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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부산 Vol 63. 2009. 9/10. 49-51쪽 배 학수(경성대 교수/ 철학) --> 블로그보기

“뭣보다 교방이라는 담장, 그 담장이 가두기엔, 너무 큰 예인이었다"(KBS 황진이). 드라마에서는 예인藝人이라고 미화된 황진이 같은 기생들은 조선 시대 궁중이나 관청의 연향宴享에서 춤과 노래를 공연했다. 이들을 관리하는 정부 기관이 교방敎坊인데, 교방은 을사조약으로 폐지되었고, 그 후 교방의 기생들은 새로 생겨난 민간 조직인 기생 조합, 권번券番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권번은 서울, 평양, 부산, 대구, 진주 등 전국 각처에 설립되어 동기童妓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고 화대花代를 관리했다.

강 옥남(姜玉南)은 동래 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다. 그에게는 남기고 기록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을 터인데 언론에 한번도 대담 기사가 실린 적이 없었다. 중간에 사람을 넣어 여러 번 부탁하여 마침내 그녀를 2009년 6월 15일 부산 서구의 새진주 식당에서 만났다.


어린 시절에 대해 얘기해 달라
.
1938년 일본 나고야 태생이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돌아가시고 대구 출신인 어머니는 자식 셋(오빠, 언니, 나)을 데리고 해방되자 귀국했다. 돈 3만원을 가지고 왔는데 환전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고향인 삼천포로 갔다가 부산으로 나왔다. 부산에서 부민 국민 학교를 다녔고, 가정 형편상 졸업후 학업을 중단하다. 그 당시는 딸은 공부시키지 않았다. 오빠는 동아대학을 졸업했다. 어머니는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어떻게 무용을 배우게 되었나?

16살쯤 한 순섭(여자. 서울에서 무용 학원을 하고 있다)을 권 명화 학원에서 만났다. 한 순섭의 아버지가 잘 살아서 학원을 차렸는데 거기에 이 매방을 초청하여 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권 명화 학원에서 딱 한달을 배웠는데, 이건 무용이 아닌 것 같아 한 순섭의 권유를 따라 이 매방 학원으로 옮겼다. 이 매방, 권 명화 두 사람 모두 그 당시 부산에서 학원을 운영했다. 권 명화도 이 매방에게서 배웠다.

이 매방은 어떻게 지냈는가?

이 매방은 학원이 잘 안되어 양춤(스포츠 댄스)추는 사람에게 낮에 학원을 빌려 주었다. 이 당시에는 이렇게 안하면 운영이 안 되었다.

이 매방은 김 진홍, 조 광, 전 무영(스페인춤, 지금 양정에 있다) 등과 함께 하야리야 부대에서 가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대영 극장에서 공연을 함께 한 기억이 있다. 이 매방, 김 진홍, 성민(이 매방의 제자이며 정 진욱의 스승이다), 그리고 내가 참가했다.

이 매방은 대신동에 어떤 부자가 학원을 차려 주어서 거기로 옮겼다. 나도 따라 갔다. 이 매방은 서울에서 전 무영을 데리고 왔다, 그는 딱춤(스페인춤)을 추는 사람이다. 어린이 시간에는 그분이 가르치고, 학부형 시간(법원장 부인, 변호사 부인 등)에는 내가 가르쳤다. 성 민이가 그 당시 군대에 있었는데, 휴가 나오면 내가 가르쳐 주었다.

강습료는 많이 받았는가?


아니다. 돈을 내라고 하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춤을 배우려고 거기에 있었던 거지 돈 벌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춤을 배웠는가?

입춤, 소고춤, 승무, 살풀이 다 배웠다. 그런데 이 매방은 춤을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매방은 욕쟁이였다.

이 매방은 왜 춤을 잘 가르쳐주지 않았는가?

이 매방은 춤을 잘 추어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생짜(기생)들이 좋아한다. 고관 부인들도 돈 보따리를 들고 이 매방을 찾아왔다. 밤만 되면 화장을 똑딱하고 놀러 나갔다. 이 매방은 낮에 온천장, 별장, 호텔에서 기생들과 장구를 치고 놀았다. 김 진홍과 일본말을 하면서 같이 놀았다. 김 진홍은 예뻤다. 화장을 하면 여자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예뻤다.

