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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춤사위 춤을 의식 안 하니 진짜 춤이 나오더라!



40년 춤사위 춤을 의식 안 하니 진짜 춤이 나오더라!

고성 오광대 초대 무형문화재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
말 배우기 전부터 춤 보고 자라 대학 때는 발레 전공


춤꾼 박경랑(50)씨의 춤사위를 처음 본 것은 2년 전 서울시 중구 필동 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열린 한 공연에서였다. 박씨는 영남지방 기생의 춤, 영남교방청(敎坊廳)춤을 췄다. 느린 장구 장단에 맞춰 상체가 미묘하게 흔들리다가도 장구의 장단이 점차 빨라지면 박씨의 발놀림도 장단을 뒤따랐다. 춤을 추는 박씨의 손끝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명이 묻어나왔다. 쉴 새 없이 달리던 장구 장단이 갑자기 멎자 박씨가 무대 한편으로 다가갔다.

무대의 왼편엔 도포를 입은 한 시인이 자신 앞에 놓인 화선지에 시를 쓰며 풍류를 읊고 있었다. 박씨는 허리에 둘러맸던 치맛자락을 넓게 펼쳐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시인 앞 화선지 위에 놓았다. 시인은 먹을 듬뿍 묻힌 붓을 들어 박씨의 파란색 비단 치맛자락 위에 시 한 줄을 적었다. 오래전 교방에서의 풍류도를 그대로 무대 위에 옮긴 공연이었다. 공연을 본 한 관객은 “굉장히 여성적인 춤이었다”고 말했고, 한국을 관광 중이던 한 미국인은 “섹시한 무대였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박경랑 영남춤문화예술연구소’ 연습실에서 중견 춤꾼 박경랑씨를 만났다. 박씨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 무용 강의를 하고 서울에 올라온 직후였다. 체중이 50㎏도 되지 않는 작은 체구의 그는 국악인 특유의 거친 목소리로 “날도 더운데 여기(연습실)에선 사진만 찍고 밖에 나가서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교방청춤이 우리 춤의 기본

박씨는 국내 무용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경남 고성 출신의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 오광대의 초대 예능 보유자인 고 김창후 선생의 외증손녀다. 박씨는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춤 이수자이자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전수자이기도 하다.

“제가 언제부터 춤을 췄는지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어릴 적에 외가에 놀러갈 때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하시는 손짓, 발짓을 자연스럽게 따라하면서 움직임을 익힌 것이니까요. 자라면서 그냥 (춤을) 추고 싶,었,어요.”

박씨는 어릴 적 외증조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할아버지는 지금은 음식점이 된 부산의 동래권번(券番·조선시대에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의 후신)에 자주 드나드시면서 풍류를 익히셨다”며 “할아버지의 예인으로서의 끼가 저한테 남겨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외증조할아버지를 따라 박씨도 어릴 적부터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 즐겼다. 동네에 약장수가 와서 창도 하고 춤도 추고 묘기도 부릴 때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희 아버지 어머니는 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시고 우리 5남매 가운데 춤을 추는 사람도 저 하나뿐이에요.”

박씨가 추는 영남교방청춤은 김창후 선생과 그의 제자 고 조용배 선생을 통해 전수됐다. 교,방청춤은 교방청(고려·조선 시대 기생들을 중심으로 춤과 노래를 관장하던 기관)이 폐지된 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을 중심으로 췄다. 활달한 상체 동작과 섬세한 발놀림이 특징이다. 박씨는 이어서 “기생들의 춤인 교방청춤은 우리 춤의 기본”이라며 “기생 문화가 조선 이후에 음주 문화와 결합하며 퇴폐적인 이미지로 변했는데 원래 교방청은 예인 육성 관청으로 우리의 춤 문화는 교방에서 많이 가다듬어졌다”고 말했다.


진정한 춤은 뭘까

지금은 영남지방의 춤으로 유명한 박씨지만 대학에선 발레를 공부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발레를 시작해 세종대에서 발레를 전공했다. 하지만 무릎과 팔 관절이 발레를 하기엔 적합한 체격이 아니었다. “제 아버지도 제가 평생 발레를 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힘든 무용은 그만하고 결혼해서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길 바라셨죠.”

박씨의 생각은 달랐다. 29세에 첫아이를 낳고 한국 전통춤에 몰입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며 동래권번의 마지막 춤 선생이었던 강옥남 선생에게서 교방청춤을 배웠다. 주변에서 “독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박씨는 “그땐 ‘지금이 아니면 영영 춤을 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제가 어릴 적부터 춰오던 춤을 완성하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로지 춤에만 매달려 지금까지 달려온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춤을 그만둔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슬럼프는 간혹 찾아왔습니다. 특히 ‘내가 지금 왜 춤을 추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지난해 말 박경랑씨의 춤 인생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50세를 넘긴 해부터 체력이 예전과 같지 않았고 ‘지금 내가 추는 게 진정한 춤일까’ 의문도 들었다. 6개월 정도 이어진 정신적 슬럼프였다. 그런 박씨에게 지난 3월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의 소아마비 환자, 정신지체인 등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극단 타이핸에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어요.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의 근대무용가 최승희 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재일 동포 2세인 김말리 극단 타이핸 대표가 조선의 기생이었던 자신의 어머니와 재야의 독립운동가 함웅도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프로 만든 창작극 ‘함웅도 잠복기’란 작품이었다.


“이제야 춤을 알겠다”



“작품 속에 팔다리가 불편한 소아마비 무용수들이 자신의 느낌만으로 살풀이를 추는 장면이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움직임이 사지 멀쩡한 제가 추는 춤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곤 충격을 받았죠. 그때까지 장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하지 못하는 걸 그들은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죠.”

박씨는 이 극단과의 공연을 준비하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씨는 “서로 표현하는 형태미는 달라도 ‘공감’을 통해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다”며 “이 작품에 무용의 요소를 좀 더 가미해 오는 9월 공연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른 박경랑씨는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박씨는 “시간 날 때마다 새로 나온 국악과 클래식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작품을 생각한다”며 “할 줄 아는 게 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춤은 가장 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춤을 추기 시작한 지는 40년이 넘었고 한국무용만 추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넘었지만 이제야 춤추는 느낌을 조금 알겠어요.”

40여년간 춤을 춰온 그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매일 8시간 정도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 틈틈이 자신의 춤을 춰온 ‘연습벌레’로 알려진 그였다. 박씨는 “그전까진 여전히 내 몸동작과 음악을 의식하는 춤을 추고 있었다”며 “2년 전부터야 내 몸이 내 맘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젠 음악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춤이 나오고 음악이 멈추면 자연스럽게 몸이 멈춰 “춤출 맛 난다”는 박씨는 “제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했다.
                                                                                                                 2011년 주간조선