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현의 시시각각] 속도와 자극에 휘둘리는 시대
[중앙일보] 입력 2010.08.19 20:05 / 수정 2010.08.20 01:56지난주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강원도 인제군 산골의 선배 거처에서 찌는 더위 속 사흘을 보냈다.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없는 집이었는데, 신기했다. 마루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뒤란에서 기척도 없이 살살 들어오는 바람 덕에 한낮에도 시원하게 느껴졌다. 휴가를 마치고 아파트의 선풍기와 사무실 에어컨을 다시 대하니 좋긴 좋았다. 그러나 의문이 들었다. 산골 집에서의 청량감은 무엇이었나. 나는 어느 결에 에어컨·선풍기의 자극에 깊이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자극은 더 센 자극을 부르기 마련이다. 중독성이 강하다. 말초적 자극은 특히 그렇다. 얼마 전 TV에서 추억의 명화 ‘황야의 무법자’를 상영하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채널을 고정했다가 불과 20여 분 만에 포기했다. 너무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옛날에 입에 침 고이는 줄도 모르고 봤던 영화가 이젠 지루하다니. 하긴, ‘본 아이덴티티’ 3부작이나 최근의 ‘인셉션’처럼 숨 돌릴 사이조차 주지 않고 관객을 몰아대는 영화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지 오래다. 국산영화도 1960~80년대 영화는 이미 속도감이 떨어지고 배우들의 말씨마저 요즘과 달라 전혀 ‘자극’이 못 된다. 신성일의 주먹은 이제 주먹도 아니다. ‘아저씨’나 ‘악마를 보았다’처럼 피비린내 풍기고 난도질을 해야 액션물 축에 끼는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노출패션에도 이골이 나버렸다. 아스라한 고교시절엔 교복차림 여학생의 흰 목덜미만 봐도 전기가 찌릿 왔는데, 요즘 여름 패션은 ‘목덜미’ 정도는 저리 가라다. 나도 속물근성이 다분한 탓에 눈 둘 데 없다고 짐짓 지청구는 하면서도 몰래 힐끗거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런 패션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 건지 궁금하고 겁도 난다.
말과 글도 자극과 속도를 추구하다 보니 구수하게 에두르고 암시하는, 비유와 은유가 넘치는 화법은 멸종 직전이다. 전아(典雅)한 만연체는 구경도 하기 힘들어졌고 온통 직설법(直說法)만 판친다. 그것도 이젠 ‘140자 이내’로 팍 줄여야 한단다. 우리 사회의 말과 글이 성마르고 거칠고 강퍅해진 게 우리 심성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나마 며칠 전 모처럼 자극다운 자극, 진짜배기 자극을 맛보았다. 국내 국악인들과 재일교포 전통예술단체 ‘놀이판 사람들’이 함께 마련한 ‘판굿’이라는 이름의 공연이었다. 김운태의 채상소고춤, 장사익의 소리판, 농부 춤꾼 이윤석의 덧배기춤, 이정희의 도살풀이춤, 박경랑의 교방춤이 어우러졌다. 특히 박경랑 선생의 교방춤(기생춤)에서 나는 섹시함의 진수(眞髓)를 느꼈다. 노란 저고리, 짙은 밤색 치마, 외씨버선에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데 너무나도 요염(박 선생께는 왠지 미안하지만)했다. 치마를 살짝 들어 연분홍 속치마가 드러날 때는 가히 ‘초절정 섹시’ 그 자체였다. 꼭 훌렁훌렁 벗어야만 섹시한 게 아니다, 라고 박 선생은 관객들을 깨우쳐 주고 있었다. 그리고 정영만 선생의 구음(口音). 교방춤에 맞출 때는 여인의 요염함을 활짝 빛내주더니 이정희 선생의 도살풀이춤에 이르러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슬픔을 후벼 파는 소리로 둔갑했다. 그는 진도 씻김굿의 박병천 선생이 2007년 세상을 등진 뒤 거의 유일하게 남은 남성 구음 명인이다. 원래 피리 명인이지만 요즘엔 근무력증 때문에 힘든 피리 불기를 멈춘 상태다. 도살풀이춤의 중간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동에 밀려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재작년 돌아가신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정영만표 구음’을 그토록 좋아해 정 선생의 상여소리 속에 장례 치르고 진혼굿까지 얻어자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자극과 속도에 너무 휘둘리며 살고 있다. 말초적 자극이 넘치니 정신만 부산스러워질 뿐이다. 그러니 진지한 자기 성찰보다 남의 탓 앞세우고 공격성만 발달하는 것 아닐까. 달리다가도 가끔은 일부러 멈춰 서서 내가 어디서 왔는지 돌아보고 주변 풍경도 찬찬히 음미해 볼 일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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