이 매방 학원에서 언제까지 조교를 했나?

최 장술(노래)이 이 매방 학원을 그만두고 동래 온천장 권번에 춤을 가르쳐 주러 오라고 했다. 권번에 가니 기생이 120명 정도 앉아 있었다. 기생 앞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먼저 권 명화가 춤을 추고 나갔다. 기생 한 사람이 장구를 치고 나는 춤을 추었다. 권 명화가 춤을 춘 줄도 몰랐는데, 기생이 나를 선택했다. 춤 선생이 춤을 추어보이면 기생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생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내 나이 스물 한 두살 정도였다. 4.19이전 자유당 시절이었는데 선거 유세에 기생들 데리고 가서 춤을 추어 주기도 하였다.

이 매방 외 다른 스승은 없는가?

김 온경 아버지가 학원을 할 때 강 태홍(가야금)이 그 뒤에 살았다. 한 순섭을 따라 강태홍에게 놀러갔다. 강태홍은 ‘살풀이는 앉은 사위에서 울고, 승무는 염불 장단에서 완전히 중이라는 것을 객석에 보여주라’라고 하였다. 거기서 나는 많이 배웠다. 울 때는 울고, 웃을 때는 웃고, 표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권번이란 어떤 곳인가?

기생 조합이다. 동래 호텔. 대성장, 동래 별장으로 기생이 간다. 춤추고 노래한다. 화대를 전표로 받는다. 두 방 들어가면 두장 받는다. 여기 동래 호텔인데 어느 기생 불러 주세요. 이렇게 손님이 주문한다.

권번은 4.19, 5.16과 함께 끝이 난다. 공무원이 술을 마시면 목 날아간다. 동래 권번을 운영한 사람은 이북 출신 여자이다.

기생은 무슨 일을 하나?

출근을 해서 조합장이 이름을 뒤집어 놓으면 오늘 일이 있으니 집에 가서 화장을 한다. 끝까지 이름이 그대로 있으면 공치는 날이다. 화대는 음식 값에 포함되어 있다.

기생은 방에서 상 하나 치우고 춤을 춘다. 동래 호텔은 방문이 두꺼워서 방음이 잘 된다. 단체 손님이 서울에서 많이 온다.

기생은 입춤, 살풀이, 민살풀이(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춤), 소고품을 춘다.

기생의 한이란 무엇인가?

기생 어머니가 기생을 영감에게 돈을 받고 시집을 보낸다. 아침에 남자는 가고 나서 기생은 다음날 잔치를 한다. 동기가 남자와 자고 난 후 조합에서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동료 기생과 하는 격이다. 이것이 기생의 한이다. 동기는 남자와 자고 나서(머리를 올리고 나서) 다음에 기생 일을 시작한다. 동기 3사람을 머리 올려 주면 극락에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당시 기생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돌보아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동래 권번에서 무엇을 가르쳤나?

기생에게 조합에서 승무, 살풀이를 가르쳤다. 가르치는 기간은 기생의 소질에 따라 다르다. 춤 가르치는 사람, 악기 가르치는 사람, 소리 가르치는 선생이 따로 있었다.

공연을 한 적이 있는가?

무릎 관절이 좋지 않아 작품 공연은 거의 하지 않았다. 지도를 많이 했다. 기생들을 데리고 온천 극장에서 한번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동래 권번에서 얼마 동안 가르쳤나?

2,3년 있다가 공 대일(공 옥진의 아버지)의 초청으로 광주 호남 국악원에 갔다. 거기에도 주로 기생이 배웠다. 동기는 별로 없었다. 함평, 영광에서도 가르쳤다.

스승인 이 매방의 춤과 당신은 춤은 어떻게 다른가?

