무용인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영남 춤 중에는 현재 중앙에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은 춤이 없습니다. 현재 우리 전통 무용계의 분위기는 옛날처럼 예인들의 춤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고, 자격증을 따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 근래 부산과 서울 등에서 ‘무도회’ 등의 타이틀을 가지고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네. 부산에서는 지난 6월에 공연했고, 서울에서는 이번 8월 18일에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합니다(이 인터뷰는 무더위가 극성이던 8월 초순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이전에 광주와 진주 그리고 강릉 등에서도 공연했습니다. (이때 평자가 공연의 목적을 말해달라고 했다) 이 공연의 취지는 대중들이 우리 전통춤과 우리 전통문화에 쉽게 다가올 수 있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남춤의 맥을 잇고 그 빛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권번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현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흔히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는 우리의 권번 문화를 단순한 ‘기생집’ 정도의 분위기로 폄하합니다. 물론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 정책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 전통무용은 그 소중한 뿌리의 일부가 권번 문화였습니다. 여기에서는 우리 전통춤의 교육이, 지금의 무용예술 고등학교 수준 이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졌습니다.(박경랑은 그동안 수많은 원로 교방 무용 지도자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 왔다고 한다) 단순히 여흥을 즐기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시와 서화가 있었고, 춤으로 감동을 표현했습니다. 지금의 학자인 선비들이 그 춤을 감상했을 것이며 교양 있는 지성적인 대화가 오갔을 것입니다. 원래 교방춤은 결코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문화를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인들이 만든 화류계 문화가 아닙니다. 고고하고 지성적인 표현의 춤입니다. 저가 약 20여 년 전부터 저의 춤에 ‘교방’이라는 말을 붙여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외롭게 혼자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근래 6~7년 전부터 우리 무용계도 ‘교방’이라는 말을 다시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 객석의 반응은 어땠는지요.
“저는 우리 전통무용이 대중들과 멀어지는 이유가 옛것만 고집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은 현시대에 맞게 새롭게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의 이해도를 높이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승무를 하더라도 왜 그 춤이 추어져야 하는지 하는 연출이나 스토리가 장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는 공연을 할 때 언제나 무대를 생각하고 동시에 관객들을 생각합니다.(이때 평자는 지난 6월 16일 부산국립국악원에서 본 박경랑의 무도회 공연 때 부산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와 박수 소리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다)”
- 국악 등 다른 장르와의 협업도 많았습니다.
“저는 저의 공연을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습니다. 악기를 쓰더라도 4면6각을 모두 사용하지 않으면서 개인 악기의 특성을 충분히 살리는 노력 등을 합니다. 대금, 아쟁, 거문고, 등등 개별 악기는 모두 자신의 특별한 소리를 가집니다. 이를 통해 더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작품 표현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 우리 전통무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잠시 생각에 깊게 빠진 다음) 저 개인적으로 보면 저는 저가 추는 우리 전통춤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느낍니다. 저는 언제나 춤을 추면서 왜 우리 전통춤에는 이런 동작이 있는지, 그리고 왜 지금 내가 이 춤을 추고 있는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전통무용은 그 힘든 수련 과정을 통해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의 격을 정해줍니다. 인내심, 기다림, 참을성, 등을 한 없이 고양시켜 줍니다.”
- 왜 소중한지요?
“우리 전통무용은 우리 선조의 몸짓이고 우리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발레도 했습니다(나중에 다시 나오지만 박경랑은 놀랍게도 대학을 클래식발레의 명문인 세종대학교 발레 전공으로 입학해, 1년 후 한국무용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저희 중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학원에서 선생님들께서 발레와 한국무용 그리고 현대무용 등을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춤이 다 중요하지만 우리 춤을 추면서 우리의 얼과 정신을 지킨다는 희열은 특히 큽니다.”
- 우리 전통무용을 현시대에서 어떻게 발전시켜나가야 하는지요.
