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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영혼수첩] 아사히야마 음악제(3)




강제 징용 영가들 넋 달래
삿포로 뉴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한일 문화교류의 밤'이 끝난 후 어떤 행사인지도 몰랐던 호텔 직원들은 행사장에 서서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일본의 전설적인 록그룹 X-japan의 보컬이었던 토시의 출현도 뜻밖이었지만 한국인들은 한복을, 일본인들은 기모노를 입고 손에 손을 잡고 한국의 '고향의 봄'과 일본의 '고향'을 함께 부르자 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악수를 건넸다.

 지금까지 욘사마만 알았던 삿포로 시민들에게 한국 문화사절단의 행보는 또 다른 한류 열풍을 가져왔다.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며 넓은 마음으로 자매결연을 하고 지속적인 교류를 약속했던 한국인들은 한국 드라마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 날, 우리는 한 이름 없는 산에 세운 한국인 위령탑을 찾았다. 일 년에 두 번 작은 제사를 지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위령제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 탑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온 4만 5000여명의 조선인 징용자 영가들 및 홋카이도에서 죽어간 우리 조상을 위한 위령탑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쓸쓸한 비석에 제사상이 차려지고, 과거사를 사죄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의미에서 일본인들이 직접 접은 3800개의 종이학이 제사상에 올려졌다. 위령제가 시작되자 어디선가 영가들이 하나 둘 위령탑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법사님, 여기가 어딘가요? 저는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조선인 징용자 영가들이었다. 15살의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끌려 온 그들은 이곳이 어딘지 몰라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가들이 대부분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배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 등 아직도 홋카이도 곳곳의 탄광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글씨가 선명하다. 그 글씨의 주인공들이 속속 위령탑을 찾아와 내게 길을 물었다. "어떻게 하면 조선 땅에 갈 수 있습니까?"

 내 가슴은 미어졌다. 그들은 극심한 향수병과 중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해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는 바람에 많은 수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하루에도 수백명이 기아와 질병, 폭탄사고로 죽어갔지만 죽은 후에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낯선 땅에 시신을 묻어야만 했다.

 한국문화사절단 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위령제에 참석해 비극적인 과거사를 추도했다. 묵념과 헌화, 헌향의 순서가 끝난 뒤 한국무용의 명인 박경랑씨가 모든 살을 털어버리는 의미에서 살풀이춤을 추자 어디선가 커다란 나비 두 마리가 그녀의 얼굴 위로 날아들었다.

 징용자 영가들이 빙의된 나비였다. 영가들은 박경랑씨와 함께 살풀이춤을 추며 한과 그리움을 달래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손에 손을 잡고 위령탑 주위에 인간띠를 만들어 '고향의 봄'과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영가들과 문화사절단은 함께 울었다.

 누가 이렇게 뼈아픈 역사를 만들었을까. 문화사절단에는 조부가 홋카이도로 징용을 끌려온 분도 있었고, 북한에 살던 친척이 징용에 끌려가 죽은 분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조상을 위한 구명시식을 올리는 셈이었다.

 "이제 저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문화사절단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조선인 징용자 영가들을 보며 이제는 매년 위령제를 지내겠노라 다짐했다. 올해를 그 원년으로 삼아 내년에는 북한의 백두산에서 통일을 향한 위령제를 올리겠노라 약속해본다.
출처: [후암정사 http://www.hooam.com/ T.02-415-0108]                   2005-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