생음악을 잡으면 이 매방도 춤이 달라진다. 녹음된 걸로 하면 거기서 꼼짝 못한다. 순서대로 나가야 하거든. 이 매방도 생음악을 추면 떵떵 고개 짓을 한다. 그러나 녹음에 하면 그냥 못출까 싶어서 놀라서 기계적으로 춘다. 나는 항상 춤을 생음악으로 춘다.

강옥남 류의 특징은 무엇인가?

멋과 한의 춤이다. 우선 춤은 멋이 있어야 한다. 춤을 멋있게 추려면 춤 가락이 좋아야 한다. 보통 무용가들이 춤을 추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춘다. 그런데 하나아 두우울 세에넷 네에엣 이렇게 추어야 한다. 우리 음악은 하나가 삼분박이어서 12분박이면 한 장단이다. 하나둘셋, 둘둘셋, 셋둘셋, 넷둘셋. 삼사 십이가 되어야 온박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걸 다 줄여버리고 하나 둘 셋 넷, 그냥 이렇게 춘다. 춤에 변화를 주어야 한다. 같은 네 박자라도 그 안에서 열 둘을 먹든 열 여덟을 먹던 박자만 안고 가면 된다. 이렇게 추어야 멋있고, 지겹지 않다.

한의 춤은 자기가 슬픔이 많아야 한다. 살풀이에서 수건을 떨어뜨리고 주으러 갈 때 헤어진 연인처럼 생각한다. 감정을 잡고 얼굴의 표정에서 전달해야 한다. 동작 하나 하나에서 어떤 감정인지 생각해서 추도록 한다. 살풀이를 추면 관객을 울려야 한다. 못 울리면 못추는 것이다. 나는 상상하면서 춤을 추도록 한다. 나는 춤을 가르칠 때 상황을 떠 올리도록 한다. 죽고 못사는 연인과 헤어졌을 때를 상상하고. 그것을 느끼고 추라고 강조한다.

강 옥남은 올해 71세이다. 그녀는 등록된 문화재도 아니고, 대학에 자리도 없고 무용 협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언론도 관객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보물처럼 소중한 역사를 품고 있다. 무명의 문화재들에게도 경험과 기억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우리의 문화 유산이 풍성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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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 최고무(最高舞)는 가슴으로 울고 있었다. 쇠잔한 육체에서 자꾸만 춤이 터져나오니, 병상에 누운 몸은 어쩌란 말인가. 병원과 집을 몇 달 걸러 오가며 몸을 추스르지만 무대와는 점점 멀어지는데, 입에선 소리가 터지고 두 팔과 가슴은 소리에 맞춰 벌써 가락을 타고 있지 않은가.

# 70년을 해도 족함이 없는 전통춤

 
춘당(春堂) 김수악(81)을 몇 번의 전화 약속 끝에 만났다. 진주 엠마우스 요양병원에서 만난 그는 서울에서 내려간 제자들의 문안을 받고 있었다. 춤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당부로 부족했던지 원미자씨(김수악 전통춤 보존회장)에게 손수건을 달라 했다. 꽃무늬 손수건은 제자 김경란씨의 손에 들려졌고 침상의 스승은 구부러진 등을 추슬렀다. 긴장하는 제자. 스승은 컵라면용 나무 젓가락을 쫙 갈라 양손에 쥐고 침대에 놓인 식탁을 두드리며 슬그머니 장단을 잇는다. 즉흥 레슨이다. “띠리리 릿띠~ 허이 두드드 둥둥” 앞 소리는 젓대고 뒷소리는 가야금 선율. 스승은 악기 소리를 흉내내는 구음으로 엄격한 장단을 더했다. 어쩌랴. 제자, 쑥스러워하면서 병실에 한바탕 굿거리춤을 풀어놓는다. 이제 스승의 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스승의 한 마디 구음, 한 자락 춤사위가 나올 때마다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만 더하다.

“선생님께 배우기 힘들어요. 한 동작 한 동작 다듬어 정형화하시지 않고, 순간순간 감정이 터져나오는 대로 즉흥춤을 추시니까 저희는 매번 달라지는 춤을 따라해야 하거든요. 물론 다양한 춤사위를 배울 수 있어 좋긴 하지만….”