“있는 것은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현대감각에 맞게 고급스러운 예술로 새롭게 표현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전통무용 공연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가 새롭게 안무한 ‘문둥북춤’도 원래 고성오광대놀이의 일부 이었는데, 저가 현대적으로 새롭게 안무해 무대화시켰습니다.”
- 우리 전통무용의 현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지금 저가 생각하기로는 사라져 가는 전통무용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춤, 소리 등을 정말 잘 하시는 분들이나, 잘 아시는 분들이 그냥 묻혀있습니다. 이분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이분들을) 찾아 가서 구전으로라도 들어 우리 전통춤을 재구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사람들이 노력을 안 합니다. 이제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직전입니다. 사실 저의 춤을 마지막까지 다듬어주신 분은 부산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님이셨던 - 그리고 이매방선생의 제1호 제자였다고 한다 - 강옥남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막내 - 그 당시 기생들은 이름이 없었다고 한다 - 가 소고춤을 잘 추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추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렇게 해보아라.’는 등의 방식이었습니다. 완전히 구전 방식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모두 선명했고, 바로 이런 자료들이 저의 ‘박경랑류 교방소고춤’ 등에 고스란히 녹아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 우리 전통춤들이 문화재로 더 많은 지정을 받았으면 합니다.
“당연히 그렇습니다. 더 많은 춤들이 문화재 지정을 받아서 우리 전통춤이 잘 지켜져야 합니다. 사실 근래 무용을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전공을 지향하는 학생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예술이 됩니다. 물론 역으로 요즘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일반 성인 위주인) 문화원 무용 등은 도리어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무용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전공을 하는 프로 무용인입니다. 따라서 우리 무용계는 정말 다시 터놓고 새로 정신을 차려 나가야 합니다. 없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재 양성을 위해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재능만 있는 학생이 보이면 어떤 조건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키웁니다.”
- 제자들은 어떻게 교육하시는지요.
“제자들은 많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제관계가) 얼마나 진실한가가 소중합니다. 저가 열심히 키웠는데도 (다른 춤으로) ‘이수’하러 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니까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성공하는 경우는 잘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기본기를 확실히 지도합니다. 동작 지도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동작을 하는지 하는 것의 지도가 중요합니다. 현재 우리나라 전통무용 지도가 대부분 그냥 따라만 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 동작을 하는지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저는 무용수들의 감정 유발을 위한 설명을 합니다. ‘승무’를 할 때 대북 쪽으로 합장해 엎드리는데, 이때 대북은 임이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먼저 간 동생도 되고, 부처님도 됩니다. 그런 기본 설정이 있어야 감동을 표현하는 움직임이 이루어집니다. 그냥 막 엎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여기서는 일어나고 저기서는 엎드리고 다시 여기서는 몇 장단으로 움직여라 하는 지도만 받는 무용은 감동이 없습니다. 저의 옛날 스승이 저에게 ‘여기는 구름 위다’ 라며 춤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왜 선생님이 그런 지도를 했는지 잘 알겠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요.
“때로는 보람도 느끼고 또 때로는 속상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자리를 지키며 커나가는 것이 보람이라기보다는 저에게는 재산처럼 느껴집니다. 제자가 잘 되면 부자가 된 느낌이며, 제자 잘 되는 것이 빌딩보다 더 좋은 재산입니다. 저는 어릴 때 선생님들과 대화하다가 ‘그런 동작은 이렇게 하면 참 좋은데’라는 선생님만의 ‘숨겨진’ 동작을 우연히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 하나 하나가 지금의 저가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는 무용 같은 예술 교육은 사숙을 하며 지도하는 방식이 참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등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나왔는데, 자신 춤의 뿌리는 무엇인지요?