‘김수악 앞에만 갔다오면 춤이 달라진다’는 말이 그냥 떠도는 말이 아니다.

아들 김인권씨(54·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장)의 귀띔. “10년 전 오른쪽 골반을 다치셨는데, 지난해 10월에는 춤추며 앉는 순간 왼쪽 골반을 다쳐 5개월 동안 입원하셨죠. 이번에는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하셨습니다. 치아도 상태가 좋지 않아 틀니를 하셔야 해요.” 무역업을 하던 아들은 노모 수발을 들기 위해 사업을 접고 ‘춘당 김수악 전통춤보존회’ 실무위원장을 겸하는 등 남은 인생을 전통춤에 걸었다. 다시 아들의 증언. “어머님께선 예술가의 자존심을 제일로 치십니다. 얼마 전에는 TV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중계방송차가 몇 시간 동안 집 앞에서 대기 중인 데도 사전에 협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대문을 열지 않으셨어요. 결국 중계방송차는 돌아갔고요. 한 번의 공연을 위해 있는 정성 없는 정성을 모두 쏟아야 하는데, 갑자기 춤을 출 순 없다는 주장이셨죠. 무대에서 10분 동안 춤추기 위해 5시간 동안 단장하고 무대에 서시는 분이니까요.”

기자가 병상의 기수악을 촬영하려 하자 춘당(春堂) 김수악은 ‘사진 찍지마’ ‘안돼’ 하면서도 연방 머리를 매만진다. ‘5시간 단장’의 습관이 무섭다.

# 강산 제일의 춤, 강산 제일의 구음-가무악 일체의 만능 엔터테이너

김수악은 함양군 안의읍에서 김종옥과 유몽길의 5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순녀. ‘수악’은 집에 들른 스님이 지어준 이름이다. 어린 순녀를 본 후 명이 짧다며 ‘목숨 수, 뫼뿌리 악’으로 개명해주었다. 큰 언니 김취란은 가야금의 명인이며 황병기의 스승으로 유명한 예인이다. 순녀의 아버지는 만석꾼 집안의 장남이었다. 대를 이어야 할 큰 아들. 한량인 아버지는 결국 재산을 떼어받고 본가를 나왔다. 집에선 늘 유성기판을 틀어놓고 거문고와 피리도 수준급이었다. 집에 찾아오는 풍류객들의 분위기가 어린 순녀의 몸에도 익숙했다. 어느날 손님이 안겨준 양금은 여섯살 순녀가 김수악으로 변신한 계기였다. 순녀는 처음 만져보는 양금을 3개월도 안돼 익혔다. 남들은 7개월 걸려야 타는 악기였다.

일곱살에 진주로 이사한 순녀는 9살부터 진주권번에서 본격적으로 춤, 소리, 악기를 배웠다. 판소리는 유성준·정정렬·이선유·김준섭 등 당대 최고의 명인들에게 다섯 바탕을 사사했다. 구음은 전두영에게 배웠고, 강태홍·김종기·박상근 등에게 가야금과 아쟁도 배웠다. 춤은 김옥민을 시작으로 한성준의 ‘검무’, 최완자의 ‘굿거리춤’ ‘검무’ ‘입춤’을 물려받았다. 순녀는 ‘여란(麗蘭)’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모두 ‘애란’이라 불렀다. 진주의 애란은 영남 제일의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가야금병창, 장구, 구음, 검무, 굿거리춤 등 다재다능했다. 애란이 끼지 않으면 예능이 될 수 없었다.

“젊을 때 내 얼굴 보기 힘들었어요. 중요한 자리에는 인력거가 날 데리러 왔어요. 내 창과 춤을 확인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당시 ‘검무’는 4명이 추었는데 스승 최완자, 박국엽, 홍채자, 이현이 추다 그후 ‘사 검무’는 김수악을 비롯해 최예분, 이윤례, 김채옥이 함께 했다.

노랫말도 구성지게 만들었다. “어쩔거나 어쩔거나 어이하리 어이할꺼나 부모님께 불량하여~”로 시작하는 ‘논개의 얼’을 작곡·작사하기도 했다.

8년 연상인 김영조(진주 청과조합장 역임)와 결혼 후에는 춤을 접었는데 조용한 세월은 얼마가지 못했다. 1946년 의기 논개의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모금공연 ‘대춘향전’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섰다. 49년에는 진주에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 연주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냥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6·25 전쟁 후 아비를 잃고 60년대 초반 남편을 잃은 후 시골 판에 묻혀 살던 그에게 나라에서 인간문화재가 될 것을 권유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권번에서 배웠던 ‘검무’를 복원·계승하라고 했다. 과거를 알리기 싫었지만 전통춤 계승이라는 정부측 대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1967년 당시 월 3만원씩 줄 테니 ‘검무’로 문화재지정을 받으라는 거예요. 그때는 문화재고 뭐고 귀찮기만 해서 싫다고 했죠. 결국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됐지만, 나는 손에 칼을 비롯, 뭘 들고 추는 게 재미없어서 그리 반갑지 않더라고요.”

69년부터 목포 유달국악원, 71년 광주 호남국악원에서 춤을 가르치고 73년 진주 민속예술원을 설립했다. ‘강산 제일무’라는 별칭은 1980년대 후반 서울에서 ‘교방굿거리춤’을 추면서 전국으로 퍼졌다. 최완자의 ‘굿거리춤’에 김녹주류의 ‘소고춤’을 이어붙여 만든 김수악만의 브랜드 ‘진주교방굿거리춤’. 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되고 김수악은 예능보유자가 됐다. “굿거리춤은 발디딤과 손놀림 등 모든 춤의 원동력이라 그것부터 배워야 해요. 교방이라는 이름 때문에 기생춤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마당에서 추는 군무와 달리 실내에 서서 추는 입춤이어서 동작이 아담하고 기교가 뛰어나죠.” S라인의 손목사위도 김수악 굿거리춤의 특징이다.

#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

26세와 33세에 남매를 낳았지만 춤이 더 귀했다. 아들도 개천예술제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춤내림을 했는데, 어미가 아닌 이모에게 춤을 배울 만큼 어미는 바빴다. 다재다능한 게 죄였다.

“60년대부터 춤을 가르치는데, 녹음한 곡은 다양하지도 않고 듣기도 민망할 만큼 시원치않았어요. 그렇다고 악사를 쉽게 구할 수도 없고. 호남에는 소리꾼과 악사들이 많은데 영남은 사정이 달랐어요. 결국 제가 장구치고 입으로 소리 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요.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려니 악기 특성별로 소리도 달리 내야 했어요. 어릴 때 판소리 다섯바탕을 남선생에게 배우면서 호방한 동편제를 익혔기 때문인지, 장조와 단조의 구음을 자유롭게 구사했지요.” 춤은 경상도, 소리는 전라도라 했지만, 본향의 최고 소리꾼들도 김수악의 구음을 제일로 쳤다. 김수악의 구음이면 헛간의 도리깨도 춤춘다지 않는가. 어떤 이들은 김수악이 유성준의 동편제 판소리로 인간문화재가 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국에서 공연되는 굿거리춤에는 녹음된 김수악의 구음이 단연 최고다.

개천예술제에서 매년 논개를 기리기 위해 공연되는 ‘논개 살풀이춤’도 김수악의 작품이다. 왜장을 상징하는 빨간 수건과 민중을 의미하는 노란 수건을 양손에 들고 추는 논개 살풀이춤은 기존 살푸리춤과 다른 춤사위를 자랑한다. 논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교훈이 있기 때문에 춤의 원형대로 계승되는 한성준의 살풀이춤과 달리 김수악의 창작 춤사위가 중심을 이룬다.