“저의 춤의 뿌리는 여러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자문 받은 다양하고 풍요로운 춤사위들이었으며, 저가 그 춤사위들을 가지고 하나의 통합적인 저의 춤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분들의 춤사위에는 장단점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선생님들의 춤의 최고의 장점만 추출하고 취합해 저 고유의 춤으로 만드는 노력을 했습니다.”
- 어떤 계기로 자신의 독자적인 춤을 만들게 되었는지요?
“어떤 지인이 저에게 ‘이제 따라하며 흉내 내는 춤은 그만 추고, 그동안 배워온 여러 선생님의 춤사위들로 자신 고유의 춤을 만들어보라’는 조언을 받고 난 다음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저 춤을 창조해 왔습니다.”
- 그 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박경랑류 교방소반춤, 박경랑류 교방소고무, 박경랑류 교방살풀이춤, 박경랑류 교방승무, 박경랑류 교방검무, 박경랑류 교방수건춤, 박경랑류 징춤, 박경랑류 진쇠춤, 박경랑류 북춤, 등등입니다. 저는 선생님들로 배워 온 이 춤들을 저 스스로 연상하고 기억한 후 저의 고유 춤으로 만들었습니다. 비록 (저의 이 춤들이) 문화재가 되지 않더라도, 저가 여러 선생님 등으로부터 배워 온 이 소중한 춤사위들을 저의 작품으로 만들어 꼭 후세에 남겨야 하겠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가 그동안 만들어 온 이 10개의 춤에 대한 창조 과정을 책으로 엮어 낼 예정입니다.(이때 평자는 그 창조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작품 창조 과정을 다시 한 번 상세히 말해주겠습니까.
“일단은 여러 선생님들의 춤을 학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설렁탕집도 집마다 맛이 다르듯이 각 선생님들의 춤사위와 느낌도 달랐습니다. 선생님들 춤을 배우면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만 추출합니다. 그래서 그 아주 좋은 동작들만 저 나름대로 재구성하고 안무해 저의 춤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때 구전되어 오는 말들을 채집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면 판소리 하는 선생님이나 악기 하는 선생님들의 자신들이 오래 전에 본 무용에 대한 기억 등도 소중했습니다. ‘진주 기생이 그때 이런 춤을 이렇게 추었다’는 등의 말 하나 하나가 다 저의 창작의 소중한 원천이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저가 배웠던 발레의 공간 사용 방식 등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 전통춤도 발레처럼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계의 사람들이 우리 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심지어는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생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현재 우리 전통춤 지도 현장의 대부분의 현실은 ‘그냥 따라 해라’, ‘보고 그대로 해라’, 정도의 수준에 그칩니다. 왜 그 동작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자신 춤의 특징은 무엇인지요?
“저는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분들이 저의 춤을 보고 움직임의 선 등이 아름답고 표현력 있다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저는 전통은 무겁고 깊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을 저 스스로가 연습하고 연마하며 이해했습니다. 이는 말만 듣고는 결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저가 한창 연습할 때는 약 8년 동안 하루 2~3시간만 자고 춤을 췄습니다. 그러자 몸이 이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특히 발 디딤을 정말 섬세하고 조신하게 합니다. 전통춤은 상체도 섬세해야 하지만 사실은 발 등의 하체 움직임은 상체보다 더 정교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동차도 바퀴가 잘 굴러야 잘 간다’는 말을 해줍니다. 발가락이 벌여져 있는 상태면 당연히 섬세한 디딤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몸의 기운이 흐트러지고 중심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발 디딤 하나를 정확히 하기 위해 하루 종일 반복해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조금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습니다.”
- 앞으로 자신의 춤을 어떻게 확산시키고 발전시켜 나갈 예정인지요?