“예술은 마음, 정신, 인내, 공력, 한(恨), 멋, 혼이 어우러져야 해요. 춤도 내가 추는 게 아니고 몸이 추도록 해야 합니다. 맺고 푸는 호흡의 예술이 춤이니까요.” 명무는 춤이야기에 빠져 아픈 줄도 모른다. 침대에 앉은 채 두 팔을 올려 연꽃 사위를 직접 시연하며 제자들을 가르친다. “제 의상의 대부분이 연분홍색이에요. 분홍색을 좋아하면 마음 약한 사람이라는데….” 그러나 약하고 곱기만 한 건 아니다. 춤과 소리에 엄격하지 않았다면 병상에서 제자들에게 손수건을 들릴까. 스승은 누누이 강조한다. “무겁게 추되 발디딤을 살랑살랑하면서 속은 깊으게. 몸에 알뜰한 멋이 들어야만 알뜰한 예술이 나와!”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스승의 마음이 깊고도 알뜰하다.

▲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중 둘째로 출생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
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
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
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
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
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
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
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
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유인화 선임기자|진주에서 rhew@kyunghyang.com〉

-‘제자들과 함께’ 병실에서-

# 풍경1

병실에서 아들 김인권씨의 보살핌을 받는 김수악 명인.

병실에서의 화제는 얼마 전 김수악이 승소한 소송건이었다. 김수악 측과 김수악의 제자 정모씨가 고소인과 피고소인으로 맞선 재판이었다. 정모씨가 김수악에게 알리지 않고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조직 후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발행한 사실이 드러난 것. 김수악 측에선 아닌 밤중에 홍두깨. 김수악 제자들로 구성된 김수악 전통춤 보존회는 정씨의 진주교방굿거리춤보존회를 무효화하고 정씨가 이수자 자격증을 주지 못하도록 소송을 냈다. 정상적으로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인 김수악이 인정하는 제자에게 김수악의 도장이 찍힌 이수자 자격증을 주어야 한다. 김수악에게 굿거리춤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김수악의 굿거리춤 이수자 자격증을 받는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 그런데 정씨는 김수악의 허락없이 김수악 도장을 위조해 7명의 이수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 풍경2
김수악 병상 옆에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스승 김수악과 정답게 찍은 사진이 놓여 있다. 강금실 전 장관은 부산지법 판사 시절부터 20년 넘게 김수악의 제자다. 1985년부터 88년까지 김수악에게 굿거리춤과 살풀이춤을 배웠다. 김수악은 “춤을 계속 했으면 성격이 차분하고 성실해 대단한 춤꾼이 됐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오죽하면 스승이 ‘검사 하지 말고 나하고 춤추자’고 권했을까. 강전장관은 요즘도 안부 전화를 자주 한다고 한다. 2005년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열린 명무전 ‘전무후무’ 공연 때는 법무장관이던 강전장관이 스승이 춤추는 토월극장에 오느냐 못 오느냐가 화제였다. 세간의 관심을 의식한 법무부 측에선 ‘바쁘신 분이니 알아서 하시도록 두라’는 전언을 공연 주최 측에 했다고. 그러나 그는 스승의 분장실을 찾았고 스승은 화답이라도 하듯 노약한 몸을 잊은 듯 살푸리춤에 소고춤을 엮은 ‘교방굿거리춤’으로 무대를 들었다 놓았다.

# 풍경 3
서울 제자들이 전한 내용. 역시 2005년 여름이었다. 노스승은 운신할 수 없을 만큼 기진한 상태인 데도 매년 진주에서 열리는 김수악 전통춤 워크숍을 진행했다. 또한 워크숍 기간 중 제자들의 부축을 받고 진주 남강 앞 야외무대에서 열린 제자 강미선씨(한국체육대 무용과 교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피날레에서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오른 춘당은 언제 아팠느냐는 듯 꽹과리를 잡자마자 거장의 예혼을 객석에 뿌렸다. 등은 구부러지고 기력이 없는 데도 무대 오른편에 앉은 사물놀이팀 악사를 어르며 맞대화를 펼쳐나갔다. 춘당은 전했다. “좋은 선생에게 올바로 배운 제자들”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피날레를 사양하지 않았다고 했다.

                                                                                                  경향신문 2007년 6월 21일 기사
Posted by 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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