“저는 이미 1995년부터 - 그렇다면 23년 전이라는 말이 되고 30대 중후반에 벌써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 된다 - 저의 영남교방청춤의 연수회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일부에서는 ‘어린 사람이’, ‘문화재 지정 종목도 아닌데’ 등등의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결코 사라져가는 보석 같은 우리 전통춤의 춤사위들을 그대로 날려 보낼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함께 공유하고 함께 배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연수는 이어지고 이제 9월에도 또 저희 전수관에서 (저의 춤에 대한) 연수가 계속됩니다. 저는 저의 연수 2시간 모두를 끝까지 연습시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저도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들과 함께 움직이고 뜁니다.”
- 영남춤의 특징은 무엇인지요?
“아무래도 저가 추는 영남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서민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춤이며, 쾌활한듯하면서도 깊은 한을 가지는 춤입니다.”
- 영남춤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도 저는 아무래도 근대 영남춤의 역사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원래 영남 쪽 권번에서는 다양하고 풍요로운 춤들이 있었습니다. 부산(동래) - 우리나라의 권번제도가 동래에 제일 오래 남았다고 한다 - , 진주, 대구, 등등에서는 수많은 우리 전통춤들이 풍성하게 추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전국의 춤과 소리와 기악의 명인들이 영남으로 모였습니다. 이매방선생님도 부산에서 활동하고 명창 안숙선선생님도 동래온천 쪽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동래의 권번 등도 사라지면서, 이제 전국의 예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올바른 전수교육기관이 없는 영남춤은 - 그리고 앞에서 거론되었지만 영남춤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아무것도 지정받지 못했다 - 소멸의 위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이때 평자는 ‘아! 그래서 박경랑관장이, 문화재 지정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온갖 몰이해와 어려움을 묵묵히 견디며, 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영남춤 보존과 창작에 나섰겠구나 하는 확신을 가진다)”
- 영남춤을 누구보다 면밀히 연구하고 집중해왔습니다.
“(다시 박경랑이 그 특유의 수줍고 순수한 미소를 지은 다음, 겸손에 가득 찬 대답을 이어간다) 사라져가는 춤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후세에 전달하고 싶었는데, 아직 이것 밖에 못했습니다.
- 영남춤이 상대적으로 서울 등에서는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중앙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한 것이 큰 요인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고 춤도 사라지게 됩니다.”
- 영남춤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요.
“(다시 박경랑이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이 전수교육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영남춤을 사랑하고 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 (이때쯤 시계를 보니 벌써 밤 10시가 넘어있다. 이제 빨리 이 소중한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끝내야 한다) 태어난 곳은 어디이고 춤의 동기는 무엇인지요.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주로 마산에서 살았습니다. 춤을 추게 된 동기는 고성오광대놀이를 하신 외할아버지의 - 박경랑의 외조부 고 김창후 옹은 고성오광대의 중시조였다 -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 가족들은 좋아하셨는지요.
“반대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끝까지 저의 뒷바라지를 해주셨지만, 아버님의 반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께서는 이 길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도 막상 날마다 무용하지 말라고 하시다가도, 저가 상을 받아오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버님이셨습니다.”
- 어릴 때 학교는 어디에서 다니셨는지요.
“4살 때부터 마산에서 학교를 다니기 위해 고성에서 통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는 마산 월영초등학교, 완월초등학교 등을 다녔고, 마산여중과 마산여고를 졸업했습니다.”
- 어릴 때 어떤 추억이 있는지요.
“집에서 저를 잃어버리면 극장 앞에 가면 찾았다고 합니다. 저에게는 극장 간판, 약장수, 등등을 좋아하는 감성적인 기질이 많았겠지요. 영화를 보면 펑펑 울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문예부 학생이기도 했습니다.”
- 대학교는 어디로 진학했는지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지만, 평자는 여기서 정말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서울로 와서 세종대학교 발레 전공으로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대학 1년을 마치고 한국무용 전공으로 바꿉니다.(물론 이때 평자는 왜 박경랑의 전통춤에 클래식발레 특유의 우아한 기품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지 하는 것을 이해한다)”
- 무용단에도 근무를 했습니다.
“네. 1984년도에 창단된 경남도립무용단의 창단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무용단이 창원시로 이관되면서 창원시립무용단 단원으로 88올림픽 때까지 활동했습니다.”
- 존경하는 스승을 말해주세요.
“김수악 선생님으로부터 진주교방굿거리 검무 오고무 소고춤 등등을 배웠습니다. 김애정선생님으로 부터는 김애정류 살풀이춤과 교방소반춤 등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제자이면서 천하한량이라는 소리를 듣던 조용배 선생님으로 부터는 소고춤, 북춤, 문둥북춤 등의 동작들을 공부했습니다. 강옥남 선생님은 저의 춤의 기법을 다듬어 주신 분이며, 황무봉, 김진홍 선생님 등으로 부터는 수려한 춤사위의 표현 방식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고향 고성 등의 이름을 모르는 선생님들 - 흔히들 ‘꼭지선생님’ 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로부터는 살풀이춤과 소고춤 등등을 배웠습니다.”
- 수상실적은 어떻게 되는지요.
“대표적인 상을 말씀드리면, 1995년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문 장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1997년 서울전통공연예술 경연대회에서는 심사위원 18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상을 수상했습니다.”
- 지난 반세기 이상 한 평생 무용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지요?
“(다시 깊은 생각에 잠시 담긴 다음) 고2때 아버님의 사업이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경연에 나가야 하는데, 학원에서 작품을 받을 돈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저 스스로 작품을 만들었어야 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기존의 흰 의상에 닭털을 씻어 붙여 의상을 만들고 경연에 나가 경상남도 학예발표회에 나가 또 1등을 했습니다. 힘든 때였지만 저에게는 정말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 나는 나의 작품을 스스로 안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나 자신의 춤을 스스로 만들어 출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나의 춤이라는 것은 내가 스스로 창작해 추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무용에서 안무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음악을 잘 이해해야 안무가 가능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저는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서울 부산을 오가며 살풀이춤 음악 하나를 계속 수백 번 반복해 듣기도 합니다.”
- 가장 기쁜 일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저 스스로의 춤을 - 즉 박경랑류의 춤을 -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저가 전통춤 전공 선택을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저의 춤 한 개는 - 박경랑류 영남교방청춤 -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나머지 9개의 춤을 잘 발전 보급시키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 다시 태어나도 춤을 추는지요?
“추고 싶습니다. 현세에 못 다한 것을 다음 세상에서 계속 더 해나가고 싶습니다. 춤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물론 저도 춤에 모든 것을 집중했습니다. 친구와 사람들이 변하는 것은 보았지만 춤은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춤은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기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지켜봐주고 있습니다.”
- 앞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요?
“저의 10개 춤을 세상에 전수 보급시켜나가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저의 춤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춤 출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지만 저의 이 10개 무용의 탄생 혹은 안무 창조 과정을 하나하나 상세히 글로 적어 책으로 발간해 후세에 남기는 것입니다.”
- 마지막으로 전국의 무용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십시오.
“진정한 춤을 추기 위해서는 진정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올곧은 마음으로
자신들의 춤에 정진해 나간다면 우리 전통춤의 앞날은 밝기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힘들어도 더 인내를 가지고, 더 멀리 보고 나는 새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송종건/월간 ‘무용과 오페라’ 발행인/sjkdc@hanmail.net)
'운파 박경랑 > 인터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춤은 맛을 알면 벗어 날 수 없는 마약과 같아요” - 박경랑(2007 SIDANCE인터뷰내용) (0) | 2014.05.14 |
---|---|
2010년 박경랑 인터뷰 (0) | 2013.10.16 |
[송동선이 만난 사람] 춤꾼 박경랑씨 (0) | 2013.08.12 |
조각가 김학제교수와 인터뷰. 재즈에 살풀이를 춰봐 (0) | 2012.08.14 |
한국 무용의 비너스, 박 경랑 (0) | 2012.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